출판사 리뷰
본고에서는 대한제국기 황실의례 중 길례의 설행공간인 종묘의 신실에 현재 구비(具備)되어 있는 배설제구와 포진제구를 연구대상으로 삼았으며, 제구에 함의되어 있는 개념과 그 의미를 확인하고자 조선왕실에서 대한제국 황실로 국체가 전환되면서 변화된 황실의례의 내용을 살펴보고, 왕실과 황실 부묘의례의 변화양상을 비교한 다음 이것이 현존하는 종묘 소장 제구의 양식에 끼친 영향을 밝힐 뿐 아니라 그러한 제구를 제작한 소재 등의 과학적 분석을 규명하여 향후 종묘 소장 제구의 원형 보존 및 복원 복제 방향 등에 기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대한제국기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시기는 제국주의적 기존 질서가 근대화의 보편적 가치로 전환하는 과정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극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대한제국의 선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주 국가의 위상과 자긍심을 표방하기 위한 국면 전환이었다.
의궤에 의하면 신정왕후의 부묘 의례는 신정왕후의 삼년상이 끝나고, 1892년(고종 29) 6월 10일에 거행되었다. 왕후의 부묘 의례는 왕후가 먼저 승하한 경우는 상기(喪期)를 마친 뒤에도 신주는 계속 혼전에 있다가 왕의 삼년상을 기다려 왕과 함께 부묘되었다. 왕이 먼저 승하한 경우 상기가 끝나고 왕의 신주가 봉안된 신실에 함께 봉안되었다. 신정왕후의 부묘 의식은 6월 9일 혼전인 효모전(孝慕殿)에 신주의 이봉(移奉)을 고하는 고동가제(告動駕祭)를 지내고 6월 10일에 종묘 정전 익종의 신실에 함께 봉안됨으로써 완료되었다. 신정왕후의 부묘 의례는 담제(禫祭)를 먼저 지내고 한 달을 기다려서 종묘의 하향대제(夏享大祭)와 겸행해야 한다. 그러나 그사이에 윤달이 있어 두 달을 기다리게 되어 담월에 거행하게 되었다.
위 <그림 28>은 봉안하고 있는 신주의 수량에 따라 크기가 다르게 제작된다. 전체 108개의 신주 가운데 선후가 한 분인 경우가 27개 실이고, 두 분인 경우가 5개 실이고, 세 분이신 경우가 2개 실이다. 신주가 세 개의 경우는 2450㎜×124㎝×255㎝(가로×세로×높이)이고, 네 개의 경우는 380㎝×124㎝×2550㎜(가로×세로×높이)로 실측되었다. 영녕전은 신주가 전실에 2부로 내면장의 크기는 2330㎜×1240㎜×2550㎜(가로×세로×높이)로 일정하게 실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