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바틀비가 반복하는 “~하지 않는 편이 더 좋겠는데요”를 아감벤은 고전적 저항이 아닌 잠재성과 창조를 다시 묻는 정식으로 읽는다. 하기를 멈추고 가능한 것을 되돌아보는 이 기이한 선택은 단순한 거부가 아니라 잠재성을 보호하려는 실험이며, 필연성과 현실화의 압제 속에서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드러내는 철학적 장면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성·빈 서판 은유를 불러오며 잠재성이 결핍이 아닌 고유한 존재 양식임을 강조하는 대목 역시 인상적이다.
아감벤은 바틀비를 서구 형이상학을 해체하는 강력한 정식의 주체로 자리매김하며, 필경사의 무위를 우연성과 비잠재성의 임계에서 드러나는 창조의 형상으로 읽어낸다. 우리의 윤리 전통이 ‘무엇을 원하는가’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치우친 탓에 간과된 잠재성과 우연성의 문제를 복원하며, 제2의 창조 혹은 탈창조로 향하는 사유의 가능성을 여는 책이다.
출판사 리뷰
“~하지 않는 편이 더 좋겠는데요”의 역설!
창조는 쓰는 순간이 아니라 쓰기를 멈춘 손끝에서 시작된다!
실현되지 않은 잠재성으로 존재의 윤곽을 다시 그리는 탈창조의 철학!
바틀비가 말한다. “~하지 않는 편이 더 좋겠는데요.” 아감벤은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가 반복해서 말하는 이 문장을 고전적인 저항 이야기로 읽지 않는다. 아감벤은 이 단 한 문장에서 창조와 자유를 다시 묻는다. 우리는 늘 더 많이 하고, 더 잘하고, 더 빨리 하라고 요구받는다. 그래서 ‘~해야만 하는’ 필연성에 갇히고 만다. 그런데 필사하지 않기를 선호한다거나 사무실을 떠나지 않기를 선호한다는 식으로 필연성을 거부하는 바틀비의 기이한 선택에서 아감벤은 다른 가능성을 불러낸다. 바틀비가 고집스럽게 반복하는 저 정식은 단순한 거부나 게으름이 아니라 실험임을. 하기를 멈추고, 가능한 것을 되돌아보는 시도라는 것을. 무수히 많은 잠재성이 실현되지 않은 채 묻혀버린 지금 여기의 삶을 다시 배치하려는 시도라는 것을.
아감벤은 다른 문학적 필경사들의 성좌에 견주어 바틀비를 철학적 성좌로 배치하면서 이 책의 첫 장을 연다. 그런 다음에 사유나 정신을 둘러싼 서양 사유의 오래된 은유, 즉 사유=잉크/잉크병, 지성(잠재적 사유)=빈 서판이라는 은유를 소환해 잠재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성(잠재적 사유)을 아직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서판으로, 그리고 모든 잠재성에는 본질적으로 ‘할 수 있음’과 ‘하지 않을 수 있음’이라는 양의성이 있다고 본 점에서 잠재성은 결핍이 아니라, 고유한 존재 양식이라고 아감벤은 말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언제나 이 잠재성을 행위로 현실화하여 ‘~하지 않을 잠재성’을 소진시키도록 강요하는 ‘필연성’의 압제 아래 놓여 있다.
바틀비가 반복하는 문장 “~하지 않는 편이 더 좋겠는데요”는, 아감벤이 보기에, 단순한 무기력이나 거절을 넘어, 서구 형이상학의 근간을 해체하는 가장 강력한 철학적 정식이다. 바틀비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필사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잠재력’을 행사하는 데 사용해 자신의 잠재성을 현실화의 의무로부터 영원히 보호한다. 그리하여 바틀비는 필사를 하지 않는 무위(無爲), 곧 “~하지 않는 편이 더 좋겠는데요”라는 제스처로 자신의 존재를 필연성에 구속시키지 않고 완전한 잠재성을 보존하는 필경사, 우연성과 비잠재성의 임계에서 창조의 존재론을 드러내는 극한의 형상, 곧 가장 강력한 자기 해방의 형상이자, 모든 강요와 의무에 맞서는 가장 고독하고도 전복적인 자유의 형상으로 떠오른다. 아감벤은 우리의 윤리적 전통이 ‘할 수 있는가’보다는 ‘무엇을 원하는가’ 혹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잠재성의 문제를 회피해 왔다고 지적한다. 바틀비는 이 짧지만 밀도 있는 소책자에서 철학이 제대로 말하지 못한 잠재성과 우연성의 편에 서서, 그래서 필연성과 현실화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제2의 창조 혹은 탈창조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 공방 시리즈
현실문화에서 ‘공방 시리즈’를 새롭게 선보입니다. ‘공방 시리즈’는 예술, 미학, 정치철학에 관한 논쟁적인 주장을 담은 소책자 시리즈입니다. 공방 시리즈의 ‘공방’에는 여러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共房: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곳’
•工房: 사유하고 빚어내는 ‘공부방’이자 ‘작업장’
•空房: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비어 있는 장소’
•攻防: 치열하게 토론하고 ‘논쟁’하는 ‘불화’의 장
현대정치철학연구회 주도로 기획되는 공방 시리즈는 1차 두 권에 이어, 앞으로도 미셸 푸코, 장-뤼크 낭시, 자크 랑시에르, 조르조 아감벤, 자크 데리다, 니콜 로로, 카를로 디아노 등 여러 현대 사상가들의 저작을 소책자 형태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조르조 아감벤
1942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시몬 베유의 정치철학에 관한 박사논문을 썼고, 마르틴 하이데거의 토르 세미나(1966, 1968)에 참가했다. 바르부르크연구소(The Warburg Institute)에서 연구했고, 이탈리아 벤야민 전집 편집에 관여했으며, 파리 국제철학학교에서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동시대 프랑스 철학자들과 교유했다. 하이데거, 발터 벤야민, 미셸 푸코, 질 들뢰즈 등의 문제틀을 이어받은 동시에 고대 헬라스 철학과 중세 철학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차별화된 글쓰기를 보여준다. 1995년부터 2014년까지 장장 20년 동안 『호모 사케르(Homo Sacer)』(1995-2014)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그 밖에도 『내용 없는 인간(L’uomo senza contenuto)』(1970), 『언어활동과 죽음(Il linguaggio e la morte)』(1982), 『도래하는 공동체(La comunit che viene)』(1990), 『목적 없는 수단(Mezzi senza fine)』(1996), 『열림(L‘aperto)』(2002), 『사유의 능력(La potenza del pensiero』(2005), 『철학이란 무엇인가?(Che cos’ la filosofia?)』(2016), 『창조와 아나키(Creazione e anarchia)』(2017) 등의 저서를 펴냈다.
목차
I. 필경사, 혹은 창조에 관하여
II. 정식, 혹은 잠재성에 관하여
III. 실험, 혹은 탈창조에 관하여
옮긴이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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