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당신의 ‘젊음’을 죽이는 적들은 누구인가
적들에 둘러싸인 현대인우리는 젊음을 죽이려는 적들로 에워싸여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불행하게도 태어나자마자 자립한 젊음을 박탈당하고 만다.
당신 주위에는 당신의 자립한 젊음을 죽이려는 적으로 넘쳐난다. 당신이 풍요로운 환경에 있을수록 적의 수는 더욱 많을 것이다. 사회 시스템이 편리해지고 고도해지고 복잡해지면서도 적은 는다. 그러니 어지간히 자각이 분명하고 각오가 굳지 않는 한 야생동물의 일원으로 생기 넘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어려울지 모르겠다. 태어나기를 잘했다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생애를 보내기란 힘들지도 모른다. 17-18쪽에서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우리의 젊음을 죽이는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에서도 신랄하게 몰아붙였던 부모의 사랑이다. 어째서인가. 부모가 왜곡된 애정으로 자녀를 대할 때마다, 하나에서 열까지 시시콜콜 뒤를 봐줄 때마다, 고민을 털어놓고 의논할 상대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상대도 부모밖에 없다고 세뇌할 때마다, 자녀의 젊음은 점점 더 죽어 간다. 그런 부모 역시 오래전에 젊음을 잃어버린 상태면서 말이다. 결국 자녀들은 부모의 보살핌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어른아이’가 되어 버리고 부모 같은 배우자를 만나는 악순환 속에 갇혀 버리고 만다.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자가 직장인이 된다가족보다 더한 최강의 적은 바로 직장이다. 겐지는 “한 번 직장인의 세계에 몸담고 나면 젊음이 말살당해 그저 얼간이로 추락하는 도리밖에 없다”고 일갈한다.
당신이 만약 안이한 판단으로든, 숙고 끝에 내린 결정으로든 직장인이라는 직업을 선택했다면, 그 순간 자유롭게 살 권리의 90퍼센트를 포기한 셈이 된다. 즉 당신은, 누가 강압적으로 뺏은 것도 아닌데, 스무 살 전후에 일찌감치 노쇠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53쪽에서
왜 그러한가. 직장만큼 안정과 안일함과 안락에 젖어 들게 하는 건 없기 때문이다. 그건 죽은 자의 상태다. “분투, 혼란, 내일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두려움”이야말로 산 자의 상태기 때문이다. 또한 “젊음의 핵을 이루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타인에게 팔아넘기지 않는다는 자긍심”인데, 직장이란 곳은 굴욕과 굴종을 내면화하는 곳이다.
젊음을 죽이는 근원적 적은 국가이다젊음을 죽이는 더 근원적이고 거대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국가다. 국가는 철저히 소수 부유한 지배층을 위해 복무한다. 지배층이 남몰래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들을 떠받들고 있는 그 무수한 서민이 들고일어나는 상황이다. 노력한 것 이상의 높은 지위와 풍족한 생활을 만끽하고 있는 이들은 국민의 분노가 자신들을 향하지 않도록,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고삐를 늦추는가 하면 때로 분출구를 마련해 놓기도 한다. 겐지는 그 대표적인 분출구가 술과 복권임을 일깨운다. 복권은 일확천금이란 헛꿈을 꾸게 함으로써 “노예의 처지에 이의를 제기하고 반란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아예 봉쇄”해 버린다. 어디서고 마음만 먹으면 마실 수 있는 술은 더 위험하다. “노예들의 분노를 해소하기 위한 적정선의 마약, 그것이 바로 술”이다.
술 앞에서는 답답함도 슬픔도 분노도 맥을 못 춘다. 술이 들어가면 그 화살은 국가와 사회를 향하는 일도 없어지고, 어쩌면 이상적인 사회와 국가를 재건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었을 감정의 폭발도 그 기회를 잃고 만다. 정당한 권리 주장도 다음 날이면 숙취의 두통 속에 매몰되고 만다. 출근하기 위해 옷을 차려입고 나면, 자신에게는 이 길밖에 없다느니, 이 정도가 어울리는 인생이라느니,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비인간적인 만원 전철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직장에 도착할 무렵이면 이미 하루에 필요한 에너지의 절반은 소모되고 만 상태이다. -136쪽에서
기자들의 정의를 믿지 마라국가와 마찬가지로 매스컴 역시 젊음을 죽이는 적이다. 겐지는 기자들이 “국가에서 위정자들에게 유리하도록 왜곡해서 흘리는 정보를 실로 안이하게 받아들여서는 기껏해야 비판도 못 되는 코멘트를 곁들이는 선에서 기사로 내보내고, 뉴스로 보도한다”고 비판한다. 또한 그들 역시 상부의 뜻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고용인 신세에 불과함을 상기시킨다.
기자들이 자신들은 평범한 직장인과는 다르다, 사회의 정의를 책임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해도, 그들 역시 이쪽저쪽의 안색을 필요 이상 살피며 살 수밖에 없는 직장인이다. 상부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는 고용인 신세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날카로운 촉각을 작동시켜 시대의 심각한 전조를 감지했다고 해 봐야 글을 써 철저하게 저항하는 선까지는 가지 못한다. 이렇게 만성적인 중도 포기와 자기 몸 사리기에 바쁘다는 점에서는 다른 업계 직장인의 의식과 별 차이가 없다. 당근이나 던져 주고 먹잇감을 눈앞에다 들이밀면 입을 꾹 다물고 물러선다. 자신의 주장을 굽히고, 입사 첫날 정의의 사자가 되리라던 고결한 결심을 이제는 생각만 해도 창피할 만큼 유치하고 풋내 나는 것으로 치부하고는 마음의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다.
실수 없이 일하는 것밖에 염두에 없어 애써 다짐한 신조가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 노예근성의 소유자로 변해 버리고 만다. 그럴 거면 애당초 종합상사나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103-104쪽에서
대항할 힘은 처음부터 당신에게 있었다이처럼 우리의 젊음을 말살한 것은 부모이며 학교 교육이며 사회이다. 국가이며 문명이다. 부모의 넘치는 사랑과, 현실에서 눈을 돌리게 한 학교 교육과,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돌봐 줄 것처럼 군 국가다. 야생성의 광휘를 빼앗은 편리한 문명이다. 그리고 편안하고 푸근한 둥지에서 언제까지 나오려 하지 않고 또 이미 그런 공간이 없는데도 여전히 찾고 있는 자신이다. 겐지는 말한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려 하는 자는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비겁자”이며, “우리는 처음부터 스스로를 구제할 힘을 갖고 있었다”고 말이다. 마치 그 힘이 없는 것처럼 느끼는 이유는 “그 힘을 끌어낼 방법을 모르고, 저력을 발휘하는 습관이 몸에 붙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 조언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 힘을 끌어낼 수 있을까.
자립한 젊음을 달콤한 이미지나 경박한 미학 따위로 획득하려는 우둔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일이다. 자립은 자신의 힘에만 의지해 고군분투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평생을 들여도 겨우 그 문턱에 닿을까 말까 한 것이다. 때로 흉측한 꼴을 당하게 될 수도 있을 정도로 멀고도 험한 길 끝에 있다. 194쪽에서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절대 속지 않는 것”이다. 속지 않으려면 모든 권력과 권위를 의심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떤 권력도, 권위도 다 사기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권력과 권위의 비위를 맞추는 단계에서 젊음은 바로 말살당하고, 살아 있으나 산 자가 아닌 인간으로 격하되고 만다. 그러므로 겐지는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 않더라도, 정부가 하는 일에 전혀 무관심한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경고한다. 국가가 무관심이라는 틈을 노리고 있다가 우리의 젊음을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외견상으로도 젊을 뿐만 아니라 몸속 깊은 곳에서 배어 나오는 자립한 젊음을 뽐내는, 멀리서 바라만 봐도 기분이 고양될 정도의 어른이 실제로 존재한다. 평생을 고기잡이에 몸 바친 어부, 나무꾼, 농부, 운동선수, 연예인, 광부, 라면가게 주인, 장인. 주로 이런 사람들 사이에 많이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으나, 보통 회사원이나 주부 중에도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다.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련과 싸움의 연속이다. 아무리 윤택한 환경에 있는 자라도 시련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인간이란 그렇게 살 운명이다. 그 또한 인간 역시 야생동물의 일원이라는 증거이다. 야생동물이라면, 자신이 지닌 모든 능력을 발휘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인생의 길을 걸어야 생명은 그 빛을 발하고, 진정한 젊음도 획득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