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예술이 미학적 무의식의 산물이라는 통념은 흔히 정신분석의 권위로 뒷받침돼 왔다. 랑시에르는 이 짧은 소책자 『미학적 무의식』에서 이 통념을 뒤집는다. 그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단지 임상에서 ‘발견’된 결과물이 아니라, 이미 19세기 이후 예술의 미학적 체제 - 말해진 것과 보이는 것, 의식과 무의식, 지식과 행위, 능동과 수동, 로고스와 파토스의 대립이 서로 얽혀 작동하는 체제 - 위에서 가능해졌다고 논증한다.
즉, 정신분석이 예술을 해석해온 것이 아니라, 예술이 이미 무의식처럼 ‘작동’해왔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비극과 미켈란젤로의 조각, 소설과 연극에 기대어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정식화했다는 사실은, 예술이 해석의 대상이기 전에 사고의 형식이었다는 반증이다. 이 책은 ‘무의미 속의 의미’, ‘침묵의 말’, ‘하찮은 세부’ 같은 비사고적 형식이 어떻게 사고를 작동시키는지를 추적하며, 재현 규범을 넘어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 재배치되는 미학적 전환을 그려낸다.
출판사 리뷰
프로이트적 해석을 넘어서 무의식을 읽는 또 다른 방식!
미학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결을 거슬러 무의식 읽기!
‘무언의 말’과 ‘세부의 정치학’으로 펼쳐내는 미학적 무의식!
예술이 미학적 무의식의 산물이라는 통념은 흔히 정신분석의 권위로 뒷받침돼 왔다. 랑시에르는 이 짧은 소책자 『미학적 무의식』에서 이 통념을 뒤집는다. 그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단지 임상에서 ‘발견’된 결과물이 아니라, 이미 19세기 이후 예술의 미학적 체제—말해진 것과 보이는 것, 의식과 무의식, 지식과 행위, 능동과 수동, 로고스와 파토스의 대립이 서로 얽혀 작동하는 체제—위에서 가능해졌다고 논증한다. 즉, 정신분석이 예술을 해석해온 것이 아니라, 예술이 이미 무의식처럼 ‘작동’해왔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비극과 미켈란젤로의 조각, 소설과 연극에 기대어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정식화했다는 사실은, 예술이 해석의 대상이기 전에 사고의 형식이었다는 반증이다. 이 책은 ‘무의미 속의 의미’, ‘침묵의 말’, ‘하찮은 세부’ 같은 비사고적 형식이 어떻게 사고를 작동시키는지를 추적하며, 재현 규범을 넘어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 재배치되는 미학적 전환을 그려낸다.
미학적 무의식: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숨겨진 모체
자크 랑시에르는 이 책의 서두에서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을 미학에 적용하는 일반적인 접근법을 거부한다. 오히려 그의 핵심적인 질문은 결을 거슬러 진행된다. ‘왜 프로이트는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문학적·예술적 사례들(오이디푸스, 그라디바 등)을 필요로 했는가?’ 랑시에르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을 가능케 했던 문학적, 예술적 형상들을 역추적하면서, 미학과 정신분석의 숨겨진 이론적 공모와 갈등을 밝혀낸다. 랑시에르의 통찰에 따르면,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은 임상 영역 바깥에서, 이미 예술 작품과 문학 작품의 영역에 특권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고 있던 ‘무의식적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할 때에만 정식화될 수 있었다. 이러한 ‘미학적 무의식’은 ‘사고하지 않는 것의 사고’라는 이념으로 요약된다. 이는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것에도 의미가 있고, 하찮은 세부에도 사고가 충전되어 있다는 믿음이다. 프로이트가 동료 실증주의자들이 무시한 ‘하찮은’ 사실들의 해석자로서 예술적 사례들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사례들 자체가 감각적 물질성 안에 사고가 현존함을 보여주는 모종의 무의식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미학적 무의식이, 프로이트 이론이 탄생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역사적이고 존재론적인 선행 조건이었다고 말하면서, 미학적 무의식이 단순히 프로이트 이론의 배경이 아니라, 그 이론의 숨겨진 모체였다고 주장한다.
재현 체계의 질서를 무너뜨린 미학적 혁명
랑시에르에게 미학은 예술을 다루는 학문이 아닌, 예술의 사태를 사고의 사태로 삼는 특정한 역사적 사고 체계다. 이 미학적 체계는 고대부터 지속되어 온 시학적 재현 체계를 무너뜨린 미학적 혁명의 결과다. 재현 체계는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볼 수 있는 것 사이에 엄격하게 조절된 관계의 질서였다. 이 질서 속에서 말은 감정과 의지를 드러내면서도, 자신이 드러내는 가시적인 것을 통제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한 광경(찔린 눈의 끔찍함 등)을 무대에서 직접 보여주는 것을 금지했다. 그래서 고전주의 극작가들은 소포클레스의 주인공 오이디푸스가 ‘결함 있는 주체’라고 비난했다. 이 결함은 단순히 근친상간 소재 때문이 아니라, 비극적 진실이 계시되는 방식과 오이디푸스의 광적인 지식의 파토스에 있었다. 그는 알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은 것을 알고 싶어 하는 광적 집착에 사로잡혀 있으며, 진실을 들으려 하지 않고, 결국 스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르는 끔찍한 행위를 저지른다. 드라마는 부분적 무지 상태에서 특정 목표를 추구하는 합리적인 행위로 전개되어야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질서를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랑시에르는 오이디푸스의 ‘지식과 비지식, 행위와 파토스의 비극적 동일성’이야말로 재현 체계가 포용할 수 없었던 미학적 혁명의 씨앗이었으며, 미학적 혁명이 이 모든 질서를 해체했다고 말한다. 이 새로운 체제는 지식과 비지식, 행위(능동)와 고통(수동)의 비극적 동일성을 예술의 핵심으로 끌어올린다. 혼란스럽고 감각적인 것이 더는 하위 인식이 아니라, 사고하지 않는 것의 사고로 격상되는 것이다. 이로써 예술은 필연성과 규범에서 해방되어, 무언의 말, 즉 무의식의 효력이 특권적으로 발휘되는 공간이 된다.
‘무언의 말’과 세부의 정치학
이 책에서 랑시에르는 ‘무언의 말’과 ‘세부’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미학적 무의식의 작동 방식과 감각의 정치학을 연결 짓는다. 소위 ‘아무것도 아닌 것’—여백, 정지, 하찮은 세부—이 실제로 사유를 점화하는 핵심 장치라는 통찰에 있다. 랑시에르는 두 가지 ‘무언의 말’을 제시한다. 하나는 사물의 표면에 각인된 흔적과 배열이 만들어내는 상형문자적 말하기, 다른 하나는 인물의 심리와 대사를 넘어 무대에 스며드는 익명의 목소리다. 전자는 골동품 가게의 먼지나 도시 하수구의 이미지처럼, 주변부 디테일이 중심서사를 교란하며 감각의 지도를 다시 그리게 한다. 또 다른 ‘무언의 말’은 익명의 힘이 내는 귀먹은(들리지 않는) 언어이다. 이 언어는 배우의 심리와 의도를 넘어, 익명적 정동과 무의미의 힘을 소환하며, 그림자·밀랍인형·초인형(크레이그), 죽음의 연극(칸토르)으로 형상화된다. 두 형태는 함께 문학적 말=증상의 말의 공간을 스케치한다, 이처럼 ‘무언의 말’은 한쪽에서는 해독될 상형문자로, 다른 쪽에서는 목소리/몸을 부여받아야 할 익명성으로 나타난다. 랑시에르는 이 둘이 서로를 비춘다고 말한다. 해독을 요구하는 문자로서의 세계와, 아직 목소리를 얻지 못한 익명성으로서의 세계가 교차하며, 우리는 작품의 표면에서 사고의 심도를 경험한다. 그 결과 ‘세부는 장식이 아니다’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디테일은 감각적 재배치의 핵심적 통로이며, 독서는 의미를 채집하는 행위가 아니라, 의미가 발생하는 리듬에 동참하는 수행이 된다.
▞ 공방 시리즈
현실문화에서 ‘공방 시리즈’를 새롭게 선보입니다. ‘공방 시리즈’는 예술, 미학, 정치철학에 관한 논쟁적인 주장을 담은 소책자 시리즈입니다. 공방 시리즈의 ‘공방’에는 여러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共房: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곳’
•工房: 사유하고 빚어내는 ‘공부방’이자 ‘작업장’
•空房: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비어 있는 장소’
•攻防: 치열하게 토론하고 ‘논쟁’하는 ‘불화’의 장
현대정치철학연구회 주도로 기획되는 공방 시리즈는 1차 두 권에 이어, 앞으로도 미셸 푸코, 장-뤼크 낭시, 자크 랑시에르, 조르조 아감벤, 자크 데리다, 니콜 로로, 카를로 디아노 등 여러 현대 사상가들의 저작을 소책자 형태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것에도 의미가 있고, 자명해 보이는 것에도 수수께끼가 있으며, 하찮은 세부〔디테일〕처럼 보이는 것에도 사고가 충전되어 있다는 것. … 그것들은 사고와 비사고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고, 감각적 물질성 안에 사고가, 의식적 사고 안에 비자발적인 것이, 무의미한 것 안에 의미가 모종의 방식으로 현존함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이 파토스는 고전주의 시대에 오이디푸스를 〔그에 대해〕 급진적 교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불가능한 주인공으로 만든다. 〔오이디푸스가〕 불가능한 〔주인공인〕 까닭은 그가 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해서가 아니라 그가 그것을 배우는 방식 때문, 즉 이 학습에서 그가 구현하는 정체성, 지식과 비지식의 비극적 동일성, 자발적 행위와 수동적으로 겪게 되는 파토스의 비극적 동일성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은 사고를 질병의 문제로, 질병을 사고의 문제로 삼아 철학과 의술이 서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지점에서 발명된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자크 랑시에르
1940년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루이 알튀세르의 ‘『자본』 읽기’ 세미나에 참석해 카를 마르크스의 비판 개념을 발표했다. 68혁명을 거치면서 알튀세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론적 실천이 내포하는 ‘지식과 대중의 분리’, 그들의 이데올로기론이 함축하는 ‘자리/몫의 분배’를 비판했고, 『알튀세르의 교훈(La lecon d’Althusser)』(1974)을 집필하며 스승 알튀세르와 떠들썩하게 결별했다. 1970년대 들어 19세기 노동자들의 문서고를 뒤지면서 노동자들의 말과 사유를 추적했다. 이 연구는 『노동자의 말, 1830/1851(La Parole ouvriere)』(1976), 『평민 철학자(Le philosophe plebeien)』(1983) 같은 편역서, 국가 박사학위논문 『프롤레타리아의 밤(La Nuit des proletaires)』(1981), 『철학자와 그의 빈자들(Le Philosophe et ses pauvres)』(1983), 『무지한 스승(Le Maitre ignorant)』(1987) 같은 저서의 토대가 되었다. 구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선포된 정치의 몰락/회귀에 맞서 정치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하면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Aux bords du politique)』(1990, 1998), 『불화(La Mesentente)』(1995)를 발표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미학과 정치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사유하며 『무언의 말(La Parole muette)』(1998), 『말의 살(La chair des mots)』(1998), 『감각적인 것의 나눔(Le partage du sensible)』(2000), 『이미지의 운명(Le Destin des Images)』(2003), 『미학 안의 불편함(Malaise dans l’esthetique)』(2004), 『해방된 관객(Le spectateur emancipe)』(2008), 『아이스테시스(Aisthesis)』(2011), 『픽션의 가장자리(Les Bords de la fiction)』(2017), 『예술의 여행들(Les voyages de l’art)』(2023), 『미적 경험(L’experience esthetique)』(2025) 등을 썼다.
목차
주체의 결함
미학적 혁명
무언의 말의 두 형태
하나의 무의식에서 다른 무의식으로
프로이트의 수정들
세부의 다양한 사용법에 관하여
의술 대 의술
[부록] 계쟁적 대상들 - 『미학적 무의식』에 관하여 (아르헨티나판 서문)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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