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첫 소품집 『음이 없는 소리들』로 이십 대의 방황을 전한 이학민 작가가 두 번째 소품집 『파고』로 돌아왔다. 김달님 작가의 다정하고 사려 깊은 소개로 시작되는 『파고』에는 이학민 작가가 팔 년의 공백기 동안 인생의 파고에서 그러모은 세 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다. 1부에선 문학하는 일상과 출간 여정을 다룬다. 극복의 서사 대신 다가오는 파도 앞에서 분투하고 때로 휩쓸린 채 나아간 시간을 담담한 문체와 은근한 유머로 들려준다.
매체 기고 비평문이 실린 2부에서는 한정원, 프랑수아즈 사강,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진영, 조해진 작가의 작품에 기대 상실에 관한 밀도 높은 사유를 전한다. 3부에선 소외의 순간과 겨울을 통과하는 기분을 특유의 시적 산문으로 표현한다. 책에 담긴 세 편의 이야기는 자신을 믿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는 데 익숙한 이들에게 전하는 방백 형식의 연서이기도 하다.
출판사 리뷰
인생의 파고에서 그러모은 세 가지 이야기
이학민 소품집 둘 『파고』
▣ ‘소품실’에서 온 두 번째 ‘소품집’저자의 미발표 산문과 매체 기고문을 담은 이 책의 형식은 ‘소품집’이다. 발신처는 셋방 작업실인 ‘소품실’. 명명의 “이유나 의미는 찾지 말자”(70쪽) 하니 오히려 그 의미를 모색해 보고 싶다. 지면을 하나의 무대라고 가정해 보자. 이때 소품실은, 무대에 올릴 도구를 만드는 공간이 된다. 자연히 연상되는 장면. 지면이라는 무대를 상상하며 무대 뒤 작은 방 안에서 글 쓰는 한 사람의 뒷모습. 그 모습을 담은 이 소품집은 어쩌면 저자의 생활을 닮은 종이집인지도 모른다.
두 번째 소품집이다. “하나가 둘이 되기까지 팔 년”(22쪽)이 걸렸다. 첫 소품집 『음이 없는 소리들』을 두고 “나의 이십 대가 담긴”(30쪽) 책이라던 저자는 출간 전후의 시절을 이렇게 기억한다. “하루하루 조급하게 살았다. 그러는 동안 내면은 서서히 병들어갔다. 첫 소품집을 자주 열어보지 않은 건 그 때문일 것이다.”(31쪽)
마지막일 줄 알았던 소품집이 두 번째 장을 연 계기는 무엇일까. 무기력에 빠져 허우적대던 저자는 어느 날 첫 소품집을 펼쳤다. 그리고 변화를 겪었다. 그는 그 순간을 이렇게 적었다. “과거의 내가 무기력한 오늘의 나를 등 떠밀었다. 이제 일어나라고. 비로소 나는 음이 없는 소리들을 이해했다.”(같은 쪽) 그러므로 이 책은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나’가 화해하고 조응한 결과물일 것이다. 다만 읽는 것만으로 고통이 되살아나던 ‘하나’가 내어준 용기로 ‘둘’이 된 여정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 무기력, 상실, 소외 그리고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돼 있다.
‘1부 반감기’. 무기력을 주제로 한 소설적 산문으로, 지방 창작자로 살아온 시간을 담담히 전한다. 그 안에는 무겁고 어두운 동행도 있다. 고독과 가난이다. 그러나 분노와 원망은 없다. “살아보니 책임의 시작은 더 나은 나를 만들기가 아니라 지금의 나라는 현상을 수용하는 것부터였다”(68쪽)는 고백으로 보건대 저자는 다가온 파도 앞에서 발산이 아닌 수렴의 태도로 자신과 문장을 다듬어 온 듯하다.
스스로 “성실한 비관주의자”라 소개하는 저자는 말한다. “세상은 비관을 나무라지만, 낙관에서 오는 것이 더 밝고 생산적인 것도 맞지만, 성실한 비관이 나쁘기만 한 태도는 아니라고 믿는다. 기대 없이 순전하게 매진한다는 의미니까. 내일이 아니라 오늘의 나를 책임지는 일이니까.”(35~36쪽)
‘2부 중정에서 광장으로’. 비로소 무대에 오른다. 여기서 무대란 “저마다의 상실이 한데 모인 곳”(128쪽)이다. “나의 밖에서 내가 죽는 사건”(126쪽)을 시작으로 사회적 참사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우리 곁의 상실을 비평문의 형태로 구현한다. 그리고 ‘슬픔’이 이 극의 핵심임을 전한다. “슬픔은 가장 중요하다. 결속을 결정하는 기준이기 때문이다.”(158쪽)
결말은 간명하다. 사랑을 부추긴다. “슬픔과 사랑을 동류”(같은 쪽)이므로 “완전히 같은 슬픔은 존재하지 않지만, 행위로써 함께 슬퍼하지 못하면 사랑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사랑을 약속하려면 슬픔도 약속해야 한다. 아니, 애초에 둘은 한 몸인지도 모른다. 슬픔은 사랑의 다른 말이다.”(같은 쪽) 그렇게 상실 앞의 우리가 함께 슬퍼하길 간청한다.
‘3부 소외의 기분’. 무대가 끝나고 다시 소품실로 돌아온 저자는 ‘혼자’ 준비해 온 이야기를 시적 산문으로 꺼낸다. “서늘한 공기와 그보다 차가운 바람이 온 세상을 독재하는 겨울 새벽”(192쪽)을 닮은 소외에 관한 문장들. 외롭고 때로 서러운 예화들이나 읽는 마음이 힘들지 않다. 오히려 한 사람의 다정을 읽게 된다.
비결은 무엇일까. 저자는 말한다. “혼자지만 혼자가 아닌 채 이 새벽을 보내온 사람은 모두 나의 동료이다. 그들이 어떤 사람이냐면 너그러운 사람, 숨을 줄 아는 사람, 음울한 그림자를 밟고서 세상에 웃어보는 사람. 새벽의 동료들은 인간을 다정하게 만든다. 오래 배운 믿음이다.”(197쪽)
▣ 점선책 쓰기를 ‘하나의 선을 긋는 일’로 표현한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전까지 “선(線)이 아닌 점(點)만 계속”(21쪽) 찍었다고 말한다. 온전하고 명료한 하나의 선을 긋고자 했으나 시시각각 들이친 파도로 인해 불완전한 점만 남긴 셈이다. 우리의 인생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대비한들 들이치는 파도는 피할 수 없고, 억지로 버티어도 완벽한 선은 그을 수 없다. 높고 낮은 파도가 남긴 생채기. 나이테 같은 인생의 파고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망연할 필요는 없겠다. 우리에겐 점이 남았으니까. 우리가 할 일은 점으로 남은 순간을 잇는 것. 그것으로 하나의 선을 긋는 것. “모스부호처럼, 여러 점을 이으면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된 과정”(22쪽) 속에서 『파고』를 쓴 저자가 그러했듯이.
점선도 선이다. 팔 년이라는 시간을 통과해 우리 앞에 놓인 이 책을 읽고 깨달았다. 그렇다면 점점이 돼 살아가는 우리도 때때로 하나의 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서로의 파고를 들여다봐 준다면. 스스로 모르는 각자의 점선을 발견해 준다면. 이 책이 서로를 발견하는 연습의 마중물이 되기를 바란다.
브랜드 비효율출판사 주머니시의 단행본 브랜드로, 효율이 최고의 덕목이 된 사회에서 종종 외면받는 가치와 이야기를 비추고자 합니다. 느리고 비효율적 일지라도. 고유한 방식으로. 『파고』는 비효율의 첫 책입니다.
출판사 주머니시2018년, 금연과 독서 증진 캠페인을 계기로 설립되었습니다. 공모를 통해 작품을 선정하는 플랫폼형 운영 방식으로 200여 명의 작가와 함께 ‘담뱃갑 판형 시집’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왜 책상은 매번 ‘돌아가는 자리’처럼 느껴지는 걸까. 하나의 파도가 지나가면 나는 책상으로 돌아가 글을 썼다. 내가 모르는 시간 속에서, 그 또한 매번 그러했듯이.
─ 「파고를 여행하는 독자를 위한 안내서(김달님)」
인생은 끊임없이 파도를 맞는 일이다. 하나가 가면 또 하나가 온다. (…) 우리가 살아가며 쉽게 불안에 빠지고 긴장을 풀지 못하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홀로 선 파도 앞에서 휩쓸리지 않으려고 가족을 만들거나 타인을 지인으로 바꾸어 곁에 두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의 손이라도 잡고서 응전해 보겠다는 무의식의 발로랄까. 물론 ‘나’를 지탱해 주는 대상이 꼭 사람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게는 문학이 있다.
─ 「어른과 파도」
작가 소개
지은이 : 이학민
소품집 시리즈 기획자. 편지 뉴스레터 「고독에게」를 발행 중이며, 읽고 쓰는 일을 한다. 인스타그램 dltoqur__⦁ISNI│0000 0005 2895 3046 ⦁출간작│『음이 없는 소리들』, 2017, ISBN 9791127217099 『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고 살아가는 중(공저)』, 282북스, 2025, ISBN 9791198839558
목차
서문 파고를 여행하는 독자를 위한 안내서_김달님 _6
1부 반감기
점과 선 _19
의미 없는 소리 _24
일구월심 _34
불면 _44
데리고 다닐 정도 _54
인생의 버팀목이 오는 순간 _63
소품실 _69
어른과 파도 _92
술 마시며 배운 것들 _98
통증 _108
마침표 _115
2부 중정에서 광장으로
여는 글|고통을 덮고서 한 일 _125
언 바다 위를 걷는 기분 _129
반대편에 사는 사람 _134
극복할 수 없지만 _140
모국어를 쓴다는 것 _145
무의한 죽음, 무의미한 고통 _150
당신의 회복이 더딘 이유 _155
겨울, 한철 _160
3부 소외의 기분
인기척 _167
샘 _170
홀수 _172
혼자만의 것들 _177
속도 _183
겨울이 오기 전에 _187
이새벽 _192
한겨울 _198
시간이 지나가면 _200
일상의 바깥 _204
발문 감사의 말 _210
참고문헌 _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