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황금알 시인선 221권. 박우담 시집. 박우담의 시를 읽는 일은 시 본연의 가치를 확인하는 과정과 다른 말이 아니다. 시인의 작품에는 '삶'이 있다. 그가 형상화하는 '삶'은 늘 '죽음'을 염두에 둔 것이어서 때로 불편함을 야기할 수도 있으나 그러하기에 진실에 가까이 다가선다.
박우담의 이번 시집은 시가 '언어'이자 '음악'이며, '은유'이자 '상상력'임을 또한 '역사'임을 넉넉하게 입증하였다. 시인이 추구하는 시는 또 그것이 추구하는 미학(美學)에는 거창한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그가 생각하고 표현하는 시 세계는 자율적으로 움직인다. 박우담의 시는 인간이 태어나서 살아가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갈 뿐이다.
출판사 리뷰
비 다음에 진흙이 있고 진흙 다음에 신발이 있고 신발 다음에 비누가 있고 비누
다음에 손이 있다 아찔하다 다음에 다음에 다가오는 건 우산이다 우산 다음에 수건
이 있고 수건 다음에 눈물이 있고 눈물 다음에 이별이 있다 아찔하다 다음에 다음
에 이별 다음에 내가 있고 내 다음에도 내가 있고 내 다음에 내 다움이 있다 아찔
하다 내 다움이 있고 내 신발이 있고 내 비누가 있고 내 눈물이 있다 내 다움에 아
찔한 내가 있다
- '아찔하다' 전문
‘아찔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갑자기 정신이 아득하고 조금 어지럽다’이다. 이 시를 읽는 독자는 과연 아찔함을 느낄 수 있을까? 박우담은 여기에서 ‘연쇄법’을 활용한다. ‘비’→‘진흙’→‘신발’→‘비누’→‘손’으로의 연결이 첫 번째 흐름이다. ‘우산’→‘수건’→‘눈물’→‘이별’의 연쇄가 두 번째 흐름이다. 우리는 이상의 두 개의 흐름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의 진심이 담긴 부분은 작품의 후반부라고 생각한다. ‘이별’ 이후에 시적 화자 ‘나’가 등장한다. “내 다음에도 내가 있고 내 다음에 내 다움이 있다”라는 진술에 주목하자. ‘이별’이라는 부정적 상황을 겪은 후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나’의 모습은 자연스럽다. ‘내 다음’과 ‘내 다움’을 연결하는 대목은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내 다움’ 이후에 다시 ‘내 다움’→‘내 신발’→‘내 비누’→‘내 눈물’이라는 흐름이 전개된다. ‘신발’이나 ‘비누’, ‘눈물’ 등은 앞의 흐름에서 나왔던 대상들이지만 이번 연쇄에서의 그것들은 앞에서와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나’와 결합하여 등장하는 ‘신발’, ‘비누’, ‘눈물’ 등은 이제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내 다움’이자 ‘아찔한 나’ 자체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아찔하다?에서 ‘내 다음’과 ‘내 다움’을 연결하는 대목은 단순한 언어유희를 뛰어넘는다. 그것은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나’와 결합하여 등장하는 ‘신발’, ‘비누’, ‘눈물’ 등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내 다움’이자 ‘아찔한 나’ 자체이다. ?예하리?를 읽는 독자는 시와 음악의 멋진 조응에 감탄할 게다. 빗방울의 낙하를 보며 ‘시벨리우스의 교향곡’을 떠올리는 박우담의 시안이 든든하다. 시인은 또한 아름다운 자연물을 스케치하면서 ‘시간’이라는 테마를 다룬다. 시간은 ‘이별’을 포함한 ‘생(生)’일 테다.
박우담의 시를 읽는 일은 시 본연의 가치를 확인하는 과정과 다른 말이 아니다. 시인의 작품에는 ‘삶’이 있다. 그가 형상화하는 ‘삶’은 늘 ‘죽음’을 염두에 둔 것이어서 때로 불편함을 야기할 수도 있으나 그러하기에 진실에 가까이 다가선다. 박우담의 이번 시집은 시가 ‘언어’이자 ‘음악’이며, ‘은유’이자 ‘상상력’임을 또한 ‘역사’임을 넉넉하게 입증하였다. 시인이 추구하는 시는 또 그것이 추구하는 미학(美學)에는 거창한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그가 생각하고 표현하는 시 세계는 자율적으로 움직인다. 박우담의 시는 인간이 태어나서 살아가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갈 뿐이다.
1부
자귀꽃
그림자에 앉은 깃털이 흔들려요 새가 개울물 소리에 맞춰 깃털을 흔들고 있어요 시간의 깃털이 당신의 심장에 쌓여요
그림자를 슬며 당신이 개울 속으로 들어가고 있어요
태피스트리
― 섬
어둠이 섬을 수놓는다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있던 그림자
실오라기 빠지듯 달아난 호수
호수는 그 많던 그림자를 어디로 보냈을까
어둠 속으로 기억이 흘러갔다
어둠으로부터 어둠에까지
발목에 걸린 너의 이름은 잊혀졌지만
물속을 더듬으면 손에 닿을듯한 너의 실루엣
끝없이 이어지던
물결이
가시처럼 그림자를 삼켜버렸다
먹다 남은 섬을 베어먹듯
발목에 걸려있는 덜 벗겨진 속옷을
다른 발로 벗기듯
노을 밖으로 던져진 너의 매듭들
태피스트리
1
여분의 바람이 분다
날개로 깨어나고 날개 위에 잠드는 바람
고추잠자리 트랙 너머를 맴돌고 있다
버거워 보이는 날개로
끝이란 없다 그 너머가 있을 뿐
2
바람에 시달린 날개가 수놓고 있는 그림
인조잔디 씨앗만큼 많은 날갯짓으로 그림자를 풀어주며 당기는 때때로 천을 붉게 물들이는 바람
무리에서 이탈한 녀석이 트랙은 안중에도 없이 곧장 날아 자기 몫의 그림을 새긴다
3
때때로 앞으로, 뒤로, 옆으로, 나를 따라다니던 그림자
갈 곳이 정해진 듯 날갯짓이 계절의 문양을 수놓는다
운동장을 벗어난다는 건 그림자와 색의 여분을, 경계를 알아차리는 것
4
나는 너머와 너머를 서로 연결하는 내 날개의 매듭을 묶는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박우담
1957년 진주에서 태어나 2004년 『시사사』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구름트렁크』 『시간의 노숙자』 『설탕의 아이들』 『계절의 문양』 등이 있다.
목차
1부
자귀꽃·12
태피스트리 ― 섬·13
태피스트리·14
그림자 1·16
별빛 무도회·18
네안데르탈 16 ― 새벽·20
그림자 2·22
손금·23
수박·26
소문·28
태피스트리 ― 네온사인·30
고양이·31
베아트리체의 미로·32
2부
유등·36
새를 강물에 던졌다·37
태피스트리 ― 추억·38
물푸레 극장·40
축구공 ― 유령이 나오는 시간?·42
그림자 ― 감꽃 ·44
네안데르탈 17 ― 플랫·46
거미 2·48
열세 번째 축구공·50
낙엽·52
꿈·54
초록 거미·56
네안데르탈 18 ― 뒷골목·58
버드나무·61
3부
운동장·66
이방인·67
길·68
내원골·70
맹그로브 숲·72
그림자 ― 까치밥·74
남강둔치·76
태피스트리 ― 낙엽·78
버드나무 2·80
산수유 3·82
벚꽃·84
봄·86
별똥별·88
4부
덕천강·90
아찔하다·91
달맞이꽃·92
그림자 ― 수몰지구·94
남강 유등·96
그림자 ― 쪽배·97
남강·98
그림자 ― 예하리·100
게·102
내원사 계곡·104
그림자 ― 장당계곡·105
합천호·106
산수유 4·108
해설 | 권온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의 콜라주·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