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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입학시험 풍경
지금, 우리 교육은 과연 일제 잔재가 청산되었을까?
지성사 | 부모님 | 2021.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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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일제강점기 입학시험 제도가 어떤 목적으로 시행하게 되었는지, 당시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신문과 잡지 등 일상의 자료를 통해 어떤 일들이 벌어졌고, 어떤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는지 다양한 사례를 담았다. 일제는 학교 운영에 필요한 예산에 아주 인색했을 뿐만 아니라 학교 설립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짧은 교육 기간, 저급한 수준의 교육, 일본인과의 차별 등으로 일관하며 학교를 식민 통치의 핵심 기관으로 삼았다. 이때 등장한 입학시험이 대표적인 예다.

일제가 폭증하는 입학지원자를 떨어뜨리기 위한 수단으로 입학시험을 철저하게 활용한 결과 ‘입시지옥’이 생겨났고, 이에 따른 치열한 경쟁, 명문 학교 등장, 입학 브로커 그리고 입시 전문학원이 생겨나는 등 얼핏 지금의 우리 교육제도와 많이 닮아 있는 당시의 입학시험 제도를 비롯해 다양한 사건과 사고들을 살펴본다.

  출판사 리뷰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워
‘2021년 인문 교육 콘텐츠 개발 지원 사업’ 선정작

근대 교육과 제국주의 교육으로 탄생한 교육제도!
일상과 교육 현장에서 일제의 식민 통치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의 교육을 되돌아보다!

지금 우리 교육은
일제강점기 교육제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 온 국민의 관심이 한 곳에 쏠리는 바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날이다. 이날은 오로지 수험생이 주인공이다. TV에서는 새벽 찬 공기를 맞으며 시험장 풍경을 전하는 것을 시작으로 늦잠을 잔 수험생이 아슬아슬 시험장에 도착하는 풍경까지 온갖 이야기들로 넘쳐난다. 시험장 입실이 완료되는 오전 8시 10분 문이 굳게 닫히고, 시험이 끝나는 오후 6시경까지 수험생은 거의 열 시간에 걸쳐 대학으로 향하는 첫 관문인 수학능력시험을 치른다. 수험생의 부모가 그러했듯이 이제 그 자녀들로 이어진 이러한 풍경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누구나 한 번쯤 가졌음 직한 궁금증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적으로 문맹 퇴치에서 민족의 지도자 육성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가난의 극복에서 개인적 출세와 같은 사회적 신분 이동에 대한 기대감 등으로 교육열이 뜨거워졌고, 근대식 학교를 찾는 발길이 이어졌다. 이에 지원자가 급증하자 이들을 수용할 학교가 턱없이 부족했다. 일제는 급증하는 보통학교(현재의 초등학교) 지원자들을 떨어뜨리기 위한 수단으로 입학시험을 도입했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바로 백 년 전의 일이다.
이처럼 입학지원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1920년 이후에서 1945년까지, 입학시험과 관련한 신문과 잡지 등의 기사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당시의 사회상을 살펴보는 의미 있는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 일제강점기 입학시험 풍경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2021년 인문 교육 콘텐츠 개발 지원 사업’에 선정된 작품으로, 현재 우리 문화와 역사를 주제로 강의와 교양서를 집필하는 전업작가로 활동하면서 이야기 우리 문화, 신화는 두껍다, 왕비, 궁궐 담장을 넘다, 정도전의 시대를 읽다 등을 펴낸 저자 김진섭이 오랜 시간에 걸쳐 일제강점기의 교육을 다룬 선행 연구 업적은 물론이고 일제강점기 교육 관련 자료를 망라하여 정리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신문 자료를 꼼꼼하게 조사한 후 관련 자료들을 하나하나 모아서 정리했고, 이를 사료로 이용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사료들을 분석하여 중요한 의제를 이끌어내고 이를 주제별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전문성을 엿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지금의 입학시험에도 여전히 현안이 될 수 있는 주제들, 즉 독자들이 궁금증과 호기심을 가질 만한 주제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사회적·교육적 가치가 높다. 예를 들면 입학시험 날의 각종 풍경, 언론의 지나친 관심, 상급 명문 학교로의 진학 열기 등 우리 눈에도 선한 모습들을 마치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듯 흥미있게 서술되어 있다. 독자들은 100여 년 전과 다른 듯 같은 입학시험 경쟁에서 여전히 일제 잔재가 청산되지 못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을 것이다.

가장 고질적인 문제, 입시 교육은
시작부터 비뚤어진 교육제도였다!


일제강점기는 근대식 교육기관과 식민지 교육기관이 설립된 시기로, 이때 사회 대변혁을 가져온 근대와 강압적 침탈을 앞세운 식민지 지배라는 두 가지 특성이 융합된 독특(?)하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근대식 학교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파생된 입학시험은 단순히 입학생을 선발하는 기능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대단히 컸다. 따라서 입학시험은 당시의 사회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이며, 이를 통해 일제 식민지 통치 정책의 본질과 함께 1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입학시험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기회이기도 하다.
우리의 뜨거운 교육열과는 정반대로 일제는 식민 통치의 기반으로 활용하기 위해 세운 근대식 학교 운영에 필요한 예산에 아주 인색했을 뿐만 아니라 학교 설립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짧은 교육 기간, 저급한 수준의 교육, 일본인과의 차별 등으로 일관하며 학교를 식민 통치의 핵심 기관으로 삼았다. 이때 등장한 입학시험이 대표적인 예였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당시의 입학시험에 한정하여 다루고 있다. 일제강점기에서 교육정책은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고, 한편으로는 우리의 높은 교육열이 반영되어 1920년대부터 근대식 학교에서 교육받으려는 지원자가 대폭 늘어난다. 여기에는 학문에 대한 열정과 식민지 사회에서의 출세,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국민 육성과 계몽·애국심 고취 등 상반된 의도가 서로 충돌하면서 희망과 좌절 그리고 수용과 저항이라는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했고, 그런 가운데 초등학교에서도 입학시험을 시행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의 교육은 사회적 조건의 변화와 시민사회 구성원들의 의식변화로부터 자연스럽게 출발하는 기회를 상실하고 시작부터 왜곡과 굴절을 겪는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지속되었고, 수험생을 비롯해 학부모에게 심각한 정신적 고통이나 자살 등 부작용이 발생하는 등 이른바 입시지옥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입학시험과 관련하여 새로운 사회 풍조가 등장했다. 이렇듯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형성된 입학시험이라는 용어에는 개별 인간의 차원을 넘어 사회구조적 그리고 사회사적 인식이 그 이면에 작용하고 있다는 주장과 함께 당시에도 입학시험에 대한 사회적으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입학시험과 관련한 논문을 토대로 하여 신문 기사, 잡지, 인터뷰 자료 등 다양한 자료를 참고했고, 특히 일제강점기의 신문 자료를 꼼꼼하게 내용별로 분류하여 주요 자료로 삼았다. 신문의 경우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자료가 주를 이룬다. 그 까닭은 일제가 전시 체제로 돌입하면서 입학시험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고 일제가 폐망할 때까지 계속되었음에도, 신문과 잡지 등은 폐간되었기 때문에 1940년을 기점으로 다양한 자료를 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입학시험이 시행된 지 어언 100여 년, 현재까지도 여전히 사회적인 논란의 중심에 있는 우리는 입시 교육의 굴레에서 언제쯤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저자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입시 교육의 뿌리를 살펴보는 소중한 기회임과 동시에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단초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의 교육 현실은 지금도 그 미로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그 시작은 바로 근대 시기의 일제강점기였다는 점에서 충분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제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듯하지만,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100년 전은 바로 일제강점기였고, 특히 초등학교부터 입학시험이 본격적으로 실시되던 시기였다. 일제강점기의 입학시험은 교육의 본질을 왜곡하며 학교 안팎에서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고,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했다.

주제별로 분류하여
일제강점기 입학시험 풍경을 담다!


이 책은 주제별 분류하여 모두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하였으며, 당시 시대상에 관한 독자들의 이해와 궁금증을 제대로 풀어내기 되도록 쉽게 서술하여 입학시험과 관련한 다양한 풍경들을 담았다.

<풍경 1: 근대 교육과 식민지 학교가 만나다>는 도입부로, 입학시험을 본격적으로 풀어나가기에 앞서 일제 식민지 통치가 시작되는 1910년대까지 근대식 학교의 풍경을 다루었다. 여기에는 일제가 설립한 근대식 교육기관이 자리 잡는 과정과 학교 교육에 그들의 의도가 어떻게 반영되었고, 이에 대한 우리 민족의 거부감은 어떻게 나타났는지, 그리고 근대식 교육기관의 역할을 분담했던 각종 사립학교와 서당은 어떻게 감소했고, 보통학교부터 중등학교까지 지원자가 급증하면서 입학난이 시작되는 원인과 과정 등이 실려 있다.

일제는 ‘조선인은 오로지 식민지 국민으로서 각 분야에서 노예적 심부름을 잘하는 인물을 양성하는 교육만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내무부 장관은 이 강연회에서 “초등학교 교육은 예비교육이 아니고 완성교육을 행하는 곳으로, 학교를 졸업하면 곧 성실·근면·실무에 복종하고 충량(忠良)한 국민으로서 신민의 본분을 다하도록 지도해야 한다”며 “식민지 국민으로 육성하기 위한 조선인의 교육은 초등교육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_17~18쪽

일제는 사립학교에 비해 학회 주도의 조직적인 면이 약한 서당을 전통 교육을 이행하는 곳으로 묶어두고, 탄압과 회유라는 양면책을 씀으로써 식민지 교육기관으로 개편을 시도하면서 한편으로는 민족교육을 수행하는 사립학교를 먼저 탄압하는 일종의 분리 정책을 실시했다. (……) 1910년대까지 사립학교의 위축에 따른 공백을 메우며 근대식 초등교육기관 역할까지 담당했던 서당 역시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었고, 서당을 대신해서 야학과 강습소 등이 증가했다. 반면 보통학교로 개편되기 직전까지 학생이 10여 명에 불과할 정도로 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었던 공립 목포소학교 등 전국의 관공립보통학교들은 조선총독부의 지원에 힘입어 학생들이 늘어났다. _42쪽

일제는 관리의 임용 조건으로 학력 자격을 법규화하고 회사원이나 노무자 등을 신규 채용할 때 출신 학교장의 추천을 관행화하거나 학력에 따른 임금차별을 관행화하는 등의 기준을 적용하여 관공립학교의 사회적 위상이 예전과 달리 강화된다. 즉 일제에 의해 각종 제도에서 학력을 요구했고, 학력이 없으면 식민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점차 사라졌다. 여기에 실력을 키워 민족을 구하자는 이른바 실력양성론으로 많은 이들이 지식인 대열에 합세했지만, 개인의 출세 욕망으로 일본이 인가한 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게 되었다. _49쪽

<동아일보>에는 “매년 봄이 되면 들려오는 신음소리는 입학난이고, 매일 지방으로부터 들려오는 논평은 보통학교 증설과 학급 증설 문제이다”라고 비판하는 등 기회 있을 때마다 학교의 증설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지만, 특별한 성과가 없었다. 때문에 일부 학교에서는 탈락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임시 조치를 마련하기도 했다. _64쪽

<풍경 2: 입시지옥이 생겨나다>에서는 1920년대를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치열한 입학시험과 관련해서 초·중·고등 교육기관으로 구분하여 인문계와 실업계 그리고 관공립과 사립학교의 입학시험 경쟁과 관련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다룬다. 입학시험 과목과 시험문제, 절차, 전시 체제로 전환된 입학시험 등을 통해 입시 교육이 어떻게 왜곡되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추적해본다. 그리고 중등학교의 경우 관공립학교가 입학시험을 주도하면서 이른바 ‘입시지옥’과 함께 ‘명문 학교’에 대한 인식이 이때부터 생겨나는 등 오늘날의 입학시험을 되돌아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일제가 기독교 계통의 사립학교에 실업교육을 실시하도록 권고하는 등 인문계 고등교육의 중요성까지 망각하며 실업교육에 편중하고 있다”고 비판했지만, 실업학교와 관련한 식민지 통치 정책은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농업학교의 경우 1925년 22개교에서 1936년까지 9개교가 늘어나 총 31개교에 이르는 등 조선인에게 농업을 중심으로 한 실업교육을 확산시킨 직접적인 이유는 일본에 대한 안정적인 쌀 공급을 위해 저곡가 정책으로 노동자의 저임금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_84쪽

조선총독부는 국비를 지원하여 직할 경영하던 각 중등학교들을 1925년부터 지방비 관할로 이관하여 관립학교가 없어지고 공립학교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지방비 자체에 대한 국고 보조는 계속했지만, 중등학교의 경비를 독립적으로 지원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국비 지원과 고등보통학교 증설 요구가 지속적으로 이어졌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처럼 인문계 중등학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운데 진학 희망자의 증가는 입학난을 더욱 부추겼다. 이에 <동아일보>는 “입학난의 절규, ‘나를 가르쳐 주세요’하는 아우성 소리가 삼천리강산을 울리다”라는 등, 신문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학교가 부족한 현실을 보도했다. _90쪽

교사가 삼각형과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아동에게 그려보라고 연필을 준다. 아동은 연필을 쥐고 열심히 그린다. 그러나 삼각형이 네모진 탓에 옆에 있던 채점 교사에게 지적을 받았고, 아동은 5점이 감점되었다. 다음은 바둑돌 헤아리기로, 책상 위에 빨간 돌 5개와 흰 돌 4개가 섞여 있다. 교사가 “모두 몇 개냐?”고 묻자 “아홉 개”라고 답했다. 다음에는 “빨간 돌과 흰 돌 중 어느 것이 많은가?”를 물었고, “빨간 돌이 많다”고 답하자 “옳지, 맞혔다. 그러면 이 중에서 두 개가 없어지면 몇 개가 남느냐?”라고 묻자, 아동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참을 바둑돌만 노려보고 있더니 갑자기 여교사를 바라보고 “선생님…… 저…… 오줌……”이라며 머뭇거렸다. 그러자 여교사는 아동의 번호와 함께 ‘오시꼬(오줌)’를 외쳤다. _126쪽

<풍경 3: 시작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에서는 입학시험에서 민족 차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다룬다. 이를 위해 필기시험 외에 구두시험, 소견표, 신체검사와 체력검사, 사상 검열 그리고 입학시험에 지원할 자격을 갖추기 위한 자격 검정시험 등 수험생을 평가하기 위한 다양한 시험들과 관련한 내용들이 실려 있다. 입학지원자의 폭증으로 학생 선발보다는 지원자를 탈락시키려는 목적에서 시행된 입학시험 제도에는 선발 인원 선정과 사상 검열 등 민족을 차별하는 일제의 식민 통치 정책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게다가 경제력을 기준으로 입학생 선발 기준을 마련하는 등 입학시험에서 경제력이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한 이유와 사례들을 살펴본다.

<동아일보>는 진학률이 좋은 학교를 ‘이름난 학교’ ‘좋은 학교’ ‘이름이 높은 학교’ 등으로 표현하면서 “이러한 학교에는 지원자가 많아 입학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특별히 학교의 우열을 가릴 것이 아니라 그 학교를 졸업하여 상급학교에 입학할 자격을 얻을 만한 정도이면 아무 학교든지 입학하기 쉬운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영리한 처지라 하겠다. 또한 중등학교에 지원하면서 전문학교까지 가르칠 힘이 없으면 실업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낫다”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교육 당국은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 대단히 소극적이었고, 조선인 차별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수험생과 학부형의 의지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_144쪽

학교의 서열화는 상급학교 입학시험이 만들어낸 결과였고,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학교 간의 차이에 유의할 것과 성적 일람표 제출을 통첩하며 학교 서열화를 조장했다. 또한 관공립학교 우대라는 차별정책은 학력주의의 제도화로 이어졌고, 관공립학교를 황국신민 양성을 위한 최적의 교육기관화함으로써 식민지 지배체제 구축의 도구로 이용했다. _148쪽

입학시험에서 소견표는 크게 첫째 성적 판정, 둘째 가정의 자산 판정, 셋째 사상 검열 등 세 가지 기능을 했고, 입학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탈락자를 선별하기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되었다. 특히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입학시험의 간소화를 추진하면서 “시험지옥을 돌파하게 할 만한 좋은 방책으로,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입학시험에서 수험과목의 성적에 치중하기보다는 출신학교의 성적 소견표를 더 중요시할 방침이다”라며 소견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_164쪽

관립전문학교에서 수험생의 철저한 신분 조사 때문에 지원자가 감소할 정도였고, 경성제국대학에서도 첫 입학생 선발부터 수험생의 사상 검열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예를 들면 학무 당국의 촉탁으로 수험생들의 사상 검열을 각 경찰서 고등계에 의뢰했고, 광성고보 출신의 한 수험생은 “경성제국대학 구두시험에서 면접관이 ‘고보 시절 동맹휴학에 가담한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회고하여 구두시험에서도 사상 검열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동아일보>는 “경성제국대학 예과 지원생을 경찰에서 엄중 조사…… 사상 경향과 만세 사건의 관계 유무를 엄밀히 조사한다”고 보도하면서 “경성제국대학 관계자는 입학시험에서 ‘조선인 입학시험 성적이 양호하였다’고 하였음에도 합격자가 적은 이유는 형사 시험관의 배일사상 시험에 성적이 불량한 까닭인가?”라고 따졌다. _202쪽

밀린 수업료를 독촉하는 과정에서 학생의 책보를 빼앗고 교실에서 쫓아내며 구타가 이루어지는 등 학대 행위도 가해졌다. 함남 이원군 진명보통학교에서는 월사금을 체납한 3학년생 3을 화장실로 끌고 가서 뺨을 때리고 세 시간이나 화장실에 가두어 두어 물의를 일으켰고, 황해도 재령군의 어느 학부형은 “……어린 학생 4~5명이 길거리 한 모퉁이에서 ‘오늘 너 왜 학교에 안 왔니?’ ‘그까짓 도적놈의 학교’ ‘월사금 때문에 그랬구나.’ ‘선생도 도적놈들이더라고’……” 하는 아이들의 대화를 자신이 직접 보고 들었다며 신문에 투고하기도 했다. _ 215쪽

<풍경 4: 입학시험이 만들어낸 풍경들>에서는 교육의 본질은 사라지고 입시 경쟁만 난무했던 구체적인 사례들을 살펴본다. 그 예로, 보통학교에서부터 입시 과목 위주로 수업을 하고, 휴일이나 수업이 끝난 후에도 별도의 교재로 시험 준비 교육을 했으며, 중등학교에서는 진학반과 취업반을 나누어 수업을 진행했다. 이처럼 치열한 입학시험 경쟁을 피하기 위해 일본을 비롯해 만주, 러시아 등으로 조기유학 현상이 나타났고, 전쟁 수행을 위한 준비로 각종 군사 관련 학교의 진학을 권유하기도 했다. 치열한 입시 경쟁과 맞물려 각종 수험서들이 불티나게 팔리는가 하면 가정교사와 과외가 일반화되었으며, 입시 전문학원과 스타 강사,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한 문제집과 의약품 광고 시장의 확장되기도 했다.

입학시험 준비교육은 보통학교에 입학한 후 학년이 올라갈수록 다시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입시 위주 교육으로 이어졌다. 반면 상급학교 진학을 희망하지 않는 학생들은 수업에서 배제되었고, 진학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에게는 공부가 단순한 경쟁으로 변해갔다. 심지어 수예(手藝) 시간은 물론, 학생들의 전람회나 학예회에도 자신이 만들지 않은 작품을 제출했고, 교사들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 말 없이 받았다. 때문에 “선생님이 아무 말 없으니 어머니가 만든 작품을 내놓게 되어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가르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학부형들의 경쟁의식과 허영심으로부터 나오는 조력이 얼마나 아이들을 나쁘게 만드는 것인지 알 수가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_227쪽

전차 조종사를 양성하는 일본 전차학교에서는 ‘소년들의 동경의 대상’ ‘소년의 열렬한 애국군인 지망생을 환영하고 있다’며 소년 전차병 생도도 모집했다. 지원 자격은 고등소학교 졸업 정도로 만 15세에서 18세까지였고, 신체검사와 학과시험에 합격하면 2년 과정의 교육을 받고 졸업하게 된다. 1939년 소년 전차병 생도 모집에 100여 명의 지원자 중 조선인이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_252쪽

학비 걱정보다 자녀의 입학이 더 큰 문제였을 정도로 입시난이 심각했다. 신문에도 매년 입학시험 철이 되면 “비참! 1:6의 이 비참, 중등학교가 태부족, 교육계의 통한(痛恨), 모집하는 정원은 불과 1,300명인데 입학 희망자는 이미 7,000명에 가까웠다” “뼈가 저리게 비참한 광경, 가련한 소년들” “남의 학교까지 빌려서 처참한 입학시험 광경” “낙제(탈락자) 아동 천여 명, 17개의 보통학교 입학시험 결과” 등 높은 경쟁률, 시험 대비 요령, 학교의 수험 준비 기관화, 조선인 차별과 자산 차별 문제, 수험 준비로 인한 ‘건강 파괴’ 문제, 불합격생들의 자살과 각종 입시 비리 등, 해마다 입학시험 시기에 발생한 온갖 기사가 쏟아졌다. _258쪽

보통학교 교사들이 개인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외도 꽤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는 각 보통학교장들에게 “교사들이 유족한 가정에 드나들며 개인적으로 가정교사 노릇을 하는 것은 금지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외는 점 차 일반화되었다. 요즘 말로 하면 사교육 시장이 생겨난 것이다. 일제강 점기에는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수재들이 사범학교에 많이 진학했는데, 1942년 광주사범학교 입학생 104명 가운데 과외를 전혀 받지 않은 학생은 겨우 6퍼센트였다고 할 정도였다. _286
“4~5세의 어린 아동들이 입학시험 준비로 신경쇠약에 걸린다”는 등 입학시험의 압박에 시달리는 수험생들에게 ‘신경쇠약’이라는 새로운 병명이 등장했고, 두뇌를 혹사하거나 지나친 스트레스로 위장병이나 불면증 등에 시달리는 수험생들도 생겨났다. 심지어 입학시험에 대한 불안감으로 목숨까지 끊는 등 수험생들의 정신건강이 사회문제로 등 장하면서 이와 관련한 의약품들도 등장했다. _295쪽

<풍경 5: 입학시험과 사건사고들>에서는 입학시험에 관한 각종 사건과 사고들을 다룬다. 입학시험에서 실패한 수험생이 가출에서 자살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일탈 그리고 수험생을 둔 가족과 교사들이 겪어야 했던 수난 등 다양한 사례들을 담았다. 또 시험문제 유출 사건, 문서 위조와 입시 브로커를 둘러싼 사기 사건도 살펴본다.

교문 앞에서는 아버지가 수험표를 가지고 오지 않은 아이의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욕을 하고 호통치기도 했다. 아버지는 자동차를 타고 가서 수험표를 가지고 왔지만 이미 교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때문에 시험장에 들어갈 수 없었던 아들과 아버지는 교문을 붙잡고 통곡했다고 한다. <동아일보>는 이 일을 보도하면서 “입학 열쇠를 잊고 오면 입학이 된다고 해도 그만큼 허둥대는 사람이니, 학교에서 도외시할 것이다. 가지고 올 것을 못 가지고 허둥대거든 벌써 입학은 단념하셔야 한다”고 일침을 가하는 등 교문 앞의 다양한 풍경을 전했다. _304쪽

조삼제(17세) 군은 진주고보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고도 집안의 재산이 700원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했다. 당시 재산이 최소한 4천~5천 원은 되어야 한다는 말이 돌았다. 그런데 조 군의 집안은 자산이 7천 원으로, 직원이 기록하는 과정에서 0을 한 개 빠뜨려서 700원이 되어 불합격되고 말았다. 그리고 “시험은 만점이나 입학을 거절, 진주고보 자산 부족하다는 이유로, 당자는 학교 문전에서 방성통곡”이라는 기사도 보인다. _318쪽

1927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입학시험에서 전년도에 있었던 6.10만세운동에 직접 연루된 학생은 물론 당시 검거된 학생이 많았던 학교 출신들도 입학을 불허하는 등 사상 검열이 한층 더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때문에 광주고보는 1927년부터 1929년까지 경성제국대학에 7명의 합격자를 배출했지만, 광주학생운동 직후 불온 학교로 낙인이 찍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단 한 명의 합격자도 배출하지 못했다. 또 6.10만세운동으로 검거된 학생이 많았던 경성의 각 사립중등학교 졸업생들도 피해를 보았다. _333쪽

영흥군 출신 유 모 군은 경성에서 중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더 배우고 싶어 전문학교 입학시험을 보아 합격했다. 유 군은 기쁜 마음으로 시골집으로 내려와 부모님께 경제적 지원을 부탁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해서 돈이 없었던 부모님은 돈을 구할 수 없었다. 이에 극도로 비관한 유 군은 양잿물을 마시고 자살을 기도했다. 다행히 가족들이 유 군을 발견하여 응급처치를 하고 8~9일 동안 정성을 다해 치료했으나 너무 많은 양잿물을 마셔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_337쪽

자녀가 입학시험에서 불합격하자 충격을 받고 자살을 시도한 아버지도 있었다. 전라남도 광산군에서는 믿었던 아들이 광주고보 입학시험에 낙방하자 아버지 정 모 씨(48세)가 비관한 나머지 마을의 방죽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당시 광주고보는 100명 정원에 542명이 지원했는데, 수백 석을 추수하는 부호였던 정 씨는 넉넉한 살림임에도 아들을 제대로 공부시키지 못한 책임감을 느끼고 비관한 것으로 전한다. _348쪽

구두 수선업을 하던 박인환(32세)은 조 모 군(17세)과 알게 된 것을 기회로 친한 중등학교 교사들이 많다고 접근하여 ‘희망하는 학교에 입학시켜주겠다’며 감언이설로 조 군을 꼬드겨 그가 가지고 있던 스케이트를 빌려서 전당포에 저당 잡히는 등 같은 수법으로 어린 학생들의 물건을 갈취하고 호주머니를 털었다. _354쪽

입시철이 다가오면 교사들은 주변의 청탁으로 심한 몸살을 앓았다. 어떤 교사는 “친분이나 여러 가지 관계 때문에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이 말을 하면, 수첩에 이름을 적기는 하나 실상은 자격이 모자라 아이를 합격시킬 수 없다”고 자기변명처럼 말하는 등 주변 사람들의 청이 귀가 따가울 정도로 계속되었다. 때문에 교사수첩에는 보통 40~50명에서 100여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심한 경우 ‘특별히 좀 봐달라’는 청을 받은 수가 300명에서 많게는 500~600명이나 되는 교사도 있었다. 그러나 모집 정원은 100명에서 많아야 200명 이내였기 때문에 청을 모두 들어주어도 턱없이 모자랐다. _357~358쪽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조선인 교사들도 적극적 친일 또는 소극적 친일 행위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교육 당국은 교사들을 적극 통제했다. 이러한 교사들의 행적은 광복이 된 후 1945년 9월 15일 전체 중등교사 1,894명 가운데 450명이 휘문중학교 강당에 모인 ‘중등학교 교육자대회’에서 스스로 폭로되었다. 이 자리에서 교사들은 “우리 교육자는 과거에 조선인을 일본 정신으로 가르쳤다. 우리가 새 나라의 자녀를 가르칠 자격이 있는가? 스스로 비판하자. 우리 모두 사직을 하자. 신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교단을 지키며 대죄하고 적어도 제일선에서 활약한 교장급은 모두 물러나라”고 결의했다. _371쪽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진섭
동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에서 인문콘텐츠를 공부하여 문화예술 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홍보·교육·도시빈민 간사, ’99강원국제관광엑스포 홍보제작전문위원, 강원인재육성재단 사무처장, 한국미디어콘텐츠학회 이사를 지냈다. 춘천교육대학교 겸임교수, 동국대학교 만해마을 교육원 교수를 거쳐 춘천교육대학교, 동국대학교 영상대학원, 인천대학교에 출강했다. 현재 우리 문화와 역사를 주제로 강의와 교양서를 집필하는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지은 책으로는 <조선의 아침을 꿈꾸던 사람들>, <이야기 우리 문화>, <신화는 두껍다>, <왕비, 궁궐 담장을 넘다>, <정도전의 시대를 읽다>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리얼 버라이어티 쇼의 확장성과 전통 연희에 대한 소고: 2006년 무한도전 등장 이후를 중심으로>, <리얼 버라이어티 쇼에 내재된 동시대인의 일상 연구>가 있으며, “김치의 혁명을 몰고 온 고추”, “우산, 근대와 전근대가 만나다” 등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

  목차

추천의 글/ 들어가는 글

풍경 1 근대교육과식민지학교가만나다

독특한 근대식 학교가 등장하다
공립보통학교를 거부하다
서당이 변하다
지원자는 늘고, 정원은 부족하고…

풍경 2 입시지옥이 생겨나다

실업학교가 주목받다
중등학교, 입시지옥이 생겨나다
전문학교, 일본인과도 경쟁하다
입학시험, 절대적인 선발방식이 되다

풍경 3 시작부터기울어진운동장이었다

학교가 변하다
수험생을 다양하게 검증하다
식민지 정책을 고스란히 담다
시작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경제력도 실력이다?

풍경 4 입학시험이만들어낸풍경들

교육은 사라지고 입학 실적만 남다
조기유학에서 각종 군사학교까지
언론과 문학, 입학시험은 뜨거운 감자였다
갈등에서 무시험 선택까지
수험생, 소비자로 주목받다

풍경 5 입학시험과사건·사고들

교실 안과 밖 풍경, 입학시험장을 가다
집안의 갈등에서 사기 사건까지
수험생의 일탈로 이어지다
가족, 또 다른 수험생이었다
교사들도 수난이 이어지다

나가는 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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