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등단 이후 시와 동시를 함께 쓰며 청소년시까지 창작 영역을 넓힌 김현서 시인의 두 번째 청소년시집. 사춘기에 접어든 중학생 소년들의 좌충우돌 성장기를 추리 소설의 형식을 빌려 담아낸 첫 청소년시집 <탐정동아리 사건일지>(창비교육, 2019)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청소년시집이다.
이 시집은 그때보다 한 단계 성숙하긴 했으나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인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시인은 따돌림과 학교 폭력, 가족 간의 소외와 소통 부재, 불우한 가정 환경, 사회 구조와의 부조화 등 불안과 혼돈의 시기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불안정한 감정과 막막한 일상을 섬세한 눈으로 살핀다.
시인은 이 시집을 두고 “각자의 공간에 유폐된 고통을 끌어안고 끙끙거리는 아이들에게 부디 이 시집이 ‘넌 혼자가 아니야!’라고 내민 따뜻한 손이 되어 주길 바란다.”(시인의 말)라고 적었다. 시인의 바람대로 이 시집이 꿈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불확실한 오늘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응원이 되어 줄 것이다. 이 시집은 ‘창비청소년시선’의 마흔두 번째 권이다.
출판사 리뷰
나 좀 내버려 두세요청소년은 미래의 주인공으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다. 청소년들의 삶은 기성세대의 잣대에 휘둘리거나 사회적 관습에 억눌려서는 안 된다. “세상엔 답이 없는 문제도 있고 정답이라고 믿었던 게 정답이 아닐 수도 있”(소원 풀이)는 만큼 자유로운 삶을 누려야 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오늘의 청소년들은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정해진 틀에 갇혀 꿈틀거리며 따분하게 살아간다. 기성의 질서와 규율에 억압된 세계에 던져진 청소년들의 처지는 시인이 비유한 대로 ‘도마 위에 놓인 생선’과 다를 바 없다. 시인은 “떨어져 나간 자신의 살점을 바라”보며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야들야들 팔딱”대면서 “나 좀 내버려 두라고 몸부림”(무뚝뚝한 규율 아저씨)치는 청소년들의 간절한 몸짓에 함께 아파하며 그저 한때의 방황으로 치부하는 그 순간의 고통에 한 걸음 다가간다. 누구나 거치는 사춘기일 뿐,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닌 “한때라고 생각하는 매 순간”을 청소년들이 “안간힘을 다해”(뿌리의 힘) 살아간다는 것을 보통의 어른들은 모른다.
등나무야
나를 철사처럼 친친 휘감고 올라가서 본
하늘엔 뭐가 보이니?
네가 내 목을 조르며
보라색 등꽃을 피우는 동안
겨드랑이를 타고 자꾸 식은땀이 흘러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막혀
네가 내 몸에 남겨 놓은 흉터에는
이제 새가 날아오지 않고
햇빛이 들지 않아
등나무야
나를 움켜쥔
징그러운 덩굴손을 조금만 풀어 줄래?
맑고 파란 바람이 느껴지게
흰 구름 같은 꽃을 피울 수 있게
나한테서 조금만 떨어져 줄래?
―목련나무 전문
폭력은 폭력일 뿐, 장난이 아니야흔히 ‘질풍노도의 시기’로 불리는 청소년기에는 예민한 감수성과 불안정한 정서가 단순히 “확 밟아 주고 싶은 충동”(저녁이 깊어 간다)에 그치지 않고 공격적인 행동이나 폭력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시인은 날로 심각해지는 따돌림, 괴롭힘, 물리적 폭력 등의 학교 폭력에 특히 주목한다. “기괴한 일진 놀이에 빠져”(ZONE) 자기가 “애들한테 당한 거 분풀이”(두고 보자, 이연주)하듯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누구한테도 털어놓지 못”(장난이라고)하고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하는 아이, 잘못인 줄 알면서도 “같이 어울려 욕을 하지 않으면/다음 욕받이가 자기가 될까 봐” 두려워 “하고 싶지 않은데도/습관처럼 욕을 퍼붓는”(욕받이) 아이. 이들은 각각 가해자, 피해자, 동조자로 분류될 것이나 시인은 이들을 똑같이 폭력의 희생자로 여기며 저마다 폭력이 남긴 상처로 고통스러워하는 청소년들의 마음을 헤아린다. 시인의 말대로 “폭력은 어떤 형태로든 상처를 남긴다.”(시인의 말).
넌
사자가 가젤을 세워 놓고 으르렁거리는 걸
대화라고 생각하니?
넌
임팔라를 잡아먹은 악어의 눈물이
반성이라고 생각하니?
아, 몰라 몰라
그럼 넌
개구리가 뱀을 보고 웃는 게
반가움이라고 생각하니?
―아, 몰라 몰라 전문
허울만 남은 안식처따돌림이나 괴롭힘 같은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에게 가정은 더할 나위 없는 마음의 안식처이다. 하지만 고단한 학교생활만큼이나 가정 환경도 가족과의 관계도 우울하기 짝이 없다. “집 안에 들어오면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ㅤㄸㅣㄱ 잠가 버”(우리 가족)리고 아무런 교감도 나누지 않는다. 부모님은 “바빠서 내가 담배를 피우든 염색을 하든 가출을 하든 관심 없다(바빠서). 이렇듯 서로의 무관심 속에서 가족이라는 관계는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아빠의 사업이 망한 뒤 “빨간딱지가 쏟아 내는 냉기로 집 안은 살얼음판”(빨간딱지)이고, 집 나간 “엄마의 삶에서 나는 뭘까?”(도랑에 빠진 바퀴) 생각해 보면 쓸쓸하고 곤혹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마냥 주저앉을 수만은 없다. 답답한 현실에서 “나를 구하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외로움과 슬픔을 참고서 “보고 싶지 않은 풍경들”과 “나를 아프게 만드는 풍경들”(라이더 알바)을 하나씩 지워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상큼한 오월 같은”(풋) 아늑한 세상이 활짝 열릴지도 모른다.
밖에서만 큰소리치는 너구리
밖에서만 활짝 피는 나팔꽃
밖에서만 조잘거리는 종달새
밖에서만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개구리
집 안에 들어오면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ㅤㄸㅣㄱ 잠가 버린다
―우리 가족 전문
나는 정말 문제아일까?시인은 청소년들의 내면에 도사린 불안한 심리를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이유도 모를 화가 불쑥불쑥 치밀어 오”(화가 날 때)르고, 문제집을 “확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저녁이 깊어 간다)과 온갖 “잡생각”(주술 관계에 밑줄 긋기)과 “엿같은 기분”(믹서기)이 속에서 들끓는 청소년들의 감정은 도무지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아무 때나 바락바락 소리치고 싶어지는 내가 싫다”(내 자리)가도 “선생님이 문제구나 말하니 나는 또 문제아가 되는 것 같다”(나는 정말 문제아일까?)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심지어는 “창가에/오래 앉아 있으니/내 몸에서도/따뜻한 햇빛 냄새가”(불안)나는 것이 오히려 불안하다. 세상은 그렇게 청소년들을 무작정 ‘요주의 인물’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시인은 잠시 숨을 고르고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며 “불안에 맞설 돌멩이 몇 개를 주워 주머니 속에 넣어”(주술 관계에 밑줄 긋기) 두고서 내일을 꿈꾸며 어두운 바닥에서 스스로를 끌어 올리는 청소년들의 ‘느리고 단단한 시간’을 믿는다.
마음이 팍팍해질 때
불안해진 내일이
한판 붙을 태세로 깐족깐족 다가올 때
학교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
그냥 그럴 때도 있는 거라고 말해 두자
속에서 들끓고 있는 분노를
하품처럼 쏟아 내고 싶을 때
지금의 방황에 대해
누구의 탓도 하고 싶지 않을 때
힘없이 벽을 내리치듯
그냥이라고 하자
그냥 한번 해 보자
―그냥 부분
넌 혼자가 아니야청소년들은 늘 불안에 쫓기듯 살아간다. 종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운 감정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었다가 일인칭 관찰자 시점이었다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둔갑”하기도 하고, “사지선다형이었다가 오지선다형이었다가 주관식이었다가”(주술 관계에 밑줄 긋기) 변덕스러운 모습으로 뒤죽박죽 휘몰아친다. “천 개의 칼을 가진 세상에서 버텨 내려면 천 개 이상의 좌절을 맛보아야 한다”(좌절의 말맛)는 문장을 읽을 때면 자칫 “어둠에 먹혀 버릴지도 모”를 위태로운 시간을 “혼자서 어둠을 밀어 내며 견뎌야”(가로등) 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아프게 다가온다. 그 모습을 시인은 외면하지 않고서 가만가만 속삭인다. “넌 혼자가 아니야”, 시인이 이번 시집의 갈피마다 ‘숨겨 둔 말’이 바로 이것. 갈등과 고민의 “암막 커튼을 젖히며/눈부신 햇살을 쏟아 내는”(혼자가 아니야) 이 다정한 위로와 격려의 말이 녹록지 않은 현실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한 줌 희망의 불빛이 되어 줄 것이다.
암막 커튼을 젖히며
눈부신 햇살을 쏟아 내는 그 말!
넌 혼자가 아니야
선생님의 말이 입 안에서 사탕처럼 굴러다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사탕!
천 개쯤 있었으면 좋겠어
(중략)
넌 혼자가 아니야
읊조릴 때마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 쪼가리 같은 내 몸이
나풀나풀 날아올라
노랑나비 흰나비 이리 날아오너라
넌 혼자가 아니야
창문을 열고 높은 담장도 폴짝 뛰어넘어
창공으로 날아올라
넌 혼자가 아니야
사방이 확 트인 구름 해먹에 누워 흔들흔들
밑도 끝도 없는 배짱이 생겨나는 그 말
나는 혼자가 아니었어!
―혼자가 아니야 부분
누구나 한때가 있다 살구꽃이 피는 것도 살구꽃이 지는 것도 살구가 달리는 것도 앙상한 가지로 추운 겨울을 견뎌 내는 것도 다 한때다
살구꽃 대신 자두꽃을 꿈꾸는 것도 벌이 날아오고 벌레가 꼬이고 강풍과 폭설에 시달리는 것도 말썽도 응석도 다 한때다
그러나 한때라고 생각하는 매 순간 살구나무 뿌리는 안간힘을 다해 흙을 붙잡고 있었겠지
- 「뿌리의 힘」 전문
창가에
오래 앉아 있으니
내 몸에서도
따뜻한 햇빛 냄새가 난다
- 「불안」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김현서
앞뜰에는 늙은 대추나무와 황매화가 있고, 뒤뜰에는 빨간 딸기가 올망졸망 자라던 강원도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 경기도로 이사했다. 아기 때의 기억은 아름답지만 학창 시절은 조금 달랐다. 어느 날은 배가 고팠고 어느 날은 잠깐 웃었고 어느 날은 왈칵 눈물을 쏟기도 했다. 그 시절의 눈물과 웃음 그리고 좌충우돌 서울살이를 자양분 삼아 글을 쓰고 있다.1996년 시 전문지 『현대시사상』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0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어 동시도 함께 쓰고 있다. 펴낸 책으로 동시집 『수탉 몬다의 여행』, 청소년시집 『탐정동아리 사건일지』, 시집 『나는 커서』, 『코르셋을 입은 거울』, 동화 『우주로 날아라, 누리호!』(공저) 등이 있다.
목차
제1부 당한 거 갚아 준 거래
장난이라고
화가 날 때
아, 몰라 몰라
두고 보자, 이연주
저녁이 깊어 간다
나는 정말 문제아일까?
무뚝뚝한 규율 아저씨
타자를 대하는 방식
ZOOM
그냥
욕받이
뿌리의 힘
제2부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바빠서
우리 가족
소원 풀이
빨간딱지
도랑에 빠진 바퀴
좌절의 말맛
숨겨 둔 말
가로등
알람 소리
옥탑방
라이더 알바
주술 관계에 밑줄 긋기
악몽, 꺼져 줄래?
제3부 쫄면 어때?
비밀
목련나무
내 자리
쫄면 어때?
수능일
고양이 싸움
믹서기
애매한 인생
불안
이달의 식단표
뻥식이가 다가온다
불치병
제4부 난 혼자가 아니야
따봉충
ZONE
유리창
풋
허세 많은 늑대
혼자가 아니야
시작
백일홍
달빛 맛집
팝콘
PCR
첫사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