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세 권의 시집을 내면서 문학적 감도와 상상력의 파장이 원심적으로 상승하는 과정을 밟아온 정유정 시인의 네 번째 시집 『하루에서 온 편지』가 문학세계사에서 출간됐다. 진화의 이력을 바탕으로 정유정 시인의 공력은 균질적으로 더욱 밀도가 높아졌다.
정유정의 시는 근원적으로 평화와 안식을 노래한다. 부드럽고 상냥한 해변의 미풍을 꿈꾸고 환하게 닦은 창 너머로 눈부신 꽃들이 피어나기를 희구한다. “고귀하고 소중한 신뢰”(「해변의 미풍」)가 끝까지 이어져 믿음의 세상이 영구히 펼쳐지기를 소망한다. 저녁에 별이 뜨면 나란히 산마루에 앉아 “아름답고 찬란한 내일의 꿈을 기다리는 것”(「별 5」)을 일과로 삼고자 한다. 참으로 고귀한 정념이다.
그렇다고 그의 내면에 아픔과 시련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남에게 다 털어놓지 못할 상처의 시간이 은밀히 내장되어 있지만, 그는 그것을 직접 발설하지 않고 음악과 기도의 힘으로 다스려 아름다운 소망의 음역을 펼쳐내는 일에 전념한다. 참으로 순결한 서정이다.
출판사 리뷰
“정유정 시인의 시를 읽는 것은 눈물겨운 기쁨이고 하나의 축복이다.”
─이숭원(문학평론가, 서울여대 명예교수)
예술 창조의 근원을 형상화하는 시도
어머니의 상징과 기도의 능력시인은 시집을 다음과 같은 「시인의 말」로 시작했다.
가을이 창 앞에 와
붉은 손 내민다.
저 손 잡으면
내 아이(詩)들도
온 산 물들일 수 있겠다.
산 안에 계신
어머니께 바친다.
가을이 붉은 손을 내민다는 것은 단풍이 물든 가을 산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다. 여기 나오는 아이들과 어머니는 실제 삶 속의 아이들과 어머니일 수 있겠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주변의 모든 존재가 아름다운 자연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나타낸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자신이 길러낸 크고 작은 물상들이 가을의 아름다움과 하나가 되고, 자신을 길러내고 보살핀 어머니 같은 존재들도 모두 가을의 혜택을 입는 그러한 이상 상태를 시집 머리에 그려본 것이다. 모성母性은 모든 예술의 근원적 동력이다. 어머니 같은 희생적 사랑이 없으면 예술은 잉태될 수가 없다. 그러니 “산 안에 계신 어머니”가 실제 어머니의 유택을 암시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예술 창조의 근원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유정 시인의 시에 ‘어머니’라는 시어가 아주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모성에 대한 시인의 지향이 그만큼 강렬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음악의 환상적 구조와 서정의 황홀한 승화멈추라고 요청할 정도로 숨 막히는 극치의 순간은 시인에게 음악이 환기하는 환상의 선율에서 온다. 음악은 인간 영혼을 신의 영역 가까이 이끌어 주는 예술이다. 그래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1788~1860)는 음악이 어떤 표상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의 의지 자체를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모든 표상 예술이 음악을 동경한다고 말했다. 음악은 우리의 영혼에 직접 충격을 가해 영혼을 거룩한 차원으로 직접 이끌고 간다. 정유정 시인의 의식을 주도하는 가장 큰 힘은 신앙이요 두 번째 견인력은 음악이다. 음악의 시가 여러 편이 있는데, 중요한 의미를 담은 한편을 소개한다.
눈을 감고,
빗소리를 듣고 있었을 뿐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를
듣고 있었을 뿐이다
끊임없이
냇물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따라
춤추며 걸으며 바다로 왔다
파도는 지금도 맨발,
새빨간 노을에 잠긴 채
파도처럼 춤추며 바다로 왔다
바다는, 그래
이리 먼 곳에 있었지
출렁거리며
간간이 끊어지는 춤
물끄러미,
바다로 가는 기차도 멀어지고,
어디서 찾아야 할까
신기루처럼 사라진 푸른 숨
점점 작아지는 빗소리
─「바다로 가는 춤」 전문
‘바다로 가는 춤’이라는 제목부터가 상징적이다. 그 말은 인간의 운명을 상징한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러시아의 음악가로 19세 때 첫 번째 교향곡을 작곡하여 연주함으로써 단번에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그 명성을 유지했다. 그는 현대 음악의 여러 경향을 수용하여 새로운 스타일의 곡을 만들었는데, 이로 인해 사회주의 리얼리즘 운동이 전개되던 당시 소련 사회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시대에 맞는 작품으로 전환하여 소련에서도 인정받는 작곡가가 되었다. 15편의 교향곡 외에 현악 4중주곡, 피아노 협주곡, 기악곡, 발레 음악 등 많은 명작을 남겼다. 특히 쇼스타코비치 왈츠 2번은 대중적으로 유명해서 많은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었다. 한국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에 사용되었고, 외국 영화 〈안나 카레니나〉, 〈아이즈 와이드 셧〉 등에 활용되었다.
이 시의 영상은 소리와 음악과 파도와 바다와 기차가 어우러진 환상의 만화경을 펼쳐낸다. 음악의 선율이 끝나면 환상의 장면은 신기루의 환영과 잦아드는 빗소리의 음영으로 마무리된다. 영혼에 직접 자극을 주는 음악의 구성이 시의 언어로 환치된 독특한 작품이다.
시인의 음악 지향은 다음 시편에서 조금 다른 각도에서 다시 한번 시도된다.
─심오해지지 않으면
베토벤은 귓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라고,
끝없는 몽상 속
환희의 악보는 무더기로 살아난다
정교하게 건져 올린
수천 조각, 빛이 두드리는 완전한 세계
아마도 달의 변신이었을 것
루체른 호수의 변신이었을 것
범람하는 달빛으로 푹 젖은
차마 젊은 남자여,
후일의 슬픔이
그의 청춘 위에 미리 와 있었을지라도
아무도 넘지 못할 빛에 취해
끝없이 두드렸을 피아노포르테
심오해지지 않아도
질기고 완곡婉曲한 숨소리 들린다
무심한 시간 다스리는,
달의 숨소리 들린다
─「월광」 전문
이 시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을 소재로 했다고 시인이 주를 달아 밝혔다. 이 곡은 베토벤의 피아노곡 중 가장 많이 알려지고 대중의 사랑을 받는 곡이다. ‘월광’이라는 이름은 베토벤이 사망한 후 음악평론가 루트비히 렐슈타프가 1악장의 분위기를 달빛 비친 루체른 호수의 정경에 비유한 데서 유래하였다. 곡의 흐름은 단순하면서도 우아하고 소박해 보이면서도 깊이가 있다. 일정한 리듬이 되풀이되면서 고요와 격정이 교차하는 음의 연속은 월광의 아름다움을 적실하게 그려낸다. 시인은 베토벤의 이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심오해져야 한다고 주석을 달았다. “정교하게 건져 올린/수천 조각, 빛이 두드리는 완전한 세계”는 이 곡의 핵심을 요약한 구절이다. 달빛의 부서짐은 수천 조각으로 분해되어 정교하게 반짝이는 것 같지만 그것이 통합되면서 완전한 빛의 통일체로 수렴된다. 음악은 몽상의 끝없는 연속과 같아서 피아노의 선율에 따라 신비로운 음악의 환상은 무한히 펼쳐진다. 호수와 달빛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훗날 사랑의 슬픔에 몸살을 앓는다 해도 한 젊은 남자는 달빛의 환상을 음악의 선율로 창조할 수밖에 없다.
시인은 자신의 내부에 놓인 사랑의 고뇌와 아픔을 완전한 빛의 세계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그러한 생의 모순 인식과 고뇌의 파장은 사랑의 경건함으로 상승한다. 모순의 인식은 화해의 소망으로 이어지고 생의 갈등은 평화의 불빛으로 전환된다. 시인은 자기 내면에 출렁이는 세상의 무한한 파동들을 음악의 감성으로 순화하여 평화의 빛으로 포용하고 진정한 자유를 찾으려는 기도의 정결함으로 승화시켰다.
시와 음악은 가장 밀접한 친연 관계에 있다. 인간 영혼을 리듬 있는 언어로 표현하는 시는 형이상학적 사유도 감성적 환상으로 바꾸어 표현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정유정 시인은 음악과 신앙의 정결함에 바탕을 두고 대상에 대한 의식을 조정하고 융합하여 자신의 언어로 시를 엮어 갔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정유정
199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보석을 사면 캄캄해진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셀라비, 셀라비』를 출간했다. 2021년 대구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목차
Ⅰ
해변의 미풍 ______ 10
저렇게 밝은 창 ______ 12
찔레 ______ 14
별 4 ______ 15
별 5 ______ 16
별 6 ______ 18
별이 찾아간 길 ______ 20
별을 찾아가는 길 ______ 22
사랑, 그 정체停滯의 시간 ______ 24
소년의 향기 ______ 25
미늘 ______ 29
공연한 허공 ______ 31
허무는 완벽하게 ______ 32
가을에 전합니다 ______ 34
Ⅱ
샤갈의 마을에 눈이 내린다 ______ 36
자작나무 한 그루, 길 위에 멈추다 ______ 38
만날 수 없다 ______ 40
사월 4 ______ 41
사월 5 ______ 43
사월 6 ______ 44
은자隱者의 기별 ______ 45
붓다의 숨소리 ______ 46
하루에서 온 편지 ______ 47
바다로 가는 춤 ______ 49
예사로운 일 ______ 51
사발 하나가 공중에 떠 있다 ______ 53
숲은 문이 없다 ______ 55
노랑에게는 의문이 생기지 않는다 ______ 57
영혼의 모양 2 ______ 59
Ⅲ
월광 ______ 64
공중무덤 ______ 66
민들레 홀씨 2 ______ 68
눈사람 3 ______ 70
페넬로페의 수의 ______ 72
섬 ______ 74
판다 ______ 75
흠결 없는 단어 ______ 76
추억 느낌 ______ 78
이미지 1 ______ 79
이미지 2 ______ 80
두려움의 절정 ______ 81
철갑옷 ______ 83
음울한 어떤 날은 죽은 가인을
침엽수림에 묻는다 ______ 86
파경 ______ 88
Ⅳ
파랑 고래 ______ 92
어머니의 뜰 ______ 94
배경 ______ 95
노을 ______ 96
생명의 빛 ______ 97
숲이라 부를 수 없는 ______ 99
불면증 ______ 101
산으로 가요 ______ 103
행복 ______ 105
그리할지라도 ______ 106
첫사랑 ______ 108
고요한 정원 2 ______ 109
풍경 ______ 111
구해줘 ______ 112
불의 상처를 위로하소서 ______ 113
┃해설┃이숭원(문학평론가, 서울여대 명예교수)
음악이 환기하는 생의 정결淨潔과 황홀 ______ 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