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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 박재석 평전
평범한 인생, 빛나는 봉사
생명의양식 | 부모님 |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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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송산 박재석 장로는 교회쇄신운동의 일환으로 생겨난 고신교단이 지도자 양성을 위해 설립한 칼빈대학에서 최고의 신앙훈련을 받았고, 고신교회의 교회쇄신운동을 경험하고, 그 정신을 직접 체득하였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평생을 고신대학교가 성장 발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후원자의 역할을 하였다.

  출판사 리뷰

송산 박재석 장로는 교회쇄신운동의 일환으로 생겨난 고신교단이 지도자 양성을 위해 설립한 칼빈대학에서 최고의 신앙훈련을 받았고, 고신교회의 교회쇄신운동을 경험하고, 그 정신을 직접 체득하였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는 평생을 고신대학교가 성장 발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후원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송산은 고신교회에서 기억할 만한 평신도 지도자였고, 그의 신앙과 삶, 신앙과 경건은 고신 교회의 뿌리에 닿아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송산 박재석 장로는 고신교회 사회 복지 사역의 중심인물이며 고신교회 성장과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기에 그의 전기를 만드는 일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이에 송산 박재석 장로의 10주기를 앞두고 그의 전기를 엮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송산의 회고록 『새벽을 깨우리로다』와 고신대 출판부에서 펴낸 산수기념문집 『꿈과 열정으로 살아온 80년』, 그리고 교단 역사와 정신을 담은 실록(實錄)과 같은 〈기독교보〉와 〈파수군〉,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록』 등 관련 자료를 취합하여 이 전기가 집필되었습니다. 흔히 전기나 평전을 생각하면 대단한 인물들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행적을 영웅적으로 기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물이나 사역을 과도하게 부풀리기도 하고, 때로 영웅적인 모습으로 덧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번 평전은 앞서 언급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역사의 조각을 하나하나 맞춰 가면서 완성되었습니다. 송산 박재석 장로의 생애를 통해 평범한 한 성도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가를 함께 나누시며 하나님 나라를 섬기시길 소망합니다.

송산은 대학을 마치고 영어강습소 운영을 하다가 1962년 3월 고려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동안 학제가 바뀌어서 새 학년도가 시작되었고, 3월에 입학하였다. 송산이 고려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칼빈대학을 마친 후 두 해가 지나 서였다.
그 무렵 고신교회는 1960년 12월 13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를 개최하였을 때 한상동 목사는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다시 총회장에 재선되었다. 1948년 이자익 목사가 총회장에 재선된 이후 처음이었다. 한상동 목사는 극구 사양하였지만, 마지못해 재선 총회장이 되었다. 그것이 함정이었던 것을 그는 훗날 깨닫게 되었다. 합동총회에서 신학교 문제를 논의하면서 고려신학교와 총회신학교가 같은 총회 안에 있는데, 한 이사회가 두 신학교를 관리한다는 의미에서 ‘신학교 일원화’를 결의하였고, 이사회 구성은 양 교단 동수로 하기로 정하였다. 그러나 한 해 만에 이것이 바뀌었고, 신학교 이사회에서는 고려신학교를 총회신학교에 병합하는 상정안을 제출하였고, 그의 사회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대구공고를 졸업한 재석은 목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대구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신학교에서는 전임교수가 없었고 목회자들이 담당하는 강의는 대학 인가도 나지 않았고, 교육의 수준도 성경공부 수준이어서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는 3년을 수학한 후 고려신학교 예과가 칼빈대학으로 개편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칼빈대학에 편입하였다. 그는 2년 동안 강한 훈련을 받고 1960년 칼빈대학을 졸업했다. 1962년 3월에 고려신학교에 입학해 한 해를 공부하고 방학을 맞으면서 송산의 생애에서 변곡점을 맞는 일이 있었다.
그는 누나가 운영하는 동명보육원에서 총무로 일하면서 시온 영어강습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평소 알고 지내던 경상남도 사회복지시설연합회 사무국장으로부터 무궁애학원을 방문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1962년 12월 성탄절을 며칠 앞둔 날로 날짜가 정해졌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울에 있던 무궁애학원이 피난길에 올라 남으로 남으로 내려와 부산 근교 양산 물금에 자리잡고 있었다. 부산시내로는 진입하지 못하고 비교적 싼 지역인 물금에 자리하고 있었다. 무궁애학원은 1955년 경상남도 지사로부터 후생시설 인가를 받았고, 1957년 보사부장관으로부터 재단법인 무궁애학원 인가를 받았다.
무궁애학원은 뒤편으로 오봉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곡창지대 양산평야가 한눈에 보이는 좋은 위치였다. 그러나 그 시설은 형편이 없었다. 무궁애학원은 마땅한 장소가 없어 양산교육청 소유의 20평 건물과 루핑 지붕을 한 20평 천막같은 건물에 원생 30여 명을 수용하며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다. 부엌에는 19공탄 연탄을 세 개를 넣는 드럼통이 있었다.
무궁애학원에 들어선 순간, 재석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붕은 당시에 값싼 건축자재였던 루핑으로 하늘을 가리우는 정도였고, 방은 판자로 칸을 질렀지만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고 그 사이로 바람이 통하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 천정에서 비가 새서 방안에서 양동이로 물을 받아 내어야 했다. 곳곳에 비가 흘러내린 흔적이 벽에 남아있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원생들은 허기진 배를 안고 신음하고 있었다. 비가 그치면 천정과 벽에 다시 곰팡이가 생겨 불결하였다. 방에서 밤에는 하늘의 별이 보였고, 마당에 누운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사회복지는 몇 단계를 거치며 변화하여 왔다. 이에 따라 송산의 사회사업도 몇 단계의 변화를 보여왔다. 1950년대 한국전쟁 후 전쟁고아가 많이 발생해 처음에는 이들이 주된 돌봄의 대상이었다. 송산이 1963년 2월 무궁애학원을 인수할 때까지도 한국 사회는 전쟁고아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이 송산 부부의 돌봄으로 자라 성인이 되어 사회로 나갔다. 전쟁고아들이 많은 헌신적인 사회사업가들의 봉사를 통해 건실한 시민이 된 것이다.
1960, 70년대에는 온 나라가 가난해 아이를 키울 수 없어 아이를 버리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부모에게서 버림을 받아 아이가 버려지면 경찰서를 거쳐 무궁애학원으로 흘러오는 경우가 많았다. 청소년이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아기를 출산 후 자신의 교육과 미래를 위해 아기를 버리는 일도 더러 있었다. 이들도 부모를 알지 못하고 고아원에서 자라야 했다.
무궁애학원에 온 아이들은 이렇게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경험으로 인해 사랑이 결핍된 채 살았다. 각각 차이는 조금씩 있어도 많은 아이들이 그러한 결핍의 특징을 보이곤 했다. 이것이 일탈행동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웃들은 도난에 시달려야 했고, 송산 부부는 늘 미안한 마음으로 이웃을 대해야 했다. 송산이 지역사회와 깊은 관계를 갖게 된 것도 그러한 일이 자주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결핍된 아이들의 빈 마음 한편을 채워주며 어머니의 마음으로 돌보는 것이 이금지 권사의 몫이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을 보는 시각이 일천하였다. 장애인들을 ‘병신’이라 부르는 야만적인 시각이 많았고, 이들의 불편을 배려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교회 안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제사 장은 흠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레위기 21:16-21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여 육체적인 흠이 있는 장애인들에게 목사 안수를 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장애인들이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고아원 육아 사업의 필요가 줄어들면서 정부의 강력한 권고로 인해 고아원들이 장애인 복지 시설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장애인들을 위한 필요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송산도 사회 복지 분야에서 시대가 바뀌어 고아의 시대가 장애인의 시대로 넘어갈 것을 내다보았다. 1977년 12월 31일 자로 육아 시설을 종결하였다. 이는 송산이 고아원 사업을 시작한 지 14년 만의 일 이었다.

-분문 중에서-

송산은 대학을 마치고 영어강습소 운영을 하다가 1962년 3월 고려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동안 학제가 바뀌어서 새 학년도가 시작되었고, 3월에 입학하였다. 송산이 고려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칼빈대학을 마친 후 두 해가 지나 서였다.
그 무렵 고신교회는 1960년 12월 13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를 개최하였을 때 한상동 목사는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다시 총회장에 재선되었다. 1948년 이자익 목사가 총회장에 재선된 이후 처음이었다. 한상동 목사는 극구 사양하였지만, 마지못해 재선 총회장이 되었다. 그것이 함정이었던 것을 그는 훗날 깨닫게 되었다. 합동총회에서 신학교 문제를 논의하면서 고려신학교와 총회신학교가 같은 총회 안에 있는데, 한 이사회가 두 신학교를 관리한다는 의미에서 ‘신학교 일원화’를 결의하였고, 이사회 구성은 양 교단 동수로 하기로 정하였다. 그러나 한 해 만에 이것이 바뀌었고, 신학교 이사회에서는 고려신학교를 총회신학교에 병합하는 상정안을 제출하였고, 그의 사회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대구공고를 졸업한 재석은 목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대구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신학교에서는 전임교수가 없었고 목회자들이 담당하는 강의는 대학 인가도 나지 않았고, 교육의 수준도 성경공부 수준이어서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는 3년을 수학한 후 고려신학교 예과가 칼빈대학으로 개편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칼빈대학에 편입하였다. 그는 2년 동안 강한 훈련을 받고 1960년 칼빈대학을 졸업했다. 1962년 3월에 고려신학교에 입학해 한 해를 공부하고 방학을 맞으면서 송산의 생애에서 변곡점을 맞는 일이 있었다.
그는 누나가 운영하는 동명보육원에서 총무로 일하면서 시온 영어강습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평소 알고 지내던 경상남도 사회복지시설연합회 사무국장으로부터 무궁애학원을 방문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1962년 12월 성탄절을 며칠 앞둔 날로 날짜가 정해졌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울에 있던 무궁애학원이 피난길에 올라 남으로 남으로 내려와 부산 근교 양산 물금에 자리잡고 있었다. 부산시내로는 진입하지 못하고 비교적 싼 지역인 물금에 자리하고 있었다. 무궁애학원은 1955년 경상남도 지사로부터 후생시설 인가를 받았고, 1957년 보사부장관으로부터 재단법인 무궁애학원 인가를 받았다.
무궁애학원은 뒤편으로 오봉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곡창지대 양산평야가 한눈에 보이는 좋은 위치였다. 그러나 그 시설은 형편이 없었다. 무궁애학원은 마땅한 장소가 없어 양산교육청 소유의 20평 건물과 루핑 지붕을 한 20평 천막같은 건물에 원생 30여 명을 수용하며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다. 부엌에는 19공탄 연탄을 세 개를 넣는 드럼통이 있었다.
무궁애학원에 들어선 순간, 재석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붕은 당시에 값싼 건축자재였던 루핑으로 하늘을 가리우는 정도였고, 방은 판자로 칸을 질렀지만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고 그 사이로 바람이 통하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 천정에서 비가 새서 방안에서 양동이로 물을 받아 내어야 했다. 곳곳에 비가 흘러내린 흔적이 벽에 남아있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원생들은 허기진 배를 안고 신음하고 있었다. 비가 그치면 천정과 벽에 다시 곰팡이가 생겨 불결하였다. 방에서 밤에는 하늘의 별이 보였고, 마당에 누운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사회복지는 몇 단계를 거치며 변화하여 왔다. 이에 따라 송산의 사회사업도 몇 단계의 변화를 보여왔다. 1950년대 한국전쟁 후 전쟁고아가 많이 발생해 처음에는 이들이 주된 돌봄의 대상이었다. 송산이 1963년 2월 무궁애학원을 인수할 때까지도 한국 사회는 전쟁고아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이 송산 부부의 돌봄으로 자라 성인이 되어 사회로 나갔다. 전쟁고아들이 많은 헌신적인 사회사업가들의 봉사를 통해 건실한 시민이 된 것이다.
1960, 70년대에는 온 나라가 가난해 아이를 키울 수 없어 아이를 버리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부모에게서 버림을 받아 아이가 버려지면 경찰서를 거쳐 무궁애학원으로 흘러오는 경우가 많았다. 청소년이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아기를 출산 후 자신의 교육과 미래를 위해 아기를 버리는 일도 더러 있었다. 이들도 부모를 알지 못하고 고아원에서 자라야 했다.
무궁애학원에 온 아이들은 이렇게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경험으로 인해 사랑이 결핍된 채 살았다. 각각 차이는 조금씩 있어도 많은 아이들이 그러한 결핍의 특징을 보이곤 했다. 이것이 일탈행동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웃들은 도난에 시달려야 했고, 송산 부부는 늘 미안한 마음으로 이웃을 대해야 했다. 송산이 지역사회와 깊은 관계를 갖게 된 것도 그러한 일이 자주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결핍된 아이들의 빈 마음 한편을 채워주며 어머니의 마음으로 돌보는 것이 이금지 권사의 몫이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을 보는 시각이 일천하였다. 장애인들을 ‘병신’이라 부르는 야만적인 시각이 많았고, 이들의 불편을 배려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교회 안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제사 장은 흠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레위기 21:16-21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여 육체적인 흠이 있는 장애인들에게 목사 안수를 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장애인들이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고아원 육아 사업의 필요가 줄어들면서 정부의 강력한 권고로 인해 고아원들이 장애인 복지 시설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장애인들을 위한 필요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송산도 사회 복지 분야에서 시대가 바뀌어 고아의 시대가 장애인의 시대로 넘어갈 것을 내다보았다. 1977년 12월 31일 자로 육아 시설을 종결하였다. 이는 송산이 고아원 사업을 시작한 지 14년 만의 일 이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나삼진

  목차

추천사
프롤로그

제1부 어린 시절과 성장기

1. 어린 시절과 성장기
2. 가문과 송은 박익 선생
3. 해방과 중·고등학교 시절
4. 기독교 신앙을 갖다

제2부 든든한 기초, 영성의 모판 칼빈대학
5. 해방 후 교회쇄신운동과 고신교회
6. 든든한 기초 칼빈대학
7. 작은자들과의 첫 만남
8. 부지런한 부부
9. 고려신학교 입학

제3부 고아의 아버지
10. 한국전쟁과 그 후유증
11. 생의 변곡점, 무궁애학원과의 만남
12. 무궁애학원 초기 사역
13. 아버지의 마음 어머니의 마음
14.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
15. 믿음의 동지들

제4부 장애인들의 아버지
16. 시대의 변화, 사역의 전환
17. 장애인들과 함께 한 평생
18. 최고의 시설, 최고의 교육
19. 국제사회복지대회 참가

제5부 교회와 함께한 평생
20. 물금교회와 초기 신앙생활
21. 양산 기독교 연합 사업들
22. 교회와 함께한 생애
23. 임종만 목사와 새로운 예배당 건축
24. ‘바울 같은 장로, 디모데 같은 목회자’

제6부 큰 봉사 큰 상급
25. 더 넓은 세상과 함께
26. 더 큰 교회와 함께
27. 국제 문화탐방과 성지 순례
28. 큰 봉사 큰 상급
29. 다음세대를 키우는 장학 사업
30. 송산의 유업을 잇는 자녀들

에필로그
부록

1. 송산 박재석 장로의 신앙과 삶과 영성
2. 송산 박재석 연보
3. 무궁애학원의 연혁과 현황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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