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갤러리를 산책하며 만난 우리 그림에 대한 인문적 단상. 서종택 작가(고려대 문화창의학부 명예교수)의 미술에세이 『오후 네 시의 갤러리』가 푸른사상에서 출간되었다. 관람객이 더 들지 않을 것 같은 오후 네 시의 한산한 갤러리, 저자는 상념과 몽상의 시간으로 독자들을 이끌며 예술 텍스트가 개성과 심미성을 넘어 한 시대의 담론임을 보여준다.
이 타버린 붉은 구두 한 짝은 거칠게 마모되어 배열된 검은 부장물의 색조와 잘 대비되어 있다. 프린트와 리프린트가 교직된 바탕 위에 놓인 적과 흑의 외짝 신발은 그 검은색의 절망과 진홍빛 정념이 극명히 대비되면서 상황의 비극성을 고조시켜준다. 작가는 타버린 구두 주인의 행방이나 그와 함께 그 구두가 걸어온 길에 대한 상상의 공간까지도 넉넉히 마련해주고 있다.훼손 왜곡된 형과 색은 자연스럽게 그 이전의 피사체의 꿈의 형상들을 기억하게 해준다. 인간과 사물들의 장애나 상흔들에 대한 옹호는 결국 드러난 형국보다는 기억해야 할 가치들에 대한 희구일 것이다.그의 사진들은 바라보기보다는 읽어내기에 좋은 것들이며 아파하다가 마침내 동행하게 되는 치유의 풍경들이다. 그가 찍은 것은 일그러진 사물이 아니라 본래적인 것들에 대한 우리들의 욕망이다.
얼핏 잘 구워진 빵의 둘레 같기도 하고 도넛의 잔해 같기도 한 황갈색의 테두리―이 거대한 콘돔 속은 그러나 이 음험한 공간에 찾아든 자들의 욕망과 좌절, 성스러움과 비속함, 은폐와 권태가 함께 어우러진 육체적이며 은유적인 공간이다. 자잘한 빛을 제거해버린 채 테두리 자체와 그 내부를 극사실로 보여주고 있는 이 장면은 어김없이 현대인의 욕망의 굴레를 드러내주며 그 욕망 안을 기웃거리다 마침내 함몰되어버리는 존재의 덫이라 할 수 있다. 원형의 침대와 거대한 캡슐이 거느리고 있는 어둠의 동공은 요람이나 무덤, 생성과 소멸의 공간으로 기억된다. 실낱처럼, 거미줄처럼, 잘려 나간 순대처럼 뒤엉킨 내부의 공동은 그 디테일한 묘사에 의해 섹스의 본질과 절망을 잘 확대해 보여준다. 심연처럼 아득한 어두운 공간은 죽음의 이미지와 관련된다. 그리하여 조르주 바타유의 이른바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으로서의 에로티즘의 저돌적 모습이 끔찍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서종택
작가,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저서로 『외출』 『백치의 여름』 『원무』 『한국 근대소설과 사회갈등』 『한국 현대소설사론』 『바람의 화가 변시지』 『갈등의 힘』 『코리아 블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