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슬픔이 증발한 자리, 건조하게 남겨진 사유의 흔적”글 쓰는 군인 고유동의 첫 산문집. 20년간 군인의 길을 걸어온 작가가 건강을 잃은 뒤, 새로운 눈으로 ‘낱말’과 ‘일상’을 직조하면서 길어 올린 50편의 이야기를 전한다. 작가는 총 대신 펜을 들고, 실체가 분명한 적 대신 허공을 배회하는 사유와 싸운다. 수많은 낱말과 일상에서 작가 자신을 본다. 그리고 깨닫는다. 사멸조차 생을 내포하고 있음을. 바로 그곳에 새로운 삶이 피어남을 온몸으로 증언한다.
작가는 좌절에 빠졌거나 심연을 헤매는 이에게 위로를 전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그러니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힘을 얻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볼 일이다. 놀라운 사유의 깊이와 폭, 삶을 예리하게 벼려내는 문체에 흠뻑 빠져 읽다 보면, 어느새 당신 앞의 진창이 단단한 아스팔트로 변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심연을 기꺼이 열어젖힐 의지를 가진 작가는 얼마나 귀한지, 그런 의지를 가진 작가의 글을 만났을 때의 전율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 작품을 읽으며 다시금 추억할 수 있었다는 말에는 과장이 없다.”이 책은 육군에서 20년을 근무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수필가의 작품이다.
군인이었던 경력이 어째서 독특하냐고 한다면, 그가 군인의 삶을 떠나 선택한 것이 글을 쓰는 작가이고 그중에서도 수필가이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저자는 스스로 군인으로 살면서 ‘규칙적이고 몹시 실천 지향적인 삶’을 살았으며 지독한 일 중독자에 야근이 일상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글을 쓰는 일도 부지런함과 실천이 중요하니 그리 괴리가 큰 삶일까 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군인의 삶과 작가의 삶을 비슷한 선에 올려놓기는 쉽지가 않다.아마 책을 선택하기에 앞서 저자의 이력을 살펴본 독자는 내가 그랬듯 저자가 어째서 그 누구도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된 것일까? 하는 궁금증에 가장 시달리게 될 것이다.
저자는 건강의 문제로 야근을 일삼았던 일 중독자의 삶을 유지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얻었다고 털어놓고 있어서 저자를 안정된 삶에서 밀어낸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해준다.하지만 왜 저자가 주변의 모든 이가 뜯어말리는 안정된 미래를 포기하고 하필 무엇이 기다릴지 모를 바다로 뛰어드는 것을 선택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내가 가보지 않은 길, 해보지 않은 일이 나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는 우리 모두가 궁금하고 항상 아쉬움을 갖고 사는 일이지만 실제로 그 도전에 몸을 던지는 사람은 흔치 않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감각은 몹시 예민해진다.
마음의 해상도가 급격하게 올라가고 기존에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고 느낀다.
비로소 드러나는 적대감의 근원.
군인의 본능은 투쟁으로 이끈다.
총 대신 펜을 들고 실체가 분명한 적 대신 허공을 배회하는 사유와 싸운다.”
저자는 여전히 자신에게 군인의 본능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군인의 본능이 말미암은 투쟁의 일환으로 총 대신 허공을 배회하는 사유와 싸운다고.그렇다면 이 작품은 군인의 글일까,아니면 군인으로 살았으나 이제 철저히 글을 쓰는 삶을 사는 작가의 글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군인의 삶을 살았을 뿐 그저 늘 깊이 사유하는 사람의 글일까?
“아직도 생생하다. 이 기이한 바삭함은 뭔가. 도무지 형용하기 힘든 짭짤한 맛.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감각의 공격은 맹렬했고, 저돌적이었다. 겉으로 부드러워 보였던 노란색 탄수화물 덩어리는, 잔인하게도 아직 덜 여문 초등학생의 혓바닥을 가차 없이 점령해 버렸다. “꿀꺽” 무언가가 물처럼 목구멍을 넘어갔다. 입안의 어둡고 습한 공간에 여운만을 남겨둔 채.”
저자는 이 작품이 세상 속에서 좌충우돌하며 한없이 비틀거리는 이가 쓴 글이라는 것과 좌절에 빠진 이에게 희망이 되는 글이기를 바란다는 고백으로 50편의 글을 엮어 내놓았다. 이 50편의 글 중 저자가 독자에게 보이기를 원한 첫 번째 글은 의외이면서 고개가 끄덕여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초등학생 시절 부잣집 친구의 생일잔치에 갔다가 처음 먹어본 프링글스.초등학생이 처음 먹어본 프링글스의 맛이 준 충격을 묘사하는 이 글은 당시의 어린 저자뿐만 아니라 독자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글이다.제목만으로는 언뜻 내용을 예측할 수 없었던 이 작품은 독자가 직접 프링글스를 입에 넣는 것처럼 생생한 묘사와 더불어 맹렬한 감각의 공격에 신을 대면하는 광신자의 자세로 무릎 꿇은 초등학생의 모습으로 인해 한 편의 잘 만든 연극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20년 동안 군인이었고 군인의 삶에 몰두했던 저자가 작가로 훈련을 받지는 않았을 터, 군인으로 살았던 오랜 세월이 있으니 군인의 방식으로 투쟁의 이야기가 펼쳐지지 않을까 했던 예상은 첫 번째 작품에서부터 보기 좋게 빗나갔다.프링글스를 처음 맛본 초등학생의 이야기는 곧 첫 경험의 강렬함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수필은 개인적인 경험을 글감으로 삼아 글을 쓰되,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모두가 공감하는 보편성으로 확대해야 하는 글이다.개인적이지만 너무 특별하거나 완고해서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면 실패하고, 보편성만글 곳곳에 흔하게 널린 글이어도 실패한다.그래서 수필은 어쩌면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보다도 더 독자와 함께 숨 쉬는 글쓰기이고 적정한 선을 지켜내지 못하면 존재의 가치를 잃는다.
새롭고 낯선 것, 내가 쉽게 가지거나 볼 수 없었던 것을 처음 대면했을 때의 강렬한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저자는 자신이 가진 그 강렬한 처음의 기억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서 독자들의 공감과 재미를 이끌어 내고 독자들로 하여금 누구나 갖고 있을 첫 경험을 떠올리며 미소 짓게 만든다. 왜 이 작품이 저자의 책 첫머리에 등장한 것인지 깨닫게 된 순간을 지나자 저자의 낱말은 제대로 방향을 잡은 듯 좀 더 기운차게 달려나간다.
“이글이글 불타는 눈동자는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쏘아본다. 마치 그러면 진즉에 떠나버린 연인이 돌아오기라도 하는 듯. 당최 누군지도 모를 누군가를 원망한다.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3층에서 멈춘다. 이 정도 높이면 걸어 다녀야 하는 것 아닌가. 아기 엄마라도 탔나. 다시 돌아오겠지 하며 기다리는데 여지없이 배반하는 엘리베이터. 매정하게 다시 올라가고, 4층에서 멈춘다.”
작품 <엘리베이터>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층층이 멈추는 엘리베이터 앞에 선 채 분노를 삼키며 온갖 번뇌에 시달리는 저자의 모습은 그 자체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양손을 압박하는 무거운 짐을 들고 두고 보자 두고 보자 벼르면서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며, 엘리베이터가 마침내 열리면 상대를 향해 얼른 날 선 말을 꽂을 준비를 하던 저자의 곁에 서서 독자인 우리는 울컥하는 긴장감으로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걸 지켜본다.
하지만 저자와 함께 우리가 끝내 마주한 것은 그저 텅 빈 엘리베이터.끊어질 듯 말 듯 팽팽한 긴장감이 퍼덕거리던 순간은 빠르게 치솟아 오르다가 덜컹하고 멈춰 선 엘리베이터처럼 당혹감이 흐르는 침묵을 끝으로 긴장의 끈을 가차 없이 잘라낸다.수필에서 솔직함은 막강한 무기다.저자 스스로를 불쏘시개 삼아 독자들의 흥미와 공감을 끌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터, 이 작품에는 솔직함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식의 글에 대한 기대감을 주는 단서가 있다.
“잘 들어보시라.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일단 짝다리 짚고,
믹스커피 홀짝이며
똥배 좀 내밀고 나서.
에헴. 많이들 들어보셨겠지만 오늘날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변화’는
4차 산업혁명 어쩌고 메타버스 저쩌고
NFT 어절씨구
ChatGPT 저절씨구 옹헤야다.”
<미래학자>라는 제목의 작품은 특히 눈길을 끄는 인상적인 글이다.시인 듯도 하고 랩인 듯도 한, 수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형식의 이 글은 전에 없던 날것의 신선함을 주면서도 글맛이 잘 느껴지는 리듬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다.눈은 물론 귀에도 들리는 듯한 리듬의 글이란 다년간의 훈련이 아닌 원초적인 감각으로만 탄생하는 것이기에, 어쩌면 이것은 저자가 작가 이전의 삶에서 얻은 강력한 무기가 아닐까 한다.
이 책은 1, 2부로 챕터를 나누고 있는데 앞선 1부가 일상적이면서 보편적인 정서를 예리하면서도 주저 없는 강렬함으로 건드렸다면 2부는 저자 본인의 심연으로 독자를 한층 더 깊이 끌어들인다.
“색채의 장엄한 순환에서 생명의 유구한 순환을 느낀다.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활력이 곧 인생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삶이란 정지가 아닌 순환. 움직이고 또 움직여야만 실현되는 것임을 이렇게 배운다. 분초 단위로 의미를 새기고 또 새기며 사는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신의 심연을 내보이는 일은 작가에게는 숙명이다.작가는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되, 그 관찰의 결과를 독자와 나누어야만 한다.그것이 정련되지 않은 거칠고 투박한, 심지어 얼굴 붉어지는 부끄러운 것이라 해도 그러하다.자신의 심연은 감추고 드러내고 싶은 것만 전시하는 글에서 독자는 심연을 드러낼 용기를 내지 못한 작가에게 연민은 느낄지언정 정작 필요한 위로와 공감은 얻지 못한다.심연을 기꺼이 열어젖힐 의지를 가진 작가는 얼마나 귀한지, 그런 의지를 가진 작가의 글을 만났을 때의 전율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 작품을 읽으며 다시금 추억할 수 있었다는 말에는 과장이 없다.
“글쓰기란 마음을 산산조각 내는 일이 아닐까. 얇은 두께의 유리창을 콘크리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서 바스러뜨리는 일. 분자 단위로 말끔하게 해체된 마음은 그제야 제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온전히 드러난 생각. 혹자는 이를 두고 다른 사람 앞에서 벌거벗은 기분이라 토로하지만, ‘쓰는 사람’은 언제 나 옷을 입고 있다. 글로 아무리 까발려 봐야, 독자가 받아들이는 것은 ‘벌거벗겨진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종이에 박힌 활자’를 보는 것이니 말이다.”
저자가 고된 시간을 넘어 이 작품을 독자들에게 내보이며 갖는 바람은 소박하다.좌절에 빠진 이에게는 희망을, 심연을 헤매는 이에게는 한 줄기 빛이 되기를.그리고 자신의 작품이 독자의 발을 붙잡는 무른 길을 단단한 길로 바꾸어 줄 수 있기를.이전에 저자가 규칙과 질서의 삶을 살았다면 그 삶에서 떠난 저자는 놀라울 만큼 기존의 질서를 벗어나 새로운 삶의 길에 안착했다.
저자의 낱말은 ‘진화’ 중이며, 독자는 그 진화의 목격자이다.
“인간의 수명은 무한하지 않고, 아름다움은 단명(短命)하며, 계절은 변화를 거듭하다가 끝내 증발한다. 그러나 흔적은 남는다. 흔적은 추억이자 화석이고, 무엇보다도 질감이다. 까칠까칠하면서 매끄러운, 낱말에 새겨진 무늬. 질식을 앞둔 사람에게는 산소와 같다. 그는 턱 끝에 맺힌 마지막 숨을 참고, 음각된 사유를 따라간다.”
“낱말은 파편이었다. 깨진 유리 조각이자 완전을 추억하는 가련한 타락 천사. 산산조각이 난 그의 심장에는 피를 대신해 망각이 흐르고 있다. 매끈하게 잘려나간 맥락들. 덩그러니 몸통만 남아버린 낱말은 소리는 있되 의미를 상실한 기억상실증 환자다. 의미를 담아두던 그릇이 비었으므로 내부는 진공 상태가 된다. 낱말은 자신을 둘러싼 기이한 것들을 모두 빨아들인다.”
“사멸에서 피어나는 생(生). 모든 것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므로, 모든 것의 심연에는 생(生)이 있다. 그것은 작디작고, 금방이라도 사그라들 것처럼 미약하지만,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희망을 품게 한다. 아기가 입바람을 불면 바로 꺼질 흐느적거리는 촛불이지만, 그 촛불은 담담하게 광대한 어둠을 밝힌다. 설령 촛불이 꺼져도, 연약한 빛은 무한히 뻗어나간다. 미약한 온기는 대기에 흔적을 남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