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세계인에게 한국문학이란 무엇일까? 우리에게 한국문학이란 무엇일까? 그동안 한국문학은 ‘한국인 작가가 한국어로 한국의 사상을 쓴 문학’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2024년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을 비롯해 한국문화에 대한 세계시민의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한국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이해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와 같은 자각 아래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가장 지적인 작가로 평가되는 최인훈(1936~2018)의 문학을 ‘아시아’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한 저작이다. 그 과정에서 『광장』뿐 아니라 그동안 충분히 조명되지 않았던 『회색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두만강』, 『태풍』 등을 포함하여 최인훈 문학을 새롭게 해석하고, 최인훈의 문학을 식민지와 냉전이 이어진 20세기 동아시아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평화와 공존이 가능한 새로운 세계사의 원리를 탐색한 사유의 실험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출판사 리뷰
왜 지금 『최인훈의 아시아』를 읽어야 하는가?
『광장』의 작가 최인훈, 그가 꿈꾼 평화와 공존의 아시아, 그리고 ‘중립화의 상상력’을 조명하다!
세계인에게 한국문학이란 무엇일까? 우리에게 한국문학이란 무엇일까? 그동안 한국문학은 ‘한국인 작가가 한국어로 한국의 사상을 쓴 문학’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2024년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을 비롯해 한국문화에 대한 세계시민의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한국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이해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와 같은 자각 아래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가장 지적인 작가로 평가되는 최인훈(1936~2018)의 문학을 ‘아시아’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한 저작이다. 그 과정에서 『광장』뿐 아니라 그동안 충분히 조명되지 않았던 『회색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두만강』, 『태풍』 등을 포함하여 최인훈 문학을 새롭게 해석하고, 최인훈의 문학을 식민지와 냉전이 이어진 20세기 동아시아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평화와 공존이 가능한 새로운 세계사의 원리를 탐색한 사유의 실험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무엇보다 이 글은 최인훈의 문학을 사례로 한국문학을 한국문학-동아시아문학-세계문학의 세 가지 정체성이 교차하고 있는 문학으로 제시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즉 최인훈의 생애사, 독서, 이동, 번역, 그리고 문제의식을 검토하는 가운데 한국문학의 층위(한국의 역사, 문학에 대한 관심), 동아시아문학의 층위(동북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의 역사 및 문학에 대한 관심), 세계문학의 층위(세계의 역사 및 문학에 대한 관심)가 서로 연동하면서 최인훈 문학이 형성되었음을 확인했다는 의미다. 이 책의 제안을 통해 한국문학을 새롭게 이해한다면, 그것을 기반하여 세계시민과 공유하는 한국문학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특장점은 ‘한국인에게 아시아인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를 검토했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한반도 안에서는 자신을 한국인으로 규정하고, 출장이나 해외여행, 혹은 지구적 사안에 관심을 가질 때는 자신을 세계시민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한국인이 자신을 아시아인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에 반해 최인훈의 문학은 한국인이 아시아인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삶과 일상에 개입한 ‘아시아’의 다양한 면모에 주목했고(식민지, 냉전 등 동아시아의 정치적 현실 및 한국인의 삶에 개입한 일본의 흔적 등), 동시에 자신의 유년 시절 식민지 경험을 성찰하면서 아시아인의 소통을 모색하였으며, 동아시아 문명권의 역사적 의미를 음미하면서 세계사를 새롭게 이해할 가능성을 열어갔다. 『최인훈의 아시아』는 이처럼 최인훈의 문학을 통해 한국인이 한국이라는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아시아인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고자 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분단문학’의 틀을 넘는 최인훈의 사유지형을 복원하고, 그의 대표작을 비롯하여 강연이나 평론, 미발표 원고 속에 드러난 ‘중립화’의 철학적 의미를 분석하며, 동시대 지식인들이 고민했던 ‘아시아의 자립’과 ‘냉전 이후의 사유 방식’을 조명하는 데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최인훈의 ‘아시아’는 지명이 아니라 사유방식이다!
한반도의 냉전은 끝났을까? 그렇지 않다. 남과 북 사이의 군사적 대치는 어느 정도 잦아들었지만, 이념의 흔적은 여전히 우리의 언어, 사고, 정치, 심지어 일상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점점 더 극렬하게.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대답을 찾지 못한 질문을 안고 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 서 있는가?” 『최인훈의 아시아』는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한국 현대문학의 대표작가 최인훈의 작품 세계를 ‘아시아’라는 관점에서 재조명하며, 분단문학을 넘어선 그의 지적 실험과 사유의 지형을 그려낸다. 『광장』, 『회색인』, 『화두』 등 대표작뿐 아니라 덜 알려진 평론, 강연, 미발표 원고까지 포괄하여 분석하면서 지금까지 조명되지 않았던 작가의 ‘아시아적 상상력’을 복원한다. 그렇다면 그가 냉전 속에서 꿈꾼 제3의 길, 이른바 ‘중립화’란 무엇이었을까? 최인훈과 동시대 지식인들은 남과 북,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중 어느 쪽도 완전한 해답이 될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들이 떠올린 대안이 바로 ‘중립화’였다. 이념 진영 사이에서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언어와 철학으로 세계를 해석하려는 ‘제3의 길’ 말이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남과 북 모두에서 실망한 채 끝내 삶의 방향을 잃는다. 그러나 그 결말은 절망이 아니다. 또 다른 희망인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라는 질문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질문을 문학과 역사, 철학의 언어로 다시 해석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즉, 서구의 사유체계에 편입되지 않은 다른 목소리, 다른 해석의 방식인 ‘아시아’를 상정하여 더는 고착화한 체제 사이에서 방황하거나 정체성을 잃지 말라고 다독인다. ‘광장’이든 ‘밀실’이든 고립되지 말라고, 그러나 그 고립을 자기 질문의 출발점으로 삼아보라고 독려한다. 이념과 역사, 식민성과 정체성, 민족과 타자에 대한 고뇌가 여전히 사회 전반을 잠식하는 오늘, 이 시점에 『최인훈의 아시아』가 특히 유의미하게 읽히는 이유이다.
『최인훈의 아시아』 이렇게 읽자
이 책은 최인훈의 주요 소설 9편을 분석하는 9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다. 3편의 작품씩을 묶어서 한 장으로 구성하였다. 2장은 아시아의 공간, 3장은 아시아의 시간, 4장은 아시아의 원리로 편성하였다.
먼저 2장 ‘아시아의 공간: 냉전을 넘어선 평화의 상상력’에서는 최인훈 문학에 나타난 아시아의 ‘공간’을 살펴본다. 20세기 현실적으로 존재했던 동아시아냉전분단체제의 성립 및 변동과정과 이에 대응한 최인훈의 정치적 상상력을 검토하고자 한다. 20세기 한국은 식민지와 냉전이 가져온 억압과 분단의 아픔을 경험하였다. 최인훈 문학은 식민지와 냉전을 넘어선 평화를 지속적으로 탐색하였다. 4·19 직후 1960년대 초반 최인훈은 중립이라는 정치적인 이념을 직접 제시하였으나(『광장』), 이후 군사독재 아래에서는 그 이념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못하지만 통일에 대한 관심을 이어간다(『서유기』. 1970년 동아시아에서 냉전이 누그러진 데탕트를 맞이하면서, 최인훈은 평범한 사람의 일상 안에서 사회적 연대로서 평화를 만들어가고자 한다(『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이어 3장 ‘아시아의 시간: 비서구 근대의 경험을 통한 보편성의 재인식’에서는 최인훈 문학에 나타난 아시아의 ‘시간’을 살펴본다. 비서구 동아시아는 유럽 중심의 세계사에 뒤늦게 참여하였으며, 선진 유럽을 문화적 표준으로 이해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수백 년의 시간이 지체된 아시아의 문화적 후진성을 마주하였다. 1960년대 초반 최인훈은 아시아의 문화적 식민지성을 교양(서구적 이념)과 경험(아시아의 역사적 현실)의 불일치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성급한 서양 문화의 이식으로 인해, 한국문화가 건강한 전통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적으로 진단하였다(『회색인』). 이후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초반 최인훈은 한국현대문학의 역사 그 자체가 새로운 문화 창조를 위한 ‘전통’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한국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보편성을 새롭게 이해할 것을 제안하였다(「총독의 소리」). 냉전이 종식된 1990년대 초반 최인훈은 소련을 방문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20세기 초반 한국 작가들의 꿈이었던 탈식민화와 사회적 연대가 가진 세계사적 의미를 되짚었다(『화두』).
마지막 4장 ‘아시아의 원리: 연대와 공존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세계사의 원리’에서는 최인훈 문학에 나타난 아시아의 ‘원리’를 살펴본다. 근대 유럽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확장과 함께 비서구 식민지를 경영하면서 선진국으로 자부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나라를 억압하거나 환경 파괴를 초래하는 등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 최인훈은 근대 유럽 중심의 세계사 인식을 점검하는 한편, 개별 국가 단위가 아니라 문명권 단위로 역사를 바라볼 필요성을 확인한다(「주석의 소리」). 특히 식민지 시기와 겹친 자신의 유년 시절을 돌아보면서, 여러 민족이 갈등을 조정하며 공존할 지역 사회의 가능성을 탐색한다(「두만강」). 나아가 최인훈은 침략과 연대가 얽혀 있는 ‘아시아주의’를 역사적으로 성찰하며 근대 유럽 중심의 세계사 인식을 상대화하고, 개별 국가를 넘어선 공존과 조절에 기반한 새로운 세계사 인식을 제안한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이항 대립을 넘어서, 양(탈식민 저개발 국가)도 아니고 사자(제국주의 국가)도 아닌 상태의 공존과 조절 가능성을 제안한 것이다(『태풍』).
20세기 세계사 안에서 한국은 자신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표상하지 못했다. 한국은 ‘동방의 그리스’ ‘한국의 루쏘’ 등 서구 세계의 지명과 명명에 ‘한국의’ ‘동방의’ 등의 수식어를 붙여서 자신을 표현하였다. 따라서 독고준의 글이 빈을 ‘오스트리아의 ‘서울’’이라고 일컫는 것은 주변부 한국의 역사적 경험을 뒤집은 것이다. 1922년 문학사가 안확은 『조선문학사』에서 허균의 문학적 성취를 ‘조너선 스위프트’에 빗대어 설명하면서 한국문학의 보편성을 확증하였다. ‘조너선 스위프트’의 스승으로 ‘허균’이 제시되는 것 또한 한국의 상황을 뒤집은 것이다. 식민지의 문화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꾸지 않겠노라.”라는 무례한 선언을 뒤집은 “정송강과 나빠유를 바꾸지 않겠노라.”라는 난폭한 선언. 무리한 선언을 제시할 만큼, 독고준은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후진성에 깊이 절망하였다. 그리고 그는 한국의 후진성이 식민지 경험 때문이라고 인식하였다.
반대로 서구 세계의 선진국은 “국민사(史)인 것이 바로 인간사(史)”인 나라, 곧 자신의 경험이 지구적으로 보편성을 가지는 나라였다. 문제는 선진국은 ‘식민지’를 기반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한국은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 식민지를 경영하지 않으면서도 문화의 발전을 이룰 수 있는가? 독고준 역시 “식민지 없는 민주주의는 크나큰 모험이다.”(회색-1, 1963: 300)라는 생각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글을 멈춘다.
최인훈은 후진국 한국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궁리하였고, 『회색인』에서 세 개의 길을 제시할 수 있었다. 첫째 길은 노예의 환상에 충족하고 만족하는 길이다. 노예선 한 척이 폭포를 향해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노예선의 노예는 배가 향하는 방향에는 관심이 없고, 갑판의 텔레비전에 투사된 USA라는 배의 화려한 이미지에 감동할 뿐이다. 이 길은 한국의 현실을 외면한 채, 타자를 모방하는 길이다. 둘째 길은 한국이 후진국이라는 생각 자체를 거부하는 길이다. 한국을 후진국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서양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기준을 서양이 아니라 한국을 삼을 수도 있다. 다만, 이 경우 자칫하면 외부와의 소통을 스스로 닫을 수 있다.
_<1장 최인훈, 아시아를 질문하다>
서구에서도 ‘반공’의 사회 분위기나 매카시즘은 존재하였지만, ‘반공’의 분위기는 한국을 비롯한 탈식민 국가에서 더욱 강력하고 장기적으로 나타났다. 냉전과 독재가 겹쳤던 1960년대 한국의 민중은 “사고의 틀을 남북 대결의 코드 이하로 제한·단순화하고, 사유의 단위 또한 대립하는 두 정체(政體) 이상으로 확장하지 않을 것”을 강력히 요구받았다. 구보씨는 자신의 삶을 “철 들고부터 이 세상은 빨갱이와 흰둥이로 갈라져 있고 그 두 세력은 물과 불같은 것이라는 소리 속에 자라고 배우고 지금껏 살고 있다.”라고 진술한다. 그에게 냉전의 대립은 당연한 것이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이나 1960년 전후 중·소 대립의 소식을 듣고도 “견문이 좁은 구보씨는 중·소가 짜고서 미국 사람을 속이기 위해서 싸우는 체하는 줄”로만 알뿐 그것을 믿지 못하였다. 구보씨는 남북의 적대적 대립을 압도적인 현실감으로 체감하였으나, 지구적 냉전의 변동은 언론을 통해 인지했을 뿐 맥락과 추이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기에 “수상쩍은 낌새”로 느낄 따름이었다(구보2, 1971: 410-411).
1960년대 후반 전 지구적 냉전 질서의 완화와 분단과 독재 아래 한국의 경직된 사회 분위기의 낙차는 구보씨에게 인지부조화를 일으킨다. 인지부조화는 구보씨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교과서에 씌어 있는 대로 역사가 걸어왔고, 신문에 나는 일만으로 하루가 이루어지는 줄만 알고 사는 민중”(갈대-2, 1971: 402) 모두가 경험하는 것이었다. 구보씨가 보기에 한국의 민중은 한국 사회의 규율과 규범에 (비)적응하며 한국 언론을 통해 정보를 얻고 살아가지만, 정작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조건은 그들이 체감하고 재현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곳에서 결정되었다. 구보씨는 “‘공식(公式)’으로 돌아가던 세상이 거짓이요, 탈바가지고 그 뒤에서 구보씨 수준인 인물은 언감생심 짐작도 못할 꿍꿍이가 익어간다는 이 현실의 진행 방식”(갈대-2, 1971: 402)을 의심하고 비판하였다. 구보씨를 포함한 한국 민중에게 역사는 풍문으로만 전달되었다. 역사학자 이남희의 통찰처럼, 한국의 민중은 역사의 주체가 아니었고, 그 자신 역사의 중심으로부터 소외된 “역사 주체성의 위기”를 경험하였다.
_<2장 아시아의 공간-냉전을 넘어선 평화의 상상력>
『광장』은 해방공간 한국과 북한의 언어를 나란히 제시하면서, 식민지 이후 한국의 현실과 교양의 이념 사이의 괴리를 분명히 드러냈다. 한국의 언어가 서구의 교양을 모방하고 지향했고, 북한의 언어는 주어진 이념형으로부터 연역적으로 현실을 인식하도록 명령하고 강제하였다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교양과 현실이 결합한 상황은 공통적이었다. 사회사학자 서호철의 지적처럼, 해방 이후 한국 문화의 역사적 조건을 두고, 『광장』의 작가와 서술자는 ‘현장’과 대립하는 ‘풍문’의 나라라고 명명하였다. 바스티유의 감격도 없고, 동궁(冬宮) 습격의 흥분도 없다. 기로틴(단두대)에서 흐르던 피를 목격한 조선 인민은 없으며, 동상과 조각을 함마로 부수며 대리석 계단을 몰려 올라가서 황제의 침실에 불을 지르던 횃불을 들어 본 조선 인민은 없다. 그들은 혁명의 풍문만 들었을 뿐이다. (광장, 1961: 153)
역사의 ‘현장’인 서구로부터 떨어져, 그곳에서 있었던 혁명과 민주주의를 ‘풍문’ 혹은 공문으로만 듣고 알게 되었던 ‘거리감’은 『광장』의 이명준에게 주어진 세계의 조건이었다. 『광장』의 「작자의 말」은 “‘메시아’가 왔다는 이천 년 래의 풍문(風聞)이 있읍니다. 신(神)이 죽었다는 풍문이 있읍니다. 신이 부활했다는 풍문도 있읍니다. 컴뮤니즘이 세계를 구하리라는 풍문도 있었읍니다.”로 시작한다. 그리고 ‘작자’는 이명준을 두고 “풍문에 만족치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 한 친구”로 부른다. 한국과 북한은 모두 경험과 교양이 결합하지 못한 상태였고, 한국의 현실과 서구 이념의 거리를 상상의 영역, 혹은 지식의 영역으로 봉합하기 위한, 필연적으로 실패할 ‘노력’들을 지속하였다.
『광장』은 지식으로서 세계를 구축하는 주체로 자기를 정립하고자 하는 이명준의 기획을 보여 주는 동시에, 한국에서 지식에 기반한 세계 구축이 불가능한 상황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이명준은 그 불가능을 마주하면서 지식을 통해 자기를 구축하고자 하는 교양주의적 입장을 보여 준다. 교양과 경험의 불일치라는 비서구 한국에서 쓰인 『광장』은 교양과 경험의 결합을 목표로 한 교양소설(Bildungsroman)이다. 이명준은 교양과 경험의 불일치라는 세계의 조건을 선험적인 것으로 수용하기를 거부하면서, 자기 경험과 교양을 결합하는 ‘교양 의지’에 충실하고자 노력한다. 이명준을 비롯하여 최인훈의 소설에 등장하는 남성 인물이 지식과 여성을 등가로 놓으면서 물신화하거나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과 태도는 그러한 거리감의 전도된 형상이며, 식민지 남성 지식인이 취했던 태도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광장』은 역사의 ‘현장’이 될 수 없었고 역사를 ‘풍문’으로만 전해 들었던 한국의 역사적 조건을 경험과 교양, 혹은 이념과 삶의 불일치라는 틀로 문제화하였다. 1960년대 최인훈은 지속적으로 경험과 교양의 불일치라는 문제를 탐색한다.
_<3장 아시아의 시간-비서구 근대의 경험을 통한 보편성의 재인식>
작가 소개
지은이 : 장문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부교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식민지/제국과 냉전, 그리고 인간의 너머를 상상했던 동아시아의 사상과 세계문학으로부터 지금을 위한 지혜를 길어 올리고, ‘앎-주체’의 역사와 지식의 공공성을 성찰하기 위해 한국학을 연구하고 강의하고 있다. 『조선문학을 권함-오무라 마스오와 한국문학이라는 공유지』(소명출판, 2025)를 썼고, 『문학 ‘읽기’의 방법들-문학이론 도구상자』(이음, 2024)를 함께 옮겼다.
목차
『최인훈의 아시아』를 읽는 방법 : 반동의 디스토피아를 넘어설 지혜를 찾다 _박홍규 / 최인훈이 멈춘 곳에서 가능성을 떠올리다 _오혜진
『최인훈의 아시아』를 펼치면서 : 샹그릴라를 찾아서 - 최인훈, 혹은 우리의 아시아 _배주환
최인훈, 아시아를 궁리하며 상상하던 무렵
1장 최인훈, 아시아를 질문하다
최인훈이라는 질문 - 『광장』과 중립국, 그리고 그 너머 / 최인훈의 상상 - 식민지 없는 우리나라가 갈 수 있는 세 가지 길 / 최인훈의 아시아 / 동아시아 냉전 질서를 넘어서 / 시간과의 경쟁을 넘어서 / 새로운 세계사 이해를 향하여 / ‘최인훈의 아시아’를 탐색하는 지도
2장 아시아의 공간 - 냉전을 넘어선 평화의 상상력
(1) 동아시아의 광장, 중립을 쓰다 - 『광장』
① 타고르호를 타고 중립국으로 떠난 이명준
② 동아시아 공동의 광장을 찾아서
(2) 한국의 지식인, 통일을 말하다 - 「크리스마스 캐럴」과 『서유기』
① 필화 사건에 휘말린 작가들
② 조심스럽게 중립을 기억하기, 신중하게 통일을 말하기
(3) 지역의 민중, 민주주의와 평화를 꿈꾸다 -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① 어느 월남인이 기록한 데탕트의 월차 보고서
② ‘광장으로 나오는 공공의 통일론’과 사회적 연대로서의 평화
3장 아시아의 시간 - 비서구 근대의 경험을 통한 보편성의 재인식
(1) 한국이라는 풍토에 이식된 서양 - 『회색인』
① 혁명과 근대를 풍문으로 들은 나라
② 후식민지 한국이 갈 수 있는 길, 혹은 가지 않은 길
(2) 한국의 역사적 경험으로 새롭게 만든 ‘전통’ - 「총독의 소리」
① 겹쳐진 해도 - 1930년대 작가의 질문을 반복하며
② 식민지 문학의 전통을 되짚으며 발견한 보편성의 원리
(3) 망각된 한국 민중의 꿈으로 다시 쓴 인류의 이상 - 『화두』
① 냉전이 끝난 후 소련에서 생각한 것
② 슬픈 육체를 가진 짐승이 내는 별들의 토론 소리, 혹은 탈식민화와 사회적 연대
4장 아시아의 원리 - 연대와 공존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세계사의 원리
(1) 근대사를 다시 생각하다 - 「주석의 소리」
① 국민 국가의 역사를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사 쓰기의 조건
② 뒤늦게 마주한 화두, 동아시아 문명권
(2) 식민지를 다시 생각하다 - 『두만강』
① 유년기 추억에 겹쳐진 식민지의 곤혹
② 지역의 일상으로 쓴 식민지의 작은 역사
(3) 세계사를 다시 생각하다 - 『태풍』
① 적도에서 마주한 아시아주의의 유산
② 주변부의 세계사, 혹은 연대와 공존의 꿈
5장 최인훈, 아시아를 생각하다/살다
최인훈과 아시아라는 사상 / 최인훈과 이름 찾기 / 최인훈의 아시아가 멈춘 곳 / 지금 다시, 최인훈의 아시아? / 다시, 아시아의 최인훈? 세계의 최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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