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길에서 길을 묻다
요즈음 강변이나 산자락에 걷기 편한 길들이 많아서 산책하기가 참 좋다. 둘레길, 올레길, 소리길, 자락길, 자드락길, 해파랑길 등 이름도 다양한 산책길이 여기저기 놓여 있다. 각양각색의 개성을 갖고 있는 길들이지만 강변이나, 해안, 호수, 산자락을 끼고 도는 길이라는 점은 공통적이다.
길을 걸으며 주변 산천을 돌아보며, 풀꽃 향기도 맡고, 새소리도 듣는다. 차 한 잔과 음악이 곁들여지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저절로 나를 생각하고 추억을 떠올리며 명상에 잠긴다. 나도 모르게 시인이 되고 철학자가 된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얻는 소소한 행복,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소확행(小確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도 집을 나서 길을 걷는다.
내가 걸어본 길 중에는 아무래도 지리산 대원사 계곡길이 최고인 것 같다. 대원사 계곡을 따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만들어 놓은 길이다. 계곡을 따라가며 꾸민 길이라 계곡의 물소리와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무엇보다 사람이 없어서 좋다.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는 둘레길은 소란해서 번거롭다. 나만 호젓하게 걸으며 명상에 젖어 보는 것이 걷기의 매력일 것이다.
내가 그 길을 좋아하는 또 하나 이유는 추억어린 ‘가랑잎초등학교’가 있어서다. 학교 이름부터 정겨운 이 학교는 이미 폐교된 지 오래됐지만 지금도 가랑잎과 별빛을 받으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원사 계곡길은 가랑잎초등학교가 있어 더 아름답다.
나도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 중의 하나다. 어려서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학교고, 놀이고, 농사고 모든 게 걸어서 이루어졌다. 두 발로 걷지 않으면 기껏 우마차를 타는 정도였다. 자전거도 훨씬 후에 등장했다. 그만큼 궁벽한 시골이었다. 아스팔트도 깔리지 않은 흙길이었기에 늘 흙냄새를 맡으며 걸었다. 당시에는 서울로 가는 신작로도 흙길이어서 버스가 달리면 뽀얀 먼지가 일어나곤 했다. 그래서 여름날엔 더위도 식힐 겸 물차가 도로변을 돌며 물을 뿌렸다.
그렇게 걸으며 성장했기에 다리 힘 하나 만큼은 튼튼하다. 도회지에서 버스나 전차를 타고 크던 아이들과는 비교가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걷는 것은 자신이 있다. 점심, 저녁 후 동네 뒷산이나 공원길 걷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집 근처에 고덕산, 일자산이 있어서 걷는 일이 습관이 됐다. 하지만 최근에 무릎을 다쳐서 잠시 멈춰 서 있다.
어렸을 때 동네에는 ‘왕뎅이’라는 유서 깊은 샘이 있었다. 조선 시대 어느 임금이 평양, 의주 길에 나서다 목이 말라 들른 곳이 왕뎅이였다. 그 옆으로는 시냇물이 맑게 흐른다. 그리고 둑방길이 길게 뻗어 있다. 나는 그 길 걷기를 참 좋아 했다. 봄이 되면 둑방에 온갖 풀꽃들이 피어난다. 민들레, 제비꽃, 개망초 그리고 이름도 모를 풀꽃들의 향연이 벌어진다. 그 향기를 쫓아 벌 나비도 여기저기 날아든다. 소년 시절의 나의 봄은 왕뎅이 둑방길에서 먼저 왔다.
맑게 흐르는 냇가에는 온갖 새들이 날아들었다. 물총새, 딱총새, 오리에다 수리까지 날아든다. 물고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숲덩쿨을 이루어 풀냄새가 물씬 풍긴다. 저녁에는 반딧불이가 하늘의 별처럼 반짝거리며 날았다. 누렇게 익은 황금벌판이 펼쳐진 가을날의 둑방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풀벌레들이 숲속에서 가을 노래를 애처롭게 부르곤 했다. 하얗게 눈 덮인 둑방길을 걸으며 눈에 찍힌 발자국을 새던 추억도 아련하다. 그렇게 어린 동심을 키우고 가꾸어 주던 길이 왕뎅이 둑방길이었다.
중학교 때는 그 길을 걸으며 노래도 부르고 시도 읽었다. 영어 단어장을 들고 단어도 외웠다. 문학소년의 감수성과 미래에 대한 꿈을 키웠던 것 같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라는 노래가 당시 나의 애창곡이었다. 백합 대신에 이름 모를 풀꽃이 지천으로 피어나던 길이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윤동주, <새로운 길>
윤동주가 걷던 길처럼 내가 걷던 둑방길에도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바람이 불었다. 그 길을 걸으며 꽃과 새를 사랑하는 자연의 감성을 키웠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영혼의 소리를 들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발레리의 시처럼 소박한 시심(詩心)과 영혼을 키웠던 것이다. 서정주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지만 나를 키운 건 8할이 길이었다. 둑방길은 ‘나의 길’이었고, ‘새로운 길’이었다.
서울로 진학해서도 걷기는 계속되었다. 비록 전차와 버스는 탔어도 걷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장위동 하숙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30분, 청계천 2가에서 계동 학교까지 30분, 그렇게 왕복 하루에 2시간씩 걸어야 했다. 내가 다니던 모교는 계동 골목 끝자락에 있어서 학생들이 애를 먹었다. 늘 시간에 쫓기며 지각을 면하려고 뛰어다니곤 했다. 그렇게 서울생활도 걷기는 마찬가지였다. 흙길 대신에 삭막한 건물들이 들어선 아스팔트길이었다는 차이뿐이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마로니에 길을 걸었다. 지금은 대학로가 되어 화려한 거리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세느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천변이었다. 봄이 되면 개나리가 피고, 여름에는 마로니에가 숲을 이루었다. 가을에 노란 은행잎으로 덮힌 풍경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곳에 자리 잡은 학림다방에서 문학을 이야기하고, 학문을 논하던 시절은 청춘의 봄이었다. 종로 5가에서 혜화동 로타리까지 이어진 대학로, 마로니에길을 사랑했다.
그래서 어느 추운 겨울날 눈이 소복히 쌓여 걷기도 힘든 길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몇 번 오르내렸다. 길거리를 방황하던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처럼 구보가 되어 무작정 눈길을 걸었다. 혜화동 쌍과부집에서 먹은 소주 한 잔으로 추위를 이겨냈다. 그러다가 발이 아파 잠시 학림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난로가에서 깜박 조는 바람에 신발까지 태워 먹던 아찔한 기억, 젊은 날 초상화의 한 장면이다. 그때 LP판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은 ‘솔베이지의 노래’였다.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구보씨가 되어 대학로를 오르내리던 젊은 날의 보헤미안이 떠 오른다.
군에 가서도 길이 있었다. 비록 출퇴근길이었지만 걷고 싶은 해안길이었다. 진해 북쪽에 양어장 근처가 하숙집이었는데 그곳에서 사관학교까지 10여 키로가 넘는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 30분 정도가 된다. 출퇴근 버스도 있었지만 일부러 자전거를 탔다. 푸른 바다를 끼고 달리는 해안길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진해 시내길도 깨끗한 걸로 유명하다. 외부인이 버스에 내리며 신발을 벗고 내렸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들릴 정도다. 그 길을 3년 동안 자전거에 청춘을 싣고 달렸다.
그러다 봄날 벚꽃이 만개하면 걷기도 했다. 아침 일찍 나서서 10여 키로 길을 걸었던 것이다. 퇴근길에도 자전거가 없으니 걸어야 한다. 퇴근길에는 중간에 학림다방이 있어서 차 한 잔의 여유를 갖기도 했다. 하루에 20키로 왕복, 지금은 꿈도 못 꿀 일이지만 시퍼렇게 젊은 시절 그것은 결코 힘든 일은 아니었다.
대구대 시절 역시 걷기가 생활이었다. 집에서 대명동 학교까지 5키로 쯤 된다. 버스로 가면 4코스 정도였다. 왕복 10키로 그 길을 열심히 걸어 다녔다. 한번은 버스를 탔다가 돈까지 날치기를 당해 버스타기가 더욱 싫었다. 지나는 길에 성당시장이 있어서 장구경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실상 물건 사는 일은 드물지만 장 구경을 하면 나도 몰래 삶에 대한 의욕과 생기가 돋는다. 열심히 장사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삶의 훈기와 열기가 전파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웃기웃, 여기저기 장 구경을 즐겼다. 어쩌면 그 재미로 걸어 다녔는지 모르겠다.
경산 하양으로 학교를 옮긴 다음에도 나의 길걷기는 계속되었다. 학교 근처 문천지라는 둑방길이 있었는데 그 길을 열심히 걸었다. 물론 출퇴근은 버스로 하였지만 틈나는 대로 둑방길을 걸었다. 그 길은 어린 시절에 걷던 왕뎅이길과 비슷해서 더 애정이 갔다. 물론 왕뎅이길보다 훨씬 길었다. 한 바퀴 돌면 한 나절이 걸릴 정도였다.
문천지의 4계는 변함없는 자연의 순환이었다. 계절마다 다르게 펼쳐지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특히 봄이 되면 피어나는 물안개, 수초꽃, 물망초, 둑방 너머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청보리밭, 그 위를 나는 노고지리, 가을하늘을 수놓던 잠자리 떼, 흰 구름, 그 모든 것이 한 폭의 풍경화고 수채화였다. 내가 그림 솜씨가 있어 그대로 화폭에 담았다면 고호의 명화가 탄생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사랑했던 길은 투르게네프 언덕길이었다. 문천지 옆 구릉지에 무덤이 두 개 놓여 있는 언덕길이 있다. 가는 길목에 탱자나무가 있어 참새들이 둥지를 틀고 재잘거린다. 가을에는 노란 황금벌판이 된 논두렁에 코스모스가 수줍게 피어난다. 그 길을 따라 30분쯤 오르면 나만의 비밀의 화원인 ‘투르게네프 언덕’이 나온다. 투르게네프 언덕은 윤동주 시에서 따온 명칭이다. 그 길을 오르내리며 투르게네프가 되고, 윤동주가 되었다. 언덕에 누워 바라보던 가을날의 푸른 하늘, 그 위로 떠가는 구름은 왕자의 성이었고, 청춘의 화원이었다. 그렇게 문천지 둑방길과, 투르게네프 언덕을 오르며 청년교수 시절을 보냈다.
건대에서는 일감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 시내에서 일감호처럼 큰 호수를 품은 대학은 없을 것이다. 일감호는 건대의 축복이다. 면접시 진학 이유를 물으면 호수가 아름다워서라고 답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역시 국문과 학생다운 답이었다. 일감호를 한 바퀴 돌려면 20분 정도 걸린다. 그래서 부담없이 틈나는 대로 일감호를 돌았다. 그런데 나름대로 규칙이 있었다. 돌긴 도는 데 시계방향 반대로 도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살아온 세월을 반추해 보며 내 인생을 돌아보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살아온 시간을 거꾸로 돌기, 그렇게 지난 세월을 일감호에 비춰 보곤 했다.
그리보면 내 인생은 길에서 시작해서 길로 끝날 것 같다. 걷기는 아직도 내 인생의 진행형이다. 오래전에 본 영화지만 영상이 뇌리에 남아 있는 영화가 있다. <길 걷는 사람>이라는 일본영화다. 특별한 줄거리 없이 길 걷는 주인공의 일상만 반복해서 보여주는 다소 지루한 영화였다. 영화기법으로는 한 장면만 오래 비춰주는 롱테이크(long take)였을 것이다.
밥 먹고 잠자는 것 빼고는 영화의 주인공은 걷는 게 일이다. 마땅한 직업이 없으니 생활 형편도 곤란하지만 걷는 데 모든 것을 건 그야말로 워킹 맨(walking man)이었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며 걷는 철학자였다. 그렇게 나이 들고 마침내 길에서 숨을 거둔다. 영화의 주인공 정도는 아니지만 나 역시 걷는 일이 인생길처럼 느껴진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걷는다. 걸어야 생활이 이루어지고 일상이 꾸려진다. 조선 시대 보부상이나 행상꾼들은 두 발로 걸으며 생계를 유지했다. 걷는 것이 삶의 전부고 생활이었던 것이다. 고전이 된 명화 <길> 역시 삶의 길로서 길의 모습을 보여준다. 차력사 잠파노는 보조사 젤소미나와 함께 낡아 빠진 삼륜 오토바이를 끌고 전국을 누비며 생계를 꾸려간다. 길에서 돈을 벌고, 길에서 잠을 잔다. 그야말로 길로 이어지는 인생이요, 삶이었다. 길로 시작한 그들의 인생행로는 마침내 바닷가에서 종지부를 찍는다. 더 이상 갈 길이 없는 바다에서 그들의 인생이 끝나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차마고도를 걷는 행상들도 길이 삶의 터전이다. 험한 산길을 말과 노새에 기댄 채 죽음을 각오하고 걷는다. 빙하와 눈으로 뒤덮인 험준한 산과 계곡을 몇 달씩 걷는 것이다. 그들에겐 오직 살아야 한다는 의지 밖에 없다. 그들에게 차마고도는 사색의 길도, 여행길도 아니다. 오직 먹고 살기 위한 생존의 길일 뿐이다. 그래서 그 길은 더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나는 그들처럼 삶과 생계를 위해서 차마고도 같은 길을 한 번이라도 걸어 본 적이 있는가. 그렇게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 본 적이 있는가 생각해 보면 부끄러움이 앞선다. 차마고도 영상을 보며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느껴지는 이유는 그래서일 것이다. 산다는 것의 준엄함, 생존의 엄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가볍게 산 것이 부끄럽다.
영화 <길>이 크게 성공하자 <길>을 모방한 ‘길영화’가 많이 등장했다. 소위 로드무비(road movie)가 그것이다. 길을 따라가며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길가에 펼쳐진 이국적 풍경을 담아낸다. 서부영화 고전 <역마차>가 그렇고, 일거리를 찾아 떠도는 유랑민들의 삶을 다룬 <분노의 포도>가 그렇다. 1950년대 누벨바그 운동을 주도한 <쌀>, <철도원>같은 영화들도 로드무비다. 서부영화는 태반이 로드무비다.
또한 길을 떠도는 방랑자들을 소재로 한 로드송(road song)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1930년대 만주벌판을 떠돌던 유랑극단을 소재로 한 유랑가다. 조선인들이 개척한 마을을 찾아다니며 만주벌판을 헤매돌던 유랑극단의 슬픔과 한을 유행가로 불렀던 것이다. 백년설의 <유랑극단>, 박향림의 <막간 아가씨>, 김영춘의 <청노새 극단> 등이 대표적이다. 청노새가 끄는 마차에 몸을 싣고 만주벌판을 헤매던 유랑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노래에 담겨 있다.
조선 시대 방랑시인 김삿갓도 길 인생의 표본을 보여준다. 그는 벼슬을 집어 던지고 속세를 떠나고자 했으나 결국은 길거리를 떠돌며 시 한 수에 술 한 잔으로 살아간다. 김삿갓의 표랑은 물론 잠파노의 삶과는 차원이 다르다. 생계보다는 철학과 문학, 낭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김삿갓의 방랑에서 에뜨랑제나 집시 같은 보헤미안 정서(bohemian temper)와 낭만을 읽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생존 자체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삿갓에게 표랑은 시대에 대한 저항이고 풍자였던 것이다. 그것이 그의 존재이유였고, 그러한 삶을 즐기고자 했던 것이다. 시대의식을 보헤미안 정서로 포장한 채 전국을 떠돌며 주유(周遊)를 즐겼던 것이다.
산티아고의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들은 종교적 신념에 의한 것이다. 그리 멀고 험한 길을 그런 신념 없이는 걷기 힘들 것이다. 티벳의 순례자들도 마찬가지다. 목적지인 성지(聖地) 라싸까지 험하고 먼 길을 오체투지(五體投地)로 버텨 내며 걷는 것이다. 가히 신의 경지, 신들린 빙신(憑神) 상태가 아니면 감히 흉내 내기 힘든 일이다.
하이델베르그에 가면 철학자의 길이 있다. 하이델베르그를 가로지르는 넥카 강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좁은 샛길이다. 이 길을 헤겔, 괴테, 야스퍼스,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들이 걸으며 사색에 잠기고 영혼을 불태웠다. 그래서 철학자의 길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철학자가 되는 느낌을 갖는다. 13세기에 지어진 고성과 조용히 흐르는 사색의 강 넥카, 그리고 대학도시 하이델베르그가 주는 고풍스럽고 아카데믹한 아우라(분위기, aura) 때문일 것이다. 황태자도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공부하며, 술 마시며 청춘을 구가했다. 그렇게 소설 <황태자의 첫사랑>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황태자가 외치던 ‘Trinken! Liebien! Studiren!’(마시자, 사랑하자, 공부하자) 하고 외치던 황태자의 목소리가 그곳에 가면 생생히 들려온다.
길에서 길을 찾는 일은 도를 닦는 수행자들의 일이기도 했다. 길은 한자로 도(道)라 표기한다. ‘도를 닦는다’ 할 때 바로 그 도다. 도는 걷는 길이면서 마음의 길, 곧 수양과 득도의 길이기도 하다. 나를 알고 깨우치는 길, 그 길이 도로 이어지는 것이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도반(道伴)도 함께 도를 찾아 길을 나서는 동행을 의미한다. 그래서 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지 목적지를 향해 걷는 보행이 아니라 자기를 찾는 구원의 길, 수신(修身)의 길이라는 뜻을 갖는다.
최인호의 장편 <길 없는 길>(1988)은 바로 이러한 득도와 개오(開悟)의 길을 제시한 작품이다. 주인공이 경허스님과의 선문답을 통하여 구도의 길을 찾아가는 먼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문재상의 <길에서 길을 찾다>(2012)는 신학생의 무전 여행기를 통하여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김순신의 <길에서 길을 찾다>(2014)는 수필도 마찬가지다. <길에서 길을 묻다>는 비슷한 내용의 책도 많이 나왔다. 김영현, 문무일의 수필집이 있고, 참꽃문학회에서 펴낸 동명의 시집도 있다. 낙산사에 가면 경내에 ‘길에서 길을 묻다’는 표지석이 서 있어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모두 길에서 자기가 걸어야 할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내가 소년시절 걷는 길이 아니라 인생의 길을 처음 만난 것은 프루스트(R.Frost)의 시 <가지 않은 길>에서였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아름다운 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의 자취가 적어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생각했지요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프루스트, <가지 않은 길>
프루스트는 숲속에 난 두 갈래 길 중에서 풀이 많고, 사람의 자취가 적은 길을 택했다. 아마도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 새로운 길을 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훗날 그 길이 자기 인생에서 최선의 길이었을까 회의가 든다. 그래서 한숨을 쉬며 이야기 한다. 그 길을 택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프루스트가 다른 길을 택했다면 어찌 됐을까. 그 길 역시 후회와 한숨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기가 택한 길은 그것이 운명의 길이고, 그 길을 어떻게 가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곧 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그 길을 가느냐가 자기 인생을 좌우할 것이다.
내가 이 시를 교과서에서 처음 읽으며 과연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 내 길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고민에 빠졌다. 살아가면서 길에서 길을 잃을 때에도 이 시구는 성경말씀처럼 떠오르곤 했다. 하지만 정답은 없다. 프루스트도 자기가 택한 길에서 한숨을 내쉬지 않았는가. 하지만 길에서 길을 잃고 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을 때도 길을 찾아야 한다. 길은 내 자신이 찾아야 하고 그것이 최선의 길이기 때문이다. ‘도(길)를 묻는 사람도 도를 모르고, 도에 답하는 사람도 도를 모른다’는 장자의 말처럼(<지북유(知北遊>) 최선의 도는 없는 것이다. 오직 자기가 찾아 가는 길이 최선의 길인 것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영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서울대 대학원 국문과 문학 석사, 박사 학위 취득해군사관학교, 대구대학교, 건국대학교 교수 역임연변과기대 교환 교수현재 건국대 국문과 명예교수, 문학평론가우리말글학회, 겨레어문학회 회장인문과학연구소 소장교육부 교육과정 심의위원, 국어교재 심의위원학력고사 출제위원건국학술대상<시와 시학> 평론상<문학과 의식> 평론상『개화기 시가의 장르 연구』 『한국 현대시 논고』 『현대시론』 『김소월』 『박인환』 『한국 현대시 정수』 『한국 현대시의 좌표』 『한국 개화기 시가 연구』 『말의 힘, 시의 힘』 『21세기 한국시의 지평』 『현대시의 사회시학적 연구』 『문학의 이론』 『한국 시가의 재조명』 『독서』 『문학체험과 감상』 『한국 현대시 양식론』 『한국 대표시 재조명』 『시간의 향기』 『한국 가요 사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