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큰글자도서 소개리더스원의 큰글자도서는 글자가 작아 독서에 어려움을 겪는 모든 분들에게 편안한 독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글자 크기’와 ‘줄 간격’을 일반 단행본보다 ‘120%~150%’ 확대한 책입니다.
시력이 좋지 않거나 글자가 작아 답답함을 느끼는 분들에게 책 읽기의 즐거움을 되찾아 드리고자 합니다.
★ 《해방의 밤》 은유 작가 추천
"법이 당신 편이 아닌 순간에도
여전히 당신 편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차가운 법이 미처 헤아리지 못한 빈틈을
사람의 온기로 채워 간 682일의 기록리어카를 끌며 폐지 줍는 할머니가 있었다. 어느 날 그 리어카로 비싼 자동차를 긁어 재판까지 가게 됐다. 판사가 제발 묻는 말에만 답하라고 했지만, 할머니는 타령을 하듯 그간 본인의 고단한 삶을 다 토해 냈다. 급기야 상대측 변호사에게 거짓말쟁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참다못한 판사도 같이 소리쳤다. "자꾸 이렇게 소란 피우면 감치할 겁니다!" 할머니가 그게 뭐냐고 물었다. 어차피 설명해 봤자 말만 길어진다고 생각한 판사는 이렇게 답했다. "엄청 무서운 거예요!" 심각한 분위기와 그렇지 못한 대사에 웃음이 터지려는 그때, 할머니가 다시 물었다. "얼마나 무서운 거예요? 돈 드는 거예요?"
사회복지사의 요청으로 엉겁결에 할머니의 재판에 동행한 변호사는 그 말을 듣고 10톤 화물 트럭에 실려 있던 돌들이 가슴 위로 떨어지는 듯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할머니를 모시고 법정에서 나왔다.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난 터라 밥이라도 들고 가시라고 하자, 집에 치매 걸린 할아버지를 묶어 놓고 와서 얼른 가 봐야 된다고 하신다. 할아버지가 젊어서 바람피운 일이나, 늙어서 아픈 것도 다 감당할 수 있는데, 날씨가 궂은 날에 폐지를 줍지 못하면 벌이가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할아버지를 미워하게 만드는 돈이 할머니는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고 한다. 평생 게으름이나 낭비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게 살아왔음에도,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돈의 무게에 짓눌려 있을 삶은 어떻게 감당해 내야 하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할머니를 집 앞까지 모셔다 드리고, 식사라도 챙기시라고 수중에 있는 현금을 몽땅 털어, 한사코 거절하시는 손에 쥐여 드렸다. 저희 할머니가 생각나서 그런다고, 손녀가 주는 용돈이라 생각하고 맛있는 고기반찬 사 드시라고 말씀드리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구청 화장실 앞 한 평짜리 법률 상담소
그곳에서 만난 찡하고 짠한 사람과 세상 이야기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는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들어 주는 변호사가 있다. 법이라고 하면 어렵고 딱딱하게만 느껴지고, 살면서 변호사를 만날 일 같은 건 없기를 바라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닥치는 불행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런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구하려고 법이 있다지만, 안타깝게도 그 법조차 내 편이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그럴 때 법보다 사람 편에 서서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친구 같은 변호사가 곁에 있다면 어떨까. 당장 명쾌한 법적 해결책을 주지 못한다 해도, 내 억울한 처지와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한 심정을 헤아려 주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지금은 신림동이라고 불리는 난곡 달동네에서 나고 자란 천수이 변호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달동네 판자촌에서 사회운동에 헌신한 부모님과 달리, 그는 누구보다 가난이 싫어서 돈 잘 버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또다시 어려운 사람들 곁에 머물며 그들을 돕는 자리에 가게 됐다. 구청 복도 화장실 앞 한 평짜리 무료 법률 상담소가 그곳이다.
공짜 변호사를 찾아오는 의뢰인들은 노숙자, 야쿠르트 배달 아주머니, 일용직 건설 노동자, 유언장을 쓰려면 한글부터 배워야 하는 할머니 등 가장 법의 보호가 필요하면서도 그 보호를 받지 못하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때로는 돕고 싶어도 도울 방법이 없어서 그저 손 한번 지그시 잡아 드리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의뢰인들의 무력한 모습에서 어린 시절 이웃들의 모습이 겹쳐 보일 때는 저도 모르게 화가 나고, 별 도움도 못 되는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맞나 고민이 깊었다. '의뢰인들이 나보다 더 훌륭한 변호사를 만났다면 더 좋은 답을 얻어 가지 않았을까?'
그런데 상담을 거듭할수록 이 자리는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들어 주는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뢰인들은 속 시원한 답을 원해서만 그를 찾는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변호사의 돈이 되는 백 마디 조언보다 한 사람의 진심 어린 관심이 더 절실하고, 그것만으로 힘이 날 때가 있다.
난생처음 듣는 별의별 사연들 앞에서 의뢰인보다 더 황망해하던 초짜 변호사를 누구의 어떤 이야기에도 맞장구치며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운 건 오히려 의뢰인들이었다. 학교나 책에서는 결코 배우지 못할 인생 경험을 한 보따리씩 풀어놓고 가는 이들 덕분에, 다른 변호사들이 의뢰인에게 답을 줄 때, 저자는 의뢰인에게서 자기 인생의 답을 배웠다. 그렇게 사람 사이에서 사랑을 배우고 사람이 되어 가는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
'출생의 비밀'부터 전세 사기와 보이스피싱까지
평범한 사람들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사연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관심을 두는 것만으로도
이미 세상은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뜰 준비가 된다."아동 추행범으로 몰려 교도소에 다녀오니 가족들은 다 이사가 버리고 어디 하나 자신을 받아 주는 곳이 없어 노숙자가 되었다는 남자. 그는 억울하게 옥살이한 것은 보상받을 수 없더라도 가족은 되찾고 싶다며 변호사를 찾아왔다.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임신한 몸으로 집을 뛰쳐나와 과거를 숨기고 재혼한 여자. 뱃속의 아이를 차마 입양 보낼 수 없어 현재 남편의 아이인 양 키운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가족관계증명서에 남아 있는 50년 전의 흔적을 지울 수 있는지 묻는다. 괴롭더라도 자신만 입을 다물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타다 보행자와 부딪쳐 상해를 입힌 의뢰인은 지체 장애가 있다. 기초수급 70만 원으로 살아가는 그에게 400만 원의 벌금과 2000만 원의 민사소송 보상금을 마련할 돈이 있을 리 없다. 노역이라도 해서 벌금을 내고 피해를 보상하고 싶지만, 불편한 몸을 그렇게 죗값을 치르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벌금을 감경해 주십사 재판부에 선처를 구하게 된 이유다.
사람은 이름 따라간다더니, 어려서부터 '수이한'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던 저자는 변호사가 되어서도 기막히고 억울하고 엉뚱한 사연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긴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출생의 비밀'부터 보이스피싱, 깡통주택 전세 사기, 사생활 동영상 유포, 명예훼손, 파산/회생 등 평범한 사람들이 살면서 겪을 법한 불운할 일들까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언뜻 흔하고 별것 아닌 일처럼 보이는 사연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드라마 같지 않은 인생이 없다. 법적으로는 판단이 분명하나, 인간적으로는 잘잘못을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상황도 많다. 배가 고파서 마트에서 즉석밥과 라면을 훔친 현대판 장발장 같은 어르신, 살아서 평생 가족들에게 짐만 된 아버지의 장례 치르기를 거부하는 자식을 뭐라고 나무랄 수 있을까. 법은 옳고 그름과 유무죄를 냉정하게 가르지만, 사람 사는 세상은 그렇게 무 자르듯 나뉘지 않는다. 알고 보면 저마다 안타깝고 어찌할 수 없는 속사정이 있다. 그러니 내가 그 삶을 살아보지 않고는 어떤 것도, 그 누구의 삶도 쉽게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법이 아무리 잘나고 똑똑해도 세상만사를 해결해 줄 수는 없기에 법 또한 완벽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2006년 대전고등법원의 한 판결문에서는 법을 기성복에 비유했다. 아무리 다양한 치수의 옷을 만들어 두어도 모든 사람이 그 옷에 맞을 리 없는 것처럼, 법의 이성에도 빈틈이 있다면 그 틈을 메우는 것은 사람의 사랑이라고 저자는 믿는다.
사랑이라고 해서 그리 거창하고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다. 우리 인생에 시린 겨울이 닥칠 때, 저자가 의뢰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듯 서로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귀 기울이는 것, 힘들어 보이는 누군가에게 먼저 손 내밀어 주기도 하고, 누군가가 내민 손을 붙잡기도 하며 그 계절을 무사히 헤쳐 나가는 것이다. 저자의 믿음처럼, 이 책에는 고단하고 팍팍한 사연들 사이로 곳곳에 따스한 온기가 가득하다. 의뢰인들이 수임료 대신 놓고 간, 갓 쪄 낸 고구마와 손수 튀긴 오징어 튀김처럼 말이다.

변호사의 ‘호(護)’자는 ‘말씀 언(言)’과 ‘자 확(蒦)’이 결합한 것으로, ‘말로 붙잡다’라는 의미다. 안타까운 상황에 놓인 사람을 말로 보살피고 돕는 것이 변호사다. 내 인생도 제대로 책임지지 못했던 츄리닝 수험생이 타인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여 그들을 이해하고 보살피고 도와야 하는 정장 입는 변호사가 됐다. 이 폭풍 같은 변화가 아직도 꿈만 같다. 내 앞의 작은 서류봉투 속에 담긴 의뢰인 한 분 한 분 인생의 무게를 느끼며, 변화는 있어도 변함없는 사람이 되길 기도했다.
영화의 도입부에 “열 명의 죄인을 놓친다 하더라도 죄 없는 한 사람을 벌하지 말지어다”라는 글귀가 나온다. 진실이 힘이 없어 사실과 균형을 잃었다면, 진실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변호사다. 소송이 끝나면 다른 변호사들의 역할은 끝이 나지만, 내 역할은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이 아닐까. 누구라도 억울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비록 법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한 번쯤 귀를 기울여 주고 싶다. 사실과 다른 진실이 있을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