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특집 한국교회의 성만찬 이해와 실천“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마 11:19) 이는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말이다. 자신을 세리와 죄인과 구별하여 거룩하다고 여긴 권력자들에게 예수의 차별 없는 환대와 사랑은 불쾌하고 불편한 것이었을 터이다. 예수는 아무런 조건 없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이들과 기꺼이 식탁을 나누셨다. 그것이 바로 성만찬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과연 이 성만찬의 정신을 얼마나 깊이 묵상하고 있는가? 의례화된 성만찬이 삶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판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에 「기독교사상」 7월호는 “한국교회의 성만찬 이해와 실천”을 특집 주제로 삼았다. 첫 번째 글에서는 성만찬의 목회적 의미와 함께 그 준비와 실행 등 실제적인 방법을 구체적으로 다루었고, 두 번째 글에서는 의례로서의 성만찬이 단순한 상징을 넘어 어떻게 일상 속 신앙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를 고찰하였다. 세 번째 글에서는 교파마다 성만찬에 대한 이해와 실천이 어떻게 다른지를 살피며 각 전통의 신학적 지향을 입체적으로 조명하였고, 마지막 글에서는 디너처치의 유래와 한국에서의 전개 양상을 소개하며, 그 의미와 장점, 전통적인 성찬식과의 조화 가능성을 함께 성찰하였다.
종교 의례는 시간이 흐르며 관습화되고 상징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본래 의미를 되새기지 않는다면, 의례는 껍데기만 남은 형식으로 전락할 수 있다. 더구나 교리의 차이에 몰두한 나머지, 자기 전통만이 정통이라 주장하는 태도가 과연 예수의 성만찬 정신과 복음의 본질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돌아볼 일이다. 이번 특집이 성만찬의 본래 의미를 깊이 되새기며, 일상 속 신앙과의 연결하고, 나아가 새로운 성만찬 실천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특집 요약
1. 성만찬 : 준비와 실행최주훈 목사(중앙루터교회)는 이 글에서 성만찬의 목회적 의미를 살피는 동시에, 이를 어떻게 준비하고 실행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필자는 떡과 포도주의 준비부터 예식의 순서, 참여 자격과 방식, 어린이 성만찬 문제까지 다양한 쟁점을 폭넓게 다루며, 특히 ‘분찬’을 설명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분찬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희생에 참여하고 그와 하나 되는 체험으로, 개인적 신앙을 넘어 공동체적 연합을 이루는 시간이다. 루터교회에서는 신자들이 성찬대 앞으로 나아와 집례자에게 직접 떡과 잔을 받는데, 이 일대일 분찬 방식은 목회적으로 큰 유익이 있다. 짧은 순간이지만 성도의 눈빛과 떨림을 통해 목회자는 누가 위로와 기도가 필요한지를 직감하게 된다.
필자는 어린이 성만찬에 대한 교단별 규정을 소개하면서, 어린이도 하나님 가족의 소중한 일원으로 환영받아야 하므로 이에 대한 지혜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전한다. 필자의 교회에서는 초등학교 졸업 전까지는 어린이를 위해 따로 기도하고, 떡을 부모에게 전달해 아이와 함께 나누는 방식으로 성만찬을 진행한다. 끝으로 필자는 성만찬의 깊은 의미를 교회 공동체가 함께 배우고, 그 방식과 빈도, 자격에 대해 함께 논의하고 결정할 것을 제안한다. 성만찬은 모든 이를 위한 거룩한 식탁이며, 주님이 우리를 위한 밥이 되어주셨다는 복음 안에서 우리는 힘과 위로를 얻게 된다는 말로 글을 맺는다.
2. 성만찬이 생동감을 지니려면안선희 교수(이화여자대학교)는 이 글에서 의례로서의 성만찬의 의미를 설명한 뒤, 그것이 단순한 상징을 넘어 일상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는지를 고찰한다. 먼저 필자는 성만찬이 단순한 종교 의례가 아니라, 초월적 경건을 일상으로 중계하는 통로임을 강조한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와의 식탁 교제를 기억하게 하며, 일상의 식사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체현하는 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오늘날 성만찬이 ‘상징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진단한다. 반복되는 의례가 감동을 잃고, 성만찬의 상징이 신자들의 실제 삶과 연결되지 못한 채 형식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필자는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첫째는 과거의 따뜻한 식사 경험을 통해 성만찬에 감정을 이입하도록 돕는 ‘경험의 유비’, 둘째는 일상의 식탁에서도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하게 하는 ‘성사적 투명성’이다. 이러한 접근은 성만찬을 살아 있는 신앙의 행위로 회복하는 데 기여한다.
나아가 필자는 성만찬을 ‘하나님 나라의 리허설’로, 일상을 그에 따른 ‘퍼포먼스’로 해석하며 둘 사이의 유기적 연결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성만찬이 단지 예배 안에 머무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정의와 평등, 환대와 나눔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식탁 질서를 구현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말로 글을 마무리한다.
3. 성만찬은 교파마다 어떤 관습으로 이루어지는가손정명 수녀(선한목자예수수녀회)는 이 글에서 성만찬에 대한 이해와 실천이 교파마다 어떻게 다른지를 살피며, 각 전통이 지닌 신학적 지향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가톨릭과 정교회는 ‘실체변화’ 또는 ‘성변화’를 통해 그리스도의 실재적 현존을 강조하며, 루터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 안에 ‘함께’ 임재한다는 공재설을 따른다. 칼뱅은 영적 임재를, 츠빙글리는 상징적 이해를 주장하며, 성공회는 ‘성사적 현존설’이라는 중도적 입장을, 구세군은 성례를 삶으로 실천하는 ‘성례전적 삶’을 강조한다. 성찬례 집전자, 예식의 빈도, 성체 보관 방식, 영성체 대상 등 구체적 실행 방식에서도 차이가 뚜렷하다.
그러나 필자는 단지 교리적 차이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함으로써 성만찬을 통한 일치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특히 루터교와 가톨릭 간의 대화 문헌인 『갈등에서 사귐으로』에서 확인되는 ‘기억’ 개념에 대한 해석은 주목할 만한 진전이다. 성만찬은 단순한 과거 사건의 재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현재화하고 미래를 소망하게 하는 은총의 식탁이다. 필자는 정교회의 시간 이해나 성공회의 실천적 기억 등, 성만찬에 담긴 ‘오늘’의 감각이 신자의 삶과 예배를 더욱 깊이 연결해준다고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오늘날의 갈라진 교회가 성만찬을 통해 영적 일치를 향해 나아가기를 기대하며 글을 맺는다.
4. 디너처치(Dinner Church) : 사귐과 나눔, 그 본래의 교회안덕원 교수(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는 이 글에서 디너처치의 유래와 한국에서의 전개 양상을 간략하게 소개한 뒤, 디너처치의 의미와 장점, 그리고 전통적인 성찬식과의 조화 가능성에 대해 성찰한다. 필자는 예수의 사역과 초대교회의 원형에서 디너처치의 기원을 찾는다. 예수는 가나의 혼인잔치, 세리와 죄인과의 식사 등을 통해 식탁 교제를 복음의 본질로 드러내셨고, 초대교회 역시 식탁을 중심으로 교제와 나눔, 환대를 실천하며 복음을 삶으로 살아냈다.
디너처치는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재조명된 새로운 교회 운동으로, 전통적인 예배 형식에서 벗어나 함께 식사를 나누며, 찬양과 말씀, 기도를 엮어가는 ‘식탁 중심’의 예배 공동체다. 필자는 국내외 다양한 디너처치 공동체를 언급하며, 이들이 저녁 식사를 통해 낯선 이들을 환대하고, 수평적 관계 안에서 신앙을 나누는 새로운 실천을 이어가고 있다고 전한다. 물론 디너처치가 전통적인 성찬식을 대체할 수 있는지는 신학적 논의가 필요한 주제지만, 그 시도는 성만찬의 본래 정신인 차별 없는 환대와 은혜의 식탁을 삶의 자리에서 구현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필자는 디너처치를 교회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작지만 의미 있는 실천으로 평가하며, 관계와 환대, 공동체 회복이라는 오래된 가치를 다시 붙드는 ‘조용한 길잡이’가 되기를 바라며 글을 맺는다.
* 주목할 만한 글 – 황푸하, “투쟁과 예배, 골목에서 피어난 거룩의 향기”새로 시작한 꼭지 ‘청년 그리스도인, 현장을 말하다’를 여는 글이다. 이 꼭지는 신학과 목회의 양상이 점점 다변화되는 상황에서 다양한 선교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목회자/평신도들의 열정과 참신한 시도를 소개하는 코너이다. 첫 번째 필자인 황푸하 목사는 타자를 향한 따뜻한 환대와 사랑으로 철거민들의 삶과 함께하고 있으며, 소외된 한 사람이라도 살리고자 하는 그의 선교는 쫓겨난 이들의 삶의 현장에서 투쟁과 예배로 구현된다. 그 생생한 사역기를 이번 호에 담았다. 그의 삶의 현장을 따라가며 목회/선교에 대한 새로운 도전과 자극을 얻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