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살아 있는 사물들과 조응하면서 함께 자라는 과정
생성하고 변형하는 세계 속에서 계속 나아가는 생명의 행진연인들의 다정한 시선처럼 서로가 구별되지 않을 때까지
감응과 물질이 씨줄과 날줄로 서로를 휘감는 혼합이야말로 만들기의 본질이다.
—「제7장 도주하는 신체들」중에서
『만들기』는 인류학자 팀 잉골드가 2013년에 출간한 『Making』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이른바 ‘선의 인류학 3부작’이라고 불리는 세 권의 저술 중에서 『라인스(Lines)』(2007)와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Life of Lines)』(2015) 사이에 펴낸 두 번째 저술이다.
이 책은 물질 세계를 고정된 것이 아닌 생성하고 변형하는 움직임으로 인식하도록 이끈다. 이때 인간 존재 역시 다른 존재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사물’로서 세계의 내부에서 사물들과 조응하며 성장한다는 점을 잉골드는 강조한다.
잉골드는 이 책에서 이론가와 실천가를 대립적으로 구분하는 사고방식에 반대하며 이론과 실천을 통합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통합된 관점에 따르면 ‘앎’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앎’은 내부로부터 사물과 함께 조응하는 방식으로 성장하여 비로소 우리의 일부가 된다. 잉골드는 이러한 앎의 방식은 예술과 건축에서 그러하며, 인류학과 고고학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아래는 각 장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한 것이다.
제1장 내부로부터 알기“당신이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으로 성장해야 하고, 그것이 당신 안에서 성장하게 해서 당신의 일부가 되도록 해야 한다.”
앎은 외부에서 주어지는가? 내부에서 자라나는가? 잉골드는 외부의 초월적 위치에서 대상화를 통해 아는 것이 아닌 세계의 내부에 참여하고 경험함으로써 아는 방식에 주목한다. 진정한 앎의 방식을 배우기 위해서는 ‘~에 대해’ 배우는 방식을 버리고 ‘~와 함께’ 배우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인류학에서의 ‘민족지’ 방법을 비판한다. 회고적 서술로 환원하는 민족지의 기록 방법에 반대하면서, 그 대신 참여적이고 변환적인 실천의 방식으로 ‘참여 관찰’을 옹호한다.
제2장 생명의 물질“이것은 사물을 다시 생명으로 되돌리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흔히 만들기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달성하고자 하는 아이디어를 머릿속에 넣고 그걸 재료에 투영하여 마침내 재료가 의도한 형태를 갖추는 순간 제작이 ‘완성’됐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는 질료형상론의 영향을 받은 사고방식이다.
잉골드는 이러한 인식에 반대하며 만들기의 본질은 투영을 통해 인공물의 재료에 정신을 부과하는 일이 아니며, 실천자와 물질이 생동하는 흐름을 따르면서 형태를 이끌어내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잉골드는 질료형상론을 비판하면서 질베르 시몽동의 개체화 이론을 참조하여 형태발생론을 전개한다. 물질문화 연구에서 말해지는 ‘물질성’ 개념에 대한 비판도 포함된다.
제3장 주먹도끼 만들기에 관하여“깨지기 쉬운 부싯돌은 숙련된 석기 제작자의 손 안에서 액체처럼 흐르게 되고 흐름의 소용돌이로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모든 잠재적 타격혹은 회오리가 되어 이로부터 파단면이 파도처럼 잔물결을 이루며 퍼져 나간다. 석기 제작자는 격지를 떼는 리드미컬한 타격 운동을 하며 이 흐름을 따라간다.”
주먹도끼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 문제는 오랫동안 ‘선사시대의 가장 기이한 수수께끼’로 여겨졌으며, 그동안 고고학은 그 제작 방법에 대해 다양한 학설을 내놓았다. 전통적 가정은 주먹도끼의 대칭적 형태를 만들려는 디자인이 ‘미리’ 있었고 그에 따라 도끼가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잉골드는 주먹도끼 제작을 둘러싼 여러 학설들을 검토하면서 사물을 창조하는 활동의 본질을 재검토한다. 이로써 석기와 같은 도구 역시 질료와 형상의 관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힘과 물질의 관계를 통해, 즉 조응의 활동으로 만들어졌음을 주장한다.
제4장 집 짓기에 관하여“중세 건물은 바로 그 ‘돌보는’ 과정, 즉 숙련된 공예술의 지성에서 디자인되었다. 우리는 건물을 지은 석공에 대해, 그들이 그리면서 디자인했을 뿐만 아니라 디자인하면서 그렸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디자인은 드로잉처럼 작업의 과정이었지 정신의 투영이 아니었다.”
중세 대성당은 사전에 설계된 디자인의 산물이었을까? 중세 석공들 역시 도면을 그렸다는 증거가 있지만, 그들이 그린 도면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건축 설계도와 같은 도면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드로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드로잉에는 현장에서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간 과정이 반영돼 있다. 따라서 중세 시대의 대성당 같은 거대한 규모의 건물 역시 “어떤 이름 모를 건축가의 사변적 비전을 장엄하게 완성한 것”이 아니라, 현장의 여러 석공과 일꾼들이 수시로 가졌던 “의사소통 왕래”와 “엉성한 실천”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이 확인된다.
제5장 눈뜬 시계공“디자인이란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실행 이전에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 장은 디자인을 둘러싼 논쟁을 더 깊이 탐구한다. 디자인은 무엇을 의미할까? 디자인은 더 이상 만들기와 구분될 수 없는 것일까? 디자인과 만들기는 단지 같은 것을 나타내는 두 단어일 뿐일까?
잉골드는 디자인이 완결성이나 종결을 추구하기보다는 희망이나 꿈을 다루면서 열린 결말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계획이나 예측이 아닌 미래에 대한 기대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희망과 꿈을 뒤쫓고 있어야만 창조적 상상력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제6장 둥근 둔덕과 대지 하늘“둔덕에서 과거는 삶의 지속적인 연속성을 위한 토대로서 모여든다. 반면 기념물에서 과거는 뒤로 밀려나고 오직 유물로서만 남는다.”
둥근 둔덕은 어떻게 생겨날까? 대지와 하늘은 어떻게 만나고 뒤섞이는가? 나무는 어떻게 자라는가? 바람은 숲속에서 무엇을 하는가? 환경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잉골드는 환경이란 “대상의 환경이 결코 아니다”라고 말한다. 환경은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라 부풀어오르고 성장하고 감싸고 펼쳐지고 흐르는 환경이다. 즉 환경은 생생한 에너지와 힘으로 자신을 만들어나간다. 때문에 잉골드는 우리가 설령 ‘대상의 세계’를 점유(occupy)한다 할지라도 그 점유자에게 세계는 등 돌린 모습으로만 보일 것이라 말한다. 세계의 움직임과 지속적인 형성에 동참하는 방식. 잉골드는 그것을 주거(inhabit)라고 표현한다.
제7장 도주하는 신체들“장인이 물질로부터 사고하듯이, 무용수는 신체로부터 사고한다. 생동하며 역동적으로 구성되는 신체 속에서 인격과 유기체는 하나다. 신체는 유기체-인격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신체 또한 사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사람들과 사물들의 관계를 논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또한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신체란 무엇일까? 잉골드는 신체란 활동이 격정적으로 펼쳐지는 소란 자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신체가 무엇이냐고 묻는 상황에 다시 주목한다. 신체에 관해 사고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신체로부터 사고한다. 신체는 신체화의 대상이 아니라 활성화하는 무엇이다.
잉골드는 고정된 신체화를 거부하는 활성화의 논의를 통해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은 물론 인격과 유기체의 이분법도 해체하고자 한다. 나아가 ‘객체의 행위성’을 논하는 현대 이론들을 비판한다. ‘행위성’은 사물을 ‘객체’로 격하시키는 잘못된 전제에 기반한 사고로서, 객체가 없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행위성이 아닌 단지 행위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잉골드는 하나의 예로서 연날리기를 설명한다. 연이 둥실 떠올라 하늘에서 춤추기 위해서는 연 날리는 사람, 연, 공기의 작용이 필요하다. 이때 인간만이 주체이고 연과 공기가 객체라면, 연과 공기에는 ‘행위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듯 공기란 스스로 행위하지 행위성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연도 공기의 행위 덕분에 움직이지 자신의 행위성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때문에 잉골드는 연날리기가 ‘행위성의 춤’일 수 없으며, 이는 ‘행위의 춤’이라고 말한다. 연의 비행은 사람의 행위, 연의 행위, 공기의 행위가 조응하며 활성의 춤을 추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객체는 없다.
제8장 손으로 말하다“한마디로 손은 말할 수 있다. 손은 과제를 수행하는 데에서 그 진행조건에 대한 세심한 주의력으로도 말할 수 있으며, 또 손이 만들어내는 동작과 [재료에 흔적을 남기는] 기술적 행위로도 말할 수 있다.”
손은 어떻게 진화했을까? 고고학자 앙드레 르루아그랑이 『행위와 말』에서 설명하길, 과거 인간이 어느 순간 사회생활과 상징문화의 영역에 진입하면서 손과 얼굴의 관계가 재설정되었는데, 손은 기술적 운영을, 얼굴은 언어와 발화의 운영을 맡는 쪽으로 진화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잉골드는 여기서 만든다는 것은 즉 대화하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그렇다면 만들기를 수행하는 손은 르루아그랑의 말대로 기술을 운영하는 것일까? 이 장에서 잉골드는 손이 말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눈이 시각적이고 합리적인 기관인 반면 손은 촉각적이며 감응적으로 조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잉골드는 손의 퇴행에 맞서 손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하는 손이 그리는 선(line)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장으로 이어진다.
제9장 선을 그리다 “말하는 그리기는 이미지가 아니며, 이미지의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몸짓의 흔적이다.”
앞서 논의한 대로 제작 과정에서 물질과 교류하는 손의 역할은 다양하다. 손은 말하는 손이자 느끼는 손이자 그리는 손이다. 이 장에서는 그리는 손이 하는 일을 살펴본다.
손이 하는 일 중 하나로 ‘말하는 방식으로서의 그리기’가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손으로 그린 모든 선은 신체 동작의 흔적이 되기 때문이다. 신체동작적인 선은 곧 말하는 그리기의 선이다. 말하는 그리기란 마치 음악 연주와도 같다. 첼로 연주를 예로 들면, 활 털을 현에 접촉해 선율을 자아내는 것, 이것은 연필로 종이 위에 드로잉의 자취를 새기는 일과 마찬가지로 말하는 그리기 행위다. 이 같은 사례는 고고학자의 발굴 작업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고고학자가 모종삽으로 발굴 현장의 단면을 감각하며 따를 때 이 또한 말하는 그리기와 같다. 건물 짓기에서도 마찬가지다. 건설자가 삽과 같은 건설 도구로 벽과 통로를 만들 때 그의 손은 말하는 그리기를 행하는 것과 다름없다.
손이 수행하는 말하는 그리기를 검토한 후 잉골드는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선의 본성과 특질을 검토한다. ‘통합되고 일관된 사고’를 지향하는 직선형 사람들의 방식에 견주며 잉골드가 더욱 주목하는 것은 구불구불한 선을 따라 걷는 당나귀의 경로이다. 잉골드는 우리도 직선의 폭주에서 벗어나 자신의 속도대로 자기 생을 발견하며 길을 따라 나아가는 당나귀의 행로를 따르자고 말한다.

스스로 알아라! 이는 40여 년 전 핀란드 북동부 사미족(Saami) 사람들 사이에서 초보 현장연구자로 있던 내가 실용적인 작업들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몰라 막막해하고 있을 때 나의 연구참여자들이 종종 유일하게 해주었던 조언이다.
당신이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으로 성장해야 하고, 그것이 당신 안에서 성장하게 해서 당신의 일부가 되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