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청소년기 정체성, 우정, 가족에 대한 섬세한 성찰
같은 이름, 다른 세계 ‘강동수들’
같은 이름, 다른 가치관을 가진 두 소년의 특별한 성장 이야기를 담은 소설 『강동수들』.
이 책은 조용하고 평범하게 지내기를 원하는 주인공 강동수(‘그냥 강동수’라는 의미로 ‘걍동’이라 불림)'와, 드라마 작가를 꿈꾸며 늘 엉뚱한 말과 행동으로 주목받는 강동수(‘깡이 넘치는 강동수’라는 의미로 ‘깡동’이라 불림)’의 만남을 통해 시작된다.
'깡동'은 자신의 꿈인 드라마 작가를 위해 주인공 모델로 ‘걍동’을 지목하고, 끈질기게 주변을 맴돌며 관찰한다. 처음에는 이런 상황을 불편해하고 거부하던 ‘걍동’은 점차 '깡동'의 진솔한 면모를 알아가게 되면서 마음의 문을 연다. 특히 '깡동'이 가족 문제로 인해 겪는 아픔을 알게 되면서 외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자신의 상처와 엄마에 대한 원망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렇게 두 강동수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각자가 가진 결핍을 채워 나가며 진정한 우정과 성장을 경험한다.
이야기의 마지막, 옥상에서 함께 바다 소리를 들으며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두 강동수의 모습은, 독자들에게 외로움과 상처를 극복하고 진정한 성장을 이루어내는 따뜻한 감동을 선사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잊고 지냈던 가장 순수한 시절의 우정과 성장,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에 대해서도 알 게 한다.
“마음껏 살자, 강동수들아!
너를 온전히 너로 봐주고 믿어주는 사람이 옆에 있잖아.”
강동수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 눈에 띄지 않고, 아무 일도 없이, 그냥 그렇게. 그래서 친구도 적당히만 사귀고, 감정은 조심스럽게 숨기며 하루하루를 조용히 버티듯 살아간다. 그리고 여기 새로 전학 온 또 다른 강동수가 있다. 조용한 강동수와 달리 잘생기고, 엉뚱하고, 호기심 많고, 어디에 있든 튀는 강동수. 그래서 별명도 ‘깡동’이다. ‘깡동’ 때문에 졸지에 강동수는 ‘그냥 강동수’라서 ‘걍동’이 되어버렸다.
드라마 작가를 꿈꾸는 ‘깡동’은 자기 삶을 하나의 극본처럼 연출하고, 하필이면 같은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걍동’의 곁을 맴돈다. 매일 교실을 찾아와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포스트잇을 붙이고, 드라마 등장인물처럼 말하고,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며 동수의 조용한 세계에 발을 들인다. 정반대의 성격상 사사건건 충돌하고 부딪칠 수밖에 없지만 그런 과정에서 두 ‘강동수들’은 서로에게 서서히 스며든다. 도망치고 싶은 가족 이야기, 마주하기 두려운 자기 자신, 다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마음의 자국들. 그 모든 것을 조금씩 들키면서, 둘은 서로를 닮아가기 시작한다.
이름만 같았던 두 사람이 마침내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이 소설은 관계의 힘과 변화의 가능성을 믿게 만든다. 강동수와 강동수가 서로의 결핍을 발견하고, 그 결핍을 조롱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아주 조금씩—서투르지만 진심으로—건드리는 과정, 이 어긋난 손짓과 미숙한 대화 속에 십대가 가진 고유의 생채기와 감수성이 담긴다.
그러나『강동수들』은 감정의 섬세한 떨림을 건드리면서도, 과잉된 서정성에 기대지 않는다. 오히려 장면마다 단단한 유머, 대사마다 생생한 생활감, 그리고 인물 간의 거리감을 정확히 조율하면서 한 편의 잘 쓰인 드라마처럼 완결된다.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결국은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이들의 관계는, 청소년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갈등을 경쾌하고도 섬세하게 그려내면서 낙인과 편견, 소외와 우정을 넘나드는 10대의 현실을 경쾌하면서도 진지하게 포착한다.
『강동수들』은 동명이인이라는 설정을 통해 동명이인의 만남이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고, 두 강동수들이 서로의 세계를 발견해가는 이야기이자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숨겨진 또 다른 '나'를 만나는 따뜻한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야, 강동수. 왠지 우리 자주 볼 것 같지 않냐? 내 이름을 내가 부르니까 기분이 좀 이상하네. 쨌든, 앞으로 자주 볼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간다. 다음에 또 보자, 친구!”
원하지도 않는 반 애들의 관심을 끈 게 못마땅한 나와 달리, 이런 상황을 즐기는 듯 녀석은 마치 드라마 예고편처럼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고는 유유히 교실을 나갔다.
뭇시선을 끄는 강동수는 깡 빼면 시체라는 의미로 줄여서 ‘깡동’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강동수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순간 나는 ‘걍동’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내 별명에는 어떤 의미도 없었다. 그냥 강동수. 그래서 걍동. 같은 강동수인데, 넌 왜 존재감이 없어? 걍동이라고 불릴 때마다 나한테 이렇게 묻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니, 나를 자기들 내키는 대로 낙인찍는 것 같아서 싫었다. 그것만으로도 내가 강동수를 못마땅해하는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