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한국 시조 문학의 저력을 이어가는 김태희 시인이 다섯 번째 시조집 『그리움이 타는 노을』을 펴냈다. 이번 시집은 ‘시조사랑시인선’ 시리즈의 65번째 권으로, 총 127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으며, 한 편 한 편이 삶과 그리움의 진폭을 고요하게 관통한다.
『그리움이 타는 노을』은 “돌아갈 수는 없지만 떠날 수도 없는” 감정의 중간 지점에서 피어난 노래들이다. 시인은 “쉽게 읽히지만 오래 남는 시, 부드럽지만 단단한 시”를 지향하며, 독자가 시 속에서 자신의 그리움을 포근히 마주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번 시조집은 총 5부로 구성되었으며, 생명과 자연, 가족과 공동체, 회한과 성찰, 기억과 정서의 결을 따라 독자를 ‘그리움의 파노라마’로 이끈다. 첫 시조 「싹 틔움」부터 마지막 「끝없이 피는 꽃」까지, 모든 시조는 조용하지만 강한 심상으로 독자의 마음에 잔잔한 울림을 남긴다. 문학박사 구충회 시인은 평설을 통해 김태희 시인의 시조가 “전통과 현대의 접점을 탐색하며, 온고지신(溫故知新)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일깨우는 우리 사회의 변천사”라고 평가했다.
출판사 리뷰
■ 북리뷰
삶의 자락을 시로 엮어온 김태희 시인이 다섯 번째 시조집 『그리움이 타는 노을』을 선보였다. 이번 시집은 ‘시조사랑시인선’ 시리즈의 65번째 권으로, 오랜 시간 정형시의 틀 안에서 감성과 언어를 치열하게 다듬어온 시인의 문학적 성숙을 오롯이 담아낸 결과물이다.
총 127편의 시조가 실린 이번 시집은, 시간과 기억의 지층 속에서 솟아오른 감정들을 세심하게 포착한다. 시인은 삶의 한순간을 지나며 문득 마주한 감정들—기억, 가족, 자연, 그리고 이름 없는 그리움의 결들—을 조용히 끌어안는다. 다섯 개의 부로 나뉜 구성은 테마별 흐름을 따라가며 독자로 하여금 보다 깊이 있는 정서를 경험하게 한다.
1부 ‘생명의 끌림’에서는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과 생명의 눈부신 찰나를, 2부 ‘배냇짓에 남긴 시’에서는 부모 세대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담는다. 이어지는 3부와 4부에서는 도시의 풍경, 서민들의 일상, 그리고 사회적 풍속까지 시선의 폭을 넓혀, 우리 주변의 작고 낮은 것들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다. 마지막 5부 ‘가슴에 남는 풍경’은 노을처럼 깊고 부드럽게 스며드는 이미지들로 마무리된다.
이번 시집의 시들은 쉽고 담백한 언어로 쓰였지만, 그 속에는 오랜 시간에 걸친 정제와 숙성이 깃들어 있다. 형식의 틀 안에서 자유로운 감정의 흐름을 지켜낸 시인의 절제된 문장은, 한 줄 한 줄이 긴 여운을 남긴다. 어떤 시는 마치 오래된 편지처럼, 어떤 시는 흙 냄새 섞인 바람처럼 다가와 독자의 마음에 조용히 말을 건넨다.
시인의 말에서 밝혔듯, “쉽게 읽히지만 오래 남는 시, 부드럽지만 단단한 시”를 향한 그의 의지는 이번 시집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리움이 타는 노을』은 화려한 언어 대신 정직한 언어를, 과장된 감정 대신 삶의 본질을 택한다. 시인은 말한다. “시는 그렇게 다시 살아났다”고. 잊었다고 생각한 그 자리에, 문득 머물러 있던 그리움이 시로 피어난 것이다.
이 시집은 단지 정형시를 넘어선다. 그것은 누군가의 삶을 비추는 조용한 거울이며, 지나온 기억의 강가를 따라 걷는 마음의 발자국이다. 독자는 그 안에서 자기만의 노을빛 그리움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김태희 시인의 『그리움이 타는 노을』은, 시조가 여전히 오늘의 언어로 살아 숨 쉰다는 것을 조용히 증명하는 책이다.
■ 평설
그리움과 추억의 파노라마
-절제의 미학으로 본 김태희 시조의 서정 세계
구충회(시조시인, 문학박사)
1. 여는 말
김태희 시인은 시조 문학계의 자타가 공인하는 중견 시인이다. 1985년 중앙일보 시조백일장에서 「추풍령」으로 장원을 하였으니, 무려 40년 전의 일이다. 그 후 7차례에 걸쳐 중앙일보 시조백일장에 당선되었다. 전국 시조공모전에도 무려 25차례의 시조문학상을 수상한바 있다. 이는 시조 문학계에서 확실한 위상을 다진 것으로 보이는 증거라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계간 《문학저널》 시조부문 심사위원장을 지냈고, 2023년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실시하는 시조부문 ‘아르코문학창작’ 작가로 선정되었다. 지금까지 5천여 수에 달하는 시조를 창작했으니, 이 또한 파천(破天)의 업(業)을 지고 태어난 운명적 시인이 아닌가 싶다. 현재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과 한국문인협회 정책개발위원으로 시조발전에 진력하고 있으며, ‘문장웹진’을 통하여 젊은 시인들과도 왕성한 온라인 문학 활동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김태희 시인의 시조집으로는 『달래강 여울 소리』, 『그날의 소금밭』, 『창가에 정형을 들이다』, 『아플 때 피는 꽃』이 있고, 이번에 상재할 『그리움이 타는 노을』은 시인의 다섯 번째 시조집이 되는 셈이다. 지금까지 40년 동안 시류에 편승하여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오로지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의 자세로 시조 문학에 정진하고 있는 김태희 시인께 필자는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하며, 바위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이 글을 쓰기로 했다.
김태희 시인은 행운아다. 시조 생활 40년 만에 우리의 전통시인 시조가 달나라에 착륙하는 경사를 맞았으니 말이다. 올해 1월 15일 새벽 1시 11분(현지 시각) 미국 플로리다에서 발사된 민간 우주기업 파이어 플라이(Fire Fly)의 달착륙선 ‘블루 고스트(Blue Ghost)’가 우리 시조 8편이 게재된 시집 『폴라리스 트릴로지,The polaris Trilogy』를 싣고 45일 간 비행을 마친 후, 지난 3월 2일 한국시간 17시 36분 달 표면 목표지점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는 시조역사 700여 년만의 쾌거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하신지 579년 만의 경사다. 그동안 자유시의 그늘에 가려있던 시조가 독립된 문학 장르로 정체성을 인정받아 시조의 우주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가 인정해서 달나라까지 간 우리 시조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은 고사하고 ‘국가무형문화재’로도 등록되지 못한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 시조시인은 이러한 점에 관심을 가지고 시조를 우선 ‘국가무형문화재’로 등록하는데 힘을 모아야 할 때가 아닌가. 이 자리를 빌려 말하고 싶은 거다.
2. 김태희 시조의 작품 세계
김태희 시인의 제5 시조집 『그리움이 타는 노을』에 실린 작품 수는 모두 127수로, 이를 한마디로 포괄하면, ‘그리움과 추억의 파노라마’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낭만주의적 감성에 치우친 서사적 담론이 아니다. 그리움의 시는 그리움을 넘어 그리움의 본질을 추구하면서도 현대시조로의 변환을 꾀하고 있으며, 추억의 시는 시대의 급속한 변화에 따라 사라져가는 우리 고유문화에 대한 애착과 아쉬움을 표출하는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온고지신(溫故知新)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일깨우는데 의미를 두고 있는 우리 사회의 변천사다.
김태희 시인의 자연 사랑은 각별하며, 자연에 대한 심미적 감수성은 누구보다도 예민하다. 김 시인이 자연 서정의 형이상학적 표상화에서 절륜의 경지를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김태희 시인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다. 찔레꽃이 만발한 봄이 되면, 열세 살 때의 ‘은영’이 생각에 가슴을 달구고, “도시의 환부에 놓인 불빛만큼” 따가울 정도로 봄꽃에 대한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 여름이 오면 “뙤약볕에 매달린 기억”을 추스르지 못해 폭포로 달려가기도 하고, 가을이면 갈 곳이 없는 무의탁 노인에 대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연민을 느낀 나머지, 노을 짙은 서녘 하늘을 바라보면서 “붉은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추운 겨울이 오면 토렴국밥집을 찾아가 주인과 돌아가신 할머니의 따스한 손맛을 맛보며 ‘공유의 미덕’을 체험하기도 한다.
김태희 시인은 누구보다도 가족 사랑이 곡진하다.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오매불망 그리움의 표상이고, 앓고 있는 자식에 대한 사랑은 처절한 동병상련이다. 장애를 안고 있는 손녀딸 ‘아녜스’는 금쪽같은 존재요, 그녀에 대한 시인의 각별한 사랑은 솜사탕처럼 살뜰하다.
필자는 시조가 절제의 미학이라는 측면에서 김태희 시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1) 그리움의 변주곡
김태희 시인의 시조집 『그리움이 타는 노을』에 실린 작품 127편 가운데 그리움에 관련된 작품은 50여 수로, 전체의 39%를 상회하고 있다. 그러니 김 시인은 ‘그리움의 시인’이다. 그리움의 본질은 부재(不在)의 인식에서 비롯된 애틋한 정서적 결핍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영성과 사랑의 철학자 칼릴 지브란은 “떠난 후에야 진정한 그리움이 시작 된다.”고 했고, 앙드레 말로는 사람의 감정 중 “가장 오래 남는 감정은 그리움”이라고 했다. 그리움의 시 몇 편을 골라 다음과 같이 살펴보기로 한다.
내 몸을 업어줬던 그 등이 생각난다
그 곱던 카네이션 그 가슴 내가 됐다
오월이 바로 당신입니다 그리워요 어머니!
―「어머니」 전문
누가 말했던가. “하늘의 별과 대지의 꽃과 세상의 어머니야말로 우주적 아름다움의 표상”이라고. 어머니는 내 생명의 시작이고 사랑의 원형이며, 존재의 귀의처(歸依處)다.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아직 끝나지 않은 마지막 문장처럼 ‘오래된 현재’이자 ‘오래된 미래’가 되어 앞으로도 영원히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5월은 가정의 달이자 8일은 어버이날이다. 생존 시 어머니의 가슴에 달아드렸던 카네이션은 이제 시인 가슴의 카네이션이 되고 보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다. 시인은 종장에서 따스하고 아름다운 5월을 어머니의 사랑에 비유하고 있다. ‘그리워요 어머니’는 도치된 수사법으로 시인의 가슴에 복 바치는 그리움의 절규다. 시인의 역량을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너무나 익숙해서 눈에 없던 당신 이름
어느 날 창가에 선 그 뒷모습 바라보니
무섭던 그 세월 지나 젊은 기백 어디 갔나
성글은 머리카락 흩날리는 쓸쓸함만
그가 나고 내가 그인 애틋한 연민으로
눈시울 마구 흩어져 넘치던 힘 보이잖네
―「아버지 당신」 전문
아버지는 한 가정의 기둥이자 가족을 지탱하는 중심축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고 서 있는 등불”이라 했다. 가족의 생존을 위해 온갖 풍파를 이겨내면서 살아가는 한 가정의 희망이요 표상이 아버지다. 어머니는 자애롭지만 아버지는 엄숙하고 무서웠다. 그래서 엄부자모(嚴父慈母)라 하지 않았던가. 언제나 내 곁에 있으나 잘 보이지 않기에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말 대신 침묵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첫째 수에서 힘 빠진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분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어느새 시인도 산수(傘水)에 접어드는 나이가 되고 보니, “그가 나고 내가 그인 애틋한 연민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둘째 수는 결국 아버지의 판박이가 된 시인의 자화상이다.
무엇이 사라질 때 그리움이 시작된다
허전함과 달콤함 그사이에 핀 그리움
마음도 긁어모으면 그리움이 되는 건가
말로도 그려보고 글로도 그려보고
생각을 긁어보고 형상을 긁어 봐도
어머닌 그리움의 샘 그리움인 어머니
자식 곁에 누워만 있어 줘도 그리운 이
그러다 멀리 가면 더 그리운 기억 속에
그리움 가득 채워진 그리움의 이름이여
―「그리움 & 어머니」 전문
이 시조는 그리움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앞서 밝힌바와 같이 “떠난 후에야 진정한 그리움이 시작 된다”고 철학자 칼릴 지브란이 말하지 않았던가. 첫째 수에서 시인은 “무엇이 사라질 때 그리움이 시작 된다”고 했다. “허전함과 달콤한 그 사이에 핀” 것이 “그리움”이라고도 했다. 그리움의 본질과 생성 원인을 규명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수에서는 그리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이를 밝히기 위한 시인의 치열한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셋째 수에서는 그리움의 대명사가 결국 어머니임을 확인한다. “그리움 가득 채워진 그리움의 이름” 그것은 바로 어머니라고.
이 작품에서 ‘그리움(그리운)’은 무려 아홉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반복을 통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감정의 노출은 시(詩)가 지성과 감성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저무는 해를 이고 그리움을 널고 있던
나는 또 시에 젖어 이골 난 길을 간다
노을 속 철새 떼 점점 영혼 속을 날아가듯
누군가 그리울 땐 석양 놀도 꽃이 된다
하루를 그늘 삼아 살아가는 사람처럼
인연도 애초부터 아닌 낯설음을 껴안는 것
하얗던 침묵에도 뜨거움이 차오르고
기억으로 가물대던 아픔마저 묽어지면
내 가슴 그리움이 들어 나도 몰래 달이 뜬다
―「그리움, 너머」 전문
시인에게 그리움은 시작(詩作)의 모티브로 작용한다. 그래서 습관처럼 “이골 난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 수의 “누군가 그리울 땐 석양 놀도 꽃이 된다”는 표현은 40년 경륜이 농익은 시인에게서나 맛볼 수 있는 표현이다. 마지막 셋째 수는 이 시조의 백미다. 여기서 ‘달’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셋째 수 종장은 초장과 중장의 결과물인 한 편의 시조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한편의 시조를 잉태하게 된 모태는 바로 그리움인 것이다. 존재의 형이상학적 표상화가 절륜의 경지다.
(2) 추억의 파노라마
김태희 시인은 농경사회, 산업사회, 정보사회를 거쳐 인공지능 시대를 살고 있으니, 그동안 굽이진 인생길을 걸어오면서 시인이 보고 느끼고 몸소 겪은 일이 얼마나 많으랴. “청년은 미래에 살고, 중년은 현재에 살며, 노년은 추억에 기대어 산다”는 말이 있다. 그 수많은 추억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시조란 절제된 미학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치고 있는 것이다. 김시인은 추억을 캔버스에 그려내는 화가다. 여기에 몇 작품을 골라 살펴보기로 한다.
오히려 촌스러워 다정하고 따듯한 것
낡아서 날도 빠져 모서리가 닳아버린
이것들 죄다 한곳에 모여 사는 그 세상
다소간 세대 잊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추억을 자아내고 반추하는 풍물시장
현실의 길이를 모르는 허기 같은 장터다
―「풍물시장」 전문
풍물시장은 갖가지 추억을 모아놓은 전시장이다. 골동품과 중고품이 유명한 동묘 풍물시장을 스케치한 연시조다. 종류를 헤아릴 수없이 많은 풍물들은 지난 세월 우리가 쓰던 생활용품들이 대부분이다. 세월이 흘러 비록 낡기도 하고 닳기도 했지만, 우리의 손때가 묻었기에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시인은 “현실의 길이를 모르는 허기 같은 장터”라고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필자 역시 신설동 풍물시장을 돌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옛 것을 알고 새 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공자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이나 ‘법고창신(法古創新)’이란 말이 떠오르기에 더욱 그렇다.
희고 붉은 나선의 줄 그어진 원기둥도
의자의 널빤지 위 걸터앉던 이발소도
이제는 바리캉 소리 하나둘씩 꺼져간다
남성용 스킨 병과 염색약 포마드 향
서늘한 감각 속에 서걱이던 가위질로
한순간 졸음이 오다 꾸지람을 듣던 일
스포츠 상고머리 그 주문은 어디 가고
전동기 모터소리 치마 섶에 떨어지는
미용사 여자미용실로 걸음걸이 옮겨간다
샴푸 후 드라이어 헤어 락스 스프레이
그 또한 사라지고 빗질만 두어 번인
세상도 바빠진 삶의 머릿속인 탓일까
―「사라지는 이발소」 전문
이발소에 대한 추억을 생생하게 스케치한 작품이다. 빨강, 파랑, 흰색 줄무늬의 회전등은 이발소를 나타내는 싸인 불이다. 이 회전등의 유래를 살펴보면, 중세 유럽의 이발사 겸 외과 의사였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빨강은 피, 파랑은 정맥, 흰색은 붕대를 상징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현대의 이발소 회전등으로 이어진 것이다. 지금은 이마져도 추억으로 남고 말았다. 이뿐이랴. 머리를 자를 때 쓰이던 수동식 이발기(바리캉), 남성용 스킨, 포마드, 샴푸 후 드라이어, 헤어 락스, 스프레이 등 모두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남성 위주였던 이발소도, 이발사도, 여자미용실, 여자미용사로 바뀌고 말았다. 모두가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추억들이다.
기억의 저편 너머 멀어져간 소리 있다
아릿한 그리움 속 터지는 음성처럼
하얗게 뭉클 치솟는 사모의 정 그 눈물샘
귓전에 닿았다가 춤사위로 흩어지고
허공을 종횡으로 가로지른 선율이여
정으로 메아리쳐 오는 그 시절의 수채화다
가슴에 맺혀 있던 응어리를 두들기는
오묘한 높낮이의 속도 조절 기막히다
설음을 허공에 날리고 세월 다듬던 그 소리여
―「다듬이 소리」 전문
시인은 눈시울이 뜨거울 정도로 다듬이 소리에 대한 추억이 애절하다. 1980년대부터 세탁기와 다리미 등 가전제품의 보급이 확산되면서 다듬이 소리는 “기억 저편 너머”로 전설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특히 한밤의 정적을 깨고 들리는 다듬이 소리는 “정으로 메아리쳐 오는 그 시절의 선율”이기도 하지만, 어머니의 고달픈 삶을 호소하는 절규다. 그래서 시인은 셋째 수에서 어머니의 “가슴에 맺혀 있던 응어리를 두들기는” 소리로 표현하지 않았는가. 다듬이 소리는 가슴에 맺힌 어머니의 설음을 허공에 날리면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한숨소리이기도 하다. 셋째 수 종장이 이 작품의 백미(白眉)다.
해 질 녘 소꼴 베어 망태기에 가득 담고
도랑가 돌막 들춰 한소끔 잡는 것들
고향엔 이 다슬기를 올갱이로 불렀지
시원한 된장국에 가루 묻혀 끓여 놓고
올갱이를 탱자나무 가시로 빼내 먹던
그 시절 잊고 살아온 그 맛을 불러본다
산들이 옹기종기 새 떼처럼 모여 있는
그 동네 가운데를 질러가는 냇물에는
저녁놀 가물거리는 올갱이의 고향이다
―「다슬기의 추억」 전문
나이가 들수록 고향에 대한 추억이 그리운 것은 수구초심(首丘初心)이 아닐까. 다슬기를 소재로 쓴 추억담이다. 시인의 고향은 충북 충주다. 표준어는 ‘다슬기’이지만 ‘올갱이’는 이 지역 방언이다. “올갱이를 탱자나무 가시로 빼내 먹던 그 시절”의 그 맛이 그리운 거다. 다슬기는 껍질이 뾰족하고 알맹이는 나선형으로 말려있기 때문에 탱자나무 가시나 뾰족한 기구로 빼어내야 먹을 수 있다. 독자로 하여금 입맛을 다시게 하는 표현이 실감난다.
(3) 자연 서정
김태희 시인의 자연 사랑은 연하고질(煙霞痼疾)을 넘어 천석고황(泉石膏肓)에 이를 정도다. 그래서 그런지 시인의 시적 변용이 돋보이는 곳은 자연 서정의 표상화에서 절륜의 경지를 보인다. 이는 자연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심미안과 함께 시작의 원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지구환경 변화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자연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것은 이 때문이다. 몇 편을 골라 다음과 같이 살펴보기로 한다.
한 움큼 흙 내음을 솔기 터진 입에 물고
금이 간 시간의 틈 어둠속을 헤집고서
우주의 섭리에 따라 싹을 틔운 첫울음
―「생명」 전문
사유 깊은 시조다. 김태희 시인은 자연 서정을 표상화 하는데 탁월한 경지를 보인다. 땅에 묻힌 한 알의 씨앗은 금방 싹이 트는 게 아니라, 얼마간의 적절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금이 간 시간의 틈”을 찾아 어두운 땅 속을 뚫고 얼굴을 내미는 것이다. 어찌 식물뿐이랴. 병아리도 태어날 때가 되어야 태어난다는 ‘줄탁동시(啐啄同時)’란 말이 떠오르지 않는가. 결국 모든 생명은 우주의 섭리에 따라 탄생한다는 것이다. “흙 내음을 입에 물고”나 “금이 간 시간의 틈”은 시인의 역량을 가늠하기에 충분한 표현이다. “우주의 섭리를 따라 싹을 틔운 첫울음”이란 시적 변용은 생명의 신비감을 배가시키는 절륜의 표상이다.
만삭의 붉은 노을 갈대숲을 넘어와서
토혈하는 애처로움 저 생리 다 어쩌리
그 속에 내 질척이는 마음은 또 어쩌나
―「석양」 전문
석양을 응시하는 시인의 시선이 처절하다. 시인 자신이 황혼기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만삭의 붉은 노을”이 아닌가. “토혈(吐血)하는 애처로움”은 석양에 대한 서사적 담론이 아니라, 석양과 내가 한 몸이 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다. 종장이 이를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사유 깊은 수작(秀作)이다.
그리운 행성 하나 노랗게 저문 밤에
들국화 외로움을 침묵으로 흔든 미소
한 천년 가늘게 떨려 솟아오른 가쁜 숨
―「들국화」 세 수 중 셋째 수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와 접맥되는 작품이다. 초장은 “행성 하나 노랗게 저문 밤”이니,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다. 여기서 ‘행성’이란 지구를 지칭한 것이리라. “외로움을 침묵으로 흔든 미소”는 보편성을 탈피한 파격적인 변용이다. 이 시조의 백미(白眉)는 종장이다. 〈국화 옆에서〉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와 대비시켜 보라. 이에 비해 들국화는 “한 천년 가늘게 떨려 솟아오른 가쁜 숨”이란다. “가쁜 숨”이라니. 들국화가 피기까지는 천년 세월도 짧은가 보다. 시조의 멋과 맛을 유감없이 발휘한 수작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해거름 녘 외딴곳에
잊은 세월 여기 내려 호젓이 꽃 피웠나
바람 끝 입에 물고서 산그늘도 따라 운다
저무는 노을 속에 한줄기 눈물 되어
기러기 돌아올 날 가슴에 안은 채로
우는 듯 흐느끼듯이 된바람을 꺾습니다
―「구절초의 노래」 첫째 수와 셋째 수
구절초란 이름의 유래는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 채취한 것이 가장 약효가 좋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줄기의 마디가 단오에는 다섯 마디, 중양절에는 아홉 마디가 된다는 뜻의 구(九)와 중양절의 ‘절(節)’, 혹은 ‘꺽는다’는 뜻의 ‘절(折)’자를 써서 ‘구절초〔九節(折)草〕’라고 한다. 셋째 수의 종장 마지막 소절 “꺾습니다”는 낯선 면이 없지 않으나 ‘꺾을 절(折)’과 관계가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첫째 수는 구절초가 핀 환경이자 화자의 외로움이 투영되고, 셋째 수는 구절초의 강인한 인내를 표현한 서정시다. “우는 듯 흐느끼듯이 된바람을 꺾습니다”란 표현이 그렇다.
파도로 밀려오는 백사장 북쪽 아래
녹이 슨 초소마다 어둠의 추를 달고
해안선 자물쇠를 채운 초병 눈빛 서성인다
긴장을 비비다가 뒤척이는 그 언저리
갑옷 입은 소나무 거울처럼 고요한데
아직도 궤양처럼 쓰린 이 얼룩을 어찌할까
―「화진포의 밤」 첫째 수와 셋째 수
화진포는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거진읍 화진포길 280에 위치한 석호(潟湖)다. 원래 삼팔선 북쪽의 지역으로, 6.25 전쟁 이전에는 소련군정과 북한의 영토였다. 당시 김일성은 가족과 함께 화진포를 자주 찾았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그의 별장이 이곳에 남아있다. 6.25 전쟁 이후 고성군 지역이 우리 영토가 되었고,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도 화진포에서 휴가를 보냈다고 한다. 호수도 남호와 북호로 갈라져 있으니, 첫째 수는 화진포의 긴장상태를 엿볼 수 있는 서사적 담론이다. 셋째 수는 6.25 전쟁이 발발한지도 75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분당상태로 남아있으니, 시인에게는 “궤양처럼 쓰린 얼룩”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가슴 아픈 서정시다.
(4) 계절의 감각
김태희 시인은 누구보다도 계절에 대한 감각이 민감하다. 타고난 시인의 감성이 아닌가 싶다. 누가 뭐래도 한국은 축복받은 나라다. 아무리 지구환경이 변한다 해도 여전히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임에 틀림없다. 봄에는 생명의 신비를, 여름에는 성하의 열정을, 가을에는 수확의 풍요를, 겨울에는 백설의 낭만을 누리는 호사를 타고 났다. 계절의 변화에 따른 행동·생활·감정 패턴과 의식주의 다양한 변화는 ‘식상’을 벗어나 ‘참신’을 맛볼 수 있는 긍정적인 기회로 작용할 수도 있다. 여기서 사계절에 관련된 몇 작품을 골라 다음과 같이 살펴보기로 한다.
은영이 오던 날은 솔바람도 낭랑하고
햇살에 서성이던 찔레꽃도 맘껏 피어
설렘 속 포개진 향기 온 가슴을 달군 날
―「열세 살 때에」 전문
단시조의 멋과 맛을 유감없이 발휘한 서정시다. 은영이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인의 가슴을 달구게 할 정도로 설레게 하는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녀가 오는 날은 “솔바람도 낭랑하고” “찔레꽃도 맘껏” 피었다니, 더욱 그렇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가는 임’에 대한 이별의 정한이라면 〈열세 살 때에〉는 ‘오는 임’에 대한 설렘이다. 종장에서 “설렘 속 포개진 향기 온 가슴을 달군 날”이라니, 시인의 문학적 역량을 감지할 수 있는 절편이다.
봄꽃이 허리 짧게 통증으로 터지던 밤
허구한 날 지새다 혀끝으로 앓던 정이
그래도 더 모자라서 어지러움 번져가
무릎에 봄의 얼룩 또 덧없이 저려오다
봄밤도 산허리의 어디 대고 우는 건가
이맘때 끊어진 임 소식 편지처럼 쓰는가
봄꽃의 설렘이 비사치듯 터지는 밤
가난한 내 숨결로 기대지 못한 말들
도시의 환부에 놓인 불빛만큼 따갑다
―「봄날의 통증」 전문
봄꽃에 대한 시인의 감각이 ‘통증’을 느낄 정도로 처절하다. “허구한 날 지새다 혀끝으로 앓던 정”이 현기증으로 번져가고, “무릎에 봄의 얼룩 또 덧없이 저려오다” 밤이 되면 “산허리의 어디 대고” 울 정도니 처절하지 않은가. 봄밤에 비사치듯 피어나는 꽃을 본 시인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한계와 절박감을 느낀다. “도시의 환부에 놓인 불빛만큼 따갑다”는 표현은 자신의 한계를 통감한 시인의 자책이요, 양심고백이다.
한 움큼 달라붙은 저 여름을 식히면서
하얗게 부서지는 물소리를 퍼 담는다
지금은 폭포의 시간 현기증을 씻고 있다
원초의 울음으로 태금하는 여름 문장
한바탕 범람하는 녹음 속을 훑고 있다
뙤약볕 매달린 기억 장하게 부서진다
―「구곡폭포」 전문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강촌리 봉화산 계곡에 있는 폭포다. 높이 50m. 아홉 굽이를 돌아 들어간다 하여 구곡(九曲)이라 했다. 주변에 솟은 검봉과 울창한 숲, 그리고 기암절벽에서 내뿜는 폭포수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하얗게 부서지는 물소리를 퍼 담는다”라는 색채와 소리의 공감각적 이미지가 실감을 자아내고 있다. 그 물소리는 여느 물소리가 아니라, “원초의 울음으로 태금하는 여름 문장”이란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거리가 너무 멀어 모호한 감이 없지 않으니, 독자의 신중한 사유가 요구된다 하겠다. 폭포의 장관에 빠져들다 보면 뙤약볕에 찌든 육신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겠다.
두꺼운 옷차림에 은행잎은 떨어지고
물드는 단풍 속에 노을 지는 종묘 공원
저 하늘 흰 구름 이는 곳 오늘따라 쓸쓸하다
벤치 곁 스쳐 가는 수많은 굽은 세월
아무리 잊으려도 짙어지는 외로움에
뭘 해도 채워지지 않는 주름뿐인 침묵만
한 조각 빵을 먹는 오후의 종묘 텃새
뒤척이던 기침 소리 고독으로 물려오다
해지는 서쪽 하늘만 바라보는 붉은 눈물
―「종묘공원 노인」 전문
누구에게나 은행잎이 떨어지는 가을은 쓸쓸하고 외롭기 마련이다. 하물며 무료급식을 기다리는 무의탁 노인의 심경은 어떠랴! 첫째 수의 정경이다. 둘째 수는 외롭고 쓸쓸한 노인의 내면을 시인이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한 끼의 무료급식으로 하루를 때우고 마감하는 노인의 삶은 처연하다. 셋째 수 종장의 “해지는 서쪽 하늘만 바라보는 붉은 눈물”이라는 표현이 대가(大家)의 역량을 과시하고 있다. 붉은 눈물은 종묘공원 노인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주인장의 국자 질이 어설프다
한 번을 퍼 담고서 인심 좋게 또 퍼 담아
몇 번을 담았다 쏟기를 반복하고 또 한다
모르는 눈빛으로 바라보면 의아하고
퍼주기 아까워서 그러는 듯 보이지만
익숙한 풍경으로는 그 모습이 정겹다
추운 날 국을 풀 땐 할머니가 그랬듯이
이 동작 익숙한 걸 나중에야 알게 되고
음식을 먹기에 적당한 온도에다 맞춘 비법
세월 속 저만큼을 나앉은 오늘에도
그런 날 기억으로 남아있는 토렴 국밥
뚝배기 밥알과 국물에 식지 않을 뽀얀 기억
―「토렴 국밥」 전문
이 시조는 2023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 작품으로 겨울의 정취를 대변하는 감각적인 작품이다. 토렴은 찬밥에 뜨거운 국물을 반복적으로 부어 밥을 따뜻하게 만들고, 밥알에 국물 맛을 배게 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조리법이다. 토렴행위는 입이 데지 않을 만큼 따뜻한 국밥을 원하는 손님의 요구를 꿰뚫은 ‘공감’과 뜨거운 에너지를 함께 나누는 ‘공유’라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첫째 수에서는 찬밥을 따뜻하게 만들기 위한 행위고, 둘째 수는 주인장의 정겨운 달인 모습, 셋째 수는 손님의 입에 맞춘 국밥의 적절한 온도 조절, 넷째 수는 토렴 국밥에 대한 회상이다. 시인은 이를 “뽀얀 기억”으로 이미지를 극대화하고 있다.
(5) 가족애
산업화 이전 농경사회에서 성장한 세대들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 유별나다. 가정이란 사랑과 돌봄의 공동체요, 삶의 기반이자 정서적 안식처이다. 또한, 가족은 한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살아가며 성장하는 집합체다. 개인주의가 고도로 발달된 어느 나라보다도 한국인의 가족애는 매우 각별하다. 인용 작품을 통해 시인의 가족 사랑을 살펴보자.
아버지는 헛간에다 지게를 내려놓고
나뭇단에 꽂혔던 진달래꽃 한 다발을
부뚜막 엄마 앞에 놓고는 헛기침만 “흠” 하신다
―「어느 사랑」 전문
해학미가 돋보이는 서정시다. 옛날의 우리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은 언제나 그늘 속에서 시들어 갔다. 농경사회 대가족제도의 층층시하에서는 현대의 핵가족 사회와는 달리 부부간의 애정을 밖으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뭇단에 꽂혔던 진달래꽃 한 다발”은 그 시절 개명(開明)한 아버지의 최고 사랑 표시다. 종장에서 아버지의 헛기침 “흠”은 행여 웃어른이나 다른 가족에게 들킬라 말로는 못하고 몰래 전하는 아버지의 신호이자 어머니에 대한 애정 표시다.
첫 번은 머뭇했고 두 번째는 어려웠고
세 번째는 간지러워 네 번째는 쑥스럽던
“사랑해” 그 말 한마디를 어머니께 못했는데
수많은 기억 속에 더듬어도 안 떠오를
한 번도 못 해봤던 이름으로 불러본다
“사랑해” 가슴에 숨은 말 내 저 하늘 어머니
―「그 말 한마디」 전문
송나라 주자(朱子)의 십회(十悔) 중 첫 번째인 ‘불효부모사후회(不孝父母死後悔)’가 떠오르는 사모곡이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니, 그 때를 놓치면 뉘우쳐도 소용이 없다. 살아계신 어머니께 “사랑해”란 말 한마디가 그리도 어려웠던가. 이제 와서 하늘나라로 가신 어머니께 “사랑해”라고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회한이 복받치는 만시지탄(晩時之嘆)이다. 이제 와서 “사랑해”란 하지 못한 그 한마디가 시인의 가슴을 후빈다.
아파도 참았는데 참기 힘든 아픔 있다
내 힘든 건 이겼는데 자식 힘듦 안타까워
아픈 애 가슴 앞에서 기도하는 엄마 본다
기도가 모든 힘을 자식에게 주고 싶어
어릴 때 내 엄마도 지금의 나와 같이
아이야, 엄마의 엄마도 무릎 꿇고 기도했다
지금 내가 아픈 너의 가슴 앞에 엎드릴 때
나 혼자 있지 않고 여기 없는 내 엄마도
내 앞에 나와 똑같이 무릎 꿇고 기도했다
―「어느 엄마의 기도」 전문
앓고 있는 자식에 대한 엄마의 애끓는 마음이 처절하다. 자식을 낳아서 길러봐야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시그널이다. 도대체 자식은 부모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자식은 어머니의 몸에서 나왔지만 어머니 마음 밖에 두지 못할 존재다. 자식은 ‘부모의 심장 밖에 있는 또 다른 심장’이기에 사랑과 본능의 결정체이다. 그래서 자식 사랑은 대대로 대물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수능이 끝난 지가 며칠도 안 됐는데
재수를 하겠다는 아이의 애절한 말
그 심정 왜 모르겠나 눈물 맺힌 저 눈동자
자식의 짐마저도 대신해서 들고 싶어
온종일 그 생각에 밥 한술도 못 넘기는
아내의 사랑이란 게 가슴 훑어 더 아리다
부모의 가지 끝에 단풍처럼 매달려서
피눈물 끓다 못해 얼마나 애가 탈까
낙엽이 터진 속으로 또 얼마나 붉게 울까
―「사랑의 눈물」 전문
대학수학능력시험은 학생과 학부모의 지대한 관심사다. 이 시험의 결과가 대학진학을 좌우하는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이다. “울면서 재수를 하겠다”는 자식의 말에 엄마는 억장이 무너진다. 오죽해야 온 종일 자식 생각에 “밥 한술도 못 넘기는” 사태에 이르렀을까. “자식의 짐마저도 대신해서 들고 싶은” 어머니의 동병상련(同病相憐)이 눈물겹도록 애처롭다.
서로는 누워서도 등을 돌려 잠을 자도
마음은 한 포대서 온기로 돌아오고
하루를 지난날처럼 아껴주고 있는 거다
주일날 한 걸음씩 떨어져서 성당 가며
시선은 먼 산 봐도 섞여가는 일상이고
그러다 죽음과 이별 그때에도 거긴 거라
―「행복. 이런 거다」 둘째 수와 셋째 수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란 속담이 있다. 이 시조내용의 총체다. 부부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의 동반자이며, 삶과 책임, 그리고 미래를 공유하는 운명 공동체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두 남녀가 결혼을 해서 ‘부부(夫婦)’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게 되었으니, 어찌 평탄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부부란 가장 가깝고도 먼 존재가 아닌가. 부부 사이를 실감 있게 표현한 서정시이다.
3. 맺는 말
지금까지 필자는 김태희 시인의 제5 시조집 『그리움이 타는 노을』에 실린 작품 127수 모두를 정독했다. 이들 작품 중 그리움과 추억을 내용으로 한 작품이 70여 수로 전체의 55%를 상회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의 시조 127편을 포괄해서 말하면, ‘그리움과 추억의 파노라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낭만주의적 감성에 치우친 서정시나 서사적 담론이 아니다. 그리움의 시는 그리움의 본질과 그리움의 생성 요인을 제시하면서 현대시조로의 변환을 추구하는데 치열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다.
김태희 시인의 작품 세계는 그리움의 속내를 드러낸 비망록이다. 그의 그리움은 부재(不在)의 인식에서 비롯된 애틋한 정서적 결핍감에서 비롯된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영성과 사랑의 철학자 칼릴 지브란은 “떠난 후에야 진정한 그리움이 시작 된다.”고 했다. 불러도 대답 없는 천국의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시인의 그리움은 회한과 통절로 점철된 통한의 참회록이다. 지금은 이러한 그리움이 곁에 있는 아내와 자식과 손녀에 대한 사랑으로 전이되고 있음을 필자는 주시하고 있다.
김태희 시인은 농경사회, 산업사회, 정보사회를 거쳐 지금은 인공지능 시대를 살고 있으니, 그동안 시인이 보고, 느끼고 몸소 겪은 바를 파노라마처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추억의 시는 시대의 급속한 변화에 따라 사라져가는 우리 고유문화에 대한 애착과 아쉬움을 표출하는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온고지신(溫故知新)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일깨운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조라 할 것이다.
김태희 시인의 시적 변용이 돋보이는 곳은 자연 서정의 표상화에서 절륜의 경지를 보인다. 그의 시조 「열세 살 때에」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관통하고 있으며, 「들국화」는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와 접맥되고 있다. 이 작품은 형식적으로 자유시와 대비되면서 시조가 ‘절제의 미학’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현대시조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한 수작(秀作)임에 틀림없다.
김태희 시인은 계절의 변화에 누구보다도 민감하다. 한국은 아무리 지구환경이 변한다 해도 다른 나라에 비하여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시인은 작품 「열세 살 때에」를 통하여 “설렘 속 포개진 향기 온 가슴을 달군” 첫사랑을 고백하기 했고, 「봄날의 통증」을 통하여 “도시의 환부에 놓인 불빛만큼” 따갑게 봄꽃에 대한 통증을 느끼기도 했다. 여름날 「구곡폭포」를 찾아가 뙤약볕에 매달린 기억이 장하게 부서지는 통쾌감을 맛보는가 하면, 「종묘공원 노인」에서는 갈 곳 없는 무의탁 노인을 보며 “해지는 서쪽 하늘만 바라보고 붉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토렴 국밥」에서는 식당 주인의 토렴행위가 손님의 요구에 부응하여 따뜻한 국밥을 제공하려는 공감과 공유의 미덕임을 깨닫기도 한다.
김태희 시인은 산업화 이전 농경사회에서 성장한 세대이다. 그러기에 가족에 대한 시인의 사랑은 유별나다. 특히 한국은 개인주의가 고도로 발달된 어느 나라보다도 가족 사랑이 끈끈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부지간 사랑은 해학미가 돋보이는 은근한 애정 표현으로, 시인 자신의 아내에 대한 사랑은 전형적이 산업사회형 애정 모델로, 자식에 대한 사랑은 현대 형 처절한 동병상련이다. 농경사회, 산업사회, 현대사회로의 변천에 따른 가족사랑 모델을 볼 수 있어 흥미롭다.
지금까지 김태희 시인의 제5 시조집 『그리움이 타는 노을』에 실린 127편의 작품을 통하여 시인의 작품 세계를 살펴보았다. 지난 40년 동안 시류에 편승하여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오로지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의 자세로 시조 문학에 정진하면서 필자에게 많은 절편을 감상할 수 있게 해준 김태희 시인께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하고 싶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 작품이 7편이나 되지만, 내용별 분류 기준에 적절치 않아 「토렴 국밥」 외에는 인용 작품으로 소개하지 못한 점이다. 김태희 시인의 양해를 구한다.
쓰다 보니 고등학교 학생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이헌구 선생의 〈시인의 사명〉 중 다음과 같은 구절이 떠오른다.
“평화로운 시대에 있어서 시인의 존재는 가장 비싼 문화의 장식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러나 그 시인이 처하여 있는 국가가 비운에 빠지거나 통일을 잃거나 하는 때에 있어서, 시 인은 그 비싼 문화의 장식에서 떠나, 혹은 예언자로, 또는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선구자적 지위에 놓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시인은 영양가 없는 글을 쓰는 서생이 아니다. 그는 위대한 사명을 완수해야 할 막중한 존재다. 우리 시인은 국가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고, 그 비싼 문화의 장식에서 벗어나 예언자로, 또는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선구자라는 점을 자각하고 시인의 사명에 충실했으면 좋겠다.
김태희 시인의 제5 시조집 『그리움이 타는 노을』 상재를 축하드리며, 앞으로 우리 시조 발전의 선도자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태희
충북 충주 출생.1985년 중앙일보 시조백일장으로 등단한 이후, 『달래강 여울 소리』, 『그날의 소금밭』, 『창가에 정형을 들이다』, 『아플 때 피는 꽃』 등 네 권의 시집을 출간하였으며, 이번 『그리움이 타는 노을』은 다섯 번째 시조집이다.김태희 시인은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한국문인협회 정책개발위원, 《문학저널》 시조심사위원장 등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며, 한국시조문학상, 이해조문학상, 무궁화문학상, 후백황금찬시문학상, 청명시조문학상 대상 등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하며,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시조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목차
•시인의 말
•서시
제1부 생명의 끌림
싹 틔움
생명의 끌림
어린 봄
산 벚꽃
그리운 녘에서
봄비 소리
어느 사랑
애기똥풀
키오스크
생명
제라늄
추풍령
열세 살 때에
냉이
라일락
구곡폭포
어머니
상추밭
할미꽃
어둠
그 말 한마디
판공성사
외딴섬
동백꽃
시골길 버스 타고
제2부 배냇짓에 남긴 시
배냇짓에 남긴 시
아버지 당신
종댕이길
진달래
석양
노부부의 뙤약볕
간이역
예쁜 모음
아내 앞에서
어느 어버이날
닭칼국숫집 노포
추석 달을 안고서
아름다운 액자 거진항
박꽃 필 때
들국화
고려청자 주병
처서에 부쳐
동행
귀뚜라미
잎의 시간
황태덕장의 눈[目]
겨울로 가는 길
한로寒露
폭설
학의천 버들 소리
제3부 사막의 유랑流浪
사막의 유랑流浪
매화, 저 바보 같은 꽃 얘기
어느 이웃의 문자 얘기
그리움, 너머
풍물시장
노숙의 발아래
부둣가의 술맛
초원의 문장
갈대꽃 세상
행복. 이런 거다
아! 바보같이 착한 삶
어머니의 바느질 삶
아! 이 회색의 덮개를
사랑의 눈물
토렴 국밥
망해암* 저녁놀 시경
그리움의 문장들
양평. 어머니의 강
나뭇잎 바람 & 길
도라지꽃
강과 산
아버지의 바둑판 & 긴 독백
추석 달아
보이지 않는 절기
아녜스의 성탄
어느 행성의 삶
아! 울릉도
제4부 아! 병목안 삼거리에서
아! 병목안 삼거리에서
저무는 마음
작은 행복
봄날의 문장
명상, 관악을 오르며
빈집, 사라지는 것에 대한
다듬이 소리
코로나. 묻고 싶다
짜장면의 추억
들국화
화진포의 밤
죽방렴에 대하여
화개장터
중앙시장 해남집
다슬기의 추억
어머니
흐린 날 노포에서
천 년 느티의 길
아! 이 나이 되고 보니
사라지는 이발소
은정이네 코다리조림
꽃 이름을 꺾지 마라
봄날의 통증
종묘 공원 노인
어느 엄마의 기도
베트벳 송년에 핀 노래
제5부 가슴에 남는 풍경
가슴에 남는 풍경
유년의 찔레꽃
꽃과 시
혼자 우는 바람
능금 꽃 희망
두레박
콩나물시루의 시간
수주팔봉
봄 에덴의 이름으로
호스피스 병동에서
달래강, 그리움을 읽다
벽파항에 시조를 입히다
내 아버지
국화
이렇게 살아요
눈 소리
그리움 & 어머니
구절초의 노래
성모님 곁으로
고향 꿈
석양의 노모
수국
시 같이 그런 사람
끝없이 피는 꽃
평설: 그리움과 추억의 파노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