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는 20세기를 전후한 문화 예술계에 큰 영향력을 끼친 국내외 거장 아티스트의 평전 및 자서전으로 구성된다. 2018년부터 다시 출간되는 본 시리즈의 스물세 번째 주인공은 프랑스 1세대 여성 건축가이자 실내 디자인의 선구자 샤를로트 페리앙이다.
20세기 초반 남성 중심적인 건축계에서 페리앙은 개방성, 놀이성, 유연성이 돋보이는 ‘주거 예술(Art d’habiter)’을 창안하여 인간과 주변 환경이 조화로운 작업을 추구했고, 여성의 권리와 불우한 계층의 어려움에 깊이 공감하며 많은 사람이 아름답고 유용하며 기능적인 공간을 접하도록 애썼다. 삶과 자연, 자유를 깊이 사랑한 예술가답게 그녀는 개인 주택, 학생 기숙사, 군 숙소, 에어프랑스 지사, 대사관, 그리고 20년에 걸친 레자르크 스키 리조트까지 다양한 건축 작업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또한 르코르뷔지에, 피에르 잔느레와 함께 모더니즘의 가장 상징적 디자인을 탄생시키기도 했는데, 조각품 같은 그랑 콩포르, 셰즈 롱그, 포퇴유 도시에 바스퀼랑 등 ‘LC 시리즈’는 오늘날에도 컬렉터의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위대한 고전이 되었다.
이 책은 샤를로트 페리앙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자신의 모험적 삶을 풍성한 시각 자료와 함께 진솔하게 그려 낸 자서전으로,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창조적인 삶을 살다 간 한 예술가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출판사 리뷰
“예술은 모든 것에 깃든다”
‘주거 예술’을 꿈꾼 프랑스 1세대 여성 건축가
샤를로트 페리앙의 국내 첫 회고록프랑스 1세대 여성 건축가이자 실내 디자인의 선구자
샤를로트 페리앙의 삶과 예술 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회고록 프랑스라고 해도 20세기 초에는 여성이 어느 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활동하기란 쉽지 않았다. 건축계도 마찬가지였다. 1926년 장식미술연맹학교를 졸업한 샤를로트 페리앙이 현대 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의 작업실을 찾았다가 그로부터 “우리는 쿠션에 수놓지 않아요!”라는 모진 말을 들었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그만큼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컸던 시대였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재능을 뒤늦게 알아본 르코르뷔지에는 사촌인 피에르 잔느레와 함께 그녀가 참여한 살롱 도톤 전시회를 찾았고, 이때를 기점으로 페리앙은 10년간 르코르뷔지에와 함께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고정관념은 이름만큼 생명력이 질기다. 21세기가 되어도 이 여성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도시설계자의 명성은 함께 일했던 르코르뷔지에에 비해 그 주목도가 덜한 측면이 있었다. 르코르뷔지에가 모더니즘 건축의 이념과 철학을 제시했다면, 페리앙은 그것을 실제 생활에 맞게 구체화한 실질적인 디자이너이자 선구자로서 누구보다 큰 역할을 했다. 불과 몇 년 전 프랑스, 영국 등 유럽에서는 페리앙 서거 20주년 회고전이 대대적으로 열리는 등 오늘날에도 페리앙의 제자리를 찾는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디자이너 가구에 대한 인기와 더불어 그 이름이 활발히 회자되고 있으나 그녀의 삶과 예술 세계를 살펴볼 만한 자료가 충분하지 않았다. 본서는 국내에 처음 출간되는 페리앙의 회고록으로, 전문적인 직업인으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여성으로서의 행보를 두루 살펴볼 수 있다.
차가운 모더니즘에 다정한 시선을 더하다
위대한 고전 작품 ‘LC 시리즈’의 진짜 주역 오늘날 컬렉터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모더니즘의 가장 상징적인 가구 ‘그랑 콩포르’, ‘셰즈 롱그’, ‘포퇴유 도시에 바스퀼랑’ 등은 샤를로트 페리앙과 피에르 잔느레, 그리고 르코르뷔지에가 함께 만들었지만,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머리글자를 따서 ‘LC 시리즈’로 오랫동안 불려 왔다. 페리앙이 사거한 지 20년도 더 지난 2022년에야 ‘포퇴유 그랑 콩포르(Fauteuil Grand Confort, 대형 안락의자)’라는 명칭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LC 시리즈’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이 세 사람은 20세기 모더니즘 건축과 디자인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르코르뷔지에는 건축의 큰 그림을, 잔느레는 구조적이고 실용적인 부분을, 그리고 페리앙은 가구 디자인과 재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공간과 가구의 유기적 결합을 이끌었다. 이러한 관계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LC 시리즈’ 제작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 페리앙일 확률이 높다는 의견이 최근 우세해지고 있다. 이 책에서도 페리앙이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제작한 의자들을 두 사람에게 보여 주는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샤를로트 페리앙이 활동한 20세기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이념의 대립, 신생독립국가의 탄생 등 역사적으로 격동의 시기였다. 특히 전후 유럽은 폐허 속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의지와 비전이 절실히 필요했다. 모더니즘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며 합리적이고 기능적인 디자인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하고자 했다. 본서에 추천의 글을 쓴 공간디자이너 문지윤은 그러나 “모더니즘이 때로는 차갑고 획일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던 것과 달리, 샤를로트의 디자인은 그 안에 인간에 대한 깊은 사려와 다정한 시선이 담겨 있다”고 평한다. 페리앙은 디자인과 건축이 특정 계층이 아닌, 모든 이의 삶을 개선해야 한다고 여겼다. 일례로 르코르뷔지에의 위니테 다비타시옹 프로젝트에서 주방을 담당한 페리앙은 주부들이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거실과 완전히 통합된 ‘주방 겸 바’를 만들었다. 덕분에 주부들은 복도 끝에서 “잡일을 하는 하녀”처럼 밀려나지 않았고, 공간의 조화로움을 온전히 누렸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름 샤를로트 페리앙은 이번 회고록에서 자신이 태어난 1903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997년까지 거의 한 세기에 가까운 생에 대한 모든 것을 솔직하고 자세하게 묘사한다. 르코르뷔지에, 피에르 잔느레뿐 아니라 장 프루베, 루시우 코스타, 페르낭 레제, 파블로 피카소, 야나기 무네요시, 야나기 소리 등 20세기를 수놓은 거장들의 활동이 저자의 펜 끝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까닭에, 상상 속에만 존재했던 예술가들의 존재가 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생전 그녀는 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단순히 예쁜 것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세상에 살고 있고 무엇이 중요하고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사는지 표현하고 행동해야 해.” 이러한 신념과 철학은 그녀의 손길이 닿은 건축물과 가구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녀의 이름이 새로운 세기에 재조명되고 회자되는 이유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샤를로트 페리앙의 발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다.

열 살 때 어린이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당시 모든 어린이가 거쳤다는 맹장 제거 수술을 받기 위해서였다. 학교를 빼먹을 아주 좋은 기회였다. 새하얀 병원이 마음에 쏙 들었다. 병실은 간결했고, 창밖으로 나무가 심어진 정원이 보였다. 엄마는 내가 기운을 차리도록 오렌지 샴페인을 가져왔다. 하지만 정작 나는 집에 와서 가구나 온갖 잡동사니를 보고 울음을 터트렸다. 병원의 간결함이 딱 맞았다. 그때 처음으로 무의식 속에서 여백은 ‘모든 걸 담을 수 있기에 강력하다’는 걸 깨달았다.
- 「1. 1903년에 시작된 이야기」어느 오후, 드로잉북을 껴안은 채 작업실의 엄숙한 분위기에 다소 위축된 나는 커다란 안경 너머로 눈빛을 읽을 수 없는 르코르뷔지에 앞에 섰다. 그의 첫 인사말은 다소 차가웠다. “용건이 뭡니까?”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그는 드로잉북을 빠르게 훑어보고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쿠션에 수놓지 않아요.” 그러고는 출입문까지 안내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용기 내어 집 주소를 남기며 살롱 도톤에 작품을 냈다고 알려 주었다. 다시 만날 거란 기대감은 없었다.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났다. 누구도 내 매력이 작용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다음 날 오후, 살롱전에서 장 푸케를 만났다. 그는 환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아침에 네 부스에서 르코르뷔지에와 피에르 잔느레를 봤어. 함께 일하자고 할 거 같아. 편지가 오지 않을까 싶은데.”
- 「2. 르코르뷔지에, 개척자의 시대」
작가 소개
지은이 : 샤를로트 페리앙
프랑스의 건축가이자 디자이너로, 기능적인 생활공간을 강조하며 더 나은 삶을 위한 디자인을 추구했다. 20세기 초반 남성 중심의 건축·디자인계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1920년 장식미술연맹학교에 입학해 가구 디자인을 공부했으며, 1927년 살롱 도톤(Salon d’Automne)에 출품한 ‘지붕 아래 바(Bar sous le toit)’로 이름을 알렸다. 이를 계기로 르코르뷔지에의 작업실에 들어가고, 10년 동안 르코르뷔지에와 그의 사촌 피에르 잔느레와 협업하며 주로 가구 작업에 참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일본과 베트남에서의 체류 경험이 페리앙의 자연주의 미학과 간결한 형태 감각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7~1982년 레자르크(Les Arcs) 스키 리조트 설계는 페리앙 후기 작업의 정점으로 꼽힌다. 그녀의 작업은 오늘날까지도 재조명되고 있으며, 2019년 파리 루이비통재단미술관과 2021년 런던디자인뮤지엄 등에서 열린 회고전을 통해 현대 디자인사에서의 위상을 다시금 입증했다.
목차
추천의 글
1. 1903년에 시작된 이야기
2. 르코르뷔지에, 개척자 시대
3. 전쟁 시기, 일본과 인도차이나
4. 현실 시대
5. 레저 건축물, 설비, 환경
6. 무(無)와 공허 사이
감사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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