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중국사 개설서의 대부분에는 당 황실과 그 지배층의 성격과 관련하여 ‘관롱집단설’이 소개되어 있다. 북조北朝 말 이래 서위西魏·북주北周·수隋·당唐 네 왕조의 황실과 지배층은 관중關中 지역과 농서?西 지역 출신으로 호한胡漢 혼혈이거나 호한 문화에 익숙한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 주장을 담은 책이 바로 1943년에 출간된 진인각陳寅恪의 『당대정치사술논고唐代政治史述論稿』이다.
이 책은 유목 문화의 영향 속에서 성장한 당 황실 및 지배층의 출신과 그 세력 확대 과정, 당 멸망까지 지배층의 역학 관계 및 정치 정세의 변화, 당조의 멸망과 이민족 정세 사이의 관계를, 저자의 박람한 사료 섭렵, 치밀한 논증 그리고 역사에 대한 거시적인 통찰을 바탕으로 정치 측면에서 당조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이를 통해 특히 당조의 역사를 정주 지역과 유목 지역의 연동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여 당조가 한족漢族 중심의 왕조라는 시각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그 관점은 이후 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현재 유라시아 대륙 속에서 중국사를 이해하려는 시각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당대정치사술논고』는 여전히 명저名著로서 일독할 만하다.
출판사 리뷰
진인각은 수당의 통치제도를 분석한 『수당제도연원략논고』와 당대 정치사를 다룬 『당대정치사술논고』를 통해 당조(唐朝)의 성립과 통치 구조의 성격을 밝히고자 하였던 것이다.
1943년 중경(重慶)의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처음으로 출간된 『당대정치사술논고』는 모두 세 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상편 통치계급의 씨족 및 그 부침」, 「중편 정치 혁명 및 당파 분립」, 「하편 이민족 성쇠의 연동성 및 외환(外患)과 내정(內政)의 관계」 등이다. 상편에서는 당의 초대 황제 이연(李淵) 및 당의 건국 세력은 서위 우문태(宇文泰)의 관중본위정책으로 결속된 관롱집단의 일원으로서 권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무측천(武則天)이 관중본위정책을 거부하고 산동(山東)과 강남(江南) 출신의 과거 합격자를 중용함으로써 관롱집단이 결국 현종(玄宗)대에 이르러서는 와해되었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중편에서는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의 성격, 안사(安史)의 난(亂) 이후 환관의 권력 장악, 황위 계승의 불안정, 우이당쟁(牛李黨爭)의 성격 등 당초(唐初)부터 당말(唐末)까지 벌어진 주요 정치 사건 및 권력 투쟁의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하편에서는 주변 민족의 흥망과 당조와의 관계에 대해 당과 돌궐, 위구르, 토번, 고구려, 남조(南詔) 등 사이의 관계 변천 및 이민족 세력 사이의 연동성과 그 위협이 당조의 정치에 미친 영향을 기술하며 당의 멸망이 단지 황소(黃巢)의 난(亂) 때문이 아니라 계림(桂林) 등 서남지역의 혼란 때문이라고 하여 당의 성쇠가 주변 민족과의 관계와 연동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곧 이 책은 유목 문화의 영향 속에서 성장한 당 황실 및 지배층의 출신과 그 세력 확대 과정 등 당 건국의 지배층의 성격을 분석하고 이어서 당 멸망까지 지배층의 역학 관계 및 정치 정세의 변화를 추적하여 정치 측면에서 당조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당 황실 및 지배층이 이민족의 영향을 받아 등장하고 성장한 것처럼 당조의 멸망도 이민족의 관계가 주요 요인이라는 것을 지적하여 당조 내내 당조의 정치에서는 이민족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를 통해 당조의 역사를 정주지역과 유목지역의 연동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 논증을 위해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등 정사만이 아니라 『태평광기(太平廣記)』 등 필기 소설, 비명(碑銘), 돈황 출토 문서 등 다양한 사료를 박람하게 인용하고 신중하게 분석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이후 당대사 연구 및 중국사에 대한 시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선 당조가 한족(漢族) 중심의 왕조라는 시각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이것은 중국학계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학계, 일본학계, 그리고 구미학계 모두에 영향을 끼쳤다. 그의 연구는 이후 당조가 광대한 영토를 지배한 이유를 설명하는 연구나 당조를 이른바 ‘세계제국’으로 성격 규정하는 연구 등에서 주요한 논거로 여전히 인용되고 있다.
더욱이 오늘날 중국사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경향 중 하나인 유라시아 대륙 속에서 중국사를 이해하는 연구 경향에서도 그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종래 중국과 그 인근 지역과의 관계를 설명할 때 주된 관점이었던 ‘동아시아세계론’ 혹은 ‘동아시아문화권’은 중국 중심적 시각이었으나 근래에는 유목지역의 역사적 위상을 강조하면서 유라시아대륙 속에서 중국사를 파악하여 중국을 상대화하는 연구 성과가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정주지역과 유목지역의 연동으로 당조의 역사를 파악하려는 그의 관점이 더욱 긍정적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이유이다. 이처럼 『당대정치사술논고』는 이제까지 진행된 당대사 연구뿐만 아니라 오늘날 주목받고 있는 유라시아 대륙 속에서 중국사를 이해하려는 시각에도 영향을 지속적으로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명저(名著)로서 손색이 없다고 할 것이다. _옮긴이의 말 中에서
“무릇 투항한 번이(蕃夷)에 대해서 은혜를 베풀어 대접하였으며 … (중략) … 안녹산은 오랑캐의 말에 능통하여 몸소 스스로 그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지고, 포로로 사로잡은 자들을 모두 석방하여 전사로 삼았으니 그 수하들은 기꺼이 사력을 다하였으므로 싸우는 대상 가운데 앞에서 맞서는 이가 없었다.” 고 하였다. 이것이 곧 안녹산이 중앙아시아 호인으로서 지닌 상업과 언어 방면의 특출나고 뛰어난 장점을 이용하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이다.
장헌성과 설숭이 비록 모두 높은 신하의 자손이었고 또한 하삭 지역의 토착인이 아니었을지라도 그의 부친이 범양에서 관직을 맡았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그 지역에서 살면서 점차 물들어 호화되었고 마침내 전승사의 무리와 다를 것이 없게 되었다. 풍속이 사람을 바꾼 것이 이처럼 너무 지나쳤으니 하삭 지역의 당시 사회 문화의 정황 역시 미루어 알 수 있다.
“영호초는 건국 초기 십팔학사(十八學士) 가운데 한 명인 영호덕분(令狐德?)의 후손이라고 스스로 말하였다.”고 하였다.
『신당서』 영호초전에서는 비록 ‘스스로 말하였다[자언(自言)]’ 두 글자를 삭제하기는 하였지만 그 책 권75하 재상세계표 영호씨(令狐氏)조에 따르면 영호초는 실제 영호덕분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구당서』 열전의 ‘스스로 말하였다[자언(自言)]’라는 말은 굳이 삭제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무릇 영호초·영호도(令狐?) 부자는 대대로 재상을 이었고 더욱이 우당의 중견 인물이 되었으나 그 가계의 보첩(譜牒)이 의탁하고 있는 바 역시 백민중의 사례와 같았다. 바로 우당 혹은 신흥 계급이 스스로 칭한 문벌은 신뢰할 만하지 않다는 것은 이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진인각
1890년 중국 장사(長沙) 출생으로 일본 도쿄의 고분가쿠인(弘文學院), 중국 상해의 복단공학(復旦公學), 구미의 베를린대학, 취리히대학, 파리정치대학, 하버드대학 등에서 수학하였다. 유학 후 귀국하여, 1925년 청화대학(淸華大學)에 교수로 부임한 이후 향항대학(香港大學), 광서대학(廣西大學), 연경대학(燕京大學), 영남대학(嶺南大學), 중산대학(中山大學) 교수를 역임하였다. 전목(錢穆), 진원(陳垣), 여사면(呂思勉) 등과 더불어 ‘현대사대사학가(現代四代史學家)’ 중 한 명으로 칭해진다. 대표적 저서로는 『당대정치사술논고』 외에 『수당제도연원략논고(隋唐制度淵源略論稿)』, 『금명관총고초편(金明館叢稿初編)』, 『금명관총고이편(金明館叢稿二編)』, 『유여시별전(柳如是別傳)』 등이 있다.
목차
옮긴이의 말 / 5
자서(自序) / 15
상편 통치 계급의 씨족 및 그 부침 17
중편 정치 혁명 및 당파 분립 135
하편 이민족 성쇠의 연동성 및 외환과 내정의 관계 339
인명 색인 / 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