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돈을 배우기 전에 사람을 먼저 배우는 경제 수업
시장의 언어로 인간의 얼굴을 다시 읽는다우리는 매일 생산하고 소비하며, 협력하고 경쟁하는 경제구조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 ‘경제’라는 말은 이해하기 힘든, 여전히 낯설고 어려운 개념으로 다가온다. 『고전툰 2 – 경제』는 사상가들의 말을 쉽게 정리하여 소개함으로써 이런 익숙한 낯섦을 깨뜨린다. 돈과 시장, 노동과 부의 개념을 어려운 경제 공식이 아닌 인간의 선택과 가치의 문제로 풀어내며, 경제학이란 결국 “사람이 더불어 잘 사는 법”을 연구하는 학문임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경제는 숫자가 아니라 인간 사회의 이야기다. 애덤 스미스는 개인의 이익이 사회의 이익으로 이어지는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를 발견했고, 마르크스는 노동의 소외와 자본의 모순을 비판했다. 헨리 조지는 토지 불평등을, 베블런은 과시적 소비를, 박제가는 나라의 부강보다 백성의 삶을 먼저 생각했다. 다섯 사상가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서 ‘불평등의 구조’까지, 결국 경제는 인간의 이야기와 다름없음을 보여준다.
자연스럽게 고민할 수 있도록,
읽기만 하지 않고 함께 사고하게 만든다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이들의 사유는 자유와 경쟁, 정의와 공존을 함께 묻는 ‘경제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이 책은 그들의 사상을 만화와 대화, 해설로 풀어내 청소년이 경제의 핵심 원리를 스스로 이해하고 판단하게 돕는다. 히스토리에서 저자의 삶과 시대를 보고, 다이제스트에서 핵심 개념을 익힌다. 고전툰은 이해의 문을 열어주고, 북토크는 사유의 광장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북토크: 지혜의 광장〉에서는 사상가들이 펼치는 가상 대화를 만난다. 이곳에서 스미스와 케인스, 리카도는 시장과 정부의 역할,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의 논쟁을 두고 시대를 초월한 토론을 벌인다. 토론 속에서 독자는 경제를 ‘정답의 학문’이 아닌 ‘사유의 언어’로 배우며,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만들어가는 힘을 기르게 된다.
경제를 배운다는 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는 일이다
청소년이 생각하는 힘으로 세상을 이해하도록 돕는다경제는 단지 돈의 흐름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맺는 관계의 총체다. 산업과 기술이 변해도 노동의 의미와 공존의 윤리는 여전히 우리 곁의 과제로 남는다. 이 책에서 사상가에게 던져진 “성장의 끝은 어디인가?”, “공정한 사회란 어떤 모습인가?” 등의 문제는 단순히 사상가에게만 던져진 책 속의 질문이 아니다.
이 책은 사상가에게 던져진 근본적인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며, 단순히 경제를 ‘지식화’하는 데서 멈추지 않도록 돕는다. 독자 스스로 경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도우며, 경제를 공부하는 일이 곧 세상을 이해하는 일임을 깨닫게 한다. 질문에 대해 고민하며 새로운 이해와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며, 생각하는 힘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생각하는 학생이 세상을 바꾼다.
교사들이 먼저 읽고, 학생에게 가장 권하고 싶은 청소년 경제 교양서교사들은 이 책을 “복잡한 경제를 단순한 공식이 아닌 사람의 이야기로 다시 배우게 하는 교재”라 평했고, 학생들은 “읽을수록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책”이라 답한다.『고전툰 2 - 경제』는 교실에서는 토론 수업의 교재로,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녀가 함께 읽는 대화의 장으로, 사회에서는 시민의 교양을 일깨우는 프로그램으로 확장될 수 있다. 경제를 통해 세상을 읽고, 지식을 쌓는 공부가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참여하는 공부, 그 새로운 길 위에 『고전툰』이 있다. 이 책을 덮는 순간, 독자는 경제를 넘어 ‘함께 살아가는 법’을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세상을 통해 다시 인간을 배우는 이 시리즈는 청소년 민주시민 교육의 든든한 동반자다.

아고라: 우리는 매일 아침 출근해 정해진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을 다해 일하고, 그 대가로 월급을 받습니다. 이 과정은 너무나 익숙해 마치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해도 내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을까?” “내 월급은 왜 카드값과 월세를 내고 나면 금세 사라져버릴까?” 이런 보편적인 의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더 근본적인 질문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내가 받는 월급은 과연 내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 걸까요? 애초에 그 가치라는 것은 무엇이며, 또 누가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정하는 것일까요?
마르크스: 노동의 가치는 바로 노동자들의 땀과 시간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자본가는 그 땀의 전부를 임금으로 돌려주지 않지요. 노동자가 하루 8시간 일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자기 가족을 먹여 살리는 데 필요한 건 4시간 노동의 가치뿐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4시간 동안 노동자가 창출한 가치는 어디로 갈까요? 바로 자본가의 주머니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잉여가치, 곧 이윤의 비밀입니다. 노동자가 늘 월급이 빠듯하다고 느끼는 건 착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애초에 임금은 노동의 전부가 아니라 절반, 아니 그 이하의 값어치일 뿐이니까요.
스미스: 잠시만요, 마르크스 선생님. 그렇게 비관적으로만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노동이 모든 가치의 근원이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자유로운 경쟁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임금은 자연스럽게 균형을 찾습니다. 노동력이 귀하면 임금은 오르고, 일자리를 원하는 사람이 많으면 임금은 내려가게 마련이지요. 사람들은 언제나 임금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이런 균형을 맞춥니다. 문제의 핵심은 자본가 개인의 탐욕이라기보다, 시장의 흐름을 왜곡시키는 독점, 특권, 불공정한 제도 아닐까요? 저는 바로 그 부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슘페터: 두 분 모두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는 임금을 단순히 착취냐, 균형이냐로만 설명할 수 없다고 봅니다. 임금은 무엇보다 혁신과 생산성에 달려 있습니다. 증기기관이 도입됐을 때를 떠올려보세요.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을까 두려워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산성이 크게 높아지고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가 생겼습니다. 그 결과 임금 수준도 점차 나아졌지요. 임금은 고정된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파도와 같습니다. 자본주의는 분명 위기와 불만을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생활수준을 높이는 힘도 가지고 있습니다.
- 카를 마르크스『자본론』, 북토크 - 자본주의는 정말 망할 운명인가? 중에서
아고라: 인류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부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생산성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빈곤은 사라지지 않고, 도시 빈민, 청년 실업, 주거 불평등 같은 문제들은 오히려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조지: 바로 그 질문이 제가 평생을 바쳐 탐구한 주제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진보의 성과가 토지 소유자에게 독점되기 때문입니다.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가 부유해지면 그에 따라 토지의 가치, 즉 땅값과 임대료가 폭등합니다. 결국 노동자는 임금이 올라도 그보다 더 가파르게 오르는 임대료를 감당하느라 실질적
인 삶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모든 진보의 혜택이 일하지 않는 지주(地主)의 주머니로 빨려 들어가는 구조, 이것이 바로 진보 속의 빈곤이라는 모순의 핵심입니다. 서울이나 뉴욕의 집값을 보십시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월세나 대출 이자를 내다보면 남는 게 없습니다. 빈곤의 악순환이지요.
페인: 조지 선생님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여기에 조세 정의라는 관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개인이 노동과 노력으로 만든 것은 그 사람의 것이지만, 토지와 같이 사회 전체가 만든 가치는 사회가 환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토지세와 상속세가 정당한 세금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모은 재원을 모든 시민
에게 기본소득으로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기본소득은 단순히 돈을 나눠주는 제도가 아닙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공동의 자원에서 최소한의 권리를 인정받는다는 신호입니다. 가난 때문에 아이가 교육을 포기하거나, 청년이 꿈을 접는 일이 줄어들고,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경제적으로도 기본소득은 소비를 늘려 사회 전체의 활력을 높이고, 불평등이 완화되면서 공동체의 결속도 강해집니다.
스펜서: 두 분께서는 사회를 너무 기계적으로 보시는군요. 사회는 경쟁을 통해 발전하는 유기체와 같습니다. 사회가 진보하면서 불평등이 나타나는 것은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자연에서 생명체들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며 생존하듯이, 사회도 경쟁을 통해 더 강한 집단과 개인이 앞서 나가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뒤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적자생존입니다. 물론 그것이 불편하게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런 경쟁이 사회 전체의 힘을 키워온 것도 사실입니다. 진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평등 역시 사회가 더 강해지기 위해 겪는 성장통과 같습니다. 이를 세금이나 인위적인 재분배로 억지로 바로잡으려 한다면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사회를 발전시키는 경쟁의 동력을 꺼뜨리게 될 것입니다. 빈곤의 해결은 단일세나 기본소득 같은 강제적인 제도 개혁이 아니라, 개개인이 교육을 통해 스스로 역량을 키우고 도덕적으로 성장하여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해나갈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조지: 스펜서 선생님의 말씀은 지나치게 낙관적입니다. 토지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더 벌어집니다. 우리가 제도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불평등은 결코 자연스럽게 완화되지 않습니다.
페인: 맞습니다. 저도 자유와 경쟁을 존중하지만, 최소한의 안전망이 없는 경쟁은 폭력에 가깝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자유롭게 경쟁하라고 말하는 것은 공허합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기본소득은 동정이 아니라 권리입니다.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공동의 자원에서 자기 몫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경쟁에 참여할 최소한의 자격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기회균등입니다.
- 헨리 조지『진보와 빈곤』, 북토크 - 토지는 누구의 것인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