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동서 교회의 분열을 문명사적 비극으로 풀어낸 역사서다. 1054년 대분열과 1204년 콘스탄티노플 약탈을 중심으로, 기독교 세계의 단절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추적한다. 『가디언』이 극찬한 바와 같이 복잡한 역사를 서사적으로 풀어낸다.
저자는 분열의 원인을 단순한 교리 논쟁이 아닌 정치와 권력, 민족 간 경쟁에서 찾는다. 필리오케 논쟁보다 십자군과 침략, 상업 경쟁이 갈등을 심화시켰음을 분석한다. 동서 교회가 서로의 ‘영적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단절을 짚는다.
11~12세기를 중심으로 펼쳐진 갈등의 흐름을 촘촘하게 재구성하며, 대분열이 단일 사건이 아닌 누적된 역사적 긴장의 결과였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종교, 정치, 문화가 얽힌 복합적 충돌을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문명적 균열을 성찰하게 하며, 교회사와 인류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연구서다.
출판사 리뷰
영국의 <가디언>지가 극찬한 바로 그 책!
“복잡한 신학적 교리 논쟁과 외교적 술책을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명쾌하게 읽히도록 엮어진 비범한 책!”
1054년,
교회사에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그들은
왜, 이토록 죽으라고 싸웠던 것인가?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1204년의 약탈만큼 인류에 대한 범죄는 없었다.
이것은 동방과 서방 사이의 분열을 영구적으로 고착시켰고,
수 세기에 걸쳐 쌓아온 공존의 희망을 완전히 파괴한 비극적 전환점이었다.
역사상 동방과 서방 기독교의 분열을 안타까워하는 발언은 수없이 많았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순수한 청년 알료샤 카라마조프의 실제 모델이었고, 레프 톨스토이에게 깊은 문학적 영감을 제공했던 러시아의 플라톤으로 불리던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는 러시아 정교회 소속이었음에도 가톨릭과 정교회의 통합에 평생을 바쳤다. 솔로비요프는 기독교 세계가 조직과 질서가 특징인 로마 가톨릭, 정신과 신비를 강조하는 정교회로 나뉜 것을 ‘문명의 절단’, 그러니까 영성적 고통으로 간주했다. 그는 동서 교회 분열이 인류 문명 전체에 도덕적 위기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언젠가 이런 말을 남겼다. “동방과 서방의 분열은 기독교의 유기적 일체성을 파괴한 영적 재앙이다. 이 거대한 분열이 치유되지 않는 한 기독교 문명은 세상을 변화시킬 진정한 힘을 회복할 수 없다.” 분열 이후의 역사를 아는 이라면 누구도 솔로비요프의 우려에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이른바 대분열(Great Schism), 곧 동서 교회의 분열을 기독교 세계의 정신적 단절이자 문명사적 비극으로 규정한다. 런시먼은 대분열의 이유를 단지 행정 절차나 교리 차이에 따른 결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이 책뿐만 아니라 여러 강연에 나설 때마다 기독교의 대분열은 흔히 알고 있듯이 1054년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있었던 훔베르토 추기경의 파문 선언과 그에 따른 동방 교회의 격렬한 반발이 유일한 원인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동서 교회의 상호 파문보다는 오히려 1204년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폭력적 약탈 사건을 대분열을 가져온 진정한 비극의 기점으로 제시한다.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1204년의 약탈만큼 인류에 대한 범죄는 없었다. 이것은 동방과 서방 사이의 분열을 영구적으로 고착시켰고, 수 세기에 걸쳐 쌓아온 공존의 희망을 완전히 파괴한 비극적 전환점이었다.”
아울러서 런시먼은 대분열의 본질 역시 성령 발출과 같은 교리 문제, 그러니까 필리오케(‘그리고 아들로부터’)라는 표현을 신경에 추가하는 문제를 놓고 다투는 신학 논쟁보다 동방과 서방의 민족적 경쟁심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평가한다. 런시먼이 이 책 마지막에서 결론짓듯이 분열은 11, 12세기의 다양한 정치 사건에서 비롯된 동방과 서방 세계 구성원의 반감에 기초했다(“비극은 양측이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었다는 점이 아니라 서로의 영적 언어를 번역하려는 의지조차 상실했다는 데 있다”). 달리 말해서 노르만족의 군사적 침략, 이탈리아 해양 도시들의 상업적 침략, 그리고 아주 그럴듯한 명분으로 시작했으나 야만적으로 진행된 십자군 운동 전체가 타오르는 분열의 불길이었다면, 서방의 법률 중심적이고 경직된 사고와 동방 비잔티움 제국의 신비주의적이고 유연한 사고가 화합하지 못한 채 충돌해 거기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런시먼은 대분열로 표출된 동서 교회 갈등과 충돌의 역사를 11세기와 12세기를 중심으로 이 책에서 설득력 있게, 그러면서도 아주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간다.
“분열의 시작은 헬라계와 라틴계 총대주교들이 최고 자리를 놓고 경쟁하기 시작한 시점으로 보는 편이 훨씬 더 정확하다. 이런 경쟁이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 분열이 진행되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교회마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시점은 제각각이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특정 주교의 관할 지역에서 경쟁이 발생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지역 구성원 모두가 분리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분열 상태는 교회에 속한 일반 신자들이 그것을 실감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실제로 성립했다고 볼 수 있고 그런 인식은 몇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특정 날짜를 못 박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 동방과 서방의 기독교 세계는 오래전부터 서로 다른 세계관을 유지했다. 동방 기독교 세계는 헬레니즘적 정신이 깃든 지역에서 형성되었다. 문화 배경과 공통 언어는 그리스어였고 고대 그리스의 사변적 사고를 물려받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오래전에 동방의 뛰어난 지식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사상가들은 나름대로 끝없는 토론과 논쟁을 통해 기독교 계시의 철학적 의미를 완벽하게 도출하려고 했다. 상대방이 이단에 빠졌다고 증명하는 게 일종의 지적 유희가 되었고 특정 신학자의 주장이 충분한 논쟁을 거치지 않으면 누구도 정통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분열의 시작 중에서
“1054년 7월 16일 토요일 오후, 예배 의식이 막 시작되려는 순간 훔베르토와 동료 사절들이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으로 거침없이 들어가 미카엘 케룰라리오스, 오크리다의 레오, 총대주교 비서 미카엘 콘스탄티노스와 추종자 전부를 파문하는 교황의 교서(Bull)를 제단에 올려놓았다. …어느 부제가 황급히 뒤따라가 그들에게 파문장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이 거부하자 부제는 파문장을 길바닥에 팽개쳤다. …칙서는 케룰라리오스 개인이나 콘스탄티노플 주교로서 마땅한,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거부하며 시작했다. 이 칙서는 비잔티움 제국과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을 비난할 수 없었지만, 케룰라리오스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성직매매(훔베르토가 잘 알듯이 당시 서방 교회에 만연했던 악덕), 거세 조장(로마에서도 있었던 관행), 라틴계 신자들에게 재 세례 강요(당시는 사실이 아니었음), 사제들의 결혼 허용(사실과 달랐음. 기혼 남성은 사제가 될 수 있었으나 서품된 사람은 결혼할 수 없었음), 출산 중인 여성, 심지어 출산하다 죽어가는 여성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것은 초기 기독교가 인정한 훌륭한 관행)과 모세 율법의 폐기(사실과 달랐음), 수염 깎은 남성에게 성찬을 거부하는 것(이것 역시 사실이 아니었음. 그리스인은 수염 깎은 사제를 못마땅하게 여겼음), 신경 가운데 한 구절을 누락한 것(사실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런 비난을 제기하고 난 뒤로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라틴계 교회들이 폐쇄된 것과 교황청에 대한 불복종 문제에 대한 불만이 설득력을 잃어버렸다.”
파국 중에서
“무엇보다 불운했던 것은 비잔티움 영토에 최초로 진입한 십자군이 가장 난폭하고 조직력을 갖추지 못한 군대였다는 사실이다. 은자 피에르와 고티에 생자부아는 자신들이 이끄는 격앙된 농민 군중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피에르 자신은 비잔티움 농민 사이에서 어느 정도 신망을 얻고 있었다. 피에르는 당시 사람들이 성인으로 여길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가난하고 못생기고 지저분한 모습에, 역시 못생기고 지저분한 나귀를 타고 다녔다. 발칸반도 곳곳에서 주민들이 잡다한 무리에 합류했고 많은 사람이 그를 후원했다. 황제마저 그의 성품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추종자들은 여정의 단계마다 물건을 훔치거나 소요를 일으켰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도움에 전혀 감사하지 않았다. 그들은 조언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전적으로 자신들의 탐욕과 어리석음 때문에 키보토스에서 대재앙(1096년 10월, 은자 피에르가 이끌던 민중 십자군이 셀주크 튀르크 군대에 사실상 전멸한 사건)을 자초했을 때도 모든 책임을 황제 탓으로 돌렸다.”
십자군과 비잔티움의 갈등 중에서
작가 소개
지은이 : 스티븐 런시먼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 교수(펠로우)를 역임했다. 2차대전 당시에는 불가리아와 이집트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었고, 이스탄불대학과 그리스대학에서 비잔티움과 지중해 역사를 강의했다. 주요 저서는 「십자군 전쟁사」, 「1453 콘스탄티노플 함락」, 「비잔티움 문명」, 「시칠리아의 저녁 기도」를 비롯해 18권이 있다. 프린스턴대학과 시카고대학 등 전 세계 10여 개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3부작 「십자군 역사」의 집필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와 영연방 최고 명예 훈장(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 CH)을 수여 받은 20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중 한 명이다.
목차
옮긴이 머리말 _ 분열의 치유를 위해
프롤로그 _ 분열을 넘어서
Section 1. 대분열
- 분열 원인
- 갈등하는 동서 교회
- 사르디카와 칼케돈 공의회
-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 총대주교 포티오스
Section 2. 미카엘 케룰라리오스
- 필리오케 논쟁
- 공무원, 케룰라리오스
- 두 통의 편지
- 교황의 사절단
- 파국
- 분열의 주모자
Section 3. 1054년부터 1차 십자군까지
- 새로운 돌파구
- 황제 알렉시오스
- 계속되는 갈등
- 동방의 상황
- 예루살렘과 러시아 교회
- 우르바노와 안셀무스
Section 4. 교회와 십자군
- 십자군과 비잔티움의 갈등
- 갈등의 주역들
- 주인 없는 성도(聖都), 예루살렘
- 안티오키아의 분열
- 봉합되지 않은 상처
Section 5. 외교와 논쟁
- 갈등의 배경
- 알렉시오스 황제와 교황들
- 안나 콤니니의 알렉시아스
- 계속되는 논쟁
- 외교의 성과
Section 6. 적대감의 확산
- 2차 십자군 원정
- 콘스탄티노플 대학살 사건
- 두 황제
- 악당, 발사몬
- 평행선
Section 7. 4차 십자군
- 어긋난 기대
- 콘스탄티노플 공방
- 십자군의 약탈
- 깊게 팬 상처
- “당신들도 이단이다!”
Section 8. 분열의 시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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