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청소년 인문교양소설 <공자, 지하철을 타다>, <장자, 사기를 당하다> 등을 통해 특유의 생생하고도 깊이 있는 이야기 솜씨를 인정받은 철학자 겸 작가 김종옥. 저자의 책에는 종이 위에 인쇄된 지루한 글이 아니라, 마치 무더운 여름날 찾은 계곡의 물소리처럼 시원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특히 이번 <철학의 시작>에서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21세기 현대까지의 수많은 철학자의 사상, 과학자의 핵심 이론을 비롯해 아름다운 시구, 흥미진진한 소설 속 문장, 영화의 명장면, 신문 사회면 뉴스까지 망라하면서 그것들이 '나의 철학'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명쾌하게 들려준다.
출판사 리뷰
소크라테스와 공자, 마르크스와 러셀, 스테판 에셀… … .
세기의 철학자들이 외치는 한목소리!
“지금 당장 ‘나와 너, 우리 모두’를 위한 철학을 시작하자!”
■ 불안과 반항의 ‘중2병’ vs. 열정과 행복의 ‘철학병’
“북한도 무서워 침략을 주저한다는, 호환 마마보다 더 무시무시한 ‘중2병’!” 어른들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반은 우스갯소리로(반은 울화에 휩싸여) 열다섯 살 무렵의 아이들을 으레 이렇게 부르고, 이렇게 대한다. 하지만 아이들을(또는 나 자신을) 중2병이라고 쉽게 단정 짓기 전에 ‘왜 아이들은(왜 나는) 이 무렵에 고독과 불안, 자신에 대한 연민 또는 허세, 세상에 대한 불만과 반항으로 가득 차게 되는 걸까?’ 한번쯤은 고민하고 이해해보자.
이 책의 저자 김종옥은 열다섯 살 아이들이“내리깐 눈은 그대로 둔 채, 고개를 약간 삐딱하게 외로 꼬면서 턱을 쳐들기 시작하는”이유를 들려준다. “수천 혹은 수백만 년 동안 인류에게 이어진 질문-‘나는 누구인가, 나와 우주(세상)는 어떻게 생겨났나, 나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이 십 대의 초반에 한꺼번에 몰아닥쳐 와서 문을 두드리면, 우리는 불안한 열정에 휩싸인다. 다만 그때는 어쩐지 홀로 앓고 있는 병 같아서 누구와도 얘기를 나누지 못하는 거다. ” 그렇다. 대체로 사춘기가 시작될 때 우리는 ‘나와 내가 살고 있는 이 우주(세상)에 대한 끝없는 질문’에 빠져버린다.‘철학병’에 덜컥 걸려버리는 거다. 어쩌면 아이들은 거대한 질문의 바다, 철학의 바다 위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 채 표류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그 고독과 불안을 향해 반항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책은 아이들의 그 불안한 열정이 즐겁고도 깊이 있는 생각으로, 행복하면서도 책임감 있는 삶으로 바뀔 수 있도록 응원한다. 아이들의 질문과 고민이 진정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앞으로 어떤 ‘앎과 삶’을 누려야 하는지 들려주면서 철학병에 더 심하게 걸리길 권한다.
“대체 생각을 뒤집고, 파헤치고, 깨부수지 않고서 어떻게 청년이 될 수 있다는 말이지? 철학이란 나 자신과 세상을 향해 치열하게 질문하고 행동하고 책임지는 ‘삶’이면서, 나와 세상에 대한 ‘사랑’이야. 그러니 지금 ‘나’만의 철학을 시작하자. 나를 가두는 경계를 뛰어넘어 우주의 시민이 되자. 철학적 성찰과 열정과 용기로 매 순간 새로운 나를 만들자. 내가 있어 행복한 나, 내가 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
우리는 할 일이 많아. 나와 세상의 어디가 아픈가도 찾아내야 하고, 무엇이 좋은 방향인가도 알아야 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릴 체력과 실력, 열정도 키워야 하고, 드높이 소리치고 멀리 가는 노래를 부를 용기도 있어야 해. 세상을 보는 눈, 자기 삶을 성찰하는 이성, 아름다운 열정을 두루 갖추고 용감히 나서야 해. 느끼는 일도, 찾는 일도, 외치고 나서는 일도 모두 나의 일, 너의 일, 우리의 일이야.
-본문 중에서
청소년 인문교양소설 《공자, 지하철을 타다》, 《장자, 사기를 당하다》 등을 통해 특유의 생생하고도 깊이 있는 이야기 솜씨를 인정받은 철학자 겸 작가 김종옥. 저자의 책에는 종이 위에 인쇄된 지루한 글이 아니라, 마치 무더운 여름날 찾은 계곡의 물소리처럼 시원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특히 이번 《철학의 시작》에서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21세기 현대까지의 수많은 철학자의 사상, 과학자의 핵심 이론을 비롯해 아름다운 시구, 흥미진진한 소설 속 문장, 영화의 명장면, 신문 사회면 뉴스까지 망라하면서 그것들이 ‘나의 철학’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명쾌하게 들려준다. 이제 “능란한 혀로 생각을 희롱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의식을 쪼아대는” 김종옥과 함께 우주시민 철학학교 의자에 앉아 ‘나와 세상’에 대한 격렬한 수다를 본격적으로 떨어보자. 잠깐, 우주시민 철학학교? 대체 그게 뭐지?
■ 더 이상 ‘자잘한 나’로 살기 싫다면 이제 ‘우주시민’이 되어봐!
“철학적 성찰은, 우리를 단지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전쟁 관계에 있는 도시의 성역 속 시민이 아니라,
우주의 시민이 되도록 한다.”
-버트런드 러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자신을 ‘우주의 시민’이라고 표현한 이래로 생각의 자유를 옭아매는 틀에서 벗어나 있다고, 철학을 한다고 자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우주시민이라고 폼을 잡았다. 우리는 철학을 시작하게 되면 안으로는 스스로 만든 틀을 부수면서 나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고, 바깥으로는 내가 속한 학교, 도시, 국가, 인종을 넘어 끝없이 펼쳐진 우주의 까마득한 시공간으로 생각을 확장해간다. 그래서 내가 삶의 매 순간 철학을 한다면 나의 영역은 나 자신과 이 우주 전체가 되며, 나는 우주시민이 된다. 그러니까 우주시민 철학학교는 이 우주시민증을 발급받는 곳이군!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언이나 ‘호모사피엔스(지혜로운 인간)’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듯 사람은 누구나 철학자로 태어난다. 누구나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 어떤 날이면 자신만의 외로움의 동굴로 들어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같은 본질적인 질문을 선두로 하여 철학을 시작하게 된다. 그날이 오면 세상 모든 것이 침묵의 바다에서 튀어나와 철학의 바다로 몰려든다. 철학이란 이처럼 내 존재와, 내 존재가 태어난 이 우주(세상)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이어가면서 스스로에게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철학은 다른 학문과는 구별되는 특성이 있다. 첫째, 철학적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예를 들어‘생명이란 무엇인가?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정답이 있을 순 없잖은가? 중요한 건 질문을 던지고 세상의 지식과 상식을 발판 삼아‘나만의 성찰 렌즈’로 질문의 답을 스스로 찾아나가는 과정에 있다. 둘째, 철학은 오지랖 넓은 참견꾼 같아서, 철학의 질문에는 한계가 없다. 모든 학문을 동원해 나와 내 주변, 내 우주를 알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는 동안은 이 세계, 이 우주는 바로 나를 둘러싼 껍데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나를 궁금해하고 근심하듯 내 세상을 궁금해하고 근심하는 거다. 때문에 우리는 내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나’들에게 수많은 생명체와 생명 아닌 것들에게 친절해야 한다. 내가 태어나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이상, 나는 나와 내 세계에 책임이 있다. 나와 내 세상(그리고 그 안의 수많은 존재들)을 치열하게 알아갈 것, 나와 내 세상에 치열하게 발언하고 행동할 것, 그래서 내가 산 만큼 내 세상을 만들 것. 이게 중요하다. 마르크스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중요한 건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
■ 내 안에 수천 혹은 수백만 년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
재밌는 사실은, 우리가 가지기 시작하는 철학적 질문들, 생명과 우주에 관한 이 소박한(?) 질문들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미 이천 몇백 년 전부터 똑같이 시작되었다는 거다. 다만 지금 우리는 이천 몇백 년의 세월 동안(크게 보면 수백만 년 전 ‘호모속’의 원인류부터) 인류가 쌓아놓은 엄청난 지식을 기반으로 철학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우리는 그 생각들을 한 발 한 발 딛고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앉아 나와 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동서양 철학의 아침을 연 철학자들만 살펴봐도 그 어깨의 넓이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먼저 서양철학의 시조로는, 만물의 근원을 찾아 헤매던 자연철학자들, 평생 ‘선(착함)’에 몰두했던 소크라테스, 철학자가 다스리는 이상 사회를 꿈꾸던 플라톤, 모든 사물 속에서 진리를 찾았던 아리스토텔레스, 완전한 자유혼의 소유자인 디오게네스, 방탕과 탐닉이 아닌 ‘고요한 쾌락’을 강조한 에피쿠로스, 캔디처럼 참고 또 참으며 신에게 순응한 스토아학파 등이 유명하다.
동양에서도 서양과 비슷한 시기에 본격적인 철학의 시대가 열렸는데, 군자의 덕목‘어짊(인)’을 설파하면서 이천 년 가까이 동양의 스승이 된 공자, 인간은 본디 착한 존재라고 굳게 믿는 동시에,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서라면 혁명도 불사하자던 맹자, 인간은 악하고 이기적이므로 ‘예’로써 통치해야 한다는 순자, 그보다 더 나아가 오직 강력한 법으로 세상을 다스리자는 한비자,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자면서 전쟁 반대를 내걸었던 묵자, 명예나 재물에 연연하지 않았건만 천하의 이기주의자로 몰려버린 양주, 억지로 무엇인가를 하려 들지 말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라는 ‘무위자연’의 사상가 노자와 장자,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로서의 말에 집중한 혜시와 공손룡 등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다.
이처럼 나에게 철학이 어떻게 시작되었나, 인류에게 철학이 어떻게 시작되었나를 봤으니, 이제는 철학의 나래를 더욱 크게 펼쳐보자.
■ 나는 우주의 일부요 전부니라!
철학적 사색의 시작은 우주다. 서너 살 때 우주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어 밥도 못 먹었다는 육상산 정도는 아니지만, 보통 우리는‘이 우주는 무엇이고, 나는 어디에 서 있나?’로 철학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우리 세상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알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이 우주의 시작은 무엇일까? 중국 철학의 전통에서도, 현대 과학의 우주론(중 일부)에서도 우리 우주는 ‘없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무’의 에너지가 일순간 ‘있음’의 에너지로 변신해 138억 년 전 빅뱅이라는 대폭발이 일어났고, 그 이래로 이 우주에는 물질과 생명들이 탄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우주는 질서 정연한가 뒤죽박죽인가, 우주에는 진리가 있는가, 없는가? 아주 옛날부터 사람들은 우주를 관통하는 궁극의 진리를 찾아왔다. 그 최고의 진리를 알면 세상의 모든 진리를 알게 될 거라는 기대에서다. 이를 ‘만물의 이론’, 또는 ‘최종 이론’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우주를 지배하는 힘의 논리를 알아낸다고 해서 ‘나’도 저절로 설명될까?
그리고《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나오는 초슈퍼컴퓨터 ‘깊은 생각’은 ‘삶과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한 가지 해답’이 어이없게도‘42’라고 했지만, 이 드넓은 우주에는 의혹과 불확실성이 가득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러시아 출신의 과학자 프리고진은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한다. “이 세계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는 가운데 그 안에서 변화하는 질서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자기 구성의 세계다.” 이 생각대로라면 이 우주는 아주 흥미진진한 대상일뿐더러 매우 조심스러운 대상이다. 모든 순간 스스로도 모르는 무엇인가로 변하는 동시에, 그 구성에 나도 참여하기 때문이다. 아하! 그러니까 우리는 뜨개질을 하듯 끝이 정해지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중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직사각형의 뜨개옷이 목도리가 될지 바지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나의 삶이 내 세계, 내 우주의 자기 구성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매 순간 나를 넘어서자. 그것이 나의 역사이고 곧 ‘나’다!
“우주의 장엄한 일에 기쁘게 책임감을 갖고 참여하며 우주 안에서 산다.”
-스콧 니어링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전의 명언을 빌려 “너 자신을 알라”고 당부했지만,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나를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상상을 해보자. 어느 날 나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고 서 있는 ‘나’와, 나의 생체에 대한 모든 정보(뇌의 기록까지 포함해서)를 입력해서 복제한 ‘나’. 이렇게 둘이 서 있다. 자, ‘나’는 어느 쪽에 있는 걸까?
이 답을 찾기 위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내가 태어나기까지 일어난 어마어마한 도약들이다. 나를 포함하는 모든 인간은 약 40억 년 전 하나의 유기물 덩어리가 우연히도 그리고 고맙게도 자기복제를 시작하면서 탄생했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말처럼 생명의 목적이 단순히 ‘유전자의 전달’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40억 년 전의 ‘대탄생’이 있었기에 지금 여기에서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첫 번째 커다란 도약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은 어떻게 생겨난 걸까? 어떻게 물질인 뇌에서 의식이 생겨나, (다른 생물과는 달리) 나의 존재와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철학적 사색을 멈추지 않는 걸까? 이것이 두 번째 커다란 도약이다. 어쨌든 이렇게 우주로 들어온 나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나의 삶을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생명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우주 안에서 유일한 존재로서의 ‘나’를 구성해가는 것, 그것이 내 삶의 의미다.
이제 무엇으로 나를 구성하는지 대충 알 것 같다. 일단 70억 개체 그 누구하고도 똑같지 않은 ‘생체로서의 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지나온 시간의 터널, 곧 ‘삶’이라는 이름의 내 몫의 시간이 합쳐져야 진짜 ‘나’를 만들 수 있다. 둘 중 무엇 하나가 빠진다면 ‘나’를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까지 내가 살아온 삶을 바탕으로 모든 순간 치열한 선택을 하며 삶을 꾸려가는 것, 그게 바로 ‘나’를 구성하는 일이다. 이렇게 나는 나의 주인이 되고, 매 순간 나를 넘어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역사이며, 곧 ‘나’다. 그래, 또 뜨개질이다!
■ 내가 나의 지렛대이자 걸림돌이라니!
왜 공부할까? 유학의 경전인 《대학》에서는 “열심히 공부해서 자신을 닦고, 나아가 세상을 선(옳음, 좋음)으로 밝히라”고 한다. 열심히 공부해서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자기의 뜻과 마음을 바르게 하며 그걸 바탕으로 세상에 보탬이 되라는 말이다. 이때 나의 ‘앎’과 ‘삶’을 연결하는 단어가 ‘참’이다. 앎에서 참을 얻고, 그걸 바탕으로 삶에서 옳음을 찾아내는 거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내가 아는 게 ‘진짜, 참’이라는 걸 알 수 있을까? 내가 아는 것이 모두 참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장자는 “도는 똥이나 오줌 속에도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옛날부터 진달래꽃을 참꽃, 철쭉꽃을 개꽃(가짜 꽃)이라고 불렀지만 이것은 순전히 나의 입장에서 바라본 앎이다. 철쭉꽃이 생겨날 때부터 가짜 꽃일 리는 없지 않은가? 나의 앎이 참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인식 한계를 넘어서서 전체를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참’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언제든지 길을 잘못 들 수 있기에 늘 나의 생각에 대해 겸손해야 한다. 나는 나를 초월해서 세계 속으로 도약하게 하는 지렛대이자, 그걸 훼방 놓는 걸림돌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는 역사의 순간마다 앎의 진실이 수없이 뒤집혀 온 걸 봤다. 인간 계급, 사회구조, 과학적 진실, 그 어떤 것도 고정된 건 없었다. 그러니 우리는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 속에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우리가 구성하는 앎이 참인지, 그 참을 재는 잣대가 얼마나 보편적이고 공정한지 따져봐야 한다. 그리고 그 참을 바탕으로 착하게, 올바르게 살아가야 한다.
인간은 실제로 세상에 도움 되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이를 알기 위해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연구했다.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와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를 비롯해서, 인간 정신은 백지 상태라고 주장한 로크, 인간은 오직 개별 개체일 뿐 인간이라는 보편적 속성 따위는 없다는 홉스, 이성은 감정의 노예라는 흄 등이 그들이다. 사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냐 악하냐보다는 선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가 중요하긴 하지만 말이다. 칸트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항상 네 행동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으로 정립될 수 있게 행동하라.”
《공감의 시대》를 쓴 제러미 리프킨은 ‘호모엠파티쿠스(공감하는 인간)’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인간의 본성은 ‘공감하는 존재’라고 했다. 이를 통해 단일 종이라는 생물학적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멸종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거다.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 유교의 어짊(인)도 바로 이 공감하는 능력, 남의 기쁨과 즐거움과 아픔과 슬픔을 공유하는 마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고 생물학자들은 우리 인간의 내면에는 침팬지류의 투쟁적 본성과 보노보류의 평화주의가 공존한다고 말한다.
어쨌든 중요한 건 ‘세상과 내가 어떤 관계를 맺어나갈 것이냐’다. 나의 세상 속에는 나를 포함해서 수십억의 사람이 있고, 수많은 생명체가 있고, 지구가 있고, 은하계가 있고, 우주가 있으니 말이다. 나는 이 속에서 올바르게 사는 길을 걸어야 한다. 그것이 나를 위한 길, 너를 위한 길, 모두를 위한 길이다.
■ 내가 있어 행복한 나, 내가 있어 행복한 세상 만들기 프로젝트, 철학!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스테판 에셀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란 무엇일까, 그런 세상은 실현될 수 있을까? 플라톤은 최고의 국가, 이상 국가를 말했고, 유학의 경전인 《예기》에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신분과 재물의 공평한 분배, 인륜의 완전한 구현을 이룬 ‘대동 세계’가 나온다. 그렇다면 행복한 사회의 조건은 무엇일까? 좋은 세상을 말하려면 무엇보다 불평등이 심하지 않은가부터 살펴야 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인종차별, 빈부 격차, 성차별, 계급 갈등 등으로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좋음’이란 단순히 양으로 잴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를테면 한 사람이 200을 벌고 나머지 아홉이 하나도 못 벌어서 평균치가 20인 나라와, 열 사람이 10씩 벌어서 평균치가 10인 나라가 있다면, 어느 나라 사람들이 행복할까? 그래서 사회학자들은 ‘공동선(코먼 굿common good)’이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모두가 온전한 하나의 무게를 찾도록, 공정한 대접을 찾고 합의하는 일이 사회를 꾸려가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까마득한 옛날부터 하늘의 뜻은, 자연의 뜻은 공평무사하다(누구에게나 고르고 사사로움이 없다)고 강조해온 것이다.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어찌 학문이랴”율곡 이이의 이 말 속에는 세상을 한 발자국이라도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한순간도 변화를 멈추지 않으며, 우리는 그 속에서 자신을 구성해나가는 동시에 이 세상도 구성해나간다. 영화 <나의 가족 나의 도시>에는 이런 대사가 흐른다. “우리가 누구냐고 묻자 지혜로운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벌어진 모든 것이며, 우리 전에 일어난 모든 것이며, 우리 눈앞에 벌어진 모든 것이며,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다. … …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나의 노력으로 과연 이 세상이 행복해질까, 의심하기보다는 한 걸음 한 걸음 ‘선’을 향해 나아가자. 이것이 ‘나’라는 존재의 우주적 의미다. 이제 우주시민증을 들고 우리 각자의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자. 시공간을 차지하는 동안 나는 나에게, 너에게, 우리 모두에게, 서로에게 좋은 일을 해주는 ‘좋은 존재’가 되어주자!
작가 소개
저자 : 김종옥
꿈꾸기에 대한 남다른 고집과 재주가 있는 덕에 평탄치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 김종옥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한 덕에 전공 관련한 글쓰기를 가끔 하며 도시에서 살아가지만, 쓰고 싶은 것은 반짝이는 에스에프소설이고, 살고 싶은 곳은 사람이 사람을 섬기는 작은 공동체 마을이라고 주장한다. ‘쓰임’과 ‘즐김’이라는 삶의 주제에 충실하고자 하여, 장애 가족을 위한 계간지 <함께 웃는 날> 편집위원으로 있고, 지역 마을 방송국에서 한 코너를 진행하기도 하며, 조조영화클럽 활동에도 열중해 있다. 지은 책으로 《공자, 지하철을 타다》(공저), 《장자, 사기를 당하다》, 《논리줄게 논술다오》, 《나는 누구일까?》, 《지구는 생명체가 살 만한 행성인가?》, 《처음 만나는 공자》등이 있다.
목차
● 머리말 ● 철학이 시작되던 어떤 날에
● 1부 ● 철학이 시작되던 날
1 우주시민 철학학교에 가다
위대한 수다의 시작 ● 우주시민증 ● 철학, 그 아름다움과의 만남
2 드디어 철학병에 걸리다
쿵, 쾅, 퍽! 철학이 시작되는 어떤 날 ● 철학, 행복, 그리고 리비히의 ‘최소량의 법칙’ ● 낯선 하루의 시작 : 존재와 우주에 대한 끝없는 질문들
3 사람이니까 철학한다
아주 우연하고도 고마운 능력, 철학 ● 외로움의 동굴에서 철학을 배우다 ● 사람은 누구나 철학자로 태어난다
4 철학적 질문은 심술쟁이?
정답이 없는 시험지 ● 철학자의 1+1 : 결과보다는 과정이지 ● 상식과 지식이 아닌, 나만의 답 ● 철학은 경이로움과 함께 시작한다
5 철학은 나와 세상에 대한 사랑이다
철학의 오지랖 ● 과학과 철학 사이 : 나만의 ‘성찰 렌즈’ ● 치열하게 질문하고, 행동하고, 책임지기
● 2부 ● 내 안에 빛나는 철학의 시간들
1 시작보다 앞선 이야기
신에서 인간으로, 구름 위에서 땅 위로 ● 우연의 일치일까? : 세계를 관통하는 철학 ● 거인의 어깨 위에서
2 서양철학의 아침
소크라테스 이전 자연철학자들 ● 소크라테스 시대가 열리다 ● 경건이냐, 쾌락이냐
3 동양철학의 아침
신화의 시대로부터 ● 자연과 사람의 원리, 도 ● 춘추전국시대 : 백 가지 철학이 꽃피다 ● 이천 년의 역사를 이끈 유학자들 ● 모두냐, 나냐 ● 우리는 신선 스타일, 노자와 장자 ● 말의 달인들, 혜시와 공손룡
● 3부 ● 나는 본다, 나의 우주를
1 나는 우주의 일부요, 전부니라
철학적 사색의 시작, 우주 ● 우리는 왜 여기 있지?
2 우주의 시작은 무엇인가?
‘없음’에서 비롯된 우주 ● ‘없음’은 있을까, 없을까 ● 겨우 138억 년 전 무렵의 어느 날 ● 과학의 우주, 철학의 우주
3 궁극의 진리를 찾아서?
우주 만물을 지배하는 힘? ● 우주의 최종 이론은 나를 설명할 수 있나? ● 우주 궁극의 진리는 ‘42’? ● 라플라스의 악마는 어디로 갔나? ● 우주는 뜨개옷이야
● 4부 ● 나는 생각한다, 나를
1 ‘나’라는 인간을 이해하기
소크라테스의 무서운 한마디 ● 생명의 시작, 그 감격스러운 ‘대탄생’ ● 생명의 목적은 유전자의 전달? ● 우주의 목적은 삶의 전개다
2 공장으로 가자, ‘나’를 만들러
나를 어떻게 만들지? ● 뇌가 문제야? ● 쉬운 문제 하나, 어려운 문제 하나 ● 마요네즈 한 방울이 필요해 ● 그래, 또 뜨개질이야
● 5부 ● 앎을 참으로, 삶을 옳음으로
1 공부하자, 그런데 뭐가 ‘참’이지?
왜 공부하는데? ● 진리를 안다고? 진짜? ● 보태기와 빼기 ● 앎에서 참으로 ● 참들이 모여 사는 나라
2 앎과 참과 옳음 사이
도는 똥이나 오줌 속에도 있다 ● 누구의 참일까 ● 내가 나의 지렛대이자 걸림돌이라니!
3 옳음으로 살아가기
‘착한 삶’은 본성일까, 만들어질까 ● 마음의 출발지가 다른 ● 우리 사촌, 보노보
● 6부 ● 내가 있어 행복한 세상
1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위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라 ● 행복이란 무엇인가? ● 거짓말하는 사회 ● 행복한 세상의 조건들 ● 행복에서 한 사람 빼자고?
2 세상을 바꾸는 나의 힘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어찌 학문이랴 ●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 나와 우주의 사랑 이야기 ● 우리 각자의 세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