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싸움이 있다.
언제 어디서나 싸운다. 끊이지를 않는다.
지구상의 국가 중 57개국이 전쟁 또는
그와 유사한 무장 갈등 상황에 놓여 있다는 통계가 있다.
먼지 없는 세상이 가능할지 몰라도,
싸움 없는 세상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싸워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일까.
싸워 이긴다 한들 완벽한 승리가 있을까.
왜 “싸우는 인간”을 생각해보려 하는가
바로 나의 싸움, 우리의 싸움이기 때문이다!“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복지 예산 때문에 정면으로 충돌했다. 어린이집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서로 부담하라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다툰다. 국회에서는 여당과 야당이 편을 갈라 덩달아 싸운다. 검찰청과 변호사회도 서로 싸운다. 검사는 변호사들이 수사를 방해한다 하고, 변호사는 검사들이 변론을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자동차 회사와 카드 회사는 수수료 때문에 분쟁이 생겼다. 우리나라 휴대폰 회사와 외국 휴대폰 회사가 서로 특허권을 침해했다고 소송을 벌였다. 이웃 나라에서는 테러가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고, 테러를 당한 국가에서는 반드시 응징할 것이라고 벼른다. 스포츠란에서는 축구, 야구, 농구, 배구 등 종목마다 혈투를 벌인 결과를 알려 준다. 어느 프로야구단에서는 선수들과 감독이 불화를 일으켜 으르렁거린다. 서해안에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처치 곤란이라면서, ‘쓰레기와의 싸움’이라 표현했다.”
자, 이것은 어느 날 아침의 뉴스다. 몇 주 혹은 몇 달 간의 뉴스 중 꼴사납고 험악한 기사들만 골라낸 것이 아니라, 그저 어느 평범한 하루의 뉴스다. 뉴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싸움 외에 보이지 않는 싸움, 은폐된 싸움까지 생각한다면, 인간의 삶과 이 세계가 싸움이자 싸움터라고 단언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개인으로 국한해 보아도 각자는 태어난 순간부터 싸움의 무대 위로 떠밀려 평생을 싸우는 존재로 살아간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싸움은 나쁜 것이니 사라져야 한다”는 식의 진부한 당위의 재확인이나 “우리 역사에서 이러저러한 싸움이 일어났다”는 식의 지루한 지식의 나열이 아니다. 싸움의 무용함과 부작용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인간, 마치 싸우기 위해 태어났다는 듯 줄기차게 ‘싸움’으로써 존재 증명을 해온 인간, 그 ‘인간’을 중심에 세운 새로운 사유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싸움은 곧 나와 우리의 싸움이며, 이 행위를 고찰함으로써 우리 자신에 대해 알고 삶에 대한 지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합법적 싸움터’ 최전방에 선 변호사가
우회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한 사유의 힘!낮은산의 [사람은 왜] 시리즈 세 번째 권 『사람은 왜 서로 싸울까』는 ‘싸움’을 둘러싼 질문들을 현대의 ‘합법적 싸움’이라 할 수 있을 재판의 최전방에서 활동하는 차병직 변호사가 낱낱이 파고들어 탐구한 책이다. 저자는 제기할 수 있는 물음에 한계를 긋지 않고 질문에서 파생되는 다른 질문들을 집요하게 추적함으로써, 싸우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사유를 근원의 근원까지 밀어붙인다. 검증된 인용이나 사례에 기대어 주장의 근거로 삼기보다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갖가지 상황을 설정하여 “이 상황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까.” 끝없이 되묻는 사고 실험의 모험을 택했다. 주제를 에두르지 않고 정면 돌파함으로써 “사유를 사유하는” 정면 승부를 건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이 “싸움과 평화 중 어느 것이 비정상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은 당연하다. 흔히 싸움이 비정상이고 평화가 정상이라고 여기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하루 치 뉴스만 훑어봐도 금세 알 수 있듯 싸움이 세상의 원칙이며 정상의 상태다. 저자는 싸움을 촉발하는 원인에서부터 싸움의 근본적 원인, 싸움의 구체적 원인까지 싸움을 일으키는 다양한 감정과 기제를 일상적 상황과 경험을 들어 하나씩 밟아가는 한편, 관습에 젖은 우리의 상식과 통념을 차근차근 깨부순다. 특히 “싸우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여전히 50년, 100년 전처럼 지내고 있을까?”와 같은 도발적이고도 낯선 질문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타협과 양보를 통해서도 비슷한 결과에 이르지 않았을까?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거듭 상대를 설득하다 보면 모든 면에서 지금처럼 되지 않았을까? 싸우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여전히 10년 또는 50년, 100년 전처럼 지내고 있을까? 싸움에도 시간이 걸린다. 싸운다고 언제나 이기는 것도 아니고, 이긴다고 금방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싸우는 데 써 버린 그 숱한 나날들 동안 대화와 타협을 시도했더라도 비슷한 종착점에 도달하지 않았겠느냐는 말이다. 그렇다면 굳이 싸울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결과가 비슷하다 하더라도, 싸움의 과정을 거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다를까? 다르다면 어느 경우가 더 나은가?” -본문에서
싸움 그 자체의 가치
“나와 세계는 싸움의 결과일까, 싸워야 할 이유일까”싸움이 사라진다면 이 사회는 평화롭고 행복해질까? 물고기가 물 없이 살수 없듯 사람은 타인의 삶과 원하든 원하지 않든 깊이 연루되어 살아간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한 우리는 거절, 다툼, 배신, 충돌 따위의 부정적인 것들을 피할 수 없다. 저자는 싸움이 없어질 수 없는 다양한 상황을 가정한 ‘사고 실험’을 면밀하게 거친 뒤, 피할 수 없는 싸움과 싸움 그 자체의 가치에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여기서는 다양한 재판 사례와 역사적 진실과 국가 안보가 팽팽하게 맞선 해외의 굵직한 사건들, 세상의 모든 편견에 맞서는 의미 있는 싸움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저절로 찾아오는 변화는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할퀴지 않는다. 하지만 싸움을 통해 맞는 변화는 다르다. 그것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싸움의 과정에서 몸과 마음은 상처를 주고 또 받는다. 그 격렬한 충돌은 우리의 정신과 육체에 역사를 기록하듯 흔적을 남긴다. 싸움의 궤적이 바로 삶의 일부이며, 싸움이 이룬 변화의 결과에 대한 설명이 된다. 만약 세상이 바뀌었다면, 그것은 싸움의 결과다.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이겼기 때문이다. 여전히 세상이 바뀌지 않고 그대로라면, 그것 역시 싸움의 결과다.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졌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이 책 마지막 장에서 차병직 변호사는 승자와 패자의 바람직한 태도를 보여주는 실례를 찾기 위해 국내외 동료 지식인 및 문헌학자까지 동원했다. 가깝고도 적합한 사례를 찾는 데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는 오늘날의 싸움이 얼마나 무목적적이며 비인간적인지 반증하며, 싸움의 과정만큼이나 싸움이 끝난 뒤의 태도도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직업적인 예리함과 소문난 다독가의 면모를 드러내는
정교한 최종 변론서를 읽는 즐거움!자유 시장 경제 체제에서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살 길인 것처럼 가르친다. 하지만 승리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승자의 태도는 달라진다. 『사람은 왜 서로 싸울까』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대목은 싸움의 결과에 대한 독특하고도 중요한 시선이다. 특히 저자는 승자가 어떤 태도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승자 자신 외의 사람들에게 던지는 의미가 달라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승자는 자신의 실력 때문에 이겼다고 볼 수 있으나, 실력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이긴 것은 아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패자가 졌기 때문에 이긴 것이다. 시험에서 수석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이 1등에 해당하는 절대적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나았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2등 이하의 사람들이 자기보다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쟁에서 이긴 사람은 승리의 결과에 자신의 능력이 작용한 부분이 크지만, 진 사람들 덕을 본 부분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겨 얻는 이익은 전부가 승자의 것이 아니다. 그중 일부는 진 사람의 몫이다.” -본문에서
사람이 싸우는 다양한 이유, 싸워야 할 싸움의 판단과 선택, 어떻게 싸우느냐에 이어, 싸움이 끝난 뒤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이르는 이 한 권의 책은 마치 정교하고 군더더기 없는 법정 최종 변론서 같다. 날카로운 문장과 분야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사유의 행진은 차병직 변호사가 지닌 직업적 예리함과 소문난 다독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사실 우리는 싸움으로 둘러싸인 세계에 살고 있지만, 정작 ‘인간이 왜 싸우는가’에 대한 고찰은 제대로 충분히 시도된 일이 거의 없다.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싸움이라는 친숙한 단어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질문, 한 번도 제기하지 않았던 의문과 마주하는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맛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익숙하고 보편적인 주제를 낯설고 개별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진짜 사유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인문학의 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인간의 상반되고 모순된 특징과 행위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사람은 왜 서로 싸울까』와 짝을 이루는『사람은 왜 서로 도울까』도 함께 읽어보기를 권한다.
당시 천동설과 지동설을 주장하며 서로 싸웠다면, 천동설을 지지한 사람들은 틀렸고, 지동설을 믿은 사람들은 옳았는가? 지동설론자는 정당하고, 천동설론자는 정당성을 상실한 것인가? 싸움의 결과 지동설이 이기면 정의가 실현된 것이며, 천동설이 이기면 부조리한 현실이 되는 것인가?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직후에는 지동설이 탄압을 받았지만, 끝내 승리를 거둔 것인가?
“이런 게 바로 수치야.”
고대 그리스에서는 공적인 의무에 무관심한 채 개인적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을 이디오테스(idiotes)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바보라는 뜻이다. 특히 페리클레스 시대에는 아테네 시민 중에서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비정치가가 아니라 무용지물이라고 했다. 아무 쓸모없는, 가치 없는 시민으로 손가락질당했다. 공적인 일에 어떻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면, “마땅히 분노할 만한 일에 대해서 분노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하지만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