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라임 청소년 문학 시리즈 18권. 삶을 삼켜 버린 비극에 맞닥뜨린 인간이 일상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을 치열하게 써 내려간 작품이다. 2012년 푸른문학상 ‘미래의 작가상’을 수상한 김영리 작가가 오랜만에 선보이는 두 번째 청소년 소설로, 교통사고와 그로 인한 보복 살인이라는 사건으로 얽힌 두 아이가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 평범한 현재의 삶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속도감 있게 그렸다.
김영리 작가는 ‘기면증’ 환자 안용하와 그의 가족이 게스트하우스를 사수하기 위해 펼치는 소동을 재기 발랄하게 그린 <나는 랄라랜드로 간다>를 통해 웃픈 현실과 절망의 릴레이 속에서도 기죽지 않는 청춘의 발칙한 맨얼굴을 경쾌하게 그린 바 있다. 해체된 가족의 건강한 복원, 타인과의 스스럼없는 연대를 통해 일구어 내는 일상의 기적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이번 작품에서도 유효할 뿐만 아니라 더욱 깊어진 통찰력과 잘 벼려진 문장으로 형상화되었다.
교통사고로 인한 장애, 가정폭력, 가출, 노숙자, 달리기 등 다양한 소재와 여러 겹의 감정이 켜켜이 쌓여 있는 이야기는 지독하게 아프고 끔찍하게 슬픈 시간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 특유의 유쾌한 어법과 희망을 가리키는 방향성 덕분에 마냥 어둡지만은 않다. 하드보일드한 일상을 보내면서도 자기 내면과 타인의 상처에서 눈 돌리지 않는 올곧은 두 아이가 ‘평범해지기’라는 꿈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기회를 전한다.
출판사 리뷰
뺑소니범의 아들과 살인자의 딸,
우리는 지금 평범해지고 있는 중입니다.
교통사고로 오른쪽 다리를 잃은 후 치타 풋을 차고 달리는 수리,
파란 집 사건으로 아빠와 동생을 잃고 노숙자가 된 태범.
집안을 결딴낸 살인자의 가족을 찾아 복수하려던 태범은
자해로 몸과 마음이 죄다 망가져 버린 수리와 맞닥뜨린다.
다른 사람의 사정이나 고통 따위에는 관심도 없던 두 아이는
데칼코마니처럼 닮은 서로의 상처에 자꾸만 마음이 쓰이는데…….
지독하게 아프고 끔찍하게 슬픈 오늘을 견디면서
우리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삶을 삼켜 버린 비극에서 벗어나 평범한 일상을 회복하는 과정
우리의 삶은 대체로 크고 작은 희로애락으로 희비 곡선을 그리며 ‘평범’이라는 궤도 위를 맴돈다. 엄청난 비극이나 대단한 행운은 남 얘기일 때가 많다. 그렇다고 안심하긴 이르다. 때로 삶은 우리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어 뜻밖의 풍경을 펼쳐 보이기도 하니까. 실제 삶에서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욱 잔혹하거나 거짓말 같은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소설이 삶을 압도하는 비극이나 절망을 그리는 것은 안온한 일상과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나약한지를 환기시키고, 그런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는 질문을 단도직입적으로 던지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일상 속에서 비일상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의 세계에는 균열이 생기고, 그 자리에서 중요한 의미가 발견되니까.
《치타 소녀와 좀비 소년》은 이처럼 삶을 삼켜 버린 비극에 맞닥뜨린 인간이 일상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을 치열하게 써 내려간 작품이다. 2012년 푸른문학상 ‘미래의 작가상’을 수상한 김영리 작가가 오랜만에 선보이는 두 번째 청소년 소설로, 교통사고와 그로 인한 보복 살인이라는 사건으로 얽힌 두 아이가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 평범한 현재의 삶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속도감 있게 그렸다. 김영리 작가는 ‘기면증’ 환자 안용하와 그의 가족이 게스트하우스를 사수하기 위해 펼치는 소동을 재기 발랄하게 그린 《나는 랄라랜드로 간다》를 통해 웃픈 현실과 절망의 릴레이 속에서도 기죽지 않는 청춘의 발칙한 맨얼굴을 경쾌하게 그린 바 있다. 해체된 가족의 건강한 복원, 타인과의 스스럼없는 연대를 통해 일구어 내는 일상의 기적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이번 작품에서도 유효할 뿐만 아니라 더욱 깊어진 통찰력과 잘 벼려진 문장으로 형상화되었다.
교통사고로 인한 장애, 가정폭력, 가출, 노숙자, 달리기 등 다양한 소재와 여러 겹의 감정이 켜켜이 쌓여 있는 이야기는 지독하게 아프고 끔찍하게 슬픈 시간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 특유의 유쾌한 어법과 희망을 가리키는 방향성 덕분에 마냥 어둡지만은 않다. 하드보일드한 일상을 보내면서도 자기 내면과 타인의 상처에서 눈 돌리지 않는 올곧은 두 아이가 ‘평범해지기’라는 꿈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기회를 전한다.
진정한 용서와 치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다!
이야기는 태범이 노숙자에게 돈을 받고 매를 맞는 데서 시작된다. 규칙대로 10분 동안 대차게 두들겨 맞은 태범은 집안을 결딴낸 사내의 딸, 수리를 찾아간다. 엉망이 된 자신을 내보이고 정체를 밝히는 것으로 복수를 하려던 것이다. 그러나 태범의 야심찬 계획은 자해로 몸과 마음이 죄다 망가져 버린 수리의 처참한 모습 앞에서 물거품이 된다.
비극의 발단은 태범의 아빠가 낸 뺑소니 사고였다. 이 사고로 수리는 오른쪽 다리를 영영 잃게 되었고, 딸아이의 절망과 분노는 수리 아빠로 하여금 복수라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든다. 태범은 수리 아빠의 우발적인 범행으로 아빠와 동생을 잃은 것도 모자라, 정신을 놓고 자신의 존재를 기억에서 지워 버린 엄마로 인해 깊이 상처 받는다. 폭력을 일삼고 가족의 삶을 파국으로 몰았던 아빠를 떠올리게 하는 행위를 절대 하지 않겠다는 세 가지 원칙을 세운 태범은 결국 가출을 감행한다. 가출팸을 기웃거리다가 쫓겨난 뒤 아르바이트를 시도해 보지만 악덕 점주에게 뒤통수를 맞는 등 녹록지 않은 나날을 보내던 태범은 결국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게 된다.
한편, 노숙을 하고 자해를 하는 것으로 자신을 벌주고 어른과 세상에 복수하던 두 아이는 데칼코마니처럼 닮은 서로의 상처와 그림자에 자꾸만 마음이 쓰이고, 누구에게도 하지 못하는 속 이야기들을 다 토해 놓게 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또 누가 잘못했는지 그 잘잘못을 따질 수도 없을 만큼 모두가 망가져 버린 참담한 결과 앞에서 두 아이는 과거를 똑바로 마주하고, 평범한 오늘을 되찾기 위해 함께 달리기 시작한다.
《치타 소녀와 좀비 소년》은 과거와 현재, 태범과 수리의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파란 집에서 벌어진 비극’의 진실을 향해 내달린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좀비 같은 노숙자가 된 뺑소니범의 아들과 치타 풋을 차고 달리는 살인자의 딸,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손가락질당하는 이들의 꿈은 그저 남들과 똑같이 평범해지는 것이다. 이 작품은 불시에 찾아와 삶을 뭉개 버리는 비극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바닥에 나라는 사람의 무게와 크기만 한 느낌표를 찍’으며 묵묵히 앞으로 걸어가는 것,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담하게 전한다. 이와 함께 진정한 용서와 치유가 무엇인지, 개인의 불행을 사회와 그 구성원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고민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질문까지 담고 있다.
십대의 눈으로 바라본 우리 사회의 민낯과 인간의 속성《치타 소녀와 좀비 소년》에는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 같은 다양한 캐릭터들이 나온다. 세상으로부터 소외·격리되어 마음속 깊은 곳에 분노를 흉기처럼 간직하고 있는 노숙자, 타인의 불행을 외면하거나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이웃와 악덕 점주, 선의를 가지고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까지……. 그중에서도 가장 입체적이며 이야깃거리가 많은 것은 역시 주인공인 치타 소녀와 좀비 소년일 것이다. 독자들은 ‘어른들이 하는 말은 문장 부호조차 믿지 않는’ 고지식한 원칙주의자 태범과 자기 연민을 경계하는 고독한 투사 같은 수리의 날카로운 시선을 통해서 십대가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민낯과 인간의 잔인한 속성을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그렇다고 이 작품이 살벌한 현실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픈 이가 다른 아픈 이를 외면하지 못하고 끝내 보듬어 안고 서로를 용서하는 관계성을 보여 줌으로써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희망적인 일면, 포용력과 치유력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모에게 일방적으로 보호받는 수동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때론 부모를 이해하고 지키려고 애쓰는 능동적인 존재로서의 청소년상을 제시한 점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여기에 노숙, 가정폭력, 살인 등 그동안 청소년 소설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소재들을 철학적인 주제 속에 잘 녹여 냄으로써 청소년 소설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는 점 또한 이 작품의 성취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치타 소녀와 좀비 소년이 자기 삶의 주도권을 되찾고 세상으로 돌아오는 지난한 과정을 함께한 독자들의 가슴에 ‘어디에서 왔는지보다는 어디로 갈 것인지가 중요하다’는 노래 가사가 벅차게 아로새겨지기를 기대한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해 버렸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 일단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해 나갈 것, 그다음 문제를 미리 걱정하지 말 것. 복잡하고 제멋대로인 삶을 다루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토록 단순명료한 태도라는 깨달음 또한 챙겨가길!
[내용 소개]
이깟 몸뚱이
‘파란 집 사건’으로 인해 노숙자가 된 태범은 돈을 받고 매를 흠씬 두들겨 맞은 후 집안을 결딴낸 원수의 딸, 수리를 찾아간다. 엉망이 된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으로 복수를 할 계획이었지만 자해로 몸과 마음이 망가져 버린 수리를 보고 망연자실해진다. 수리는 자신의 주변을 서성이는 태범을 끈질기게 쫓던 중, 태범이 ‘파란 집 사건’의 생존자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휩싸인다.
더 때려라, 실컷.
십팔, 십칠, 시입……, 욱! 별안간 명치로 어퍼컷이 훅 날아왔다. 젠장. 오른쪽을 세 번 쳤으면 공평하게 왼쪽도 세 번 쳐야지, 갑자기 중앙으로 치고 들어오다니. 아까부터 느꼈던 거지만 이 치는 리듬을 전혀 탈 줄 모른다. 아니면 엇박자의 달인이든지. 도저히 다음 수를 못 읽겠다.
하긴 다음에 어떤 공격이 들어올지 안다고 해도 특별히 나아질 건 없다. 그저 이어질 공격의 방향과 강도를 알면 그 짧은 사이에 내 몸 안에 에어백을 채우듯 숨을 들이마시는 걸로 대비 아닌 대비를 한다는 건데, 그래 봤자 아픈 건 똑같다. 간단한 산수다. 놀람 더하기 아픔에서 놀람을 뺀다고 해도 아픔은 그대로 남는다.
뭐, 생각해 보면 인생이라는 것도 바로 다음에 어떤 공격이 들어올지, 또 어떤 거지 같은 사건이 날 자빠뜨릴지 모르는 거다. 온갖 방어 방법을 열나게 연구해도 인생이란 놈은 언제나 나보다 세 수는 더 앞서 있다. 그러니까 이 치는 지금 나에게 인생을 맛보게 해 주는 셈이다. ―8~9쪽에서
하지만 수리는 눈을 꼭 감고 얕게 숨만 쉬고 있었다. 악몽이라도 꾸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몸을 뒤척였는데 고통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간호사는 수리의 안색을 살피더니 겉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점퍼를 벗기는 과정에서 소매가 올라가면서 손목부터 팔꿈치 아래까지 길게 이어진 상처가 드러났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게다가 잔뜩 부어올라 있었다.
간호사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환자가 언제부터 자해를 한 거죠?”
‘자해’라는 단어가 귓속으로 파고들어 드릴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난 한 발 뒤로 물러서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랑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난 진짜 아무것도 몰랐다고 강조하기 위해.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간호사는 다시 수리를 살피면서 침착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바짓단을 올려서 확인했다. 그런데 바짓단 아래로 드러난 오른쪽 다리가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꼭 나무로 만들어진 피노키오 다리 같았다. 두 눈을 크게 끔뻑였다가 다시 자세히 보니 피터 팬을 괴롭히는 후크 선장의 나무다리처럼 섬뜩했다. 나무다리 위에는 못으로 찧고 그은 자국이 가득했다. -25~26쪽에서
그림자밟기
수리는 태범과 만난 뒤 ‘그 사건’ 이후 처음으로 아빠를 찾아가지만 접견을 거부당한다. 아빠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한 수리는 자신이 멀쩡해졌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복지관으로부터 치타 풋을 후원받아 마라톤에 도전한다.
한편, 노숙 생활을 계속하던 태범은 복권 할아버지의 죽음과 수리의 충고에 자극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지만, 쓰레기를 주워 와 집 안을 채우는 엄마의 모습에 고민이 깊어진다. 태범과 수리는 서로의 상처에 동질감을 느끼며 조금씩 가까워지고, 그럴수록 태범은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파란 집 사건’의 진실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몇 주간의 맹연습 끝에 나는 혼자 의족을 차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처음으로 낯선 다리와 함께 혼자 걸은 것이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래서 바람에 눈물을 날리려고 조금씩 빨리 걸었다. 보폭이 점점 넓어졌다. 걷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뛰고 싶었다. 다칠 거라는 생각? 물론 들었다. 근데 여기서 다쳐 봤자 뭐. 그래 봤자 뭐! 화가 났다.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나무다리로는 달릴 수가 없었다. 의족이 달릴 때의 충격을 흡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평생 달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달릴 수 있게 되었다. -75~76쪽에서
나는 가위질할 부분을 펜으로 그리는 것처럼 집 주변을 빙 돌아보았다. 집 뒤쪽에 있는 베란다의 창문이 열려 있었다. 나를 반기기 위해 열어 둔 것 같지는 않았다. 집 안에서 악취가 새어 나왔기 때문이다. 날씨가 제법 추운데도 악취 때문에 창문을 닫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심해로 뛰어내리기 위해 절벽 끝에 선 것처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풀쩍 뛰어 창문을 타고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집에 들어서면 그동안 누르고 있던 감정의 파도가 덮쳐 오리라 예상했었다. 낯설다, 따뜻하다 등등의 복잡한 감정일 거라고, 예방주사를 놓듯 생각했었다. 하지만 집에 들어선 순간 나를 사로잡은 건 충격이었다. 밖에서는 집 안에 이토록 많은 물건들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물건들이 여기저기에 탑처럼 높이 쌓여 있었다. 물건 탑 사이사이에 난 빈 공간들은 온몸을 타고 도는 핏줄처럼 사방으로 퍼져 있었다. 미로 같았다. 미로 속으로 걸음을 내딛을수록 숨이 막혀 왔다. -99쪽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날 봐. 알아봤더니 쟤는 살인자의 딸이래. 그런데 그 아빠가 딸의 다리를 자르게 만든 뺑소니범을 죽였다나 봐. 그럼 손가락질할 수만은 없지. 그런데 뺑소니범뿐만 아니라 어린 딸까지 죽게 만들었다고? 세상에. 거미가 줄을 타고 올라간다는 동요처럼 계속 두 손가락이 맞물려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딱 멈추는 거야. 그러고는 돌아서지.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면서. 전염병 바이러스 취급이야. 그런데 누가 나 같은 애랑…….”
나도 모르게 내 처지를 줄줄 외다가 멈추었다. 그러는 넌 왜 혼자냐고 쏘아 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도저히 이 대화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걷는 것처럼. 이상하게 이 녀석만 만나면 쓸데없이 말이 길어진다. -135~136쪽에서
바람이 분다
파란 집에서 태범의 엄마에게 붙들려 한바탕 곤욕을 치른 수리는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로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가 결국 쓰러져 버린다. 태범은 자포자기 상태의 수리를 찾아가 ‘파란 집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법정에 나가 그날 일을 증언한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두 아이는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해 나가며 세상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는다.
나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마에 울퉁불퉁 꿰맨 자국이 남아 있었고 광대뼈도 부풀어 올라 있었다. 오른손은 붕대를 친친 감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이 손수 빚은 만두를 먹을 때 가장 행복해했다는 그의 손은 이제 자신을 괴롭히고 나락으로 처박는 몹쓸 도구일 뿐이었다. 최근에 다시 싸움에 끼어든 모양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거겠지. 그는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조금씩 서로를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미워하기가 힘들다.
가족을 보호하는 건 부모의 의무라고들 말한다. 아빠는 강해야 하고 엄마는 자식을 사랑으로 지켜 줘야 한다고. 하지만 그럴 수 없을 때도 있다. 때로는 자식이 부모보다 더 강해져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나는 결심이 흐트러질까 봐 무릎 위에 놓은 손을 마주 잡아 꽉 쥐고 말했다.
“아저씨한테 제가 할 말이 있어요. 그날 사건에 대해서요. 그때 경찰한테는 기억이 안 난다고 했지만, 사실 저 다 봤어요.” -204~205쪽에서
나와 수리 고모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색하게 서 있었다. 우리가 나눌 이야기야 뻔했다. 나는 먼저 말을 꺼냈다.
“뭘 부탁하러 오신 건지 알아요. 할게요, 그거. 복지관 얘기가 아니어도 하려고 했어요.”
수리 고모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좋으면서 아닌 척하려는 건지 표정이 영 떨떠름해 보였다. 수리 고모가 뒷목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런…… 불순한 의도는 아니었어. 그냥 나도 뭔가 도움을 주고 싶어서……. 근데 어머니는 어디 계시니?”
“저한테 줄 물건을 찾으러 나가셨어요.”
수리 고모는 수리에게서 들은 게 별로 없는지 내 말뜻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말한 물건이 뭔지 추측하느라 미간을 잔뜩 모으고 있더니 내게 진짜 괜찮으냐고 물었다. 복지관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인 것 같았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엄마랑 둘이서 잘할 수 있어요.” -210~211쪽에서
작가 소개
저자 : 김영리
1983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12년 첫 청소년 장편 소설 『나는 랄라랜드로 간다』로 제10회 푸른문학상 ‘미래의 작가상’을 수상했으며 소설 『시간을 담는 여자』, 청소년 장편 소설 『치타 소녀와 좀비 소년』, 동화 『표그가 달린다』를 펴냈다.
목차
1부 이깟 몸뚱이
2부 그림자밟기
3부 바람이 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