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나는 벌레처럼 어른이 되리라“남아는 가련한 벌레, 죽을 걱정을 품고 문을 나선다.”
_유만주, 『일기를 쓰다』 중에서, 본문에서 재인용
저자는, 모멸감을 주는 욕지거리에 등장하는 벌레가 아니라 시인이 말한 대로 ‘가혹한 환경과 전쟁 때문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북방 이민족 남자의 심정을 대변하는’ 단어로 ‘벌레’를 선택했다. 국가든, 학교든, 제도와 구조는 개인을 보호하지 않는다. 그러한 세계에 짓눌렸던 소년 K들은 이제 어른이 된 K들을 소환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하도록 한다. K들은 감당 못할 질서에 나약했던, 그 마음으로 사랑에 뒷걸음질 치던, 커다란 세계에 웅크렸던 소년이 어떻게 어른이 되어 가는지를 가슴속에서부터 캐낸다. 싸우고, 타협하고, 싸우고, 후회하고, 그래도 싸우고……. 이것을 파헤쳤던 과정. 벌레처럼 커 갔던 소년의 고고학이다.
어른의 나이테에 대한 추적서늘하고도 유려한 문체로 이름을 알린 작가 설흔이 역사 소설이 아닌, 독창적인 현대 소설로 돌아왔다.
대개의 청소년 소설은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청소년의 관점에서 외부 세상을 바라보고 부딪혀 가며 성장한다. 반면 『소년의 고고학』은 어른이 된 K들이 화자인 중단편 소설 모음집이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주인공 K들은 동일 인물일 수도, 각기 다른 인물일 수도 있다.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K들이 성인이 된 후 일상에서 혹은 충격적 사건을 접한 뒤에 자신이 어렸을 때 겪었던 사건을 회고하고 감정들을 다시금 곱씹으며 자신의 현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에 이르렀는지를 추적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어느 날, 외교관 피습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도 충격적이었지만 뉴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성인 K는 예전, 외교관의 아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학교에 외교관의 아들이 전학 왔다. K는 그의 자랑하는 듯한 태도가 못마땅했고, 우등생이었던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경계했다. 그의 친절도 애써 거절했고, 얼마 못 가 녀석이 전학을 가게 되었을 때, 녀석이 준비한 ‘친구들의 말’ 노트에 “잘 가라. 하지만 난 너의 친구가 아니다.”라고 적으며 거리를 둔다. 나중에 그 녀석은 실은 수리공의 아들이며 거짓말을 했던 것임이 밝혀진다.
K는 반장에게 가서 아이의 말을 확인했다. 사실이었다. 반장은 정신 나간 놈이라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 순간 K는 무엇을 했는가? 후회를 했다. 녀석의 노트에 썼던 그 말, 너는 친구도 아니라는 그 말을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p40~41
그 녀석의 실체를 알려 하지 않고 그저 전해들은 대로 판단했을 뿐이었던 자신의 헐거운 마음을 자책했던 어린 K는 어른이 되어서 뉴스의 진위를 가리지 않고 확대 재생산하는 여론을 보며 상념에 잠긴다.
나의 오늘로부터 어른의 삶이 비롯된다이 책의 어린 K들은 유약하고 소심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사랑을 처음 대하는 태도는 그 절정이다.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 못해 괜히 여자아이의 집 대문에 신발을 던지고 도망치고, 그 아이에게 ‘문학의 밤’ 홍보 전단지를 건네러 갔으면서도 만나자마자 자기 가방에 쑤셔 넣는 모습이 영락없는 겁쟁이 샌님이다. 그리하여 결실을 맺지 못한 사랑의 마지막 장면은 어떠했던가? 돌연한 그녀의 죽음으로 장례식장에 선 K는 환하게 웃는 그녀의 사진만 마주할 뿐이다.
허망한 결과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소년은 어떻게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 작가가 되기 직전의 K는 자신의 꿈을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6개월 전 회식 후 K는 집 벽에서 나오는 소년을 처음 본다. 그 뒤 직장에서 억울하게 성희롱 의혹을 받은 K는 사직을 결심한다. 아내는 이혼을 결심하고 집을 나갔다. 책들을 정리하다 우연히 떨어진 흑백사진 한 장. 중학교 1학년 백일장 사진인데 아이들 중 단 두 명만이 모자를 쓰고 찍었다. 하나는 몇 달 뒤 죽었고 다른 하나는 연합고사를 얼마 앞둔 어느 겨울날,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둘 중 하나가 그 소년일까? 알 수 없다.
K는 책장에서 보르헤스의 책을 기억하곤 찾아낸다. 보르헤스가 말한 ‘업’을 생각한다. 보르헤스는 자신이 눈 먼 이유가 업 때문이라고 했다. K는 침을 한 번 삼킨 뒤 눈을 감는다. 그는 소년을 따라 지하 공간을 지나 넓은 초원에 다다른다. 소년은 사라지고 다른 소년들이 그곳에서 놀고 있다. 소년들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닿지 못하고 외려 집채만 한 파도가 덮쳐 꿈을 깬다. 꿈은 반복되고 K는 지쳐 갔지만 마지막 꿈은 달랐다. K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들은 다가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지팡이를 넘기고 자신들과 이곳에서 영원히 살자고 한다. K는 지팡이를 넘기지 않는다.
소년들은 K의 머리며, 몸이며, 손발을 마구 걷어찼다. 한 대 얻어맞을 때마다 숨이 멎는 고통이 엄습했다. 그러나 K는 결코 지팡이를 놓지 않았다. 소년들이 빼앗으려는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K가 지팡이를 지키려는 마음 또한 커지는 것 같았다. K는 자신의 몸 안에서 자신도 몰랐던 활력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전에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감각이었다.---p 178~179
사진에서 발견한, 죽은 두 아이는 결국 K의 청소년 시절을 대유한다. 첫 번째 아이는 백혈병이었다. 문병 간 자리에서 신해철 테이프를 사 달라는 부탁을 받은 K. 하지만 K는 가난했으므로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두 번째 아이는 원래 단짝이었다. 그러나 반이 갈리면서 그들 사이도 금이 갔다. 3학년 11월도 다 갈 무렵, 이제는 양아치가 된 그 아이는 K에게 술을 마시러 가자는 제안을 했지만 K는 만나러 가지 않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신해철 테이프를 주지 못한 것, 만남을 거절한 것은 모두 K의 청소년 시절 성격이다. 이것이 K이다. 이 기억, 혹은 업들을 업고, 미래를 걸어가야만 한다. 혼자의 힘만으로는 힘들지만 지팡이(이것이 사람이든, 혹은 그 무엇이든)와 함께 그것이 가능해진다. 청소년기를 상징하는 꿈속 소년들은 지팡이를 거부하려 하지만, 사회에 선 어른은 끝끝내 지팡이와 함께 헤쳐 나간다.
부조리하고 획일화된 질서로 인해 자신의 자유와 정체성이 위태로워졌을 때, 어떻게 행동하고 대처하는지는 어른이라고 자연스럽게 슬기가 생겨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과거를 반추하며, 지팡이를 깎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발악하면서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K가 눈을 감고 소년들을 찾아 나선 것은 이 글귀를 읽은 뒤였다.
걸어온 곳에도 길은 없고 걸어야 할 곳에도 길은 없다.
그러나 걸어온 곳과 걸어야 할 곳 없이는 길 또한 없을 것이다.
_p.16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의 불교 강의』재인용
『소년의 고고학』은 청소년들에게 너희의 오늘로부터 어른의 삶이 비롯된다는 말을 넌지시 건네고 있다.
“지 아버지가 외교관이라던 녀석 기억나지? 그거 다 뻥이었대.”
“뻥? 무슨 소리야?”
“반장네 집 화장실이 고장 나 사람을 불렀대. 그런데 녀석이 나타난 거야. 자기 아버지하고. 왠지 그럴 것 같더라니까.”
K는 반장에게 가서 아이의 말을 확인했다. 사실이었다. 반장은 정신 나간 놈이라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 순간 K는 무엇을 했는가? 후회를 했다. 녀석의 노트에 썼던 그 말, 너는 친구도 아니라는 그 말을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K는 살고 싶은 국가에 사는 게 아니라 살 수밖에 없는 국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닫는다.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국가’에 기적이란 없다. 그래서 K는 절망한다. …… K는 체육 선생이 그립다. 체육 선생이 일으켰던 그 작고 완벽했던 기적이 정말로 그립다. 글에 절망하고 국가에 절망한 K는 그 시절이 정말,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