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농촌의 가을 풍경과 생활, 그리고 거기 담긴 사람들의 마음을 그려낸 그림책. 그림작가는 가을 들녘을 먹색으로만 그려냈다. 글작가의 시같은 글에 그림작가는 수묵담채같은 그림으로 답을 던지고, 그림작가의 빛과 그림자같은 그림에 글작가는 색깔 얹은 글로 답을 한다.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면서, 곡식을 두고 새들과 한바탕 다툼을 벌이는 계절이기도 한 농촌의 가을 풍경을 잔잔하게 묘사하였다.
출판사 리뷰
그림책에 담은 새 보는 문화와 농촌의 마음
사계절출판사 ‘우리문화그림책’ 시리즈는 지금까지 사물놀이, 단청, 삽살개의 유래, 설빔, 백제금동대향로, 십우도, 씨름, 전통 상례, 부모은중경 등 유무형의 우리 문화를 다루어왔습니다. 우리문화그림책 11 『새 보는 할배』에서는 농촌의 가을 풍경과 생활, 그리고 거기 담긴 사람들의 마음을 그려냈습니다.
그림 작가 한수임은 가을 들녘을 먹색으로만 그려냈습니다. 간혹 노란색과 붉은색이 스치듯 ‘할배’와 주위를 지나갈뿐입니다. 하지만 독자는 이 책에서 붉고 노란 가을 들녘을 봅니다. ‘조밭도 붉고 얼굴도 붉어’라는 글귀가 나오는 순간, 눈으로 본 먹그림들이 마음속에서 색색의 가을 들판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화르르 새는 날고 할배는 깨고/화르르 새는 날고 할배는 웃고’라는 마지막 글귀에 이르러서 독자의 얼굴에도 책 속의 할배만큼 환한 웃음이 떠오릅니다. 글작가의 시 같은 글에 그림작가는 수묵담채 같은 그림으로 답을 던지고, 그림작가의 빛과 그림자 같은 그림에 글작가는 색깔 얹은 글로 답을 합니다. 이러한 조화가 이 그림책을 보고 또 보게 만듭니다. 숨을 잘, 제대로 쉬려면 고요하고 조용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공을 들여야 합니다. 절대로 욕심 부리거나 조급해서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쉬는 숨처럼 이 책을 만들었습니다. 이 책이 독자에게 그런 숨을 쉴 수 있는 쉼표 같은 책이 되면 좋겠습니다.
새와 할배와 조밭 이야기
책 속의 주인공인 ‘할배’는 식구들이 모두 나가 텅 빈 집에서 주섬주섬 자잘한 집안일들을 챙깁니다. 그러다가 떼 지어 날아가는 새들을 보고 문득 조밭을 걱정하지요.
사실 조야 벼에 비하면 그다지 귀하게 치지 않는, 거친 밭에 심는 잡곡입니다. 하지만 할배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평생 농사일로 잔뼈가 굵었건만 이제는 늙어 한 몫 일꾼 대접을 받지 못하는 당신의 처지와 비슷해서일까요? 할배는 얼른 팡개를 집어 들고 집을 나섭니다.
그러나 바쁜 걸음도 거기까지. 잠시 일손을 놓고 새참을 먹던 젊은이들이 지나가는 할배의 손목을 잡아 끕니다. “영감님, 탁배기 한 잔 하고 가세요.” 할배의 마음은 어느새 조밭에서 새참자리로 옮겨 앉습니다. 시원한 막걸리에 김치 한 조각, 얼근해진 할배는 이제 그리 급하지 않습니다.
휘적휘적 조밭에 이르러 허수아비 아래 주저앉은 할배, 술기운에 따스한 가을햇살이 얹히니 졸음이 쏟아집니다. 푸근히 마음이 풀어진 할배는 이제 한없이 너그럽습니다. 새가 좁쌀을 쪼아 먹든 말든 꾸벅꾸벅 할배는 졸고, 들고 있던 팡개마저 내려놓았으니 새는 아주 마음을 놓고 조알을 쪼아 먹습니다.
그때, 할배는 졸고 새는 먹을 때, 새는 먹고 할배는 졸 때, 아이들이 옵니다. 학교에서 돌아와 할배마저 계시지 않은 텅 빈 집을 보고 아이들은 금방 알아챘을 겁니다. “우리 할배, 또 조밭 가셨구나!”, “할배 심심하시겠다. 얼른 가 보자!”, “후여, 훠어이!” 소리를 지르며, 팡개를 휘두르며 아이들이 달려옵니다. 그 기세에 화르르르 새는 날아오르고, 그 소리에 할배는 잠이 깹니다. 깨어 조밭께를 보니 아이들의 생기가 가득합니다. 아직 술기운이 살풋 남은 할배의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이 번집니다. 가을이 흐드러진 순간입니다.
이 책에 실린 우리문화 이야기-농사일과 새 보기
이 논에서 우여 하면 / 저 논으로 후르르륵 / 저 논에서 우여 하면 / 이 논으로 후르르륵 /논두렁에 새지기는 / 종일토록 애만 타고 / 후룩후룩 참새들은 / 날 적마다 살이 찐다 (새 보는 노래, 충남 예산)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곡식 농사를 지으며 살아 왔습니다. 가을걷이 무렵 곡식이 여물어 가는 논밭에는 어김없이 골칫거리들이 나타나곤 했습니다. 참새나 꼬까참새 따위 작은 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니며 애써 기른 벼며 조, 수수 들을 쪼아 먹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사람들은 논 여기저기에 허수아비를 세워 사람이 서 있는 것처럼 가장하기도 하고, 기다란 장대 끝에 깃발을 매달아 세워 펄럭거리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허수아비 머리나 팔에 앉아 쉬는 새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이 직접 들에 나가 새를 쫓곤 했는데, 이렇게 하는 일을 일컬어 ‘새를 본다.’ 라고 합니다.
새 보는 일은 주로 아이들의 몫이었습니다. 바쁜 가을걷이철이다 보니, 어른들은 더 힘든 다른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지요. 아이들은 “후여, 훠어이!” 하며 목청껏 소리를 지르면서, 태를 휘두르거나 꽹과리, 깡통 따위를 두들겨 시끄러운 소리를 내어 새를 쫓았습니다. 팡개에 흙을 재어서는 논밭에 내려앉은 새 떼를 향해 힘껏 흩뿌려대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지루하면 새 보는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지요. 종종 기력이 쇠하여 힘든 일을 할 수 없는 노인들도 새 보는 일을 도왔습니다.
그렇게 한 쪽 논밭에서는 젊은 어른들이 곡식을 거두고 다른 논밭에서는 아이들과 노인들이 새를 보며 곡식을 지키다 보면 짧은 가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곤 했으니, 가을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바쁘고 고단한 철이었습니다. 이렇듯 농촌의 가을은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면서, 곡식을 두고 새들과 한바탕 다툼을 벌이는 계절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다툼이 그리 모질거나 사나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이와라 우이와라 / 아랫논에 메벼 베고 / 윗논에 참벼 훑어 / 우리 오빠 장가갈 때 / 멥쌀일랑 밥을 하고 / 찹쌀일랑 떡을 찧어 / 너도 한 상 차려 줄게 / 우리 논에 앉지 마라 / 우이와라 우이와라 (새 보는 노래, 충남 부여)
이 노래처럼 어르거나 달래기도 하고 때로는 모른 척 지나치기도 했으니, 그저 먹더라도 조금만 먹고 사람 몫까지 건드리지는 말라는 의사표시였을 테지요. 콩을 심어도 벌레 몫으로 한 알, 새 몫으로 한 알을 더 심고, 감을 따도 새 몫으로 서너 알은 남겨 놓는 것이 우리 농촌의 마음이었으니 새 보는 마음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