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박순교
경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석사와 경북대 대학원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사는 미래를 향한 희망의 몸부림이라는 신념으로 역사연구에 매진하면서도 역사에 문학적 상상력과 감성을 더한 작품을 선보여왔다.팩션 <김춘추>로도 잘 알려진 지은이는, 험난한 여정, 고달픈 시대에 맞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역사적 인물의 삶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왔다. <화산군 리용상> 역시 이런 관심 인물로 한국 최초로 베트남 역사서인 <대월사기>를 철저히 분석ㆍ해부하고, <송사>, <요사>, <금사>, <원사> 등 중국사서와, <화산군본전>, <옹진읍지>,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잘 버무려 그의 생생한 진면목을 유감없이 그려냈다.지은이는 ‘작가 후기’를 통해 오래전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이 다투어 화산군을 추적한 사실을 밝히며 많은 이가 리용상에 대해 적잖은 관심을 기울였음을 정리했다. 이 한 권의 책을 위해 기울인 저자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저서> 『김춘추는 왜 당나라와 손을 잡았을까』『외교의 승부사 김춘추』『김춘추의 집권과정 연구』「김춘추와 연개소문」 KBS 「한국사전 ‘김춘추’」 패널 및 시나리오 작가
011. 왜 김춘추는 당나라와 손을 잡았을까? 글 박순교 그림 안희숙
의자왕 VS 김춘추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이 한국사법정에 김춘추를 고소했습니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갈라져 있던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하나의 나라로 통일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의 삼국 통일은 우리 민족 형성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칭찬을 받기도 하고,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을 무너뜨리고 옛 고구려 땅을 잃어버렸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요.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의자왕을 돕겠다며 증인으로 나섰습니다. 신라의 김유신은 매부인 김춘추가 얼마나 뛰어난 외교가였는지를 증언하기 위해 증인석에 섰지요. 신라가 어떻게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는지, 그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한국사법정에서 만나 보세요.
012. 왜 장보고를 바다의 왕자라고 부를까? 글 윤명철 그림 박상철
장보고 vs 문성왕
바다의 왕자 장보고가 한국사법정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상대는 다름 아닌 신라 제 46대 문성왕입니다. 장보고는 문성왕이 자신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보냈고, 자신의 딸과 혼인을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문성왕은 장보고에게 자객을 보낸 것도, 장보고의 딸과 혼인하는 것을 반대한 것도 모두 자신이 아니라 신라의 귀족들이었다고 반박하지요. 청해진을 근거로 바다를 주름잡고 해적을 소탕하던 장보고의 호방한 기상과, 신라 말기의 왕족들의 권력 다툼, 그리고 그 시대를 살던 일반 백성의 삶까지, 이 모든 것을 한국사법정에서 확인하세요.
013. 왜 발해 무왕은 당나라를 공격했을까? 글 김갑동 그림 조진옥
대문예 vs 무왕
대조영이 세운 나라인 발해는 ‘해동성국’이라고 불릴 만큼 강하고 발전한 나라였습니다. 이 책의 피고이기도 한 제 2대 무왕이 장문휴 장군을 시켜 당나라를 선제공격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무왕에게는 숨기고 싶은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동생 대문예가 흑수말갈을 공격하라는 자신의 명령을 거역하고 당나라로 도망친 것이지요. 역사공화국에 온 대문예는 발해를 위하는 마음으로 형님인 무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이라며 무왕에게 소송을 거는데요. 과연 누가 소송에서 승리할지, 발해의 역사와 함께 한국사법정에서 확인해 보세요.
014. 왜 왕건의 부인은 29명일까? 글 김갑동 그림 손영목
견훤 vs 왕건
후백제의 견훤이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에게 소송을 걸었습니다. 견훤은 자신이 왕건의 계략에 속아 후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이용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영웅으로, 자신은 치졸한 패장으로 평가되고 있다며 억울함을 표시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왕건이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29명의 부인을 이용했다고 하는데요.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질까요? 오늘 한국사법정에서 확인해 보세요.
015. 왜 서희는 외교담판을 했을까? 글 한정수 그림 이주한
소손녕 vs 서희
고려가 건국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고려는 송나라, 거란, 여진 등의 강대국 틈에서 힘을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때로는 다른 나라와 손을 잡고 때로는 멀리 하면서 세력의 균형을 이루었지요. 그런데 거란이 고려가 송나라하고만 친하게 지내는 것에 화가나 고려를 쳐들어오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이때 고려의 서희가 거란의 소손녕과 외교담판을 벌여 전쟁을 멈추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것은 물론, 강동 6주까지 얻는 성과를 이루지요. 하지만 소손녕은 한국사법정에서 이러한 서희에게 다시 한 번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거란이 서희의 말솜씨에 휘둘리며 고려에 무조건 밀렸던 것은 아니었다고 말이지요. 서희와 소손녕의 두 번째 대결! 한국사법정은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요? 한 번 지켜봅시다!
016. 왜 묘청은 서경 천도를 주장했을까? 글 이윤섭 그림 황기홍
묘청 vs 김부식
1135년, 고려 인종 때, 묘청은 땅에 떨어진 왕실의 체면을 다시 세우고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해 서경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독자적인 연호와 황제 칭호를 사용해 금나라로 쳐들어가자고 말했지요. 하지만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 출신의 문벌 귀족들은 금나라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며 고려 초부터 추진하던 북진 정책에 반대했습니다. 묘청은 김부식이야말로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로 고구려의 독자성을 해친 인물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명예를 되찾아 줄 것을 주장합니다.
017. 왜 무신 정변이 일어났을까? 글 신안식 그림 박상철
의종 vs 정중부
1170년 여름, 고려의 무신들이 칼을 뽑았습니다. 상장군 정중부와 이고, 이의방 등의 무신들이 문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것이지요. 이후 약 1백여 년간 고려는 무신들이 다스리게 되는데요. 당시 죽음을 당한 문신들과 임금 의종이 한국사법정에 소송을 걸었습니다. 고려의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한국사법정에서 살펴봅시다.
018. 왜 고려는 팔만대장경을 만들었을까? 글 최연주 그림 손영목
이규보 vs 최우
『동국이상국집』의 저자인 이규보가 한국사법정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이규보는 무신 집권자인 최우가 몽고를 물리치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고 알고 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팔만대장경은 최우가 아니라 고려의 백성들이 몽고를 물리치기 위해 힘을 합쳐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최우는 몽고가 고려에 침입했을 때 강화도로 피란가기에 바빴던 겁쟁이에 불과하다고 말이지요. 팔만대장경은 과연 누가 만든 것일까요? 한국사법정에서 확인해 보세요.
019. 왜 삼별초는 최후까지 싸웠을까? 글 강재광 그림 이주한
김방경 vs 김통정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 삼별초의 지도자 김통정은 몽골군과 최후까지 맞서 싸운 민족항쟁의 영웅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몽골과 손잡고 삼별초를 공격한 국왕 원종과 김방경은 간사한 역적 혹은 민족반역자로 매도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원고 김방경은 삼별초는 민란과 초적을 진압할 목적으로 창설되었으며, 국군이 아니라 최씨 무인 정권의 사병과도 같은 존재로서 권력을 휘둘렀다며 한국사법정을 소송을 걸었습니다.
020. 왜 공민왕의 개혁 정치는 실패했을까? 글 함규진 그림 안희숙
기철 vs 공민왕
공민왕은 고려 제31대 왕입니다. 공민왕 때 고려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공민왕은 즉위 이후 원나라 식으로 변발한 머리를 풀어헤치고 원나라 옷을 벗어 버리며, 원나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신돈을 등용하여 귀족들이 빼앗은 토지를 백성에게 돌려주는 등 개혁 정치를 펼쳤지요. 하지만 이런 공민왕의 개혁 정치는 성공하지 못했는데요. 그 이유는 무엇일지 한국사법정에서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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