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그 여자에게는 가마솥이 따로 필요 없다.
지역사회에 퍼뜨릴 독약을 자기 몸속에서 제조하는 까닭이다.”
_타코마 타임스, 1915년 4월 6일 자
의학이 우선인가? 인권이 먼저인가?
‘장티푸스 메리’의 삶으로 보는 질병의 사회사
“손으로 꼽을 만한 기형적 변종.” _타코마 타임스(당시 지역신문)
“그 요리사는 살아 있는 배양관이나 다름없었다.” _조지 소퍼(자칭 전염병 퇴치사)
“저는 사실상 모두가 몰래 훔쳐보는 구경거리였습니다.” _메리 맬런(장티푸스 메리)『위험한 요리사 메리』는 20세기 초 뉴욕시 상류 가정들 사이에서 묵묵하고 솜씨 좋다는 평을 듣던 요리사 메리 맬런이 한순간 ‘장티푸스 메리’라는 오명을 안고 26년간 격리 병동에 유폐되어 삶을 마감해야 했던 기구한 사연을 추적한 책이다. 메리 맬런은 당시 미국에서는 그 존재조차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던 ‘건강 보균자’로, 비록 자신은 더없이 건강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여러 집안의 식솔 24명을 장티푸스 환자로 만들었다.
메리 맬런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공포와 혐오’ 그 자체였다. 병색이 완연하기는커녕 운동선수 못잖게 체구가 당당하고 기운 넘치며 ‘우리에 갇힌 사자처럼’ 저항한다는 점이 메리를 현대판 마녀로 만들었다. 게다가 메리는 아일랜드 이민 노동자였고, 무엇보다도 여성이었으며, 홀몸이었다. 보건 당국은 마치 범죄자를 다루듯 메리를 추적하고 겁박했으며, 급기야 경찰까지 나서서 메리를 잡아들이려고 기를 썼다. 다른 한쪽에서는 선정적인 기삿거리에 혈안이 된 옐로 저널이 가세해, 사실을 과장하고 왜곡하고 공포와 혐오를 부추겼다. 비대해진 공포와 혐오는 그대로 돈으로 바뀌어 허스트와 퓰리처를 비롯한 언론의 배를 불렸다.
아일랜드 대기근을 다룬 논픽션 『검은 감자』로 잘 알려진 수전 캠벨 바톨레티는 이 책에서 옐로 저널리즘이 스캔들로 소비한 메리 맬런의 논쟁적인 삶의 이면을 면밀히 살핀다. 메리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일개 민간인이자 평범한 가사 노동자가 어떻게 역사상 가장 악명 높고 가장 오해받은 인물이 되었을까? 보건 당국의 요구를 고분고분 받아들였다면 메리가 최악의 불운은 피해 갈 수 있었을까? 왜 하필 메리 한 사람만 장티푸스 건강 보균자라는 이유로 평생 동안 격리 병동에 유폐되어야 했을까? 장티푸스 메리를 낳은 책임은 누구에게 있었을까?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서 묻고 또 묻는다.
이처럼 이 책은 ‘장티푸스 메리’의 사례를 통해,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공중 보건이라는 시스템과 충돌할 때, 그리고 공공의 안전이라는 대의와 마찰을 일으킬 때 어떤 비극이 빚어지는지 조명한다. 그리고 전염병에 알게 모르게 가해지는 공포와 혐오의 시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한편으로는 ‘장티푸스 메리’ 사건에 어른거리는 미소지니와 제노포비아와 하층 계급 혐오에 대해서도 지적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장티푸스 메리’ 사건은 명백하게 온갖 혐오가 뒤얽히고 충돌하면서 폭발한 재앙이었다.
의학이 눈부신 발전을 이룬 지금도 전염병에 대한 편견은 여전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난 2015년 우리 사회를 집단 히스테리로 몰아넣었던 ‘메르스 사태’는 ‘21세기판 대한민국식 장티푸스 메리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불과 몇 달 전인 2017년 10월 ‘무차별 성매매 부산 에이즈녀’로 언론에 매도당했던 여성은 우리 시대의 메리 맬런이다. 20세기 초반을 뒤흔들었던 ‘장티푸스 메리’ 사건으로부터 10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전염병에 대해 얼마나 많이 깨우쳤는가?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우리는 충분히 보호하고 위로하고 사회의 일원으로 껴안고 있는가? 김승섭 교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인상 깊게 읽은 독자들에게 특히 권할 만한 책이다.
[책의 내용]
■ 메리 맬런, 어느 아일랜드 여성 이민 노동자의 삶메리 맬런은 1869년 아일랜드 티론주 쿡스타운에서 태어나 1883년 홀로 뉴욕으로 이주한 여성 이민 노동자다. 당시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 여성의 80퍼센트 이상이 가사 노동자로 억척스럽게 일했듯이 메리도 가사 노동으로 잔뼈가 굵었으며, 어느 결에 여느 가사 노동자보다 좋은 대우를 받는 요리사로 자리 잡게 된다.
메리가 왜 열다섯 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망망대해를 건너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시기적으로 따져 보았을 때 메리의 부모가 아일랜드 대기근 때 살아남은 사람이고, 메리의 이민 역시 대기근 이후 곤궁했던 아일랜드의 형편과 관련 있으리라고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이민 직후 메리는 친척 아주머니 부부에게 얹혀살았지만, 이내 두 사람의 죽음으로 홀로 남겨진다. 메리는 신대륙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이방인이고 외톨이였으며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그랬다.
메리는 그저 묵묵히, 능수능란하게, 한 집안의 부엌을 지배한다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자신이 비위생적인 습관으로 장티푸스를 퍼뜨렸다는 주장을 메리는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메리는 보건 당국이 방문할 때마다 문전박대하거나 요리용 포크를 휘두르며 공격하거나 돌연 잠적해 버리기 일쑤였다. 그 결과 보호받고 치료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범죄자나 마녀 취급을 받기에 이르렀다.
언론은 온갖 악의적인 표현을 동원해 가며 메리를 비인간화했다. ‘손으로 꼽을 만한 기형적 변종’,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자’, ‘인간 장티푸스 공장’, ‘인간 세균 배양관’, ‘이상한 힘을 가진 여자’……. 메리가 저항하면 할수록 상황은 악화되었다. ‘우리에 갇힌 사자처럼’ 맹렬히 저항하던 메리는 결국 경찰과 보건 당국에 체포되어 이스트강 한복판 노스브라더섬의 리버사이드 병원에 강제 이송되었고, 두 차례에 걸쳐 무려 26년 동안 유폐된 끝에 1938년 11월 11일, 69세의 나이로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자 수전 캠벨 바톨레티는 메리 맬런이 맞닥뜨려야 했던 불운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끈질기게 묻는다. 물론 이 비극은 사회의 무지와 혐오에서 비롯되었지만, 무지와 혐오가 언제나 똑같은 방식, 똑같은 힘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무지와 혐오는 언제나 교묘하게 상황과 사람을 가린다. 저자는 메리 맬런이 계급적으로, 민족적으로, 젠더적으로 약자였음을 분명히 지적함으로써, 이 비극이 기이하고 오싹한 해프닝이 아니라, 사회가 합세해서 만들어 낸 인재였음을 강조한다.
메리를 아는 사람들에 따르면, 메리는 책을 무척 많이 읽었다. 일간 신문, 특히 <뉴욕 타임스>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읽었다. 그렇다면 1910년 12월 2일 자 <뉴욕 타임스>에 실린 “걸어 다니는 장티푸스 공장의 여행안내”라는 제목의 기사도 읽었을 개연성이 높다. 뉴욕주 북부 애디론댁산맥의 어느 산속에 사는 남자에 관한 기사였다. 그 남자가 장티푸스를 옮긴 관광객은 36명이었고, 그중 2명이 사망했다. (……)
‘장티푸스 존’으로 알려진 그 남자는 치료를 받겠다고 했다. 그에 따라 뉴욕시 보건국은 최대한 빨리 ‘거처’를 구해 주기로 했다. 메리 맬런과 달리, 장티푸스 존은 익명으로 지냈고 신문 지면에서도 금방 사라졌다. 메리는 부디 자신의 이름도 그처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주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_본문 152쪽
■ 메리 맬런,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수전 캠벨 바톨레티는 메리 맬런이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욱 격렬히 불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과정을 흡인력 있게 서술한다. 하지만 메리를 예정된 운명에 끝내 무릎 꿇은 희생양으로 남겨 놓지는 않는다. 메리는 불운과 맞닥뜨릴 때마다 사력을 다해 싸웠다. 위생 관념이 희박하다고 몰아세우는 보건 당국에 끝까지 항변했고, 쓸개를 제거하면 모든 불운이 끝날 것이라는 의료진의 사탕발림을 단호히 거부했으며, 노스브라더섬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 서신을 언론사에 거듭 띄웠다. 법정에 출두해 결백을 주장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메리는 노스브라더섬에서 69세로 삶을 마치기까지 언제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옴짝달싹하기 힘든 궁지에 몰려서도 무너지지 않았고, 격리 병원에서조차 잡역부, 간병인, 간호조무사, 실험실 조수로 자리를 옮겨 가며 끊임없이 일했다. 새로운 친구들도 만들었다. 메리 맬런의 파란만장한 사연은 거대한 폭력 앞에서 어떻게 자신의 존엄을 지켜 내야 하는지 일깨우는 감동적인 투쟁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튼, 메리는 의사들이 자신을 함부로 다루어도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는 발상이 싫었던 것이다. 메리만큼 심지가 굳지 못한 사람이었다면 쉽게 무너졌을지 모른다. 메리만큼 똑똑하지 못한 사람이었다면 의료진이 쉽게 망가뜨렸을지 모른다.” 이것이 스탠리 워커가 내린 결론이었다. (……)
메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친하게 지낸 이들도 있었다. 그 사람들이 기억하는 메리는 자신의 과거를 캐묻지 않는 한 상냥한 여자였다.
조지 에딩턴은 메리가 구슬로 직접 만든 물건을 팔았던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노스브라더섬의 의사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했다면서, “메리가 작고 파란 구슬로 만든 초커 목걸이를 우리 어머니는 오랫동안 걸고 다니셨어요.”라고 말했다. 메리가 케이크를 구워서 그 섬에서 일하는 여자들에게 팔았던 일도 생각난다고 했다. _본문 168~170쪽
■ 의학, 전염병에 칼을 켜누다장티푸스는 20세기 초만 해도 치사율이 20퍼센트에 이르렀던 치명적인 질병이었다. 게다가 전염성이 강하고 마땅한 예방법도 치료약도 없어서, 1907년 한 해에만 미국 국민 2만 8,971명이 장티푸스로 목숨을 잃었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1911년에야 비로소 백신이 발견되었고, 항생물질은 1942년, 치료제 클로로마이세틴은 1949년에 발견되었다.
20세기 초 미국은 장티푸스의 창궐로 국가적인 재앙을 맞은 상황이었다. 라임 주스가 장티푸스균을 퇴치한다는 둥, 축축한 땅에서 피어오르는 독한 기운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둥의 얼토당토않은 믿음이 판치는 가운데, 보건 당국은 장티푸스를 퇴치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이때 맹활약한 인물 중 한 명이 메리 맬런의 숙적이자 자칭 ‘전염병 퇴치사’ 조지 A. 소퍼였다. 위생 공학자였던 소퍼는 1906년 한집에서 여섯 사람이 장티푸스로 죽을 뻔했지만 미궁 속으로 빠져 버린 기이한 사건이 메리 맬런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 낸 인물이었다. 소퍼는 미국 최초로 ‘건강 보균자’를 발견했다는 공로를 독식하기 위해 자기 업적을 과장하기도 하고 메리를 불결하고 몰지각한 위험인물로 몰아세우기도 했지만, 저자는 소퍼를 악인으로 치부하는 대신 “헛된 공명심에 치우치긴 했어도, 주거 환경을 개선해서 더욱 안전하고 더욱 위생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열정을 기울인”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보건 당국이 메리의 혈액과 대소변 표본을 채취하기 위해 파견한 여성 의사 S. 조지핀 베이커 박사의 활약도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베이커 박사는 16세 때 아버지를 장티푸스로 여읜 인물로, 사립병원 의사가 되는 대신 뉴욕시 보건국 순회 검사관이 되어 빈민들의 보건 증진에 평생을 바쳤다. 이처럼 저자는 메리 맬런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공권력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열악한 조건하에서 보건 당국과 의료진, 과학자들이 전염병과 어떻게 사투를 벌였는지에 대해서도 공정하고 균형 잡힌 시선으로 서술한다.
베이커 박사는 이번 일을 하면서 남다른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본인이 16세 때 장티푸스로 아버지를 여읜 까닭이다. 그때 장티푸스의 원인은 오염된 물이었다. 베이커 박사는 장티푸스의 무서운 위력과 유족에게 남긴 영향을 몸소 겪은 피해자였던 셈이다.
그런 상실과 피해를 겪은 개인사 때문에, 베이커 박사는 배서대학의 장학금 혜택까지 포기하고 의학도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마침내 1898년에 뉴욕 병원 여자 의과 대학을 졸업했다.
1907년 당시 뉴욕시에는 여성 의사가 몇 명뿐이었고 그중 한 명이 베이커 박사였다.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사립병원 의사가 되는 대신 뉴욕시 보건국에서 순회 검사관으로 일했다. 그러다 보니 로어이스트사이드의 빈민가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자주 일하다 보니 임대용 공동주택에 사는 가난한 어머니들이나 아이들과 가까워졌다.
베이커 박사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빈민들의 보건 증진에 평생을 바쳤다. _본문 83~84쪽
좋은 가사 노동자는 건방지지 않았다. 자기 분수를 알았다. 고용주보다 똑똑할지라도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삼가야 할 일을 알았다. 부엌에서 혼자 식사하면서도 평범한 식기나 철제 그릇을 썼다. 고용주 가족이 쓰는 좋은 도자기나 은그릇에 먹을 엄두를 내지 않았다. 브리짓이든 샐리든 페기든 매기든 고용주가 아이 대하듯 이름을 부를지라도, 깍듯이 예의를 갖추어 주인님, 도련님, 마님, 아가씨 등으로 불렀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가사 노동자는 언제나 여자애였을 뿐 결코 여인이 아니었다.
혹시 잠자러 들어가기 전에, 메리는 널따란 베란다에 잠깐 서 있지는 않았을까? 롱아일랜드 해협에서 대서양까지 죽 이어진 바닷가에서 풍겨 오는 짭짜래한 바람을 들이마시면서, 아일랜드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언뜻 떠올리지는 않았을까? 십대 소녀 때 혼자서 떠나온 그곳으로?
고용주들에게든 동료 노동자들에게든, 메리는 자신의 성장기에 관해 말한 적이 없었다. 우리가 메리에 관해 아는 것이라고는 대부분 몇 가지 서류, 메리에 관해 다른 사람들이 평가한 말이나 글, 메리의 여섯 쪽짜리 자필 편지에서 얻은 정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