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나는 누구인가?' 철학자라면, 불교 수행자라면 누구나 고심하는 화두이다. 그런데 이것은 수행이 일정 경지에 올랐을 때나 가능한 궁극의 화두이다. 기초가 부실한 상태에서 이 화두를 잡게 되면 너무 막연하여 시간만 허비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의 화두는 아래처럼 쪼갤 필요가 있다.
출판사 리뷰
「나는 누구인가?」
철학자라면, 불교 수행자라면 누구나 고심하는 화두이다. 그런데 이것은 수행이 일정 경지에 올랐을 때나 가능한 궁극의 화두이다.
기초가 부실한 상태에서 이 화두를 잡게 되면 너무 막연하여 시간만 허비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의 화두는 아래처럼 쪼갤 필요가 있다.
① ‘나’는 있다. - 참나, 眞我
② ‘나’는 없다. - 無我
③ ‘나’는 있는 동시에 없다. - 有而無
④ ‘나’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 非有非無
⑤ ‘나’는 空이다. - 空
⑥ ‘나’를 알 수 없다. - 不可知
당신이 이 문제를 보자마자 저절로 답이 보인다면 깨달은 것이다. 만일 아직 깨닫지 못했다면 문제를 보는 순간 머릿속으로 생각이 확 올라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이 이리저리 굴러가는 순간, 이미 답은 없다.
힌두교의 깨달음으로는 「나는 누구인가?」의 답을 내리기 어렵다. 그 구조가 4차원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세존의 가르침, 바로 佛法이다.
그렇다면 위의 여섯 가지 항목에서 어떤 것이 답일까?
이 문제의 답을 정오의 그림자처럼 뚜렷하게 제시한 것이 이 책이다.
지금껏 불교 철학에서 풀지 못했던 궁극의 화두를 다룬 책으로서, 관심 있는 독자라면 확연히 다른 수준 높음을 피부로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궁극의 화두, 이 책에 답이 있다
불교 철학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이 문제를 얼마나 긴 세월 동안 가슴에 담아 두었을까! 헤아릴 수도 없는 평생의 시간, 불교적 관점에 따르면 수억 겁 년 동안 윤회를 반복하며 헤매고 헤맸을 바로 그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힌두교도, 불교도 깨달음에 이르게 해 준다는 이 문제의 답을 속 시원하게 내놓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아직 오를 수 없는 나무일지라도, 최소한 지도는 얻어 가라
긴 세월 동안 속풀이 동치미 같은 책들만 집필해온 저자다. 특유의 날카롭고 머리를 관통하는 것만 같은 시원한 해답이 드디어 이 책을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됐다. 오랫동안 담아 두었으나 풀지 못한 그 문제를 이 책을 읽는 순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여 그만한 능력은 안 될지라도, 최소한 어떻게 찾아가는지 알 수 있는 지도는 챙겨 갈 수 있다.
반드시 성취 하십시오
철학에 발을 담근 모든 사람의 소망이 아닐까? 나의 근원을 찾아 먼 길을 온 모든 사람들이 깨달음이란 숙원을 이 책을 지팡이 삼아 풀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두 종류의 구슬로 이루어진 세상이 있다. 바로 유리구슬과 수정구슬이다. 유리구슬을 가슴에 지닌 사람들은 번뇌망상으로 인해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뭉뚱그려 중생이라 부른다.
이런 때에 중생들에게 더 높은 차원을 가르치는 무리들이 있으니, 바로 힌두교의 수행자들이다. 그들 구루(Guru)들은 중생들이 지니고 있는 유리구슬을 수정구슬로 바꿔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 원리는 간단하다. 현상계의 無常함을 인식하고 생각을 고요히 가라앉히면 수정구슬이 된다. 번뇌망상만 잦아들면 그 자체로 수정구슬이란 얘기이다. 이렇게 텅 빈 마음 바탕에서 찾은 수정구슬을 아트만(Atman)이라 부른다. 아트만은 우주와 둘이 아니기에 유리구슬이 지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은 소멸되어 영원불변하게 된다. 유리구슬의 중생에겐 더 없는 구원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대략 2천5백여 년 전에 자신이 지닌 유리구슬로 인해 몹시 괴로워하던 한 사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싯다르타이다. 그는 유리구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힌두교의 구루들을 스승으로 삼고 수행에 정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수정구슬을 얻게 되었다. 깨닫고 나니 자신은 본래부터 수정구슬이었다. 유리구슬은 스스로 왜곡해서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싯다르타는 한동안 수정구슬에 만족해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의구심이 들었다. 수정구슬은 과연 온전한가?
모든 구루들이 범아일체(梵我一體)를 거론하며 아트만이 곧 우주 삼라만상임을 강조했다. 이때 쓰이는 비유가 「수불리파(水不離波) 파불리수(波不離水)」이다. 아트만이 파도라면 브라만은 바다여서 결국 같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이런 논리에 뭔지 모를 부족함을 느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확정할 수 없지만 수정구슬에 대한 그의 의심만은 뚜렷했다.
결국 그는 구루들의 수정구슬을 능가하는 또 다른 무언가를 찾기 위해 홀로 수행에 임했다. 그리고 각고의 노력 끝에 다이아몬드구슬을 찾아냈다. 기존에 깨달음의 궁극이라고 믿고 있던 수정구슬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값진 보배였다.
세상에서 홀로 다이아몬드구슬을 갖게 된 싯다르타, 그는 자신이 이룬 경지를 세상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이아몬드구슬을 전해 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이아몬드구슬은 너무 쉽고 단순하여 사람들이 이것을 알아채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였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가장 쉬운 건 가장 어려운 것과 상통하는 법이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전해 줄 다이아몬드구슬이 훼손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중생들의 무지와 아집은 어떤 것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傳法할 마음을 접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발을 디딜 때 느껴지는 발바닥의 감각을 통해 傳法할 방법을 찾아냈다. 이런 우연한 일을 계기로 싯다르타의 법문은 열렸고, 그의 다이아몬드구슬은 마침내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싯다르타의 다이아몬드구슬은 기존 힌두교의 수정구슬과 비교해 뭐가 다른가?
아무리 살펴봐도 그 빛깔이나 촉감에 있어서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혹시 싯다르타는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수정구슬을 가지고 다이아몬드구슬이라고 허세를 부린 건 아닐까?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잠시 보자. 그는 기존의 아트만을 대놓고 부정했다. 수정구슬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철저히 분석학에 입각해서 사물의 실상을 논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기법(緣起法)에 따라 합성된 것들이고, 그래서 쪼개 보면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이다. 그 텅 빈 것을 깨달으면 그게 다이아몬드구슬이란 얘기이다.
이런 말에 힌두교의 구루들은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수정구슬은 원래부터 텅 빈 곳에 있었다. 그 텅 빈 곳은 無처럼 보이지만 여백으로서의 기능을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바로 ‘순수 알아차림’이다. 여백이 곧 ‘참나’란 얘기이다. 참나가 한 생각 일으키면 삼라만상이 그려지고 그것들에 매여 있으면서 중생이 된다. 유리구슬과 수정구슬은 모두 마음먹기에 따른 것이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텅 빈 곳에 자리한 여백의 의미마저 부정했다. ‘텅 빈 각성’인 아트만은 깨달음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는 다이아몬드구슬을 꺼내 들었다. 그것에 대한 사전적 정의나 어떤 구체적 묘사도 없이 그저 텅 빈 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諸法無我만을 강조했다. 諸法無我의 이치를 터득하면 다이아몬드구슬을 얻게 된다는 단순한 논리이다.
그 당시 힌두교 수행자들은 싯다르타의 이런 주장에 두 가지 의문을 내었다. 첫 번째는 싯다르타의 법이 유물론과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물질이 산산이 해체되면 남는 것이 없게 된다. 영혼도 물질의 산물이니 그것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수정구슬이든 다이아몬드구슬이든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그냥 오로지 無일 뿐이다.
두 번째는 유물론이 아니라면 텅 빈 곳에 뭔가 있어야 한다. 수정구슬이든 다이아몬드구슬이든 그것을 알아차리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 이 뭔가를 힌두교에서는 인정했다. 바로 참나(Atman)이다. 만일 싯다르타가 말한 다이아몬드를 알아차리는 어떤 인식 작용이 있다면 그건 기존의 아트만과 같게 되고, 결국 그는 수정구슬을 다이아몬드구슬이라고 허풍을 친 것이 된다.
싯다르타의 다이아몬드구슬엔 이렇게 두 가지 의혹이 남는다. 유물론이냐, 아니면 또다시 아트만의 재탕이냐의 문제이다.
사실 이 점을 묻게 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평생 동안 싯다르타는 침묵했다. 독화살의 비유를 들며 입을 굳게 닫았다. 독화살에 맞아 죽게 됐는데 그 화살의 재질을 꼬치꼬치 따질 필요가 있느냐는 논리이다. 그리곤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세상은 緣起法에 의해 합성된 것으로 ‘나’라고 할 것이 없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이치를 깨달으면 다이아몬드구슬이 된다고….
적잖은 제자들이 그의 침묵에 의혹을 품고 떠나갔다. 하지만 힌두교의 수정구슬에 의혹을 품은 수행자들은 여전히 그의 다이아몬드구슬에 희망을 걸었다. 이렇게 해서 다이아몬드구슬을 기치로 내건 불교가 탄생했다.
그런데 당시의 싯다르타는 왜 形而上의 진리에 입을 닫았을까? 뒤에 살펴보겠지만 싯다르타는 ‘그냥 있는 법’을 가르쳤다. 이것이 佛法의 정수인 中道이다. 그런데 적잖은 제자들이 ‘그냥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물어 보았다. 이때 세존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질문에 일일이 장단을 맞추다가는 ‘그냥 있는 법’이 더욱 미로에 빠져들 수 있다. 그래서 세존은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침묵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그냥 말하기 싫었다. 가령 누군가가 당신에게 「숨을 들이쉬면서 공기를 마셔야 합니까?」 라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말하기 싫던지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을 것이다. 당시의 싯다르타 역시 같은 심정이었다. 너무 당연한 것이나 본말을 전도시키는 질문은 그냥 넘기는 편이 나을 수 있다.
어쨌든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갔다. 과연 싯다르타의 말대로 다이아몬드구슬을 지닌 사람들이 나왔을까?
결과는 참담했다. 수행자들은 계속해서 유리구슬의 얼룩만 닦고 있는 것이었다. 유리구슬에 낀 번뇌망상의 때를 지우며 평생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일이 무려 500여 년이나 지속되었다. 이를 지켜보는 힌두교의 구루들은 그들 불교 무리의 우매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 시선이 불편했던 것일까. 유리구슬의 허망함에 지친 불교 수행자들은 하나둘씩 힌두교의 수정구슬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오온(五蘊)이 사라진 텅 빈 바탕에 초지성(超知性)의 알아차림만 집어넣으면 수정구슬이 된다. 그리고 수정구슬이 되어 바라보면 지금껏 알고 있던 유리구슬은 모두 증발한다. 번뇌망상도 모두 수정구슬의 빛이 뿜어져나와 이루어진 것이다. 삼라만상 모든 것이 수정구슬과 둘이 아니다. 절대와 해탈 역시 저절로 이루어진다. 기존의 유리구슬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높디높은 경지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제 불교수행자들은 힌두교의 아트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트만이 거짓된 것이라는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가차 없이 버렸다. 사실 그들 입장에서 죽어라고 佛法을 닦았지만 기대하던 다이아몬드구슬은 없고 남은 것은 얼룩이 지워진 유리구슬뿐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힌두교의 수정구슬로 향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렇다면 왜 불교를 버리고 힌두교로 귀의하지 않은 것인가?
힌두교로 귀의한 불제자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상당수의 불제자들은 힌두교의 수정구슬에 이름을 바꿔 달아 자기 것이라 주장하는 쪽을 택했다. 아트만 대신 참나, 眞我, 佛性, 本性, 如來藏, 一心… 등의 수많은 이름을 가져다 붙였다.
이미 하나를 훔쳤는데 두 개 세 개를 못할 게 없었다. 영혼이 인정되니 자연스럽게 윤회론이 도입되고, 내친김에 업장론이나 인과론도 가져다 썼다. 이뿐만이 아니다. 다양한 힌두교의 신들도 끌어들였다. 시바를 비롯한 힌두교의 신들은 보살이란 이름을 달고 불교의 신이 되었다. [천수경/千手經] 같은 경전엔 세세한 힌두교의 신들마저 등장하지 않던가. 신의 등장은 자연히 경배하는 의식으로 이어져 불공이 되었다. 이런 구복적 신앙에 自利利他의 자비심을 더해 대승불교라는 명패가 올라갔다.
바야흐로 힌두교의 수정구슬은 대승불교로 넘어와 깨달음의 상징이 되었다. 이런 기가 막힌 일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여기저기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끈 이가 龍樹이다.
龍樹는 무작정 반대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싯다르타가 침묵한 것을 꺼내 들었다. 바로 다이아몬드구슬의 설계도이다. 그것을 만천하에 펼쳐 보임으로써 佛法이 허황된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그것이 바로 空이다.
그런데 싯다르타의 우려는 여전히 유효했다. 龍樹의 空을 이해하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니 그의 空은 철저히 왜곡되어 도로 ‘텅 빈 것’이 돼 버렸다. 그것이 無 쪽으로 치우치면 초기불교이고 ‘텅 빈 자각’쪽으로 기울면 대승불교가 된다. 전자는 유리구슬이요 후자는 수정구슬이다.
龍樹의 空 어디에도 다이아몬드구슬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다. 色이 空이고 空이 곧 色이라는 명제는 佛法의 상징과도 같다. 하지만 여기에 쓰인 空은 龍樹가 꺼내 든 空이 아니다. 그건 ‘실체가 텅 비어 있다’는 뜻으로, 일종의 無의 왜곡이다. 無라고 하면 참나가 부정되고, 그렇다고 有라고 하면 현상계에 매여 있는 것 같아서 대충 얼버무리기 위해 꺼내든 도피용 말장난이다. 그래서 「실체가 텅 비어~」라는 생각만 해도 논리는 깨지고 의식이 일종의 맹신처럼 굳어진다. 불행히도 수행에 발을 담그는 순간부터 이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기독교 신자들이 「주여, 주여~」하는 것과 꼭 같다.
아무튼 이렇게 되니 龍樹의 空論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역사적 평판도 엇갈린다. 설익은 수행자라고 폄하하는 이들도 있고, 어찌 되었든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역할을 맡았다며 높이 평하는 이들도 있다. 결과적으로 龍樹의 다이아몬드구슬은 그것을 헤아릴 수 없었던 수행자들에 의해 퇴색됐고 그는 中觀學派로 내몰리게 되었다.
인류사상 다이아몬드를 거론한 단 두 사람, 싯다르타는 뒷방 노인네로 밀려났고 龍樹는 궤변론자가 되어 구석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대승불교는 철저히 힌두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아트만을 도용한 것도 모자라 브라만(Brahman)을 비로자나불이란 이름으로 바꾸고 석가모니불 외에 수많은 붓다와 보살을 끌어들여 힌두교화 하였다. 힌두교의 수정구슬이 그렇게 달콤했던 것일까?
맛보면 정말로 달콤하다. 어디 달콤하기만 한가. 거룩하고 위대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이런 무가지보(無價之寶)가 노력만 하면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다니 얼마나 희망적인가.
그럼 어떻게 얻는지 살펴보자. 本性만 보면 된다. 見性말이다. 어떻게 本性을 볼까? 생각이 분별을 일으키면 안개가 낀 것처럼 세상이 흐려진다. 이것이 無明이다. 그러니 無明을 거둬내면 자연히 本性이 드러나 깨닫게 된다. 그 교과서적인 방법이 선정과 지혜이다. 따라서 정혜쌍수(定慧雙修)하면 된다.
그런데 수행자들이 이것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그래서 더 쉬운 방법을 쓰기도 한다. 바로 위빠사나이다. 생각이 일으킨 대상에 휘말리지 않고 實相을 관찰하는 것이다. 관찰이 제대로 되면 그것이 곧 순수 알아차림인 本性이다. 저절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도 어려운가? 그러면 순식간에 깨닫는 방법을 쓰면 된다. 바로 看話禪이다. 대표적인 화두로 ‘無’나 ‘모름’이 있다. ‘無’나 ‘모름’을 의식하면 분별이 순간 멈추게 된다. 이때 참나를 깨닫게 된다는 얘기이다. 경우에 따라선 日象觀이라 하여 머릿속으로 日沒을 그리며 응시해도 좋다. 그렇게 無念으로 觀하다 보면 그 자체가 참나가 된다. 무척 쉽지 않은가. 이러니 깨달음의 대중화를 기대해 봄직하다.
혹시 이것도 어렵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얼마 있으면 호르몬 주사 한 대만 맞으면 에고가 사라지고 참나 상태로 깨어 있게 될 것이니 말이다.
아무튼 이런 방식으로 깨달았다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참나가 되니 時空이 끊어지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다」, 「우주와 하나가 되어 해탈했다」, 「지극히 청정하고 고요하여 열반이다」 라고….
이렇게 ‘절대’와 ‘해탈’과 ‘열반’이 공통분모로 등장한다. 그런데 정말로 깨달은 것이 맞을까?
그것들은 수정구슬의 삼대 특징이며 싯다르타가 외면한 것들이다. 그는 다이아몬드구슬을 말하면서도 절대·해탈·열반에 대비한 다이아몬드구슬만의 특성엔 함구했다. 龍樹가 空을 꺼내 그것을 구체화했지만 오늘날까지 空을 이해하여 싯다르타의 佛法을 설한 수행자는 全無하다.
수행자들에게 감히 묻겠다. 그대가 깨달았다고 하는 경지가 과연 온전한가? 혹시 ‘집단 무의식’에 몰입함으로써 얻게 된 ‘不二의 절대성’을 가지고 해탈과 열반을 운운하고 있는 건 아닌가? 불변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텅 빈 자각’이 죽음과 더불어 흔적도 없이 소멸되지 않는다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질문이 너무 많을 수 있겠다. 그럼 딱 한 가지로 정리하겠다. 그 참나(本性)는 어떤 원리로 自存하며 영원불변하는가?
참나 상태가 되면 그런 의문이 일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 이분법적인 개념들은 이미 해탈했으니 말이다. 그럼 의문이 없으면 제1원인의 문제를 해결한 것인가?
아무래도 조건을 바꿔야겠다. 술 취한 사람에게 시비를 따지기보다는 술이 깨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으니 말이다. 다시 분별을 일으켜 중생이 되어 보자. 이제 정신이 좀 들 터이니 의문을 일으켜 참나가 어떻게 원인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지 답을 내려 보라.
모르겠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문제를 푼 것이 아니라 참나라는 무의식으로 도망가 회피한 것이 된다. 진리는 어디에나 있다. 중생의 모습에서 實存을 자각하지 못하면 그건 깨달음이 아니다. 참나를 찾으면 깨닫게 된다는 흑백논리는 힌두교의 수정구슬이다. 다이아몬드구슬에서 수정구슬을 보면 그건 순수한 유리구슬이 뒤틀려 파생한 끔찍한 괴물로 다가온다. 그대들의 눈엔 그것이 절대와 해탈과 열반으로 청정하고 거룩하고 위대해 보이지만 그건 참된 존재의 또 하나의 왜곡일 뿐이다. 물론 혹자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읊으며 깨달음을 소박하고 평범하게 묘사하지만 이미 그 내면엔 수정구슬의 에고가 끈끈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대들이 굳게 믿고 있는 절대와 해탈과 열반이 과연 진리일까? 혹시 그것이 너무 매혹적이어서 당신이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건 아닐까?
싯다르타는 당신이 깨달음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을 죄다 수정구슬로 보았다. 물론 의식의 성장으로 보면 수정구슬은 3차원의 유리구슬에서 진보한 4차원 의식이 된다. 고차원의 정신적 경지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5차원의 다이아몬드구슬에서 보면 그건 의식의 진보이기 전에 我相의 고착화이다. 가령 기존의 집을 허물고 재건축하는 것보다 맨땅에 집을 짓는 편이 수월하다. 그렇듯 4차원의 수정구슬은 유리구슬이 왜곡됨으로서 깨달음의 커다란 짐 덩어리가 된다.
수행자들은 기독교의 맹신자들을 보면서 에고(ego)의 철옹성을 느낀다. 힌두교의 수정구슬도 별반 다르지 않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에 매달리는 것처럼 지금 깨달음에 달싹 붙어 있지는 않은지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도 대승불교의 수정구슬엔 양심이 있다. 그건 수정구슬을 막상 취해 보니 뭔가 부족하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수정구슬의 한계를 직시한 이들은 그것에 선을 그어 등급을 나누게 되었다. [화엄경/華嚴經]이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보면 크게 10단계로 나누고 있다. 마치 바둑에서 급과 단을 정하고 9단을 입신(入神)이라 하는 것과 유사하다.
수정구슬을 찾아 그것에 조금 익숙해지면 一地 보살이라는 품계를 준다. 그리고 이때부턴 육바라밀(六波羅蜜)을 행하며 유교의 도덕군자를 지향한다. 현상계에서 인품을 닦아 나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돈오(頓悟) 이후의 점수(漸修)에 유교를 결합함으로써 별난 수행이 돼 버렸다.
아무튼 깨달음에 계단이 생겨났고, 대략 일곱 계단쯤 올라가면 원효나 진묵이 나온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보살이 나오고 그 끝에 다다르면 붓다가 된다. 완전무결한 깨달음은 붓다에게만 부여된다.
그럼 혹시 붓다의 등급만 깨달음이고 그 밑은 깨달음이 아니라는 생각은 못해 봤는가?
눈을 감고 있는 중생이 있다. 그가 눈을 번쩍 떴다. 세상이 환하다. 그런데 그 환한 것에 등급이 있단다. 그걸 열 가지로 쪼개서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가히 몽상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거듭 말하지만 중생의 無明은 너무 어두워서 구분을 둘 수 없고, 覺者의 깨달음은 너무 밝아서 등급을 매길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깨달음의 경계를 나눈다면, 見性과 成佛 정도이다. 이 정도는 그래도 방편으로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 돈오(頓悟) 이후에 사다리를 만드는 건 매우 우매한 행동이다.
불교인들은 기독교의 맹신을 비판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어리석음이 바로 수정구슬의 등급론이다. 아트만(참나)에 취해 밝고 어두운 것을 잃어버린 결과이다. 그들은 그 분간 없음을 분별의 초월이라 말하지만 그냥 말 그대로 개념이 없는 것이다. 호박이 마음에 안 든다고 줄을 이리저리 그어 수박을 만들려는 것 자체가 한편의 희극이다.
어찌 되었든 싯다르타가 외친 다이아몬드구슬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초기불교는 묵묵히 그것을 찾으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찾지 못했고, 대승불교는 아예 다이아몬드구슬을 버리고 수정구슬을 기치로 내걸었다. 다행히 龍樹가 유일하게 다이아몬드 구슬을 들고 나왔지만 그것 역시 허망한 실패로 끝났다.
싯다르타의 다이아몬드구슬은 정녕 무엇인가?
그것이 도대체 어떤 경지이기에 無上正等覺이라 하는가?
그것을 이룰 방법이 있기는 한 것인가?
이런 의문에 명확한 논거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싯다르타는 역사상 둘도 없는 허풍쟁이가 될 것이다. 그가 대승불교의 제자들로부터 외면받더라도 자업자득이다.
뒷방노인네로 밀려 아무런 발언권이 없어진 싯다르타, 이제부터 그를 대신해 깨달음의 實相을 담아 보고자 한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준걸
空사상 연구가. 저서로는 [空으로 보는 금강경], [大道에 이르는 書], [소설天國誌/전9권], [소설 우주로 간 달마/전3권], [소설 계룡산] 외에 다수가 있다.그는 현실과 이상이 조화를 이루는 창조적 삶을 道學의 모태로 삼고, 국내외 여러 유수한 단체를 이끌며 21세기에 부합하는 현대적 정신문화 운동을 펼치고 있다.
목차
序文 - 8
제1장 총론 - 26
제2장 깨달음의 여섯 가지 함정 - 40
1. 반야로써 佛法을 깨우치다 - 43
2. 大慈大悲한 보살심으로 충만하다 - 48
3. 信心으로 生死를 초월하다 - 53
4. 위빠사나를 통해 알아차림만 남다 - 58
5. 無我之境에 이르다 - 64
6. 眞我를 찾아 無住가 되다 - 71
제3장 깨달음의 세 갈래 길 - 80
1. 싯다르타의 첫 번째 구도행, 眞我 - 80
2. 싯다르타의 두 번째 구도행, 절대 - 86
3. 싯다르타의 세 번째 구도행, 해탈 - 91
제4장 붓다가 깨달은 無上正等覺 - 98
제5장 그냥 깨달아라 - 116
1. 海印을 쥐어라 - 119
2. 대칭을 깨고 자유로워라 - 125
3. 有·無·空의 화두를 잡아라 - 134
4. 분별에 속지마라 - 150
5. 관찰하고 즐겨라 - 158
6. 實存의 위치에서 수행하라 - 165
제6장 궁극의 話頭 - 172
1. 차원의 한계 - 172
2. 힌두교와 불교의 깨달음 - 176
3. 나는 누구인가? - 182
4. 제1원인 - 186
後記 -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