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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함께 읽기
삼인 | 부모님 | 2019.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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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미학자이자 철학자인 김동국의 첫 단독 저서. 니체의 대표작에 대한 정밀한 독서이면서 그를 바탕으로 니체 사상의 정수에 다가가려는 의욕적인 시도다. 저자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모든 장을 순서대로 꼼꼼히 읽어나가면서 이 책을 통해 니체가 말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따져 묻는다. 그 과정에서 니체의 다른 저서들이 풍부히 인용되며, 니체 사상의 핵심 주제들과 요소들 ── 흔히 ‘초인’이라고 잘못 번역되던 위버멘쉬Ubermensch, 힘에의 의지, 신의 죽음,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 운명애(amor fati), 영원회귀 등이 자세하게 해석되고 조명 받는다.

  출판사 리뷰

니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니체가 말하는 ‘거룩한 긍정’과 ‘가혹한 사랑’의 철학


19세기를 살다간 이들 가운데 니체(F. W. Nietzsche, 1844~1900)처럼 21세기에도 화제가 되고 활발히 읽히는 저자가 얼마나 있을까. 더구나 그가 사상의 역사에 그저 발자취를 남긴 정도가 아니라 철학의 운명을 바꾸었다는 말을 듣는 존재라면? 현대를 대표하는 철학자 질 들뢰즈가 “현대 철학은 대부분 니체 덕으로 살아왔고 여전히 니체 덕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썼을 만큼 니체의 영향력과 명성은 우리 시대에도 막강하다. 당연히 니체와 그의 사상에 관한 책도 넘치도록 많이 나와 있다. 그러나 전문 연구자가 아닌 일반 독자가 니체의 철학에 접근하는 데 길잡이로 삼을 만한 책들은 생각보다 드물다. 니체의 주저로 꼽히지만 그 난해함과 독특한 형식, 시적인 문체 탓에 끝까지 읽기가 쉽지 않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미학자이자 철학자인 김동국의 첫 단독 저서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는 바로 그 문제적인 저작을 철저하고 충실하게 읽어내는 데 바쳐진 책이다. 저자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모든 장을 순서대로 꼼꼼히 읽어나가면서 이 책을 통해 니체가 말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따져 묻는다. 그 과정에서 니체의 다른 저서들이 풍부히 인용되며, 니체 사상의 핵심 주제들과 요소들 ── 흔히 ‘초인’이라고 잘못 번역되던 위버멘쉬bermensch, 힘에의 의지, 신의 죽음,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 운명애(amor fati), 영원회귀 등이 자세하게 해석되고 조명 받는다. 그러니까 이 책은 니체의 대표작에 대한 정밀한 독서이면서 그를 바탕으로 니체 사상의 정수에 다가가려는 의욕적인 시도다.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의 출발점은 철학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들을 위해 작성된 강연 원고다. 그래서 책 전체가 대화체로 이루어져 있다. 그 점은 수월히 이해하기 어려운 사상가의 철학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초대받은 독자의 낯섦과 어색함을 누그러뜨리는 데 기여할 테지만,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는 니체 사상을 대중에게 간편하게 해설하려는 종류의 책과 거리가 멀다. 저자의 관심은 니체의 사상을 알기 쉽게 요약하고 정리해서 마치 통조림처럼 독자가 섭취하기 좋게 가공하는 것이 아니라, 니체가 그의 시대에 맞씨름했던 문제들의 정체와 소재지와 연원을 밝힘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우리 시대의 맥락 안에서 그 문제들과 대결하도록 만드는 데 가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신을 죽이지 않았다

그것을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니체가 오래도록 감수해온 오해를 바로잡는 일이다. 니체는 누구보다 많은 오해에 휩싸인 철학자였고 지금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니체를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신의 죽음’이라는 명제는 그 대표적인 증례다. 이 명제는 ‘신은 없다’는 무신론의 당돌한 선언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니체를 무엄하게 신을 살해한 자로 규정하는 구실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니체가 이 명제를 통해 제기하려 한 것은 단순한 무신론자의 자기 확인이 아니라 니체의 선언 여부와 무관하게 이미 이루어진 신의 죽음, 곧 예수의 죽음이 갖는 의미에 대한, 또 그 죽음 이후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믿음을 바치고 존재를 의탁할 절대자가 이미 죽었다면, 그것도 (예수의 죽음이 보여주듯이) 인간의 손에 살해되었다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모든 게 헛되고 헛되다는 허무주의이기 십상이다. 반면 니체는 신이 죽었다면 신의 아들인 인간은 스스로 인간이자 신으로서 살아가야 하지 않는가고 반문하면서 이 허무주의에 맞선다. 인간 스스로 신의 자리를 대신한 삶,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삶’을 표상하는 이름이 바로 위버멘쉬다. 곧 절대적 진리, 불변의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 자리에서 끊임없는 자기 극복을 통해 스스로와 세상을 창조하는 신-인간이 위버멘쉬다. 그 위버멘쉬로서의 삶이(또는 그것만이) 허무주의, 삶에 대한 부정, 인간의 자기 부정에 맞서는 길이라는 것이 니체 사상의 한복판에 있는 주장이자 권고임을 저자는 설득력 있게 밝혀준다.


‘표면’에 깃드는 여성의 진리

니체에 대한 숱한 오해를 낳은 또 하나의 원천은 여성에 대한 니체의 관점이다. 저자도 인정하듯이 니체의 책에서는 여성에 대한 혐오나 경멸을 드러내는 듯한 구절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도 “남성은 여성을 가장 위험한 장난감으로 원하는 것이다”, “남성은 전쟁을 위해 그리고 여성은 전사의 회복을 위해 양육되어야 한다”, “남성들의 행복은 이것이다: 나는 원한다. 여성들의 행복은 이것이다: 그는 원한다”(174~175쪽) 같은 문장들이 나온다.
이를 두고 니체를 여성 혐오자, 반여성주의자로 낙인찍으려는 시도들이 있어왔지만 저자는 여기에 단연코 반대한다. 저자가 니체를 저러한 혐의에서 구출하는 작업은 통념의 전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컨대 니체는 “표면적인 것은 여성의 기질이다, 얕은 물에서 격렬히 움직이는 살갗이다. 그러나 남성의 기질은 깊고, 그 흐름은 땅 밑에서 소리 내며 흐른다”(177쪽)고 말한다. 우리는 대개 ‘표면적인 것’을 얄팍함 또는 피상성과, ‘깊이’를 고상한 가치와 연결 짓지만, 저자는 여기서 니체가 이러한 통념을 뒤집고 있다고 해석한다. 곧 깊이는 표면을 통해 드러나지 않고서는 허상일 뿐이며, 표면적인 것이야말로 니체가 긍정한 세계였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는 “오, 그리스인들이여! 그들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는 표피, 주름, 피부에 용감하게 머물며 가상을 숭배하고 형태, 음, 말 등 가상의 올림포스 전체를 믿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178쪽)고 쓸 수 있었던 것이다. 표면적인 것을 상징하는 여성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진리에 가까이 있게 된다.
니체에게 여성은 곧 그러한 진리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 여성적 진리란, 진리가 아닌 진리, 곧 비진리로서의 진리이기도 합니다. 표면이란 또한 차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생동하며 생성과 파괴를 반복하는 세계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그 표면은 마치 끊임없이 움직이는 대기의 가상인 구름과도 같은 것입니다. 세계는 마치 구름처럼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여성은 그 변화하는 세계에 복종할 줄 압니다. 니체가 여성과 관련짓는 ‘복종’은 이러한 세계 자체에 대한 것으로, 사회적 위계나 통치와는 무관한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여성들은 세계에 복종함으로써 표면에 머무르면서 변화와 차이를 이해합니다. 남성이 끊임없는 동일성으로 사물의 변화를 제거하고자 할 때 여성은 그러한 변화에 복종하며 표면에 머무는 것입니다. (178~179쪽)

저자는 여기서 니체의 한계를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니체는 당대 여성들이 요구한 ‘여성 해방’을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의 억압적 질서, 노예적 노동에 동참할 권리에 대한 주장이라고 여겨 부정적으로 보았지만, 저자는 이를 니체가 정치적 평등과 경제적 독립이 갖는 사회적·실존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니체의 사유 속에서 여성이란 분명 긍정성의 기호이지 부정성의 기호가 아니라는 점에 변함이 없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주인으로서 삶을 사랑하는 법

당대의 민주주의적 흐름, 평등주의, ‘대중’에 대한 니체의 부정적 태도 또한 니체 철학을 오해와 논란 속에 던져 넣은 요인이다. 저자는 니체의 이러한 면모가 기존의 불평등한 사회적 구조와 그 구조 안에서의 차별에 대한 옹호로 오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평등주의에 대한 니체의 반대는 그것이 인간을 다른 인간과 동일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평등주의는 인간이 스스로를 고양시키고 자신만의 높이를 얻는 일, 더욱더 위대해지고 운명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고자 하는 힘을 가로막을 뿐이라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었다. 위버멘쉬, 또는 자유정신에 대한 방해물로 여긴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니체의 격렬한 비판도 평등주의에 대한 관점에서 멀리 있지 않다. 니체에게 기독교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죄의식을 심어주고(원죄) 내세를 동경하도록 가르치는 가운데 지금 이곳의 삶을 부정하고 인간을 왜소하게 만드는 신념이자 제도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사유, 그가 가르치고 권하는 것은 평등주의나 기독교의 가르침과 정반대 편에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변화와 생성, 창조를 긍정하고 세계와 사물의 자연스러운 충동에 능동적으로 몸을 맡기는 일(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다)이며, 영원히 같으면서도 다르게 반복되는 ‘지금 이 순간’(‘영원회귀’)을 적극적으로 살아내는 것, 이를 통해 스스로의 운명 자체를 사랑하는 것(‘운명애’)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지는 그 어떤 시련과 가혹함도 기꺼이 긍정하면서 삶을 사랑할 것을 권장한다는 점에서 니체의 사상은 ‘거룩한 긍정’의 철학이고 ‘가혹한 사랑’의 철학이다. 철학자들이 관조적으로 이야기하는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방식으로 내 앞의 삶을 사랑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의 대답을 철학에서 구하려는 독자라면 이것만으로도 니체의 사상을 만나야 할 이유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는 그 행복한 만남의 중매자가 되는 데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진리는 없으며,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해석일 뿐이라는 니체의 말은 이제는 오히려 진부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니체의 다원주의는 모든 해석을 인정하자는 무분별한 상대주의와 그것의 필연적 귀결인 허무주의와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기대와는 다르게 다원성 안에서 타자와의 평화적 공존 상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원성은 전쟁을 동반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반동적인 억압의 상태(여기에 기독교 도덕, 원한 감정, 삶에의 의지, 진리에의 의지가 있습니다)이거나 창조적인 전쟁의 상태일 뿐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전쟁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전쟁입니다. 그것은 상대를 말살시키고자 하는 전쟁과는 다른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 참여하는 자들은 모두 자신을 극복하는 힘의 흘러넘침에 몸을 내맡겨야 합니다.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 그것이 니체가 말하는 타락입니다. 니체의 관점주의는 상대주의적 공존이 아닌, 전쟁의 상태로 우리를 끌고 갑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바로 이러한 전쟁의 기록입니다.

니체가 진단한 당시 유럽의 병증은 이 창조와 파괴를 부정하는 것이 원인이 됩니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에서부터, 그리고 종교적 플라톤주의인 기독교에서부터 유럽적 사유의 역사 속에 변함없이 지속되는 유일신, 진리, 이데아, 이념, 주체 등은 모두 변화를 거부하고 안정된 상태로 머물러 있고자 하는 인간 욕망의 투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여기’의 삶을 부정하는 이념으로 작용합니다. 이 병든 유럽 문화에 대한 진단으로 제시되는 개념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파괴, 몰락, 변화, 생성 등의 가치입니다. 니체가 당대의 시대, 그리고 유럽 역사 전체를 데카당의 시대, 이를테면 몰락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파괴에 따른 생성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신은 죽었다”라는 광인의 외침은 니체의 수많은 문장 중 가장 유명한 문장일 겁니다. 이 짧은 문장으로 니체는 서구의 형이상학과 종교 전체를 대담하게 전복한 철학자가 된 것입니다. 신이 죽었다면, 더 이상 절대적이고 초월론적 지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터입니다. 그는 신의 죽음을 선언함으로써 진리, 불변, 완전성, 초월성 등 철학과 종 교의 전통적 이상들을 여지없이 허물어뜨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신의 죽음으로 인해 절대적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흔한 이해가 아닙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동국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학부와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철학과 미학에 대한 강의와 글쓰기를 하고 있다. 『최소한의 서양 고전』(공저. 꿈결), 『철학이야기』(전 40권. 공저. 금성출판사) 등의 책을 썼다.

  목차

머리말 - 우리는 왜 니체를 읽는가
여는 글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기 위한 5개의 키워드
제1권
제2권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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