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조선시대, 무당의 딸과 몰락한 양반가 아씨의
운명을 넘어 새 삶을 찾아가는 여정!
“이제부터는 내가 내 운명을 이끌 것이다”
죽은 자를 내어가는 문, 시구문
“시구문은 또 다른 시작이자 출발점이었다.”
살아 있는 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조선시대 두 소녀의 여정!
운명을 헤치고 새 삶을 찾아가는 아이들의 이야기!
운명에 이끌려 갈 것인가, 직접 운명을 이끌 것인가?『시구문』은 조선시대에 시신을 내어가던, 죽음과 삶의 순간이 어우러진 시구문(광희문)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운명을 넘어 새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아이들의 여정을 담고 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었던 인조 시대, 백성들의 어려웠던 삶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다.
이 책에는 세 명의 아이가 등장한다. 무당인 어머니를 부끄러워하고 원망하는 기련, 편찮은 아버지와 어린 동생을 책임지는 소년 가장 백주, 누명으로 몰락한 양반가의 소애 아씨. 어느 시대나 청소년들의 삶은 불평등하고 아프듯이, 이들 역시 괴롭고 힘든 삶을 이겨내려 애쓰지만 각자의 발목을 움켜쥔 운명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삶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제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까지 몰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은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다. 왜냐하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이렇게 살아 있었다.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도, 막다른 길에 내쳐졌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미워했어도 우리는 숨을 쉬고 있었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했다. 누군가를 돕고, 다시 길을 찾고, 미워했던 사람을 다시 이해해야 했다.” (151쪽)
상처를 입는 것은 아프지만 그 상처가 단단한 굳은살이 될 때, 비로소 서툴고 미숙한 자신을 끊어내고 새로운 자신이 될 수 있다. 소중한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의 모순된 행동을 직시하고, 원망하던 가족을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조금씩 성장한다.
어머니는 지금 이 순간 무당도 아니고, 아버지를 잡아먹은 나쁜 아내도 아니었다. 그저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일 뿐이었다. 아니, 어머니는 한순간도 어머니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그저 내가 외면해온 순간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162쪽)
지금 이 순간에도 가족과 갈등을 안고 있는 청소년들이 있을 것이다. 때론 벗어나고 싶지만, 그럼에도 끝내 곁에 남는 유일한 존재가 가족이다. 기련 역시 어머니가 숨겨온 비밀을 알게 된 후에야 세상에 자신을 위해 기도해준 단 한 사람이 어머니뿐이었음을 깨닫는다. 조선시대 무당의 딸이라는 독특한 배경에도 어머니, 가족, 운명의 이야기는 공감하기에 충분하다. 시대가 변해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청소년의 고민과 마음은 한결같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비롯된 이 소설은 마치 그 시대에 살고 있던 아이들을 만나는 것인 양 생동감이 넘친다. 그러면서도 시대를 초월하여 요즘의 청소년들과 한없이 공감하며 읽어나가게 된다. 시구문 바깥의 삶도 여전히 거칠고 험난하겠지만, 직접 두려움의 문을 넘어선 이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덮은 아이들 역시 마음속 자신만의 시구문을 넘어, 서툴고 어리숙한 모습을 벗고 조금 더 변화한 내일을 맞이할 것임을 믿는다.
시구문의 정식 명칭은 ‘광희문’으로, 1719년부터 현판이 걸렸다. 이 책의 표지에 시구문 현판은 소설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충격 때문인지 한동안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니는 무당이 되는 내림굿을 받고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 또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방 잡아먹은 년.
사람들이 입을 가리고 내뱉는 말은 너무나도 험악하고 적나라했다. 동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나와 어머니에게 더 심한악담을 할 수 있을지 안달이 난 것 같았다.
-여편네 기가 세니 남자가 숨이 붙어 있을 수가 있나.
소문의 시작은 어머니에 대한 것들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어머니 탓으로 돌리려는 사람들의 가벼운 입놀림에 진절머리가 났다. 대꾸할 가치도 없다 싶다가도 하루에도 몇 번씩 부아가 치밀어 동네 사람들을 기어코 들이받는 일이 생긴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다 그마저도 그만두게 된 이유는 소문과 악담이 방향을 바꾸어 나에게까지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신내림은 대를 통해 전해진다는데, 딸년도 제 어미 인생 따라갈 거 아냐.
사람들이 소문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퍼뜨리는 데는 아주 짧은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자네, 들었나? 오늘 관철동 근방에서 참수가 있었다네. 양반네를 참수하는 것도 실로 드문 일이 아닌가. 그 가문이 대대손손 어떤 집안인가. 삼대를 멸하게 생겼으니. 게다가 함께 직언했다는 이유로 몇 사람이나 더 시구문 밖으로 내쳐지게 생겼더군.”
그 남자는 술 한 사발을 한 번 더 들이키더니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임금이 쥐새끼처럼 도망을 갔다 결국 청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렸으니. 쯧쯧.”
(…)
“이보게. 목소리 좀 낮추지 그러나.”
“아니, 임금은 백성의 지아비 아닌가.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 몇 명이나 목숨을 잃었나. 그래놓고는 바른말 하는 신하를 기어코 역모로 몰다니. 허허.”
말을 마친 남자가 손으로 머릿고기를 집어 한입에 털어 넣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지난 정묘년 때도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쳐서 어떻게 되었나. 결국 후금한테 명분도 실리도 다 주지 않았는가. 이러니 선대왕이 백성들 입에 회자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 이 말이야.”
잠자코 듣고만 있던 맞은편 남자가 술 한 사발을 들이켜더니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큰소리를 쳤다.
“역모를 갖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도 모자라, 폐위된 선대왕을 옹호하는 말을 하다니. 이러다 자네가 시구문 밖으로 내쳐질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