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이것이 리얼 여고생 라이프”
함께라면 겁날 게 없던 시절,
우리들만의 자취 공화국을 위하여! 누구나 한 번쯤 다시 떠올려보는 고등학생 시절. 막막하고 힘들었던 그 시기를 생각하는 사람은 미소부터 빼문다. 그리 넉넉할 것도 없는 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 천지였던 시절, 각자 모양도 방식도 다른 그때가, 왜 그럴까, 그저 그립고 또 그립기만 하다.
5권의 소설책을 통해 고유의 세계를 실현해온 소설가 구경미의 성장소설 『우리들의 자취 공화국』은 바로 이 시절에 대한 이야기이다. 1990년대 초. 갈래머리에 세일러 교복도 아니고, 버스카드를 충전하며 통학하는 시절도 아니다. 바로 코앞인 거 같은데 생각해보면 아득한 지금하고 별 차이도 없으면서, 또 엄청 다른 바로 그때. 그러니까 ‘고딩’이 아닌 ‘고등학생’ 시절.
“마을은 도시의 변두리라기보다는 시골에 더 가까웠다. 낮은 지붕을 인 집들이 빗속에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마을 뒤편으로는 언뜻언뜻 논과 밭도 보였고 그 너머는 산이었다. 어느 집에서는 개가 짖고 어느 집에선 소가 긴 울음소리를 냈다.” p.10
서울에서 멀지 않은 지방 소도시, 거기서도 조금 더 들어가야 하는 변두리쯤, 주인공 현진이가 다니는 여자 고등학교가 있다. ‘똥통’이라 불리는 불명예를 씻기 위해 ‘별을 보며 오고 별을 보며 돌아가야 하는’ 무시무시한 학업 시스템을 마련한 학교이다. 때는 1990년 초. 끝날 줄 모르는 군사 독재 정권을 타도하고자 매일같이 시위가 열리고, 사회 곳곳에서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고등학생들에게 그런 것은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 고등학생이란 오로지 대학 그것도 좋은 대학에 가야 하는 목적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존재들일뿐이다.
이 중요한 시기에 현진은 가출을 시도한다. 표면적인 이유는 아빠에게 있다. 가족들을 돌볼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은 채, 잃어버린 조카를 찾아 헤매는 아빠를 원망하기 때문이다. 물론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창살만 없을 뿐, 그저 갑갑하기만 한 집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가출을 하게 된 현진이 머무르게 되는 것은 자취 촌. 먼 곳에 살거나 사정이 있는 아이들이 자취하기 위해 모여 있는 곳이다. 이제 현진의 목적은 단 하나. 독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끝내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낸다. 자취를 시작하게 된 현진과 함께할 사람들은 같은 학년, 제각각의 개성을 가진 다섯 명의 친구들이다. 의리로 먹고사는 명진, 전교 1등 수재 영주, 예쁘지만 공부는 못하는 주애, 엉뚱한 짓을 잘하는 정혜가 그들이다. 이들은, 할아버지가 주인인 ‘후진’ 자취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이제 그들은 뭐든 함께한다. 식사도, 빨래도, 노는 것도, 이따금 공부도. 그리고 이따금 어른들이 싫어하는 ‘짓’까지 몰래. 그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기쁨과 슬픔 등의 감정과 또래의 고민은 물론이다.
“우리는 서로서로 몸을 꼭 붙이고 걸었다. 나는 정혜와 주애, 명진이 있어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여서 그 춥고 어두운 길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p.95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노스페이스’만 뺀다면, 지금의 고등학생과 그리 다를 것 없는 ‘선배들’이자 ‘언니 누나들’인 이 책의 주인공들은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의심되는 중요한 가치를 일깨워준다. ‘함께라는 소중한 기분’이 바로 그것이다. 무엇이든 개인화되고 타인과 차별화되는, 혹은 되어야 한다는 사회의 요구에 따라, 지금의 친구들은 너무 낱개로 떨어져 사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를 끝없이 외롭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의 자취 공화국』 인물들은 이렇게 말해주는 듯하다.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무책임과 책임 사이에서 고립되어가는 그 시기를 버틸 수 있는 힘은 ‘함께’이다. 주인공들처럼 함께 자취하며 살 수는 없다 해도, 어깨를 빌려주고 손을 잡아줄 이는 언제나 주변에 있다. 최근 각종 언론에서 심심치 않게 만나는 학교 폭력 문제도, 청소년들의 정신적 쇠약과 자살 등의 극단적 선택도 사실은 ‘선배’들이 ‘함께’의 소중함을 제대로 전해주지 못해 생긴 일일지도 모른다. 그 방법을 몰라 서로 눈치를 보며 주저주저하고 있을 때, 『우리들의 자취 공화국』은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격려한다. 그것보다 쉬운 것은 없다고.
“소설은 혼자 쓰는 것이 아니었다. 살아오는 동안 나를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 뭔가 함께 고민하거나 헤쳐 나온 사람들, 어느 한 시절을 같이한 사람들과 더불어 쓰는 것이다. [……] 모두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_「작가의 말」 에서
『우리들의 자취 공화국』은 기존의 회고적 성격을 지닌 성장소설과 분명히 차별된다. 우선, 작가는 굳이 지금의 청소년들이 쓰는 말투나 단어를 흉내 내려 들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작가의 고교 생활 시절을 배경으로 작가의 체험에서 기인한 까닭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 속에는 청소년들과의 눈높이를 과도하게 의식한 나머지 생기는 작위적인 설정도 어설프게 흉내 낸 청소년들의 행동 묘사도 없다. 너무 먼 때를 다루는, 그래서 동떨어진 감각이 아니라는 것도 이 성장소설의 특장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가르치려는’ 쪽이 아니라 ‘반항하려는’, ‘스스로 생각하고 존재하려는’ 쪽에 서서, 세계를 본다. 함부로 무언가를 제시하지도 않고, 가치 판단을 내리려들지도 않는다. 그저 담백한 문장과 이야기 들로 청소년 독자들에게 같은 편이 될 뿐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 속 가장 빛나는 지점은 솔직함이다. 이것은 ‘친구’라는 관계에 가장 중요한 덕목 아닌가. 그래서 이 책을 펼치는 순간 ‘이들’과 함께하게 되고, 책을 덮을 때 ‘이들’과 헤어지기 싫어 눈물마저 나온다. 저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캐릭터들, 그리고 ‘큰 웃음’을 선사하는 사건들까지. 그야말로 속속들이 알찬 진정한 의미에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고등학생, 혹은 고등학교. 어른들은 왜 이 단어들에 감응하고 또 웃음을 짓게 되는 것일까. 이 책에 그 비밀이 담겨 있다. ‘함께라는 것’, ‘함께라는 것은 어떤 것도 무섭지 않다는 것’. 이것은 철저히 개인화된 이 각박한 사회의 문제의 해결책이기도 할 것이다. 지금, 우리의 친구들과 만나보자.
“미팅이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안 나왔을 거야.”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명진이 말했다. 명진은 버스 창에다 머리를 콩콩 찧었다.
“열쇠고리는 꺼내보지도 못했어.”
내가 말했다. 전날 밤 주애는 커플을 정해야 하니까 각자 물건 하나씩을 준비하라고 했었다.
“아, 배부르다. 그래도 빵은 양껏 먹었네.”
정혜가 중얼거렸다. 정혜는 버스 창에 머리를 기댄 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이, 난 몰라. 꾀죄죄하다고 이제 소문 다 날거야.”
주애는 울상을 지었다.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더운물을 독식한 수도꼭지를 원망했다. 평소 모습대로만 나갔어도 이런 대접은 받지 않았을 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였다. 조용히 듣고 있던 영주가 툭 내뱉었다.
“다들 왜 그래? 우리가 찬 거 아니었어? 괜찮은 놈 하나도 없던데, 뭘.”
우리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영주를 돌아보았다. 영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수학 문제집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맞아, 맞아. 우리는 얼른 맞장구쳤다.
“또 만나자고 했어도 우리가 거절했을 거야. 거절당할까 봐 아예 말도 못 꺼낸 거지. 우리가 좀 차갑게 굴었냐고. 영주 얼굴 좀 봐. 꼭 수학 선생님 같잖아.”
주애가 말했다. 영주가 고개를 들더니 주애를 째려보았다. 그러자 정말 영주네 담임인 수학 선생님과 닮아 보였다. 무섭고 고지식하지만 편애도 없는 수학 선생님. 주애가 두 손을 맞대더니 비는 시늉을 했다. 우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속에 우울도 함께 담아 날려 보냈다.
―「사랑이 필요한 계절」 part. 4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