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2005년 계간 《모던포엠》으로 등단한 정성희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사라진 말씀들>이 문학의전당 시인선 354로 출간되었다. 정성희가 말하는 ‘사라진 말씀들’은 세상에 남겨진 자의 ‘가슴에 남은 그리움’이며, 그 그리움을 알아차리고 음미하는 일이야말로 시를 읽는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누군가가 그리울 수 있음은 정성희의 시를 읽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될 것이다.
출판사 리뷰
■ 해설 엿보기
『사라진 말씀들』은 정성희 시인의 첫 번째 시집입니다. 총 4부로 이루어진 이 시집의 1부와 2부는 장삼이사에 해당하는 다수의 시적 대상들이 때론 왜소하고 때론 천연덕스러운 삶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주목할 건 찰나의 생을 포착하는 순간의 시학이 1부의 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철학자들의 말에 기대자면 세계의 진실성을 접촉하는 일 혹은 세계의 ‘유동적 전체성’을 포착하는 일은 자기 안에 내재된 인식 체계를 포기하고 세계가 전체적으로 자신에게 드러나도록 기다리는 일입니다. 마음의 텅 빈 상태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관조가 매우 비밀스럽고 찰나적일 수 있음이 그래서입니다. 시집의 2부는 삶의 진솔한 양상들이 보다 극적(劇的)으로 그려집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 삶의 양상들에는 과거 삶의 방식이 자연스러운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매체에 의해 재현되는 호들갑스러움에서 비껴 있는, 자본과 속도를 지향하는 시대 현실이 알고도 모른 척하는 실제적 삶의 한 축이기도 합니다. 3부에서는 시인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짐작케 하는 시편들이 주를 이룹니다. 엄마로서의 화자이거나 딸로서의 화자를 통해 우리는 시인의 개인적 삶을 함께 경험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삶의 구체적 일상성에 바탕을 둔 보편적 삶의 양식화는 거친 노출과 생생한 형상화 사이의 미학적 거리를 유지할 때, 언제든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정성희의 시는 삶에 대한 애정과 시의 열정이 빚어내는 미적 감각에의 호소를 통해 삶의 자명성이라는 아픈 속살에 한 겹, 한 겹 부드러운 치유의 막을 입힙니다.
흔히 우리는 시의 본래적 기능이 삶의 자명성을 폭로하는 거라고 오해하기 일쑤지만, 삶의 단단한 껍질을 거칠게 벗겨내는 것만이 시의 능사는 아닙니다. 우리를 묶는 틀로부터의 일탈이 아니라, 때로는 결핍과 부재의 일상으로 귀환할 줄 아는 시야말로 진정 의미와 가치를 지니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이 시집의 마지막 4부가 세계에 대한 시인의 수용이 깨달음의 형태로 드러남은 자연스러운 귀결이겠습니다. 문학이 독자 개인이나 공동체 내부와 공명하지 않는다면 ‘문학’이라는 기표의 존재적 의미를 무엇이라 이름할 수 있을는지요. 정성희의 시는 공허하고 현란한 이미지의 재생을 소비하는 안락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이 탁월한 사유의 주체임을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다음은 크리넥스 티슈 두 장에 얹힌 시인의 사유가 탁월한 작품입니다.
각티슈 두 장이
오월 햇살로 눈부신
그늘 하나 없는 심심한 공터를 뒹굴고 있다
마치 사랑 놀음 하듯 붙었다 떨어졌다
한 몸 되어 한 방향으로 뒹굴다간 떨어져
서로 어긋난 방향으로 달아나듯
낮게 날다 멈추었다간 또 만나 함께 뒹굴고 결국은
바람에 떠밀려 바람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면밀히 지켜보니
우리네 삶이 얼비친다 그러하기에
떠돌다 어느 한 계기로 가시에 걸려 혹은
양지바른 언덕에 닿아 자리 잡게 될 때까지
겹겹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더라도
혼자보다는 이왕이면 둘이 한 몸으로 엉겨
활발하게 사랑하며 넘어보라고
주례사 읊듯 조용히 생각을 얹어보는 순간
껑충껑충 바빠진 한 생이 내 머릿속에서
바람의 급물살을 타고
족보에 한 획을 그으며
행진곡에 맞춰 먼 길 떠날 채비를 한다
공터에 널브러져 길게 누웠던 고요가
눈부신 하객 되어
일제히 손뼉 치며 일어선다
― 「크리넥스 티슈」 전문
미국 중산층 가정의 민낯을 파헤치는 영화 〈아메리칸 뷰티〉에는 비닐봉지가 바람에 날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를 본 어떤 이는 감독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꺼내놓은 것이 바로 비닐봉지’라고까지 말합니다. 예비역 대령의 아들 릭키는 캠코더의 뷰파인더로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입니다. 그의 영상에 찍힌 것은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비닐봉지로, 그것은 바짝 마른 낙엽 위를 무심하게 떠다닙니다. 바닥에 앉으려다 다시 바람에 일어서고,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는 비닐봉지를 보여주며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날 난 느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과 신비롭도록 자비로운 힘을. 내게 두려울 것이 없다는 걸 깨우쳐 줬지. 너무나 아름다운 것들이 존재해. 이 세상에는 말이야.”라고요. 영화는 비닐봉지가 바람에 날리는 소소한 일상 속 평범한 장면이 진정한 ‘아메리칸 뷰티’라고 말해 주는 거지요.
릭키의 캠코더 뷰파인더 안에 비닐봉지가 담기듯, 시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심심한 공터에서 바람의 방향대로 이리저리 힘없이 떠밀리는 각티슈 두 장입니다. 비닐봉지가 자신과 춤을 추는 것 같았다고 느낀 릭키와 달리, 시인은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각티슈 두 장이 마치 자기들끼리 사랑 놀음을 하는 것 같다고 느낍니다. 시인은 이 두 장의 각티슈에 인생을 투영해봅니다. 한 몸이 되었다가 서로 어긋나기도 하고, 세파에 떠밀리듯 바람의 방향 따라 움직이다 가시에 걸리기도 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인생의 축소판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지요. 시인은 각티슈의 움직임에 인생을 빗대어 비유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유로운 연상을 펼쳐 나갑니다. 시인의 연상에 따라 이제 이 작품의 상황은 두 장의 각티슈가 수많은 하객 앞에서 한 쌍의 부부가 되어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결혼식으로 바뀝니다. 시인은 신랑과 신부를 향해 “겹겹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더라도” 한 몸이 아니라 둘이니 “활발하게 사랑하며 넘어보라고” 축사를 읊습니다. 급기야 시의 분위기는 행진곡이 흘러나오는 등 “바람이 급물살을 타”듯 생동감이 넘칩니다. 급히 하객으로 동원된 공터의 고요가 부부가 된 각티슈 두 장의 앞날을 축복하며 일제히 일어나 손뼉을 칩니다. 각티슈 두 장에 얹는 시인의 상상력이 시를 읽는 우리에게 흡족함과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문장을 과시하거나 낭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술술 흘러나오는 시상은 신산한 세상살이의 경험과 심미적인 능력 없이는 펼치기 어려운 연상이고 상상력이지요.
― 신상조(문학평론가)
누운 채 기저귀에 오줌똥 싸는 구순의 시어머니
종일 밭에서 일하고 돌아온 늙은 며느리에게 어딜 갔다 왔느냐고 마른입으로 거친 욕 퍼부어댄다
새벽에 일어나 엉덩이 한 번 지긋이 바닥에 붙이고 쉬어보지 못한 늙은 며느리는 고사리 꺾다가 마른 억새에 손이 베여 피가 난 것을 뒤늦게 알고
구순의 시어머니 똥내 나는 욕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한 마디 대들지 않고 돌아앉아 마른 억새에 물려 베인 손가락 후후 불고 밴드를 붙인다
무어라고 읽어야 하나
저 늙어가는 며느리가 묵묵히 쓰고 있는 유적을
— 「마른 억새가 살점을 베어 문다」 전문
잎 하나 남지 않은 상수리나무 맨 가지에
물까치 댓 마리 앉아 그네를 탄다
위 문장 적는 사이
나무에 물까치 수가 더 늘었다
댓 마리 앉았다고 써놓고
맞는지 세어 보는 나를 미리 읽은 걸까
늦게 앉은 물까치들 능청스럽게 움직임 없다
가슴에 요동치는 문장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창밖 상수리나무에 앉은 물까치 떼가 나를
어릴 적 담벼락으로 이끈다
술래가 된 나는 눈 감고 다시 문장을 읊는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아득히 들린다
골목에 숨은 아이들 거친 숨소리
꼭꼭 묶어두었던 이름들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전문
할아버지는 오늘도 정치인 싸잡아 개누므 새끼들이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오시는 할아버지 연세는 여든둘
목포에서 울산으로 고등어 운반 일을 하시는 할아버지는
일단 가게에 오시면 신문부터 읽으신다
할아버지께서 읽으시는 신문에는
행간마다 개누므 새끼들이 들어 있기라도 한 걸까
후렴구 읊듯
에라 잇 개누므 새끼들 개누므 새끼들 하시는데
그 목소리가 어찌나 거칠고 크던지
행여 이웃이 우리하고 싸우는 줄 알까 봐
개누므 새끼들이 여간 귀에 거슬린 게 아니었다
오늘도 사무실 들어오시자마자
TV 뉴스 채널 틀어놓고
여러 번 개누므 새끼들 하시더니
신문을 펼쳐 들고 앉으시고는
정치인들 싸잡아 얼굴에 똥칠이라도 하겠다는 듯
손가락 끝에 침 꾹꾹 눌러 묻히고
에라 잇 개누므 새끼들이다
촛불 집회로 정권이 바뀐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는 현실에 맞닥뜨리고 나니
할아버지의 개누므 새끼들이 시원하다
속으로 따라 해본다
(에라 잇 개누므 새끼들)
— 「개누므 새끼들」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정성희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2005년 《모던포엠》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 6인 동인지 『한 그루 나무를 심다』 『궁궁이』 등이 있다. 현재 〈비익조〉 동인과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목차
제1부
꽃이 피기까지 13/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14/코끼리 발등을 읽다 16/시절 자화상 18/달에게 상처받은 밤 19/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20/크리넥스 티슈 22/개누므 새끼들 24/그날 나는 노브라였던 거야 26/당신은 손님인가요 28/몸시질하다 29/물억새 32/깨어진 찻잔 34/밥 전쟁 35/업둥이 36/무량한 바위책입니다 38
제2부
마른 억새가 살점을 베어 문다 41/집은 죽었다 42/죄다 가해자 44/선운사엔 사시사철 동백꽃 피더라 46/부추께서 물으신다 47/내 꼭꼭 숨었지 48/세상에서 가장 궁금한 안부 50/바다를 심는 아낙들 52/증언 53/수의 입은 나방 54/하 약국에서 조제 받은 김치 56/소가 우는 밤 58/그때 59/옥수수가 걸어간다 60/폐타이어 62
제3부
나는 엄마다 65/달도 앓는 밤 66/살갗이 먼저 그립다고 운다 68/이팝나무를 바라보며 69/대통 70/엄마의 부처 72/평생 걱정 73/내게도 만만한 길이 있다 74/감자꽃이 웃고 있어요 76/한 그루 나무가 되셨네 77/샘샘입니다 78/어머니가 살아있는 집 80/아버지의 작별을 보다 81/사라진 말씀들 82/나는 백수다 84
제4부
조금 가난할 뿐입니다 87/사랑의 표절 88/오동나무 꽃그늘 아래서 90/봄날의 기도 92/개미는 집을 잃었다 94/꽃의 장례식 95/물의 혀 96/고문 98/돌풍 앞에서 99/죽음을 돌보다 100/뱀에게 빼앗긴 행운 102/벌레 먹은 사과처럼 103/그립다는 것 104/업구렁이 106/바람이었으면 107/무지개는 사라졌다 108
해설 신상조(문학평론가) 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