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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동학혁명과 춘암 박인호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부모님 | 2024.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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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에 살고 거짓에 죽는다

춘암 박인호는 동학 천도교의 제4대 대도주로 임명되어 동학혁명과 3.1혁명 그리고 이후 항일운동의 주역이었음에도 대중에게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박인호의 삶과 행적은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와 동학을 전국화시킨 해월 최시형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의 통령으로, 3.1혁명의 최고지도자로 역할을 다한 의암 손병희에 비해서 결코 적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가려져 있다. 마침 충남 예산군의 지원으로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와 함께 학술대회를 추진하여 그의 생애와 그 높은 뜻을 되돌아봄으로써 숨겨진 삶을 밝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박인호는 1885년 충남 덕산군 가야산 동쪽의 막동리(현 예산군 삽교읍 하포리)에서 태어나 1940년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사망할 때까지 평생을 동학인으로 그리고 동학이 천도교로 개칭된 뒤에는 끝까지 동학의 전통인 인내천과 자주, 항일, 통합의 정신을 고수하셨던 분이셨다. 그가 평생의 신조로 되뇐 “참에 살고 거짓에 죽는다”라는 말은 그의 삶 그 자체였다. 일찍이 조선의 불평등한 신분제에 반발하고 있던 그는 모든 사람은 하늘을 모시고 있는 위대하고 평등한 존재라는 동학의 가르침에 감화되어 있던 중 1883년 인근인 충청도 목천에 해월 최시형이 계신다는 말을 듣고 직접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도가 된 이후 박인호는 누구보다도 신실한 마음으로 성실하게 동학 수련을 쌓았으며 주변에도 널리 포덕을 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충청도 내포 지역에서 동학이 크게 성행하게 된 이유는 박인호의 포덕 활동을 이해해야만 밝혀질 수 있다고 할 정도로 그의 동학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해월 최시형의 노력으로 전국적으로 동학이 크게 성해지자 동학도들의 오랜 소원인 교조 수운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주고 나아가 동학을 인정해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이 전개되었다. 공주에서 처음 시작된 교조신원운동은 급기야 1893년 초에는 광화문에서 선비들이 상소를 올리는 복합상소운동으로 이어졌다. 광화문복합상소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이가 박인호였다. 그의 사촌 동생인 박광호를 상소의 우두머리로 세울 정도로 그는 실질적인 상소운동의 주역이었다. 복합상소는 조정의 설득에 해산했으나 전국적으로 확산하고 있던 동학도들에 대한 탄압은 여전했다. 이에 해월 최시형은 동학도들이 집단행동에 나서는 취회를 보은에서 개최할 것을 명하자 동학들은 보은으로 집결하였다.
여기서 해월 최시형은 전국적인 동학을 조직화하기에 이르러 약 50여 개 이상의 포를 형성하는데 이때 박인호는 내포 지역의 대접주(덕의 대접주)로 임명되었다. 박인호가 이끈 덕의포는 충청도 일대에서 가장 큰 포였다. 이듬해 벌어진 동학혁명에서 1차 기포에서는 정중동하고 있던 덕의포는 그해 9월 18일 해월 최시형의 총기포령에 따라서 내포의 동학도들도 들고일어났다. 박인호에 의해서 포덕된 박희인이 이끌던 예포와 함께 총궐기한 내포 동학은 3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가히 박인호 헌신의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덕산에서 기포한 박인호는 10월 1일 동학군을 서산에서 집결시켰다. 이는 내포 지역의 동학군 지도자들 30명을 처형하겠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구출하기 위함 때문이었다. 서산 관아를 점령해 30명을 구한 내포 동학군은 태안과 해미 그리고 아산, 신창을 점령했다. 내포 동학군의 활약에 크게 놀란 조정은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부대를 형성해 진격하였다. 이 정보를 들은 동학군은 면천의 승전곡 계곡에 매복하고 있다가 계곡으로 들어오던 연합부대를 공격해 크게 승리하였다. 면천 승전곡에서 승리는 동학 혁명사에서도 매우 귀중한 승전보였다. 당시 일본의 정규군을 상대로 승리한 최초의 승리였기 때문이다. 이를 지휘한 지휘관이 박인호였다. 또한 지금도 예산의 자랑거리로 남아 있는 신례원 관작리 전투에서의 승리 역시 박인호 휘하의 내포 동학군이었다. 이를 보면 박인호는 상당한 군사적 지식까지를 겸비한 인물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동학의 주력부대인 호남과 호서 동학군이 공주 우금티로 향해 올 때 박인호는 내포 동학군을 이끌고 합류할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을 향하는 관문에 있던 홍주성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그의 계획은 어긋났다. 10월 28, 29일에 걸쳐서 이루어진 홍주성 전투는 홍주성에 갇힌 관군과 일본군을 향해 성을 포위하고 며칠 기다리자는 박인호의 안과 무조건 성으로 공격하자는 박희인의 주장이 갈렸지만, 박희인의 주장을 수용하고 공격하였다. 그러나 앞선 무력과 화공 전략으로 나온 연합부대에 밀려 대패하고 말았다. 당시의 희생은 동학 혁명사에서 우금티 다음으로 컸다고 할 정도이니 그 패배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름할 수 있다. 해미와 태안까지 밀려간 동학군의 장렬한 최후는 지금도 지역에서는 전설처럼 남아 있다. 다행인 것은 박인호는 예산 인근 야산 토굴에서 화를 피하였고 예포 대접주 박희인은 천안 남면 곡도재 박윤길의 집에서 화를 피하였다. 여타 도인들은 혹은 산으로 혹은 뱃길로 멀리 피신하였다. 어떤 이는 황해도까지 올라가 피신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박인호가 이끌던 내포 지역의 동학혁명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동학혁명의 좌절 이후 박인호는 숨어지내며 의암 손병희와 함께 해월 최시형을 보좌하였다. 1898년 1월에 제자들이 해월에게 문후를 드리는 자리에서 해월은 꿩 한 마리를 준비해 의암과 박인호를 겸상토록 하였다. 박인호는 이런 배려가 스승님께서 앞으로는 의암과 함께 일치하라는 묵교임을 깨닫고 이를 철저히 지켰다. 나이로는 자신보다 6살이 어린 의암이지만 그는 꼭 존대하고 옆에서 묵묵히 지켜주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미 의암 손병희는 해월로부터 수제자로 지명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박인호의 보좌가 없었다면 의암 손병희의 이후 구상과 실천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의암 손병희도 이러한 박인호가 든든한 동지이자 최고의 측근으로 인정해 이후의 모든 사안을 그와 함께 고민하고 풀어나갔다. 손병희가 최초로 도호를 내린 인물도 박인호였다. 춘암(春菴)이 바로 손병희가 내린 박인호의 도호였다. 의암은 평상시에도 춘암은 내가 한강 물에 들어가라고 하면 서슴없이 들어갈 인물이라고 평할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상상 이상의 신뢰 관계였다. 해월 최시형의 묘지 이장과정에서 춘암이 한 역할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1898년 처형당한 해월의 시신은 몰래 송파에 모셔져 있었다. 그러나 땅 주인이 관의 수사가 두려워 이장을 요구하자 의암과 함께 의논 끝에 여주의 원적산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박인호가 산길로 다니다가 보아둔 원적산 아래의 천덕봉이 명당이라고 하여 그리로 모시기로 하였다. 손병희와 김연국 등은 원적산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가장 믿음직한 박인호가 유해를 거두어 운구하기 위해 비밀리에 송파로 떠났다. 송파에 도착한 박인호는 해월의 묘소에 예를 올린 후에 유해를 거두어 준비해 가지고 간 칠성판에 두상에서부터 순서대로 모시고 칠포로 칭칭 감고 유지로 쌌다.
석양이 다 되어 박인호는 해월 선생의 유해를 등에 지고 송파를 출발하여 빠른 걸음을 재촉하여 그 밤으로 원적산에 당도할 예정이었으나 날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 세차게 쏟아졌다. 박인호는 도저히 갈 수가 없게 되자 음고개(경안고개) 마루턱에 있는 외딴 주막집 처마 끝에 스승의 성골을 모셔놓고 밤새 비가 멎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인호는 아버님의 유골이라고 주인장을 속였다. 주막집 주인이 밤새워 유골 옆에 지키고 있던 박인호의 거동을 내다보면서 아무리 효자기로서니 저럴 수가 있느냐면서, 따뜻한 국을 끓여 밤참을 해주었다. 새벽이 되어 비가 잦아들자 박인호는 다시 유해를 등에 지고 걸음을 재촉하여 원적산에 당도해 원적산의 천덕봉에 모실 수 있었다. 춘암의 책임감과 우직함을 잘 드러내는 일화이다.
춘암 박인호는 의암 손병희가 일본으로 외유를 떠났을 때도 든든한 조력자였다. 그가 없는 조국에서 동학을 묵묵히 지켜낸 이도 박인호였다. 일본에 체류하면서 국내의 개혁운동을 지시할 때도 늘 앞장서서 개혁을 전파하고 실천한 인물도 춘암이었다. 그리고 1905년 12월 동학에서 천도교로 개칭할 때도 춘암은 언제나처럼 의암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지지자였다. 실제로 동학이 근대적 종교인 천도교로 전환할 때 박인호의 꼼꼼함과 주도면밀한 행정 처리가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교단의 재정 확충은 춘암처럼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결국 1908년 1월 18일 의암은 더 큰 뜻을 펼치기 위해 자신이 책임지고 있던 교단 대도주의 자리를 가장 신뢰하는 춘암에게 인계시켜서 교단의 모든 업무를 총괄케 했다. 당시 의암은 손수 「선수문」을 지어 “나의 심법을 춘암에게 전한다”라며 선수식을 거행하였는데 행사에는 이종훈, 홍병기 등 동학 시대의 대접주들과 오세창, 이종일, 권동진, 양한묵 등 개화 시대의 지도층이 대거 참여하였다.
이후 의암은 매년 1월 18일을 승통기념식을 거행케 하였고 10주년인 1918년에는 “대도주의 위통은 한울님이 대신사(수운 최제우)에게 전수하신 동일한 심법이니, 여러분은 반드시 믿으라”라는 내용의 글을 『천도교회월보』에 특필하였다. 어쩌면 이는 3.1혁명을 뒤의 교단의 혼란을 미리 방지하고 나아가 춘암에게 확실한 교권이 전수되었음을 확인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1900년대 초 중반의 천도교의 문화운동과 3.1혁명을 준비하는 모든 과정은 춘암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포덕활동, 출판문화운동, 언론운동 그리고 교육운동까지 언제나 춘암은 의암을 대신한 최고 책임자로 이름을 올렸고 그는 그 일들을 진실된 마음으로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해 거행된 3.1혁명은 사전에 오랜 준비과정을 거쳐서 실시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엄청난 거사를 준비하면서도 의암 손병희는 춘암을 개입시키지 않았다. 사전의논에서도, 타 종단과의 유대 과정, 독립선언문 작성과 인쇄 그리고 배포과정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천도교단의 이인자임에도 민족대표 33인에 서명치 못 하게 했으며 그저 자금 지원만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는 3.1혁명 이후의 교단을 지킬 이는 오로지 춘암 박인호뿐이라는 의암의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3.1혁명이 발발하자 일제는 춘암을 체포해 갔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가 천도교단의 이인자임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 경시청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의 혹독한 문초와 고문 뒤에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9개월 동안의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민족대표들의 처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처벌이었다. 그만큼 3.1혁명에서 차지하는 그의 비중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석방된 그에게는 순국한 의암의 뒤를 이은 민족종교로서의 천도교의 전통과 그 책무를 다하는 과제가 부과되어 있었다.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를 필두로 한 청년운동, 문화운동으로서의 『개벽』지 출간, 여성운동과 어린이운동, 농민운동 등 그 앞에 놓인 과제는 항상 산적해 있었지만, 그는 바위처럼 참되게 그리고 꿋꿋하게 실천해 나갔다.
그러나 그를 가장 괴롭힌 과제는 천도교단 내에서 자행된 일제의 분열 책동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천도교 신구파의 분열은 그를 천도교 구파의 지도자쯤으로 치부케 하였다. 그가 여러 번에 걸쳐 대도주의 자리를 내놓은 것도 자신은 의암으로부터 천도교의 정통을 지키라는 명을 받았지 단순히 분열된 상태에서 구파의 지도자로 격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분열되는 교단을 보면서 그는 스승님들의 도가 더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천도교가 주도했던 모든 사업들, 일테면 제2의 3.1혁명을 준비하는 이종일의 역할과 6.10만세 시위 준비 그리고 신간회 참여 등 그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은 바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일제 압박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는 1930년대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전국의 천도교인들에게 매일 저녁 9시 기도식에서 멸왜기도주문을 외우라는 비밀 지시를 내렸다. 이 운동은 전국의 천도교인들이 비밀리에 2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지속됐다. 이점은 교단 내에서 춘암 박인호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는 방증이다. 이 사건으로 일제는 전국의 주요 교역자 300여 명을 체포해 갔으며 춘암 박인호는 병이 깊어 병석에서 문초를 당하였다.
춘암 박인호는 1940년 4월 3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 전 신구파로 분열된 교단이 다음 날인 4월 4일을 기해서 합동하기로 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합동 소식을 들은 박인호는 병석에서 “이제 내가 영계에서 스승님 뵙기가 떳떳하게” 되었다며 후일을 믿는다고 말을 남겼다고 한다. 임종 때까지 천도교 주문을 외우다 눈을 감은 춘암은 틀림없이 스승님들을 기쁘게 뵐 수 있게 되었다며 기쁘고 기쁜 마음으로 순도·순국하였을 것이다. 춘암 박인호의 묘지는 포천시 소월읍으로 정해졌다. 춘암이 순도·순국한 이후 천도교단은 대도주제를 없애고 교령제를 도입해 서산 출신의 이종린 선생이 1대 교령에 취임함으로써 오랜 분규를 끝낼 수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부분이 드러나지 않은 대표적 인물이 춘암 박인호이다. 어쩌면 동학시대의 앞선 인물들이 워낙 두드러지다 보니 상대적으로 덜 조명된 면이 있을 수 있다. 틀림없이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와 실천하는 삶으로 동학을 전국화시킨 해월 최시형 그리고 근대사에 엄청난 업적을 남긴 의암 손병희에 비해 춘암 박인호의 생애는 덜 조명된 면이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춘암 박인호가 없었다면 과연 민족정신과 사상으로서의 그리고 민족종교로서의 동학 천도교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를 상상해보면 이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로 도통을 넘긴 의암 손병희는 평소에도 “춘암 대도주는 생각하는 것은 나만 못하지만, 대도를 지키는 데는 내가 춘암만 못하다. 춘암은 밤에 만져 보아도 도(道) 덩어리이다”라고 할 정도로 그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니까 창업보다 더욱 힘든 것이 수성이라고 춘암은 언제나 참에 살면서 묵묵히 자신이 맡은 바를 실천함으로써 엄혹한 시절을 버티면서 동학 천도교를 지켜낸 인물이었다. 단 한 치라도 거짓된 삶이라면 그는 곧 죽음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철저하게 지켜온 시대의 어른이자 지도자였다.
애석한 것은 이렇게 존경해야 하고 선양되어야 할 점이 많은 춘암 박인호이건만 이제껏 제대로 된 단행본도 학술대회도 없었다는 점이다. 금번의 학술대회가 최초로 그의 생애를 규명한 대회였다는 것이 부끄럽게 한다. 그래도 첫술에 배부를 수 없듯이 앞으로 춘암 박인호에 관한 연구는 계속될 것이고 더 많은 가려진 부분들이 밝혀질 날이 올 것이다. 동학학회 역시 수운과 해월 그리고 의암만이 아닌 춘암 박인호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을 것을 다짐해 본다.
학술대회에서는 기조 강연과 4편의 전문적인 연구논문이 발표되었다. 먼저 기조 강연을 맡아주신 전 독립기념관 관장인 김삼웅 선생님께서 병고 중에도 불구하고 한편의 평전을 보는듯한 내용으로 춘암 박인호를 재조명해 주셔서 크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특별히 관장님이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재직 중일 때 춘암의 어록비가 독립기념관 내에 설치되었는데 당시 유족과 기념비 설치추진위원회에 기념관 내 어느 곳이든 가장 좋은 자리에 세우시라고 해 주셨다고 한다. 당시 관장님도 알려지지 않은 큰 인물 박인호에 대한 아쉬움이 너무 크셨던 것 같다.
본 발표에서 성강현 교수의 “춘암 박인호의 동학 수행과 동학농민혁명 활동”과 박세준 교수의 “동학·천도교의 재건과 춘암 박인호 활동 - 종교조직의 제도화와 지도자 승계 과정을 중심으로”는 각기 동학시대와 천도교시대를 구분하여 춘암 박인호의 행적과 활동을 규명한 논문으로 향후 박인호 연구의 토대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정을경 박사의 “춘암 가계의 민족운동” 논문은 기존에 연구한 것을 새롭게 보완해서 더욱 확실하게 춘암 박인호 집안의 민족운동 참여 현황을 분석해 주었다. 이는 동학에 입도한 춘암이 집안 전체에 동학을 포덕함으로써 혼자만 하는 운동이 아닌 함께하는 운동을 몸소 실천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끝으로 조극훈 교수의 “춘암 박인호의 삶과 사상: 동학의 세계화 기반” 논문은 향후 춘암 박인호의 사상이 어떻게 세계화되어야 할 것인지를 규명한 시론적 연구이다. 최근 한류 열풍이라는 말에 동조하면서 과연 한류의 마지막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정신과 사상 그리고 문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면 동학의 세계화는 동학을 연구하는 모든 연구자의 과제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끝으로 보론 차원에서 몇 편의 논문과 자료들을 실었다. 오래전에 작성했던 필자의 논문 한 편을 수정 보완해서 실었고, 박성묵 회장의 논문과 자료들이 첨가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면상으로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 분은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의 박성묵 회장님이시다. 박 회장을 25여 년 전에 처음 만났을 때 예산 지역의 동학 유적지 답사를 안내해 주면서 춘암 박인호에 대한 평가와 선양 작업의 부족 등에 아쉬움을 거듭 드러냈다. 특히 현재는 관작리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으로 새롭게 단장되어 충남 동학혁명의 학습장이 되고 있지만, 처음에는 공동묘지였던 현장에서 장차의 구상을 역설하던 그 모습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면 알수록 몰랐던 부분이 늘어나고 필자 역시 감화되어 춘암 박인호에 대한 존경심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절대적 공헌은 묵암 박성묵 회장의 노력 덕분이다.
그의 뚝심은 바로 춘암의 말씀인 “참에 산다”라는 현대판 실천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이제 남은 과제인 아무런 연고도 없이 포천에 있는 춘암의 묘소를 관작리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안으로 모시고, 하포리의 생가가 매입되어 유허비 등을 포함하는 일대에 가칭 “춘암공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일이 완성되면 충남 동학의 거두이자 위대한 민족지도자 춘암 박인호가 비로소 세상에 그의 높은 뜻이 알려지는 날이 될 것이다. 이 과제에도 역시 앞장설 인물은 박성묵 회장일 것이다. 오늘도 한결같이 참되게 살면서 춘암 박인호를 선양하는데 앞장서는 그에게 존경의 마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아울러 한결같이 동학학회를 애정어린 따듯한 시선으로 지원을 해주고 계시는 천도교 중앙총부에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앞으로도 동학학회는 천도교중앙총부와 종교성을 넘어서 우리 역사와 사상 그리고 문화로서 동학을 아끼고 사랑하는 동반자적 관계를 계속 유지할 것을 다짐한다. 끝으로 항상 학회의 일에 전심전력으로 나서주는 학회 임원진 여러분과 특별히 김영진, 김남희 그리고 박세준 총무이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항상 욕심 많은 회장 만나서 당하는 일이라 생각하라며 미안함을 변명한다. 또한 어려운 가운데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출판을 맡아주신 선인 출판사의 윤관백 대표님과 직원 여러분 모두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2024년 1월 31일
동학학회 회장 임형진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삼웅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 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국립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바른 역사 찾기에 힘써왔고, 독립기념관장(2004~2008)을 거쳐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회장을 맡고 있다.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큰 관심을 두고 많은 책을 썼으며, 특히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들의 평전을 다수 집필했다. 주요 저서로 《백범 김구 평전》 《을사늑약 1905, 그 끝나지 않은 백년》 《단재 신채호 평전》 《만해 한용운 평전》 《안중근 평전》 《안창호 평전》 《홍범도 평전》 《김근태 평전》 《몽양 여운형 평전》 《조소앙 평전》 《나는 박열이다》 《신영복 평전》 《3·1 혁명과 임시정부》 《장일순 평전》 《의열단, 항일의 불꽃》 《꺼지지 않는 오월의 불꽃: 5·18 광주혈사》 《이승만 평전》 《박정희 평전》 《김영삼 평전》 《김대중 평전》 《김재규 장군 평전》 《다산 정약용 평전》 《겨레의 노래 아리랑》 등이 있다.

지은이 : 임형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자랐다. 경기대와 성균관대 그리고 경희대에서 수학하고 정치학 박사를 받았으며 경희대 후마나타스칼리지에서 객원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한국정치사상을 전공하였고 동학사상의 현재화에 관심을 가지고 천도교 청우당 연구를 주로 하고 있으며 학문을 넘어 천도교의 전위단체인 (사)동학민족통일회의 공동의장으로 있으며 동학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있다.

지은이 : 조극훈
경기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지은이 : 성강현
강원도 삼척 출신으로 강릉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의대학교 대학원에서 『6·25전쟁 시기 천도교 포로의 전향과 종교 활동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의대학교 역사인문교양학부 겸임교수이며 동천고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충청도 옥천 동학혁명』(공저), 『전라도 전주 동학혁명』(공저), 『6·25전쟁시기 천도교 포로 연구』 등이 있으며, 한국전쟁 포로, 동학과 천도교, 민족운동 등에 관한 논문이 다수 있다.■ 저서『충청도 옥천 동학농민혁명』(공저)『전라도 전주 동학농민혁명』(공저)『강원도 원주 동학농민혁명』(공저)『6·25전쟁 시기 천도교 포로 연구』『부산 근현대사 산책』(공저)『반도의 총후진』(공역)■ 논문「소파 방정환의 일본 유학시기 활동 연구」(2021)「대한제국 진위대 연구」(2021)「『개벽(開闢)』의 3·1독립운동 민족대표 담아내기」(2021)「옥천 지역의 동학의 전파와 확산」(2020)「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과 전주화약에 관한 고찰」(2019)「6·25전쟁 시기 부산의 포로수용소」(2019)「동학농민혁명 이후 해월 최시형의 피신과 교단 수습」(2018)「해월 최시형의 단양 은거 시기 연구」(2016)「제1차 교육과정의 국사 교과서 서술체제와 내용 분석」(2016)「군대 해산 과정에서의 서소문 전투 연구」(2016)「거제도 포로수용소의 9·17폭동 연구」(2016

지은이 : 정을경
충남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충남대학교 내포연구단과 마을연구단에서 충남지역 마을조사 및 연구를 통해 지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현재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서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연구사업을 통해 지역사와 독립운동사 분야를 대중화하는 일을 하고 있다. 주요 연구로는 「일제강점기 朴寅浩의 천도교 활동과 민족운동」(2009), 「충남지역 천도교인의 3·1만세운동 전개」(2016), 「동학농민군 이병춘의 생애와 독립운동」(2019), 『충청도 옥천 동학농민혁명』(공저, 2020) 외에 다수 있다. 지금은 동학농민혁명과 천도교의 민족운동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

지은이 : 박세준
덕성여자대학교 지식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지은이 : 박성묵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회장

  목차

간행사–임형진

춘암 박인호선생의 민족사상–김삼웅

1. ‘샘 해 지지않은’ 주역
2. 비밀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발행지원
3. 내외의 교단 분열획책에 맞서
4. 신간회조직 항일구국투쟁
5. ‘멸왜기도’ 실시 왜국패망시도
6. 정신과 업적 돼살려야

춘암 박인호의 동학 수행과 동학농민혁명 활동–성강현
1. 머리말
2. 박인호의 동학 입도와 내포 지역 포덕
3.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에 덕의대접주(德義大接主)로 참여
4. 승전곡전투에서 일본군에 승리
5. 맺음말

춘암 박인호의 활동과 동학ㆍ천도교의 재건–박세준
1. 들어가기
2. 종교의 제도화와 지도력의 계승
3. 동학·천도교의 제도화와 후계자 훈련
4. 동학·천도교의 재건과 지도자 계승
5. 나가기

춘암 가계의 민족운동–정을경
1. 머리말
2. 동학을 통한 항일운동
3. 천도교를 통한 민족운동
4. 맺음말

춘암 박인호의 동학사상과 역사인식–조극훈
1. 서론
2. 춘암 박인호의 삶과 행적
3. 춘암 박인호의 동학사상
4. 춘암 박인호의 역사인식
5. 결론

내포동학혁명 지도자의 활약상과 역사 문화적 의의–박성묵
1. 머리글
2. 내포동학혁명의 주요지도자 활약상
3. 내포동학혁명의 역사문화적 의의
4. 맺음말

1920년대 천도교의 민족운동과 박인호–임형진
1. 서언
2. 천도교단 정비와 민족문화운동
3. 교단의 분화와 6.10만세운동
4. 신간회 참여와 민족연합전선에의 꿈
5. 민족운동과 박인호
6. 맺는 글

내포동학혁명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박성묵
1. 1894년 내포동학 민중의 몸짓
2. 홍주성 패퇴 후 마을을 떠난 대술 고동 경주최씨
3. 내포동학농민혁명 지휘자 박인호(朴寅浩)
4. 가족이 함께 활동한 방치덕 선생과 아들 방학삼
5. 아침밥 제공받고 싸운 신례원 관작리 전투
6. 난공불락에 욕설을 퍼부은 홍주성 전투
7. 유해 못 찾아 청수그릇 매장한 농민군 정인교 선생
8. 내포동학전투지를 누빈 비밀 연락꾼 함한석
9. 태안 근흥 토성산성에서 목 잘린 동학농민군
10. 시신없는 가묘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손자며느리

예산지역 동학혁명 유적지–박성묵
1. 내포동학혁명을 지휘하신 민족의 큰 스승 춘암 박인호
2. 동학혁명군 최화삼(崔化三 1875.8.6.~1895.4.19.)
3. 예산지역 동학혁명 유적지 안내

어린이 그림그리기 대회 사진들–박성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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