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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호조판서 권이진
가갸날 | 부모님 |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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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오늘 우리 역사에서 귀감이 될 새로운 인물을 발굴 소개한다. 조선 영조 때 호조판서를 지낸 유회당 권이진이다. 원광대 유명종 교수는 “성호 이익이 묘지명을 짓고 번암 채제공이 시장을 올린 것으로 보아 그의 학통과 사상이 유학사상사 전회(轉回)의 한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생각된다”며 유학자로서 권이진을 높이 평가하였다. 하지만 그가 더욱 주목되는 점은 뛰어난 행정가, 실사구시 관인으로서의 면모다.

권이진은 2년밖에 안되는 짧은 재임 기간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곳간을 가득 채우는 성과를 이뤄냄으로써 훗날 영조도 그를 최고의 호조판서로 평가하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양란과 기후재해로 황폐화되었던 경제가 점차 회복되고는 있었지만 지속되는 비리와 부실한 재정 관리로 인해 당시 국가 재정은 파탄 직전이었다. 권이진이 얼마나 재정 건실화에 노력했는지는 영조가 사랑스런 옹주에게 은주발을 선물하려 한 것까지 명분 없는 지출이라며 완강히 반대한 에피소드에서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권이진은 세금을 더 거두어들이는 방식이 아니라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재정원칙을 수립하고, 낭비를 줄이고, 비리를 척결함으로써 개혁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출판사 리뷰

조선 붕당사를 다시 써야 할 만큼 흥미로운 혼맥!
노론 영수 송시열, 소론 영수 윤증, ‘사문난적’으로 처형된 남인 대표 윤휴는 남인의 대표 산림 권시를 중심으로 맺어진 인척이었다
격심한 당쟁 속에서 의연히 실사구시 관인의 길을 가며 최고의 재정 행정가(호조판서)가 된 권이진의 삶을 발굴 복원하다
부록: 〈열하일기〉보다 56년 앞선 〈연행일기〉

오늘 우리 역사에서 귀감이 될 새로운 인물을 발굴 소개한다. 조선 영조 때 호조판서를 지낸 유회당 권이진이다.
원광대 유명종 교수는 “성호 이익이 묘지명을 짓고 번암 채제공이 시장을 올린 것으로 보아 그의 학통과 사상이 유학사상사 전회(轉回)의 한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생각된다”며 유학자로서 권이진을 높이 평가하였다. 하지만 그가 더욱 주목되는 점은 뛰어난 행정가, 실사구시 관인으로서의 면모다.
권이진은 2년밖에 안되는 짧은 재임 기간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곳간을 가득 채우는 성과를 이뤄냄으로써 훗날 영조도 그를 최고의 호조판서로 평가하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양란과 기후재해로 황폐화되었던 경제가 점차 회복되고는 있었지만 지속되는 비리와 부실한 재정 관리로 인해 당시 국가 재정은 파탄 직전이었다. 권이진이 얼마나 재정 건실화에 노력했는지는 영조가 사랑스런 옹주에게 은주발을 선물하려 한 것까지 명분 없는 지출이라며 완강히 반대한 에피소드에서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권이진은 세금을 더 거두어들이는 방식이 아니라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재정원칙을 수립하고, 낭비를 줄이고, 비리를 척결함으로써 개혁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훗날 정조의 개혁정치를 보좌하며 최고의 영의정으로 칭송된 채제공은 자신이 호조판서를 맡게 되자 조정의 경대부들이 서로 “그대가 반드시 권판서와 같기를 바라오”라고 했다며 “공께서 40여 년 전에 호조판서를 지냈는데도 불구하고 다스린 법과 시행했던 일들이 혁혁하게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고 회고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흥미로운 기록이 실려 있다. 탐관오리의 비리를 징치한 것으로 유명한 어사 박문수가 호조판서를 맡았을 때 좋은 평판을 받았으나 ‘권이진이 호조에 있으면서 재화를 잘 다스린 것으로 최고의 칭예를 얻은 것에는 미치지 못하였다’는 대목이다.
권이진의 정책을 면밀히 연구한 역사학자들도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고 있다. 충남대 성봉현 교수는 〈유회당 권이진의 호조재정 확보책〉이라는 논문에서 ‘권이진을 조선 최고의 호조판서로 평가’하였으며, 김준석 연세대 교수도 권이진이 ‘그 시기 재정운용의 최고 능력가라는 평판’을 얻었다고 평했다.
노론이 주도하던 당시 정치구도 속에서 권이진은 극소수파인 남인 출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호조판서로 전격 발탁된 데는 무엇보다 그의 탁월한 능력과 정파에 휘둘리지 않고 실사구시적 올곧음을 추구하던 사람됨이 영조의 눈에 띄었기 때문일 것이다.
권이진 집안의 혼맥 및 그에서 파생한 인간관계는 조선 붕당사를 통틀어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기도 하다. 그의 외조부는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이고, 고모부이자 스승 윤증은 소론의 영수이다. 사문난적으로 처형된 남인 대표 윤휴의 아들 윤의제 역시 고모부였다. 권이진의 할아버지 권시를 중심으로 당시 붕당의 대표 인물들을 망라하는 놀라운 인연이 형성된 것이다.
권이진은 송시열과 윤증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다채로운 배경 속에서 숙명적으로 다양한 학문적 세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를 더욱 탄탄히 붙들어 세운 것은 증조부 권득기와 조부 권시가 확립하고 전수한 가학의 전통이었다. ‘매사에 반드시 옳음을 추구한다’는 구시(求是)의 정신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권이진은 당파에 기울어지지 않으면서 ‘구시’의 정신을 바탕으로 민생정치와 현실적인 경세문제를 실현하기 위해 힘썼다.
격심한 당쟁의 세상에서 실사구시 관인의 길을 간 권이진의 삶은 참으로 독특하다. 그는 호조참판, 호조판서 등을 맡아 탁월한 재정 전문가로서의 면모를 보였을 뿐 아니라, 힘없는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애민적 목민관으로서도 큰 사랑을 받았다. 또한 동래부사를 맡아 자주적 대일외교의 기틀을 마련하고 남해안 연안의 방어책 마련에 획기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평안감사를 맡았을 때는 일일이 변방을 순회하며 대청무역의 적폐 청산 및 북변 방어책 확충에 노심초사하였다. 하나같이 ‘구시’를 바탕으로 한 실천적 행정가의 면모라 할 수 있다.
조선 역사상 행정가로서 이 같은 삶을 살고 성과를 낸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권이진 같은 재정 행정가는 전무하다. 이 책의 집필은 권이진이 남긴 문집 《유회당집》이 중심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그밖에 《조선왕조실록》과 당대 문인들이 남긴 기록이 전거로 활용되었다.
권이진은 1668년(현종 9년) 대전시 탄방동(당시 공주목 유성현 천내면 탄방리)에서 태어났다. 권이진은 할아버지 권시가 그곳에 입향후 호서(湖西) 사람의 일원으로 활동함에 따라 자연히 그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1707년 대전 보문산 남쪽의 무수동으로 이사해 정착하게 된다. 만년에는 부모님 묘소 아래 재실을 짓고 “날이 새도록 뒤척이면서 두 분이 그리워 잠 못 이루네(明發不寐 有懷二人)”라는 뜻으로 ‘유회당(有懷堂)’이라 이름지었다. 이후 유회당은 그의 호가 되었다. 그는 이곳을 가꾸고 일군 과정을 명당실기(明堂室記)와 하거원기(何去園記)에 남겼다. 현재 무수동에는 유회당과 삼근정사, 거업재, 장판각, 여경암 등이 대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권이진은 호조판서와 평안감사를 마친 후 고향 무수동으로 돌아와 머물다가 1734년 6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영조는 치제문을 지어 그가 이룬 성과를 칭송하며 죽음을 아쉬워한다. 그의 묘소는 대전시 중구 어남동에 조성되었다.
한편 이 책의 미덕에 추가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권이진이 1723년 연경에 사은사 부사로 가면서 남긴 〈연행일기〉이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보다 56년이나 앞선 기록이다. 두 글을 비교해 읽는다면 조선시대 연행사신의 세계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가치가 큰 만큼 전문을 부록으로 수록해 독자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한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권선준
대전에서 태어나 대전고등학교와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20대에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참여했으며 그후 국회, 청와대, 21세기리서치, 언론진흥재단 등에서 일했다. 대학에서 한국사를 가르친 부친의 영향으로 줄곧 역사를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고 인생의 목표를 찾는 삶을 살아왔으며 전통의 가치를 현재의 시각으로 되살리는 데 관심이 많다.

  목차

머리말

1. 당파를 넘어 애민의 길로

옹주의 은주발은 아니되옵니다
탄방동과 권득기, 권시 부자
효심과 우애로 가꾼 무수동
당파의 굴레를 넘은 놀라운 인연
중심을 잡게 해준 가학의 전통
노론의 집요한 발목잡기
순탄치 않은 벼슬길
추천도 되기 전에 반대부터
왕보다 당파의 이익을 우선하는 붕당정치
탄옹 권시와 기해예송
구시(求是)와 직(直), 그리고 무실(務實)
외조부 송시열과 고모부이자 스승 윤증
담백하고 강직한 성품
민생을 우선하는 실무관인

2. 조선 최고의 호조판서

반드시 권판서와 같기를 바라오
재정 안정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
왕실납품 상인들의 독점이익을 깨다
상업의 성장과 특권 상인의 등장
낭비를 줄이기 위한 외로운 싸움
공납 비리에 맞서다
정경유착의 숨은 핵 경아전
근대적 재정 원칙을 수립하다
백성들의 일곱 가지 고통
일곱 가지 폐해에 대한 민생 개혁안
조운(漕運) 개혁안을 내다
억울한 아낙의 한을 풀어주다
호족의 토지겸병 방지와 애민정책
유능한 목민관
백성의 억울한 옥사를 구제하다

3. 자주 외교, 국방을 위해


대일무역의 질서를 잡다
왜관에서 발생한 간통사건
전략적 외교의 성과 ‘신묘약조’
왜인들의 왜관 난출을 제압하다
대일관계의 ‘제변지계(制邊之計)’
성공적 실무관인
열 번이나 오가며 수립한 금정산성 계획
성안으로 읍을 옮겨야
영호남 연안의 방어책 강화
충렬별사를 세우다
〈동래부 순절도〉와 화기(畵記)
평안감사 권이진
대청무역의 적폐
위태로운 북변 방어책
힘겨운 마지막 벼슬길

4. 의인 권이진의 아름다운 인연


명당실기(明堂室記)
하거원기(何去園記)
부친 권유에 대한 회한
삼태사 향사(享祀)와 족보 판각
만회집 판각과 만회의 왕도정치론
실학의 선성(先聲)
벼슬길에도 식지 않은 학구열
동경잡기간오(東京雜記刊誤)
경종과의 인연
최석정과의 교류
제주판관 남구명을 전송하며
영조의 치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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