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오 헨리
미국의 대표적 단편작가이다. 1862년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즈버러에서 태어나,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다. 청소년시절부터 여러 직업을 전전했고, 오랜 방랑 끝에 1891년 은행에 근무하면서 주간지를 창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공금횡령의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으나 수감기간 동안 모범수로 생활하면서 습작을 통해 문필가로서의 역량을 키웠다. 이후 출감 뒤 지방 신문에 글을 기고하면서 본격적인 문필 생활을 시작했다. 작품에 현실을 철저히 반영하는 작가로서 주로 뉴욕에서 활동했으며, 그 시대의 시대상과 서민들의 애환, 인간애, 삶의 본질 등을 통찰하여 압축적으로 형상화했다. 대표작으로는 <마지막 잎새> <현자의 선물> <경관과 찬송가> <20년 후> 등 다수가 있다.
저자 :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리
1809년 3월 31일, 러시아 우크라이나 지방(현재는 독립 국가)의 소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문학을 좋아하였으며, 고등학교 때는 시나 산문을 써서 잡지에 투고하거나 학교 연극에서 연기하기도 했다. 1828년 관리가 되려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상경하지만 냉혹한 현실 앞에 좌절한다. 한편 가명으로 시집 『간츠 큐헬가르텐』(1829)을 출간하나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한 데 절망하여 스스로 불태운다. 갖은 고생 끝에 고향 우크라이나 지방의 민담을 소재로 쓴 『지칸카 근처 마을의 야화』(1831~1832)로 일약 러시아 문단의 총아가 된다. 183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의 중세사 조교수로 임명되지만, 1년 후 자신의 자질에 회의를 느껴 그만둔다. 1835년 무렵부터는 환상적 낭만주의에서 벗어나 낭만적 사실주의 경향을 띠는 작품들을 쓰기 시작한다. 러시아의 관료 제도를 날카롭게 풍자한 희극 『검찰관』(1836)으로 문단의 큰 호평을 받지만, 보수적인 언론과 관리들의 비난 때문에 약 6년간 로마로 피신해 있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봉건 러시아의 농노제와 부패한 관료들을 풍자한 최대 걸작 『죽은 혼』(1842)을 집필한다. 그러나 이후 10년이 넘도록 만족스러운 작품을 창작하지 못하고 보수주의와 극단적인 신앙생활에 빠져든다. 결국 착란에 가까운 정신 상태로 단식에 들어가 1852년 3월 4일 숨을 거둔다.
저자 : 너새니얼 호손
1804년 7월 4일에 미국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의 독실한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집안의 성이 호손(Hawthorne)이 아니라 헤이손(Hathorne)이었는데, 1659년 조상인 윌리엄 헤이손이 퀘이커 여신도들을 학대한 것을 수치로 여겨 호손 본인이 ‘w’자를 삽입했다. 그는 학창 시절에 학업에서는 탁월하지 못했으나 벌써 영국의 위대한 문학에 비길 만한 미국 문화 창조라는 야망에 불타서 열심히 집필을 시작했다.대학 졸업 후 12년간 호손은 자기 방에 틀어박혀 광범위한 독서와 습작만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때 그는 뉴잉글랜드 지방의 청교도적인 배경과 그 정신적 기질을 탐구해 자신 속에 배어 있는 청교도 정신에 대한 비판 정신을 키웠다. 그의 처녀작은 ≪팬쇼≫란 소설인데, 1828년 익명으로 자비 출판했으나 뒤에 미숙한 작품임을 깨닫고 모두 수거해 파기해 버렸다. 이후 한동안 단편에만 손을 대 초창기에는 주로 익명이나 가명으로 신문, 잡지 등에 기고했다. 1837년에 12년간의 은둔 생활 동안 쓴 단편들을 모은 우화적 단편소설집 ≪두 번 하는 이야기들≫을 친구인 호레이쇼 브리지의 주선으로 출간했다. 이 단편집이 롱펠로가 천재라고 극찬한 논평을 위시해 문학계의 호평을 받게 되어 바깥 세상에 작가로서의 명성을 처음으로 알렸다. 1850년에는 그의 유명한 ≪주홍 글자≫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은 호손에게 문학적·재정적 성공을 안겨 주었다. 이어서 1851년 ≪일곱 박공의 집≫을 출간했고, 이듬해에는 ≪블라이드데일 로맨스≫와 ≪눈사람과 다른 두 번 하는 이야기들≫을 선보였다. 1860년에 ≪대리석 목양신≫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이탈리아라는 이국을 배경으로 죄를 통해 지성과 양심의 깨달음을 경험하면서 성숙해 가는 한 인물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1857년 호손은 유럽 각지를 여행한 후 1860년에 귀국했다. 이후 1864년까지 웨이사이드에서 집필을 계속하면서 영국의 풍경, 생활 풍습 등을 스케치풍으로 그린 작품들을 발표해 호평을 얻었다. 그러나 점차 창작력과 건강이 쇠퇴해, 1864년 뉴햄프셔를 여행하던 중 5월 19일 플리머스에서 60세를 일기로 객사했다.
저자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1828년 남러시아 툴라 지방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톨스토이 백작가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모 밑에서 성장했다. 1844년 카잔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대학교육에 실망하여 삼 년 만에 자퇴하고 귀향했다. 고향에서 새로운 농업경영과 농민생활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1851년 큰형이 있는 캅카스로 가 군대에 들어갔다. 1852년 「유년 시절」을 발표하고, 네크라소프의 추천으로 잡지 『동시대인』에 익명으로 연재를 시작하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는 한편, 농업경영과 교육활동에도 매진해 학교를 세우고 교육잡지를 간행했다.1862년 결혼한 후,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의 대작을 집필하며 세계적인 작가로서 명성을 얻지만, 『안나 카레니나』의 뒷부분을 집필하던 1870년대 후반에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며 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는다. 이후 원시 기독교에 복귀하여 러시아 정교회와 사유재산제도에 비판을 가하며 종교적 인도주의, 이른바 ‘톨스토이즘’을 일으켰다. 직접 농사를 짓고 금주와 금연 등 금욕적인 생활을 하며 빈민구제활동을 펼치기도 했다.1899년에 발표한 『부활』에서 러시아정교회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1901년 종무원으로부터 파문당했다. 1910년 사유재산과 저작권 포기 문제로 부인과 불화가 심해지자 집을 나와 방랑길에 나섰으나 폐렴에 걸려 아스타포보 역(현재 톨스토이 역)에서 82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저자 : 막심 고리키
본명은 알렉세이 페쉬코프. 1868년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나, 1877년에 니즈니노브고르도 쿠나빈스코예 학교에 입학했다. 11살 때부터 생계가 어려워 학업을 중단하고 <세상 속으로> 들어갔으며, 1879년부터 1884년까지 어린 나이에 제화점 점원, 화공도제, 기선주방일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1884년, 16살이 된 고리키는 대학진학의 희망을 품고 카잔으로 떠났고, 1892년까지 러시아 남부 전역과 남 베사라비아, 크림과 카프카즈를 포함하는 러시아 순례를 하면서 시골 품팔이, 어부, 기선의 접시닦이, 철도원 등으로 일했다.1892년 「카프카즈」 신문에 막심 고리끼라는 필명으로 첫 단편소설 「마카르 추드라」를 발표했다. 1895년부터 1896년까지 「사마라 신문」의 주필로 일했고 바로 그 신문에 <이에구질 흘라미드>라는 필명으로 약 2백 편의 칼럼, 르포, 평론, 그리고 「이제르길 노파」를 포함한 다수의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1896년에는 당시 「사마라 신문」의 교정원이었던 에카테리나 파블로브나 볼쥐나와 결혼했다. 1896년부터 1897년까지 고리키는 「니줴고로트스키 리스토크」 신문사에서 일했으나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1897년 아내와 함께 남부 지방으로 이주했다. 1898년 초, 고리키는 다시 니즈니노브고로드에 돌아와 『르포와 단편소설』 1, 2권을 집필하여 출간했고, 이 책은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 비평가들은 『르포와 단편소설』의 출현을 러시아의 사회문화적 사건, 작가의 자기 정체성 확립의 순간으로 평가했다.러시아 사회문화의 주요 인사가 된 그는 체호프, 레핀, 샬라핀, 메레쥐코프스키, 안넨스키 등 당시 문화계 인사들과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으며, 이외에도 안드레예프, 부닌, 쿠프린, 베레사예프 등 <네오리얼리즘> 작가 군과 가까이 지냈다. 1898년 가을부터 잡지 「삶」의 이념적 지도자가 된 고리키는 1900년 9월부터는 출판공동체 〈즈나니에〉를 운영했고, 1904년부터 1913년 폐간 때까지 새로운 네오리얼리즘 계열의 문학 선집을 40권을 출판했다. 1902년부터 1905년까지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고정 작가로서 활동했으며, 희곡 「밑바닥에서」의 초연은 체호프의 「갈매기」와 함께 러시아 연극사의 한 장을 장식했다. 1905년 정치적 이유로 러시아를 떠난 고리키는 미국과 이탈리아를 거쳐 1913년 러시아로 돌아왔으며, 첫 망명 기간 동안 사회평론을 포함하여 『어머니』, 『고백』, 『필요없는 인간의 삶』, 『여름』, 『마트베이 코줴먀킨의 삶』, 『어린시절』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다시 러시아를 떠난 고리키는 1924년까지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체류했고, 1925년부터는 역사 서사시 「끌림 쌈긴의 생애」의 집필을 시작했다. 1928년 5월 소련으로 돌아온 고리끼는 잡지 「우리들의 업적」과 「문학수업」을 창간했으며, 1936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저자 : 빅토르 위고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소설가, 극작가. 나폴레옹 휘하의 군인인 아버지와 왕당파 집안 출신인 어머니의 셋째아들로, 당시 아버지의 임지였던 브장송에서 태어났다. 이후 파리, 나폴리, 마드리드 등을 전전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학창 시절 독서와 시 창작, 문예 비평에 열중하다 스무 살이 되던 1822년 첫 시집《송가와 여러 시》를 발표했다. 1823년 첫 장편소설《아이슬란드의 한Han》에 이어 1827년 운문 희곡〈크롬웰〉등을 발표하여 낭만주의 작가로 자리매김했고 1830년 초연된 희곡〈에르나니〉로 고전주의자들과의 싸움에서 주도권을 획득했다. 1831년 발표한 역사소설《파리의 노트르담》으로 대성공을 거두었고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 시기에 정치성을 띤 시집을 다수 발간했다.현실 참여적인 지식인이자 인도주의자로서 사형제 폐지와 빈민 구제를 주장한 위고는 공화파 정치가로도 활약했다. 1851년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로 제정을 수립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다 국외로 추방되어 브뤼셀 등지에서 19년간 망명 생활을 했다. 그 기간 동안 작품 집필에 몰두하여《명상시집》과《레 미제라블》을 비롯한 걸작들을 남겼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나폴레옹 3세가 몰락하면서 파리에 돌아온 후 1876년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지만 1878년 뇌출혈로 건강이 악화되어 정계에서 은퇴했다. 1885년 파리에서 폐울혈로 사망한 그의 장례는 국민적인 애도 속에 국장으로 거행되었고 시신은 팡테옹에 안장되었다.대하소설《레 미제라블》에 여담 형태로 삽입된 ‘워털루 전투’ 이야기는 위고가 벨기에 전적지에서 두 달간 머무르며 곳곳을 답사하는 노력 끝에 집필한 것이다. 위고 특유의 비장미 넘치는 문체가 돋보이는 이 글은 일세를 풍미한 영웅 나폴레옹의 패배 과정을 극적이고도 박진감 넘치게 그려내는 동시에 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일깨우며 여운을 남긴다.
저자 :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러시아 남부의 항구도시 타간로그에서 출생했다. 잡화상의 아들로, 조부는 지주에게 돈을 주고 해방된 농노였다. 16세 때 아버지의 파산으로 스스로 돈을 벌어서 중학 생활을 마쳤다. 1879년에 모스크바대학 의학부에 입학했고, 그와 동시에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단편소설을 오락 잡지에 기고하기 시작했다.1880년대 전반, 수년에 걸쳐 〈어느 관리의 죽음〉, 〈카멜레온〉, 〈하사관 프리시베예프〉, 〈슬픔〉 등과 같은 풍자와 유머, 애수가 담긴 뛰어난 단편을 많이 남겼다. 작가 그리고로비치의 재능을 낭비하지 말라는 충고가 담긴 편지에 감동하고 자각해 〈초원〉을 썼다. 희곡 〈이바노프〉, 〈지루한 이야기〉 속에는 그 시대 지식인들의 우울한 생활상이 잘 묘사되어 있다. 1899년에 결핵 요양을 위하여 크림 반도의 얄타 교외로 옮겨 갈 때까지 단편소설 〈결투〉, 〈검은 수사〉, 〈귀여운 여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골짜기〉 등을 집필했다.1896년 희곡 〈갈매기〉의 상연 실패는 그를 담시 극작가의 길에서 멀어지게 했으나, 〈바냐 아저씨〉를 써낸 이듬해인 1898년, 모스크바 예술 극단의 〈갈매기〉 상연은 성공적이었다. 1904년 말년에 병고 속에서도 〈벚꽃 동산〉을 집필해 상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그해 요양지인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생을 마감했다.
저자 : 알퐁스 도데
남프랑스 님므에서 출생했다. 리옹의 고등중학교에 들어갔으나 가업이 파산하여 중퇴하고, 알레스에 있는 중학교 사환으로 일하면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1857년 형이 있는 파리에 가서 문학에 전념하며 시집인 《사랑에 빠진 연인들 Les Amoureuses》을 발표, 이것이 당시의 입법의회 의장 모르니 공작에게 인정받아 비서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문학에 더욱 정진하게 되었다. 그 후 남프랑스의 시인 미스트라르를 비롯하여 플로베르, 졸라, E. 공쿠르, 투르게네프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아내 쥘리의 내조로 행복한 57년의 생애를 파리에서 보냈다. 그는 친교를 맺은 문인들과 더불어 자연주의의 일파에 속했으나 선천적으로 민감한 감수성, 섬세한 시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시적인 면이 넘치는 유연한 문체로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고향 프로방스 지방에 대한 애착심을 주제로 하여 인상주의적인 자신만의 작풍을 세웠다. 그의 문장은 보여 줄 것이 많은 예술가의 문장이자 시니컬하면서도 동정심을 담은 시인의 문장이다. 익살스런 농담에서부터 더없이 섬세한 환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주제를 다룰 수 있는 재치를 가지고 있었기에 학자들부터 군중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독자층을 매혹했다.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 경험담으로 작품에 활기를 부여할 줄 알았던 그는, 세월이 흘렀어도 빛바래지 않은 다양한 작품으로 ‘아름다운 문학’을 느끼게 한다. 소설로는 《프티 쇼즈》(1868), 《쾌활한 타르타랭》(1872), 《월요이야기》(1873), 《젊은 프로몽과 형 리슬레르》(1874), 《자크》(1876), 《나바브》(1877), 《뉘마 루메스탕》(1881), 《전도사》(1883), 《사포》(1884), 《알프스의 타르타랭》(1885), 《불후의 사람》(1888), 《타라스콩 항구 》(1890) 등이 있고, 수상집으로는 《파리의 30년》(1888), 《한 문학자의 추억》(1889) 등이 있다. 희곡으로는 《아를의 여인》(1872)이 있는데, 비제가 이를 관현악곡으로 작곡함으로써 유명해졌다.
저자 : 에드거 앨런 포
19세기 미국의 작가이자 편집자이며 비평가. 미국 근대문학의 개척자로, 고딕소설을 완성하고 추리소설을 창시했으며 유럽 문학의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09년 1월 19일 미국 보스턴에 정착한 이민자 출신 배우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1년 만에 아버지가 떠나고 어머니마저 병으로 사망하면서 부유한 상인 존 앨런에게 입양되었다. 1826년 버지니아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양부와의 갈등으로 1년도 채 되지 않아 자퇴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1827년 시집 『티무르, 다른 시들』을 시작으로 단편 소설 「병 속에서 발견된 원고」, 「리지아」, 「군중 속의 사람」 등과 장편 소설 『아서 고든 핌 이야기』, 단편집 『그로테스크와 아라베스크에 대한 이야기』 등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환상적이고 기괴한 소재를 바탕으로 특유의 기묘한 분위기를 드러내는 작품들을 주로 쓴 그는 환상 공포 문학의 대명사이자 19세기 낭만주의 문학의 선두주자로 꼽히며, 그의 문학적 경향은 이후 보들레르 등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친부모의 부재, 양부와의 불화, 첫 애인과의 파혼, 경제적 궁핍, 아내와의 사별 등 그의 개인적 불행과 방황은 전 생애에 걸쳐 계속되었다. 1849년, 포는 볼티모어에서 의식 불명으로 쓰러진 채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그해 10월 7일 사망했다.
저자 : 어니스트 헤밍웨이
1899년 7월 21일, 미국 일리노이 주 오크파크에서 태어났다. 고등학생 때 학교 주간지의 편집을 맡으며 직접 기사나 단편을 쓰기 시작했고, 졸업 후에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캔자스시티 스타〉의 수습기자로 일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적십자 야전병원 수송차 운전병으로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됐다가 다리에 중상을 입고 귀국했다. 휴전 후 캐나다 〈토론토 스타〉의 특파원이 되어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그리스 ? 터키 전쟁을 보도하기도 했다. 이후 파리로 건너가 거투르드 스타인, 스콧 피츠제럴드, 에즈라 파운드 등과 같은 유명 작가와 친분을 맺으면서 작가로 성장해 갔다. 1923년 《세 편의 단편과 열 편의 시(詩)》를 시작으로 《우리들의 시대에》(1924),《봄의 분류(奔流)》(1926), 《해는 다시 떠오른다》(1926)를 발표했다. 전쟁의 허무와 비련을 테마로 하여 전쟁문학의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무기여 잘 있거라》(1929)는 그가 작가로서 이름을 날리는 데 일조했으며,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1940)는 출판되자마자 수십만 부가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그 후 십 년 만에 내놓은 《노인과 바다》(1952)를 통해 퓰리처상(1953)과 노벨문학상(1954)을 수상한다. 이후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1961년 아이다호 케첨의 자택에서 자살로 추정되는 엽총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저자 : 기 드 모파상
1850년 노르망디의 미로메닐에서 태어났다. 1869년부터 파리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했으나, 1870년에 보불전쟁이 일어나자 군에 자원입대했다. 종전 후 1872년에 해군성 및 문부성에서 근무하며 어머니의 친구인 플로베르에게서 문학 지도를 받았다. 1874년 플로베르의 소개로 에밀 졸라를 알게 되면서 당시의 젊은 문학가들과도 사귀었다. 1880년 6명의 젊은 작가가 쓴 단편을 모은 『메당 야화』에 「비곗덩어리」(1880)를 발표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그 후 『메종 텔리에』(1881), 『피피 양』(1882) 등의 단편집을 내며 문단에서의 지위를 굳혔고, 장편소설 『여자의 일생』(1883)으로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이 낳은 걸작이라는 평을 들었다.모파상은 10년이라는 짧은 문단 생활에서 약 300편의 단편소설과 기행문, 시집, 희곡 등을 발표했으며 그 외에도 『벨아미』(1885), 『피에르와 장』(1888) 등의 장편소설을 썼다. 그러나 모파상은 작품으로 명성을 얻으면서도 신경질환 및 갖가지 질병에 시달렸고, 1891년에는 전신 마비 증세까지 찾아왔다. 1892년 자살 기도를 한 후 정신병원에 수용되었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이듬해인 1893년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사진출처 - 창비 제공
저자 : 이반 세르게예비치 뚜르게녜프
1818년 아룔 현에서 태어나, 포악하고 전제적이었던 어머니 밑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27년 가족 전체가 모스크바로 이주한 후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열아홉 살 때 첫 번째 시집을 출간했다. 유럽이야말로 참된 지식의 원천을 갖고 있다는 생각으로 베를린 대학으로 떠났지만, 2년 후 다시 러시아로 돌아와서 모스크바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1843년 스페인 출신 가수였던 폴리나 가르시아 비아르도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와의 관계는 그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투르게네프는 비아르도의 유럽 순회공연을 쫓아다녔고, 꽤 오랫동안 파리에서 지내면서 그녀는 물론 그녀의 남편과 ‘가족의 친구’로서 함께 지냈다. 1856년 이후에는 대부분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유럽에서 큰 명성을 얻은 첫 번째 러시아 작가가 되었다. 파리의 문학 서클에서 그는 유명인사였고, 플로베르와 공쿠르 형제는 그의 친구였으며, 옥스퍼드 대학은 그에게 명예학위를 수여했다. 일련의 여섯 권의 소설, 『루딘』(1856), 『귀족의 보금자리』(1859), 『전야』(1960), 『아버지와 아들』(1862), 『연기』(1867), 『처녀지』(1877)는 1830년대부터 1870년대 사이의 러시아인들의 삶을 투영하고 있다. 문학 에세이 및 회고록 이외에도 『시골에서의 한 달』과 같은 희곡, 단편소설, 중편소설 등을 썼다. 그중에서도 중편소설 『사냥꾼의 수기』는 문학적 영향력이 크며, 절정기에 쓴 『첫사랑』(1860)은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투르게네프는 1883년 파리에서 병사했고, 러시아에 묻혔다.
모파상 : 목걸이
톨스토이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오. 헨리 : 마지막 잎새
호손 : 큰 바위 얼굴
빅토르위고 : 가난한 사람들
헤밍웨이 : 살인자
고골리 : 외투
체호프 : 귀여운 여인
고리끼 : 2인조도둑
투르게네프 : 밀회
도데 : 별
포우 : 검은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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