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사물을 직접 표현하는 글자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시인은 기억 속에서 빛나는 어떤 세계들에 주목한다. 「끄트머리」에는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섞이는 시간의 언어가 “어스름 저녁의 빛”으로 나타난다.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겹치면서 미묘한 시간의 흐름이 표현된다.
그것은 “나무들이 반쯤 합쳐지는 시간”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우주가 실눈을 깜박하는 순간”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밝음 속에 어둠이 스미고, 어둠 속에 밝음이 스미는 이 시간의 결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시간의 ‘끄트머리’와 마주하게 된다. 끄트머리라고 했지만, 시간의 끄트머리는 늘 또 다른 시간의 시작점과 이어져 있다. 그것은 뫼비우스의 띠와 같아서 한참 달리다 보면 우리는 반복되며 흐르는 시간의 어느 한 지점에 서 있는 것을 문득 발견한다.
출판사 리뷰
어스름 저녁의 빛을 점점한 수묵이라고 하자 그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섞이는 시간 같은 언어가 나의 짝다리 언어다 둘이 껴안는 시간처럼 나무들이 반쯤 합쳐지는 시간처럼 우주가 실눈을 깜박하는 순간처럼 그러나 어둠이 스미는 건지 밝음이 스며 안기는 건지
끄트머리가 사라졌다
- 「끄트머리」 부분
취나물을 넣고 비빔밥을 비비다가 당신이 계란 후라이를 곁들이듯 나도 당신이 준 참기름을 곁들인다
갔다 할 수 없는 봄처럼 가고 있는 봄처럼 왔었나 싶게 간 당신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당신을 불러본다 이름 붙일 수 없는 당신이라서
오는 듯 가는 봄처럼 환한 한때의 오후처럼 애틋한 체온처럼 당신은 마음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저 홀로 피고 진다
이름 지을 수 없는 당신을 불러본다
- 「비빔밥을 비비다가」 부분
동네를 안고 있는 낮은 산발치 아래 진또배기 같고 물 고운 에미 치맛자락 같다 하늘 땅 이어주는 신의 큰 손바닥 되어 천공 아래 있다 지붕 위에 막 앉으려고 나래 접는 새처럼 해의 끈을 놓지 않는다 선조들이 지키려 했던 족보처럼 먼 신화를 만들어 내며 세월 그 언저리 이야기 무성하다 주술 같은 힘으로 땅 신의 혼불을 뿜어낸다 어제의 내력을 받아들고 알알이 넋을 토한다 가지마다 내려앉는 햇살이 되레 새파랗게 놀란 표정을 짓는다 막바지 수행중이다
- 「은행나무」 부분
사물을 직접 표현하는 글자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시인은 기억 속에서 빛나는 어떤 세계들에 주목한다. 「끄트머리」에는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섞이는 시간의 언어가 “어스름 저녁의 빛”으로 나타난다.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겹치면서 미묘한 시간의 흐름이 표현된다. 그것은 “나무들이 반쯤 합쳐지는 시간”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우주가 실눈을 깜박하는 순간”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밝음 속에 어둠이 스미고, 어둠 속에 밝음이 스미는 이 시간의 결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시간의 ‘끄트머리’와 마주하게 된다. 끄트머리라고 했지만, 시간의 끄트머리는 늘 또 다른 시간의 시작점과 이어져 있다. 그것은 뫼비우스의 띠와 같아서 한참 달리다 보면 우리는 반복되며 흐르는 시간의 어느 한 지점에 서 있는 것을 문득 발견한다.
물론 시간의 반복은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다. 같으면서도 다른 것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며 이 세계를 이룬다. 우종숙이 길어 올린 사물의 언어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저 먼 기억 속에 은은하게 남은 그 무언가를 ‘감각’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감각은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맥락을 항상 그 안에 품고 있다. 감성이 이성의 통제를 따른다면, 감각은 이성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다. 문득 떠올라 우리네 마음 깊숙한 자리를 울리는 기억을 떠올려 보라. 그 기억은 내리누른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내리누를수록 더욱더 살아남아 우리네 삶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감성의 언어가 아닌 감각의 언어를 산출한다.
「비빔밥을 비비다가」에 나타나듯, 비빔밥을 먹는 날이면 시인은 어김없이 당신을 떠올린다. 이름을 붙일 수도, 이름을 지을 수도 없는 당신은 “오는 듯 가는 봄처럼 환한 한때의 오후처럼 애틋한 체온처럼” 시인의 마음 깊이 스며 있다. 비빔밥에 참기름을 곁들일 때도 시인의 뇌리에는 어김없이 당신이 펼쳐진다. 당신은 지금 이곳에 없지만, 당신과 함께했던 그 날의 감각은 지금도 살아 있다. 이 감각을 시인은 과연 어떤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기에 시인은 오늘도 가만히 당신을 불러본다. 이름 지을 수 없는 당신의 이야기는 「은행나무」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하늘 땅 이어주는 신의 큰 손바닥”이라는 시구에 암시된바, 시인은 은행나무가 품은 “족보처럼 먼 신화”에 주목하고 있다.
시인에게 은행나무는 하늘을 향해 솟은 솟대의 새(진또배기)와 같고, 물이 고운 어미의 치맛자락과도 같다. 오랜 시간 전해 온 무성한 이야기를 가슴에 품은 은행나무는 주술 같은 힘으로 혼불을 뿜어낸다. 얼마나 많은 영혼이 은행나무에 스며들어 있을까? “어제의 내력을 받아들고 알알이 넋을 토”하는 은행나무 가지마다 새파랗게 놀란 표정을 짓는 햇살이 내려앉는다. 은행나무에는 한 개인의 내력뿐만 아니라 한 마을, 한 나라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시인은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품은 채 “막바지 수행중”인 은행나무를 들여다보며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흔적을 하나하나 헤아린다. 은행나무가 되지 않고 어떻게 은행나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시작(詩作)이란 그런 것이다. 자기를 내려놓고 사물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서 시 쓰기는 시작된다. 우종숙의 시라고 다르지 않다.
자신을 시적 대상으로 삼은 「우종숙」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편편히 이어 붙이는 게 나의 말”이고 “나”라고 분명히 선언한다. ‘우종숙’이라는 이름을 사람들은 자꾸만 ‘오종숙’으로 듣는다. 시인이 “오가 아니고 우리 할 때 우”라고 해도 사람들은 자꾸만 ‘우’를 ‘오’로 알아듣는다. ‘우’가 됐든, ‘오’가 됐든 ‘우종숙’이라는 사람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저마다 잘못 불리는 이름에 자꾸만 매달린다. 존재가 이름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이름이 존재를 결정한다는 통념에 매여 있다고나 할까? 이름에 매일수록 사물의 본질은 그만큼 더 멀어진다는 점을 우리는 이미 이야기했다. 시인의 말마따나 “고양이는 고양이 은행나무는 은행나무 나는 나”일 뿐이다. 인간이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자리에 고양이가 있고, 은행나무가 있고, 내가 있다. 저만치 달아나는 말을 따라간다고 고양이가, 은행나무가, 내가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사물의 언어에 민감한 시인이 이 점을 모를 리 없다.
말을 시퍼렇게 갈고 있다
단칼에 베어 아픔을 느끼지 못하도록 떨어진 제 목을 보고 환하게 웃을 수 있도록 내 말이 바람처럼 날렵해 표정이 베이지 않도록 포정의 칼처럼 평생을 쓸 말을 갈고 있다
모래에 스미는 물처럼 파랗게 벼리고 있다
푸른 하늘에 나는 새털처럼 부드러운 율동, 빛과 같은 속도로 꽂히는 한 마디 화살처럼 천리마가 날고 있다
그러나 뒷모습만 보이는 말은 자욱이 먼지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다 고삐를 단단히 잡지 않으면 굴러 떨어지거나 제멋대로 날뛰기 일쑤인 말인 것을,
말이 나를 베어버린다
- 「포정의 칼」 전문
녹이 슨 칼로는 단번에 사물의 목을 벨 수 없다. 시인은 시퍼렇게 간 칼처럼 날카로운 말로 사물에 다가가려고 한다. 한없이 민감한 사물의 언어와 마주하려면 그에 걸맞은 칼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위 시에서 시인은 그것을 ‘포정의 칼’이라고 이름 붙인다. 포정(庖丁)은 소를 잡는 백정이다. 뛰어난 솜씨로 소를 잡아 당대에 그 재주를 인정받았다. 포정이 날카로운 칼로 소를 잡아 재능을 뽐냈듯, 시인 또한 시퍼렇게 간 말로 단칼에 사물의 목을 베는 꿈을 꾸고 있다. 녹슨 말을 쓰면 사물의 진면목을 표현하기도 힘들뿐더러, 사물에 이런저런 상처를 내기 마련이다. “바람처럼 날렵해 표정이 베이지 않는” 말을 갈고 닦으려면 사물 저마다의 특성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사물을 제대로 표현하는 시어는 우연히 얻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시간을 들여 시인은 사물을 관찰했을 테고, 그 과정에서 사물과 어울리는 시어를 발견했을 테다. “모래에 스미는 물처럼 파랗게 벼”린 칼과 말을 상상해 보라. 그런 칼과 말이어야 포정처럼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시인이 나올 법하다.
시인이라면 푸른 하늘을 나는 새털처럼 부드러운 율동을 꿈꾸고, 빛과 같은 속도로 꽂히는 한 마디 화살처럼 하늘을 나는 천리마를 꿈꿀 것이다. 사물의 언어로 사물과 하나가 되는 이 꿈은 그러나 자욱한 먼지만 남기고 저 멀리 사라지는 언어처럼 덧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고삐를 단단히 잡지 않으면 사방으로 날뛰는 말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 포정의 칼은 여기서 빛을 발한다. 중요한 것은, 포정의 칼이 향하는 대상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사랑을 갈구하는 ‘나’라는 점에 있다. “말이 나를 베어버린다”라는 이 시의 결구를 가만히 주목해 보라. 말이 나를 수없이 베어버려야 나 또한 말을 벨 수 있는 포정의 칼을 더욱더 날카롭게 벼릴 수 있다. 푸른 하늘을 나는 새털이 되려면 그만큼 가벼워져야 하고, 빛과 같은 속도로 내달리려면 그만큼 연습하고 또 연습해야 한다. 그래야 말이 나를 베는 극한의 고통을 견딜 수 있다.
우종숙은 극한의 고통을 품은 ‘포정의 언어’로 자기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일구고 있다. 칼로 몸을 도려내는 아픔의 언어는 동시에 사물을 온몸으로 끌어안는 사랑의 언어로도 구현된다. 사물을 사랑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창출하는 우종숙의 시작(詩作)은 이렇게 사랑과 아픔이 하나로 어울리는 ‘몸칼’의 시학으로 거듭난다. 온몸을 벼린 칼의 언어를 무기로 시인은 사물과 온전히 소통하는 시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한다. 그리로 가는 길을 꿈이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시인이 되어 포정의 언어를 거침없이 휘두르는 게 한없이 중요한 일이니까. 사랑의 희열은 늘 사랑의 고통을 동반하는 법이다. 희열 없는 고통이나 고통 없는 희열은 없다고 말해도 좋다. 우종숙은 시를 쓰는 일이 그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우종숙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고, 한남대학교 사회문화, 행정복지대학원을 졸업했다. 2001년 『애지』로 등단하였으며, 현재 애지문학회, 한남문학회, 그리고 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우종숙 시인은 그의 첫 번째 시집인 『포정의 칼』에서 극한의 고통을 품은 ‘포정의 언어’로 자기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일구고 있다. 칼로 몸을 도려내는 아픔의 언어는 동시에 사물을 온몸으로 끌어안는 사랑의 언어로도 구현된다. 사물을 사랑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창출하는 우종숙의 시작詩作은 이렇게 사랑과 아픔이 하나로 어울리는 ‘몸칼’의 시학으로 거듭난다.
목차
차례
시인의 말 5
1부
태양 하나를 낳았다 12
네 궁에 들고 싶다 14
바퀴벌레 15
주름 하나 없는 길 16
장미와 고양이 18
돌개바람 19
밥 20
산 21
내장 22
틈 24
옥수리 느티나무 26
저 소리 가슴 속을 날아다닌다 28
내가 사라졌어요 29
2부
의자 32
해 년年을 쓰다 33
바퀴 34
바위와 진달래 35
나무 36
성에 38
내일 39
살구나무 40
그녀 42
잘 다녀가세요 44
목련이 피어 45
3부
흰 그림자 48
말을 삼키다 49
몸 속에 말이 있다 50
수런거리다 52
몸의 말 53
말을 베어버렸다 54
말 55
천개의 나 56
초록의 말 57
귀소의 칼 58
발 달린 페가수스 59
4부
닭백숙 62
프로크루스테우스의 침대 63
호세 64
작은 꽃 65
끄트머리 66
꽃 67
아지매 보리밥집 68
대중목욕탕 69
비빔밥을 비비다가 70
접시의 불문율 71
5부
은행나무 74
없다 75
횡단 76
바퀴 없이 78
깍두기 80
체, 이름을 잃어 82
우종숙 84
사람의 소리 86
포정의 칼 87
해설/ 온몸을 벼린 칼의 언어가 이른 곳 ― 우종숙의 시/ 오홍진 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