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열하일기》는 조선시대 중기, 연암 박지원이 쓴 중국 기행문집이다. 1780년(정조 4년)에 삼종형인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의 황제, 건륭제의 칠순연 축하사절단 일원으로 동행하는 길에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적은 글이다.
조선 사신으로는 최초로 열하(현재 중국 헤베이성 청더시)까지 간 연암이 1780년 6월 24일부터 8월 20일까지의 여정을 세세히 기록한 것으로 지리, 풍속, 토목, 건축, 인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천문 등등, 18세기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기행문이면서도 일기형식을 갖추었으며, 자신이 느낀 것을 솔직하게 담아내기 위해 속담, 민요, 소설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문학작품인 동시에 ‘이용후생’을 추구한 연암의 실학사상이 담겨 있는 철학서이자 실용서로 평가된다.
출판사 리뷰
호쾌한 문장과 섬세한 표현, 문체와 사상의 혁명
《열하일기》는 18세기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통찰한 여행 기록으로 시대를 앞서간 조선 실학자의 혜안이 담겨 있다. 연암 박지원은 “천하를 위하여 일하는 자는 진실로 백성들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실학사상을 가진 학자였다. 따라서 백성들에게 필요하다면, 당시 조선 사대부들에게 오랑캐라 일컬어지던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북학 사상을 이 책에 고스란히 담았다.
매사에 이용후생을 추구했던 연암은 집을 지을 때 벽돌을 쌓는 법, 온돌을 놓는 법, 수레의 바퀴, 해운시설, 상업적 환경 등 청나라의 실용적인 기술과 문명을 세세하게 관찰하여 조선에 전하고자 했다.
조선 정조 시대 문체반정의 표적이 되다
《열하일기》는 조선시대 일반 민중들이 쓰는 용어나 세속적인 표현, 비유와 우화적인 묘사, 소설을 삽입하는 등 새로운 스타일로 구성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사대부들의 반응도 극단적이어서 열렬한 지지를 보낸 반면, 전통적인 기풍과 풍속을 해친다 하여 질책을 받았다. 그러나 연암의 문체를 따라 하는 풍조가 유행하자 정조가 실시한 문체반정의 표적이 되었다. 정조는 당시 유행하던 소설체 문장을 패관문학이라 배척하고 전통적인 고문을 문장의 모범으로 삼도록 신하와 선비들에게 명하고 패관소설과 잡서의 수입을 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반계층과 실학자들 사이에 엄청난 양이 필사되어 세간에서 읽혔다.
통쾌한 즐거움을 주는 해학 넘치는 글쓰기
열하까지의 여행길에서 연암은 문화적으로 전혀 다른 중국인의 생활과 모습을 대면하며 다양한 사건을 겪는다. 그러나 자신의 실수담이나 부끄러운 면모를 전혀 숨기지 않는 호쾌하고 대담한 선비의 자세를 견지하고, 풍자와 해학으로 사회적 모순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보여준다.
청나라의 꽤나 번화한 마을에서 연암은 기세 좋게 필법을 자랑하고 싶어서 전당포에 걸어둘 휘호로 ‘欺霜賽雪(기상새설)’ 넉 자를 써주었다. 그러나 기실 ‘그 넉 자는 심지가 밝고 깨끗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가루가 서릿발처럼 가늘고 눈보다 흰, 그것으로 만든 국수를 자랑하는 뜻이었다.’(135~136쪽)
장신구 파는 집에 국수가게를 위한 글자를 써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기도 하고 중국인들의 기세에 눌리지 않기 위해 큰 잔에 중국의 작은 술잔 여러 개를 부어 단숨에 들이키며 허세를 부렸던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호랑이의 입을 빌어 이야기하는 <호질>에서의 해학적인 문체는 《열하일기》 특유의 재미를 더해준다. “대체로 제 것이 아닌 것을 취하는 게 도(盜)이고 남을 못살게 굴고 그 생명을 빼앗는 것을 적(賊)이라 한다. 너희들이 밤낮없이 쏘다니며 팔을 걷어붙이며 눈을 부릅뜨고, 함부로 착취하고 훔쳐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228쪽) 대목은 양반 계층의 탐욕과 부도덕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연암의 시대정신이 녹아들어 있어, 한바탕 신명나는 악극을 보는 듯 통쾌함을 자아낸다.
현대적인 문체로 생생한 재미를 되살린 《열하일기》
원전 《열하일기》는 본래 26권 10책으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이다. 이 책은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연암만의 독특한 문체와 실용주의적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내용을 선별했으며, 생생한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현대적인 문체로 풀어 썼다. 사절단의 이동경로를 그린 지도를 수록해 한양에서 열하까지 연암의 여정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했다. 부록으로는 연암의 일생과 사상, 정조가 문체반정을 시행한 시대적 배경 등도 정리했다.
애라하의 크기는 우리나라 임진강과 비슷했다. 홀로 높은 언덕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산은 곱고 물은 맑은데 정경이 탁 트이고 나무는 하늘에 닿을 듯했다. 그리고 그 속에 큰 마을이 자리 잡고 있어 개, 닭소리가 들리는 듯하며 땅이 기름져 개간해도 좋을 듯했다. 패강(浿江) 서쪽과 압록강 동쪽에는 이에 비할 만한 곳이 없으나 너, 나가 모두 이를 버려두고 빈 땅이 되었다.
어떤 이는 ‘고구려 때 이곳에 도읍한 일이 있었다’고 하니 이는 이른바 국내성이다.
책문 안을 바라보니 숱한 민가들은 모두 들보가 높이 솟아 있고 띠 이엉을 덮고 있었다. 등성마루가 훤칠했고 문호는 가지런했다. 네거리가 쭉 곧아 마치 먹줄을 친 것 같았다. 또 담은 모두 벽돌로 쌓았고 사람이 탄 수레와 화물 실은 수레가 길에 가득했다. 벌여 놓은 그릇들은 모두 그림을 그려 구운 도자기들이었다. 어느 구석을 보아도 시골티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살펴보니 대체 집을 지음에 있어 온통 벽돌만이 사용됐다. 벽돌의 길이는 한 자, 너비는 다섯 치여서 둘을 가지런히 놓으면 이가 꽉 물리고 두께는 두 치이다. 쌓는 법은 한 개는 세로, 한 개는 가로로 놓아, 저절로 감(坎) 이(離), 괘가 이룩된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박지원
조선 후기의 탁월한 문장가이자 실학자다. 박사유(朴師愈)와 함평(咸平) 이씨(李氏)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6세에 처사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에게는 《맹자》를, 처삼촌 이양천(李亮天)에게는 《사기(史記)》를 배워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했다. 처남인 이재성(李在誠)과는 평생의 문우(文友) 관계를 이어 갔다. 청년 시절엔 세상의 염량세태에 실망해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고생했으며 이러한 성장 배경을 바탕으로 진실한 인간형에 대해 모색한 전(傳) 아홉 편을 지어 《방경각외전(放?閣外傳)》이라는 이름으로 편찬했다.영조 47년(1771) 마침내 과거를 보지 않기로 결심하고 서울 전의감동(典醫監洞)에 은거하면서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을 비롯한 많은 젊은 지식인들과 더불어 학문과 우정의 세계를 펼쳐 갔다. 정조 2년(1778) 홍국영이 세도를 잡고 벽파를 박해하자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에 있는 연암협(燕巖峽)으로 피신해 은둔 생활을 했다. 연암이라는 호는 이 골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정조 4년(1780)에 삼종형(三從兄)인 박명원(朴明源)의 연행(燕行) 권유를 받고 정사의 반당 자격으로 북경에 가게 되었다. 이때 건륭 황제가 열하에서 고희연을 치르는 바람에 조선 사신 역사상 처음으로 열하에 가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연행을 통해 깨달음을 확대한 연암은 여행의 경험을 수년간 정리해 《열하일기》를 저술했다.정조 10년(1786) 유언호의 천거로 음사(蔭仕)인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에 임명되었다. 정조 13년(1789)에는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와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역임했고, 정조 15년(1791)에는 한성부 판관을 지냈다. 그해 12월 안의현감에 임명되어 다음 해부터 임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정조 임금이 문체를 타락시킨 장본인으로 《열하일기》를 쓴 연암을 지목하고는 남공철을 통해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치라 명령했으나 실제로 응하지는 않았다. 정조 21년(1797) 61세에 면천군수로 임명되었다. 이 시절에 정조 임금에게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지어 바쳐 칭송을 들었다. 1800년 양양부사로 승진했으며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순조 5년(1805) 10월 20일 서울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 자택에서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선영이 있는 장단(長湍)의 대세현(大世峴)에 장사 지냈다.박지원의 문학 정신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옛것을 본받되 변화를 알고 새롭게 지어내되 법도를 지키라”는 의미다. 그는 문학의 참된 정신은 변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글을 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비슷하게 되려는 것은 참이 아니며, ‘닮았다’고 하는 말 속엔 이미 가짜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연암은 억지로 점잖은 척 고상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대상을 참되게 그려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틀에 박힌 표현이나 관습적인 문체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지향했다. 나아가 옛날 저곳이 아닌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중국이 아닌 조선을,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야기할 때 진정한 문학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연암의 학문적 성취와 사상은 《열하일기》에 집대성되어 있다.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이용후생의 정신을 기반으로 청나라의 선진적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타개하자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북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연암은 《열하일기》 외에도 《방경각외전》, 《과농소초》,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등을 직접 편찬했다. 연암의 유고는 그의 아들 박종채에 의해서 정리되었는데 아들이 쓴 〈과정록추기〉에 의하면 연암의 유고는 문고 16권, 《열하일기》 24권, 《과농소초》 15권 등 총 55권으로 정리되었다. 《열하일기》는 오늘날 완질은 2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암의 작품은 대부분이 문(文)이며 시(詩)는 50여 편이 전한다.
목차
압록강을 건너서[도강록(渡江錄)] …… 019
구요동기(舊遼東記) / 관제묘기(關帝廟記) ) / 요동백탑기(遼東白塔記)) / 광우사기(廣祐寺記)
성경잡지(盛京雜識) …… 079
속재필담(粟齋筆談) / 상루필담(商樓筆談) / 성경 가람기(盛京伽藍記) / 산천기략(山川記略)
일신수필(馹迅隨筆) …… 141
북진묘기(北鎭廟記) / 차제(車制) / 희대(戱臺) / 시사(市肆) / 점사(店舍) / 교량(橋梁) / 강녀묘기(姜女廟記) / 장대기(將臺記) / 산해관기(山海關記)
관내정사(關內程史) …… 201
이제묘기(夷齊廟記) / 호질(虎叱)
막북행정록(莫北行程錄) …… 248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 270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298
부록 …… 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