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두보가 남긴 한시 중 그의 삶의 태도나 정서, 당시의 주변적 환경이나 풍습 등이 담긴 시를 선택하여, 두보의 삶의 모습과 태도, 그리고 당시에 지니고 있었던 가치관과 정서 등을 드러내 보고자 했던 책이다. 우리에게 위대한 시인으로 추앙하는 시인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생각에 이처럼 주옥같은 작품이 나오게 되었는지 등을 살펴보고자 한 책이다.
두보의 유년 시절부터 청장년과 중년, 그리고 노년기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시성(詩聖)의 삶과 가치관 등이 보일 것이다. 위대한 시인의 삶을 행적을 통해 먼저 살았던 시인의 삶을, 독자인 우리는 간접적인 삶을 살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 간접적인 체험을 통해 앞으로 두보의 일생은 우리가 펼쳐나갈 삶의 행로에서 지남철 같은 역할이 될 것이다. 판단의 기준이 될 수도 있고 인생행로의 방향타는 물론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요소요소에 필요한 정서적 감동뿐만 아니라, 공감과 배려의 태도도 함께 습득하고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두보의 삶을 통해 일상적인 삶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리에 통달하여 학문이며 정치·외교 등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에 익숙해질 수 있는 역량과 융통성이 생기며, 인생의 지극한 도(道)까지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 리뷰
두보(杜甫)라는 당대 지성인을 통해
오늘날 우리 시대 지성인들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다
이 책은 두보가 남긴 한시 1400여 수 중에서도 두보의 삶의 흔적이 담긴 시 173제 221수를 선택하여, 그의 삶의 행적을 살펴본 책이다. 두보는 당나라 현종과 숙종 · 대종 연간인 712부터 770년까지 살았던 인물이다. 특히 당나라가 번성기를 누리고 혼란기를 겪었던 현종과 숙종 때 등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으며, 출사하여 관직에 있을 때는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하고자 했던 두보이다. 그러나 현실 정치 세력은 두보의 충절을 곱게 바라보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좌습유라는 황제 곁에서 직언하는 관직을 받은 두보는, 제대로 능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화주의 사공참군으로 좌천되었고, 엎치데 덮친 격으로 부임지는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도저히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풍년이 들었다는 소문만 믿고 감숙성 진주(秦州)로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식솔을 이끌고 갔다. 그러나 진주도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아 사람들이 살기 좋다는 이웃 고장 동곡으로 갔지만, 역시 정착하여 살기는 팍팍한 곳이었다.
그렇게 하여 흘러들어간 곳이 사천성 성도 완화계 초당이었다. 완화계에 도착한 두보는 아는 인맥을 다 동원하여 필요한 물건은 물론, 완화계 주변에 심을 나무면 사용할 그릇까지 찬조를 받아 49세에 초당을 완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숙종 조정에 함께 벼슬살이 하던 엄무가 성도윤으로 부임해 오자 어려운 삶에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 현종과 숙종의 붕어(崩御)로 엄무는 조정의 부름을 받아 장안으로 떠나게 되었다. 두보는 장안으로 떠나는 정치적 동지인 엄무를 전송하러 면주까지 갔다가, 서지도의 난으로 성도 완화계 초당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면주와 재주, 그리고 낭주를 오가면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중 엄무가 다시 성도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또한 엄무로부터 성도로 돌아오라는 편지를 몇 통씩 받은 후 두보는 고향으로 가려는 뜻을 접고 성도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성도로 돌아온 두보는 엄무의 배려로 764년 53세의 두보가 절도참모·검교공부원외랑의 벼슬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막부의 젊은 동료들과의 뜻도 맞지 않고 또한 건강도 나빠져 765년 1월 초에 관직을 모두 사직하고 초당으로 돌아왔다.
초당에 돌아온 두보는 나름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765년 4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후원자였던 엄무가 갑자기 운명하였던 것이다. 후원자 엄무가 없는 성도는 더 이상 머물 이유도 없었던 두보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765년 5월 완화계 초당을 떠났던 것이다. 성도를 떠난 두보는 유주(중경시)를 거쳐 충주 · 운안을 지나 기주에 도착하였다. 기주에선 약 2년 동안 머물렀는데 433수라는 전체 시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기주에 머물고 있던 두보는 둘째 동생 두관의 편지를 받고 강릉으로 거주지를 옮기게 되었다.
768년 1월 기주를 떠나, 768년 3월 57세의 두보는 강릉에 도착하였다. 강릉으로 거주지를 옮긴 두보는 오히려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기주보다 못하였다. 기주에 있을 때는 백무림의 도움으로 과수원을 운영할 정도로 호구지책(糊口之策)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는데, 막상 강릉 땅에 오니 도움을 청할 마땅한 곳이 없었다. 이후 두보는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배 위에서 떠돌이 삶을 살아야 했다. 이후 강릉 아래쪽에 있는 운안으로 갔다가 다시 동정호가 있는 악주(악양), 그리고 상강(湘江)을 따라 담주(장사)로 갔다가 다시 형주로 내려가서, 또 담주로 올라와서는 다시 악주로 떠도는 사이 병이 깊어져 배위에서 한 많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두보하면 최고의 시인으로 시성(詩聖)이라는 칭호를 받은 문인이다. 이런 당대 최고의 지성인 두보가 당시 그 시대에 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생긴다. 지성인이라면 당시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능력을 보태고 앞장 서야 하는데 두보도 진정으로 최선을 다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자기가 지닌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도 지성인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경우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시 시대상황이 혼란하고 소인배들이 권력을 잡고 농단하는 시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성인은 이런 시대에도 자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끝임 없이 노력해야 진정한 지성인의 면모를 보인 것이라 할 것이다. 그나마 두보는 자신의 능력 중 문학을 통해 당대 현실을 고발하고 집권자의 잘못된 통치를 풍자했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독자 여러분은 이 ≪한시로 살펴본 두보(杜甫)의 생애≫를 읽고 지성인으로서의 역할을 한 번쯤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그래야 더 좋은 사회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윤인현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선비학당과 전통문화연구회에서 經書 공부를 하였으며, 西溟 鄭堯一 선생으로부터 四書를 師事하였다. 가톨릭대와 서강대, 그리고 인하대, 웅지 세무대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한국한문학회 총무이사와 감사도 역임하였다. 지금은 인천 아카데미 ‘등대’ 칼럼 집필위원과 다산 정약용 문화교육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인하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 ]≪한국한시비평론≫(아세아문화사, 2001), ≪한국 고전비평과 고전시가의 산책≫(역락, 2004), ≪한국한시와 한시비평에 관한 연구≫(아세아문화사, 2007), ≪한국한시 비평론과 한시 작가・작품론≫(다운샘, 2011), ≪한문학 연구≫(지성人, 2015), ≪한문학의 이해와 연구≫(경진출판, 2021), ≪오래된 미래≫(경진출판, 2021), ≪이백 시에 나타난 자서전≫(경진출판, 2023) 외 다수[ 논문 ]<용사와 점화의 차이>(1998), <이규보의 굴원불의사론에 나타난 역사의식의 문제점>(2006), <남명의 출처와 문학을 통해 본 선비정신>(2008), <한국 시가론에서의 시경시 이론의 영향>(2009), <다산의 한시에 나타난 선비정신과 자연관>(2011), <≪논어≫에서의 시경시>(2014), <고려・조선 유자의 만시 연구>(2014), <이규보 설(說)에서의 작가의식>(2015), <한시를 통해 본 허난설헌의 지향의식>(2017), <중국과 한국의 굴원론>(2019), <4차 산업혁명시대에 필요한 인간상>(2021), <문과 시를 통해 본 불우헌의 선비정신과 자연관>(2022), <율곡의 문학론과 문무책・문책으로 본 선조대의 문화>(2023) 외 다수
목차
책머리에
유년기와 청년기의 두보(杜甫)
30대의 두보가 40대의 이백(李白)을 만나다
출처(出處)의 두보
진주(秦州)・동곡(同谷) 시절의 두보
성도(成都) 초당(草堂) 시절의 두보
면주(綿州)와 재주(梓州)・낭주(閬州) 시절의 두보
다시 성도(成都) 초당 완화계 시절
기주(夔州) 시절의 시와 적극적 삶
강남 시절의 시와 두보의 말년
마무리하면서
두보(杜甫) 연보(年譜)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