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100년이 넘도록 읽혀온 지성인의 고전
★지적 생활의 즐거움을 끌어올려줄 마중물과 같은 책
★AI·양자컴퓨터 시대를 사는 우리와 플라톤의 차이는 무엇인가《지적 생활의 즐거움》은 ‘지적 생활’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빅토리아시대의 지성 필립 길버트 해머튼이 지적 본능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지적 생활자에게 전하는 인문적 통찰이다. 지적 생활을 택했으면서도 지적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는 ‘지친’ 지적 생활자와 ‘힘든’ 정신노동 종사자에게 지적 생활의 본질을 일깨워 진정한 지적 즐거움으로 이끈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1부 지적 생활을 위한 신체적 단련, 2부 지적 생활자의 현실적인 고민들, 3부 지적 생활자의 행복이라는 주제하에 지적 즐거움을 방해하는 생각과 습관을 구체적으로 살펴 지적 생활자와 소통한다. 해머튼의 조언은 100년 전의 글임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지성들의 고민에 대한 답변으로 전혀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탁월한 안목은 오랜 세월 지성인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해온 진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지적 생활을 위한 몸 관리저자는 지적 생활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두뇌의 타고난 재능에 앞서 육체적 기반을 역설한다. 지적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토대로 신체 관리가 대대적으로 강조되는 점은 신선하고 흥미로운 대목이다. 해머튼은 스스로 탐구해온 당대의 학자와 지성인의 예를 통해 그들이 얼마나 지적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신체 단련과 자신만의 독특한 생활법을 찾고 훈련해왔는지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지적 생활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두뇌의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육체적 기반이다” 라는 이 낯선 명제에 대해 완벽한 설득을 경험한다. 칸트, 괴테, 니체, 워즈워스, 조르주 상드 등 이미 탄탄한 결과물로 지성을 입증한 이들의 생활이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예를 들어 《순수이성비판》의 저자 칸트는 자기 몸과 철학자라는 직업에 가장 적합한 생활패턴을 찾아내고자 30년 넘게 스스로를 관찰하며 조금씩 진보시켜나간 인물이다. 그는 새벽 5시에 차와 담배 한 대로 아침식사를 마친 후 강의준비와 집필을 시작해 여덟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하고, 일이 끝난 오후 1시에 점심을 먹었다. 이후로는 음식을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칸트는 두뇌 노동자라면 세상 사람들의 습관에 따르기보다 나름의 희생과 절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런던타임스> 사장이었던 W. A. F. 디레인은 기자시절 순회재판이 열리는 곳을 찾아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할 때 기차를 이용하지 않고 꼭 말을 타고 다녔고, 또 여관에서 주는 밥은 되도록 피하고 좋은 식당을 찾아 아침을 먹었다. 여유가 있을 때에는 직접 장을 봐다가 요리해 먹기도 했다고 한다. 건강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던 그는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좋은 기자가 될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좋은 기사를 쓰는 것보다 건강한 기자의 몸을 갖추는 게 훨씬 어렵고 힘든 과정임을 말이다.
대부분의 지적 노동자들은 건강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살아간다.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새벽까지 글을 쓴다. 몇 주일 동안 운동은커녕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다. 잠깐 쉴 틈이 생길 때라도 신선한 공기를 접하면 좋겠지만 그 시간에 오히려 줄담배를 피워댄다. 또 뇌에 좋은 자극이 된다며 술이나 차 또는 커피를 마신다. 이러한 패턴이 지성의 출현에 큰 도움이 되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해머튼은 이러한 자극에 과다하게 의지하려는 유혹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단언한다.
해머튼은 지적 생활도 쾌락을 추구한다고 말하며, 이에 도달하는 방법은 오로지 훈련에 있다고 강조한다. 지적 훈련은 독특해서 정답도 없고 참고서도 없다. 각자의 개성을 따라가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자기 개성에 맞는 독창적인 훈련을 찾아내고, 상황에 따라 나의 성장속도에 따라 변화를 주어야 한다. 강압적으로 이루어지거나 당사자의 기분을 무시하는 훈련은 지적 훈련이 아니다. 지적 훈련은 지적인 쾌락이라는 독특한 기쁨을 맛보게 한다. 육체적 훈련이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라면, 지적인 훈련에서는 고통이 곧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지적 생활자를 절망에 빠트린 것들에 대한 답변지적 생활 중에 많은 이들이 절망에 빠지곤 한다. 해머튼은 이토록 많은 지적 생활자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말하며, 지적 생활의 목표, 본질, 효율에 대한 착각과 오류을 살펴 현실적인 고민에 대한 명쾌한 대안으로 이끈다. 시간 활용법, 지식의 확장 욕구, 배움에 대한 집착, 기억력, 독서법, 가난, 신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 지원 편중에 따른 진로 선택, 지적 이성에 끌리는 문제 등에 대해 살핀다.
지적 생활자라면 누구나 합리적인 시간 활용을 중시한다. 시간에 민감한 만큼 이들을 절망에 빠트리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해머튼은 지적 생활자의 귀중한 시간이 헛되이 사라지는 대부분의 경우는 뜻밖에도 연구 도중이라고 언급한다. 이는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되는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오늘 하루’ ‘이 순간’ 이라는 시간에 무심해지기 때문이라 지적하며, 단념과 한계, 기간 설정 등 간과하기 쉬운 것들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이뿐 아니라 대의에 밀려 간과하기 쉬운 늦잠, 지나치게 긴 식사 시간 등 생활 습관을 신중하게 살펴볼 것도 권한다.
지적 생활자가 빠지기 쉬운 또 하나의 함정은 ’지식의 확장‘이다. 지적 생활은 한 가지 분야에 만족하지 못한다. 지식은 한 가지 모습이 아니기에 자기도 모르게 그 모습을 찾아가는 여행이 지적인 삶인 것이다. 그러나 해머튼은 지식을 넓혀나가는 것에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단점도 있음을 꼬집는다. 과도한 지식습득은 자기만의 개성을 잃게 할 염려가 있음을 경고하며, 자칫 배우는 과정에 집착하여 ’배웠다‘는 과거형을 자랑삼으려는 것은 아닌지 되묻는다. 순수한 지적 욕구에 따라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경우라면 1일 최소 2시간의 독서를 권한다. 다만 생업의 효율을 높여 안정적인 독서 시간을 확보하고, 절대 중단해선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 여유가 생겼을 때만 띄엄띄엄 책을 읽는 것으로는 기대하는 지적인 삶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지적 생활자에게 기억력은 늘 아쉬운 부분이다. 스스로 기억력이 나쁘다고 한탄하는 이들에게 해머튼은 그것은 일종의 배탈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억지로 주입된 지식에 대한 혐오감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기억의 본질은 ’연계‘에 있다. 기억력은 일종의 지적 근력일 뿐, 좋은 기억력은 많은 것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고 전한다. 다음은 해머튼이 유명한 작가로부터 받은 충고의 한 대목이다.
“메모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해두세요.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쓰는 단계가 되면 메모를 보지 마세요. 메모한 것이 정말 중요한 가치가 있다면 그걸 꺼내 보지 않더라도 필요한 때 기억날 테니까요.”
이외에도 해머튼은 교양을 추구하지만 가난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위로와 희망을 전한다. 지적 생활에 있어 경제적인 부가 유리한 조건이라는 점은 맞지만, 지적인 관점에서 가난이라는 부자유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설득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한계를 안고 있고, 습득할 수 있는 능력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모든 지식을 섭렵할 수는 없다. 위대한 전집으로 서재를 가득 채워넣더라도 읽지않고서는 소용이 없으며, 읽었더라도 감동을 받지 못한다면 시간 낭비일 뿐이다.
해머튼은 말한다. “과거의 나는 기회의 중요성을 믿었다. 기회가 주어져야 노력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한데 이 나이가 되어보니 정말로 간절한 것은 시간과 건강이다. 시간과 건강이 허락하는 한, 기회는 쉬지 않고 찾아온다. 찾아오지 않더라도 내가 찾아낼 수 있다.”
지적 생활자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해머튼은 이 책을 통해 지적 생활자로 살아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대상인 나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이끈다. 지적 생활자로서의 핵심과 삶의 목표, 노동과 행복의 의미, 적과 인간관계, 예술, 나이듦, 행복, 고독의 의미 등을 살펴본다.
해머튼은 진정한 지적 생활은 내 안의 음성을 기다리는 행위이며, 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남들이 원하는 나를 만들어서는 자유로워질 수도 고상해질 수도 없다. 자유롭고 고상해지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사상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플라톤을 위대한 철학자라고 표현하는 까닭은 사유의 결과가 아닌 사유의 과정을 인정했기 때문이며,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와 헤겔과 쇼펜하우어가 필요한 까닭은 그들의 학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온 생애 때문인 것이다.
해머튼은 적이든 친구든 나의 인간관계가 곧 나를 보여준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당신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면 오늘 저녁 친구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해보라고 말한다. 훌륭한 사람과 사귀고 싶다면 먼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지적 생활자라면 해머튼의 적에 대한 해석에도 공감할 수밖에 없다. 해머튼은 그리스의 희극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의 말을 인용한다. “현명한 사람은 적으로부터 배운다.”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웃음을 가르친 것은 비극이었고, 겸손을 가르친 것은 거만한 동료작가였다.
해머튼은 경멸하고 싶은 사람을 적으로 만들지 말라고 당부한다. 적을 인정한다는 것은 내게 없는 그 무엇을 적으로부터 발견한다는 뜻으므로, 배울 만한 가치가 있는 적을 선택하라는 뜻이다.
해머튼의 예술론은 지적 생활자에게 필수불가결한 존재로서의 예술을 논한다. 특히 지적 생활자이자 예술가로서 살아온 저자의 생생한 견해가 더해져 감동의 깊이를 더한다. 해머튼은 예술이란 인간의 이상을 높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를 보다 순수하고, 보다 강렬하고, 더욱 위대한 존재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표현했다.
예술이 다른 어떤 활동보다 위대한 것은 인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국가는 국민을 억압했고, 경제는 빈곤을 낳았고, 종교는 헛된 망상을 심었고, 법은 죄인을 만들었고, 철학은 진리에 더욱 목마르게 했으나, 예술은 그 어떤 암흑의 시대에도 인간의 영혼을 위로했다. 해머튼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괴테가 아니지만 베르테르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다, 라는 기쁨이 예술의 진짜 보물이다. 나는 베토벤이 아니지만 베토벤이 사랑했던 새 소리를 듣고 있다, 라는 흥분이 예술의 진짜 보물이다.”
어떻게 나이드는 것이 좋은 것인지에 대해서라면 정답이 없다. 다만 해머튼은 나이듦이 고통스러운 까닭은 어떻게 늙어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아름다운 노년은 결국 아름다운 청춘을 살았다는 증거인데, 인간이 아름답게 늙지 못하고, 늙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나간 시간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열매를 거두느냐에 집착하기보다 현재 즐길 수 있는 꽃을 만끽하는 것이 최선이 될 수도 있음을 귀띔해준다.
해머튼이 활동했던 빅토리아시대는 산업혁명의 성숙기이자 대영 제국의 절정기였다. 해머튼은 19세기 영국인을 대상으로 이 책을 썼다. 신기하게도 해머튼의 조언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모습과도 닿아 있다. 물질문명의 모순 속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습이 지금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인지 해머튼의 말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도 효용있는 가르침으로써 다시금 희망을 품게 만든다.
물질문명이 지배하는 오늘날 우리는 숙명적으로 눈에 보이는 세계를 갈망하기에, 이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순조로울 수 없다. 물질이 문명으로 대접받는 이 시대에 지성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가 지성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결국에는 본능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해머튼은 이것이 물질문명을 살아가는 우리가 지적인 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라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