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1979년 등단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국 시조의 현장이었고, 중추였으며, 이젠 주역이 되어가고 있는 이승은 시인의 시집 『꽃으로는 못 올 우리』가 가히 시인선 10권으로 출간되었다. 일상적 체험을 시로 승화하는 이승은 시인의 시작은 반복되는 슬픔에 무뎌지지 않으려는 마음을 대변한다. 40년이 훌쩍 넘은 시간 동안 끊임없이 창작 활동을 이어가면서 시인은 자신이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기록해 왔다. 그 긴 세월을 통과하면서 시인은 글쓰기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타자를 위한 것임을 깨닫는다. 남을 위해 무언가를 쓰려고 할 때 언어는 그 무엇보다 귀한 것이 된다. 이승은 시인은 남루하고 나약한 것들을 줄곧 응시한다. 흐드러지게 폈다가 지는 꽃들,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지닌 나무와 풀들, 그리고 앞서 생을 마감한 자들, 조용히 낡아가는 것들을 응시하고 기록한다. 이승은 시인의 세계에서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를 알 수 있다.경건히 두 손으로 받잡는 자태 보소천도天桃를 훔쳤으니 어허, 그럼 도둑인데친근한 얼굴이시네 행랑 아범 같잖은가호방하고 굽힘 없는 동방삭이 눈빛 보소알면서도 서왕모는 모르는 척하였으리그래서 삼천갑자렷다, 둘은 그리 각별했나― 「낭원투도閬苑偸桃」 전문
첫돌 무렵 아장대는 어린애 눈빛인데알 것은 다 안다는 고집도 제법인데이순耳順에 이르고 보니 모르는 게 별천지다남의 눈에 들려다가 내 눈엔 들지 못한그런 중에 놓쳐버린 시간은 늘 2인칭나에겐 별 볼 일 없다고 잠깐 왔다 가버린,― 「초저녁별」 전문
개나리한나절 집 비우고 저물녘 들어오니쓴 약을 삼킨 듯이 노랗게 질린 채로대엿새 웃어주던 꽃,낱낱이 져버린 봄샐쭉한 첫 마음에 초록 잎 돋아나도꽃 보낸 줄기들은 헛웃음만 짓고 있어눈길을 떨치고 서서,나 또한 져버린 봄벚꽃지하철역 계단 어귀 눈꽃마냥 홀홀 쌓여발 딛기 저어해라 까치발로 서는 사월내 한때 꽃 비늘이다,절반쯤 지고 없는빗줄기에 휘어 처진 발아래 꽃가지를아예 꺾어 와서 유리병에 담고 보니꺾일까 안간힘 쓰다,몇 송이 지고 없는― 「우두커니, 봄」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이승은
서울에서 태어나 1979년 제1회 〈만해백일장〉 장원, 그해 KBS·문공부 주최 〈전국민족시대회〉 장원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시집 『분홍입술흰뿔소라』 『첫, 이라는 쓸쓸이 내게도 왔다』 『어머니, 尹庭蘭』 『얼음동백』 『넬라 판타지아』 『꽃밥』 『환한 적막』 『시간의 안부를 묻다』 『길은 사막 속이다』 『시간의 물그늘』 『내가 그린 풍경』, 시선집 『술패랭이꽃』이 있다. 이영도시조문학상, 중앙시조대상, 오늘의시조문학상, 고산문학대상, 백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