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자본과 노동의 만남’이라는 조건이 없었다면 산업자본주의는 현실에서 성립할 수 없었다. 양자의 결합은 필연이 아니며, 인과관계도 없다. 그렇다면 ‘만약 자본과 노동이 만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묘사할 수 있는 궤도를 ‘우리들’이 구상할 수 있다면, 그 구상을 실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자 마쓰모토 준이치로의 문제의식이다.
저자는 자본주의가 우리들의 뇌에 투영하는 사유재산제 유토피아와는 다른 세계, 달리 말해 봉건제의 구속으로부터의 도주가 자본주의에 의한 노동력 상품의 포획으로 이어지지 않고 그 포획으로부터 계속해서 어긋나며 멀어져가는 세계를 그려내고자 한다. 이 책은 자본주의를 역사화하고 자본의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서, 들뢰즈의 철학 그리고 ‘역사가’ 맑스와의 마주침을 경유해 코뮤니즘이라는 이웃 지대를 발견하려는 시도의 결과물이다.
또 이 책은 사상가들의 마주침을 일으켜 새로운 사유를 일으키는 사고의 실험이다.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라고 인정하기도 했던 질 들뢰즈와 칼 맑스의 마주침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저자는 보여준다. 그 밖에도 저자는 칸트, 헤겔, 라이프니츠, 바디우, 벤야민, 클로소프스키, 네그리 등과 들뢰즈의 마주침을 조명한다. 이러한 마주침을 통해 마주치는 사상가들의 사상이 새로이 조명되고 그 현재성이 부각된다.
출판사 리뷰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은 맑스로, 맑스주의로 완전히 관통되는 작품입니다. 현재 저는 저를 완전히 맑스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질 들뢰즈
‘자본과 노동의 만남’이라는 조건이 없었다면 산업자본주의는 현실에서 성립할 수 없었다. 양자의 결합은 필연이 아니며, 인과관계도 없다. 그렇다면 ‘만약 자본과 노동이 만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묘사할 수 있는 궤도를 ‘우리들’이 구상할 수 있다면, 그 구상을 실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들뢰즈와 맑스』 저자 마쓰모토 준이치로는 프랑스 문학, 사상, 철학을 연구하는 일본의 소장 학자로, 들뢰즈에 관한 많은 책에 공저자로 참여하고 사회철학에 관한 책을 다수 번역하는 등, 현재 일본 사상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들뢰즈와 맑스』에는 세 개의 부로 배치된 열두 편의 글(각 부에 4편씩)이 수록되어 있다. 1부에는 역사와 철학, 정치를 다루는 글들, 2부에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철학, 정치, 역사를 다시 생각하는 글들, 3부는 현대 사회에서 노동의 문제와 코뮤니즘의 가능성을 다룬 글들이 실려 있다.
1부 역사·철학·정치
들뢰즈-과타리와 역사 : 세계사는 우발적 사건의 역사이지 필연성의 역사가 아니다
1부의 첫 번째 글인 「들뢰즈-과타리와 역사 : 『자본주의와 분열증』 읽기」는 들뢰즈와 과타리가 함께 쓴 두 책,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에 나타난 맑스의 역사 이론 재구축이 조명된다. 달리 말하면 들뢰즈와 과타리 특유의 ‘맑스주의적’ 역사이론이 논의되고 있다. 이른바 ‘정통’ 맑스주의적 역사론이 모순과 필연성을 중심에 두고 전개된다면, 이 둘은 우발성과 우연에 의한 역사, 특히 자본주의의 발생을 논하고 있다. 이를 위해 맑스의 익숙한 역사 유물론의 핵심 개념들이 들뢰즈-과타리의 개념을 통해 다시 사고된다.
예를 들어 생산력과 생산관계 개념은 ‘소재-힘’의 도식으로 해체되어 재구성하여 논해진다. 이 책의 핵심적인 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 글인 「들뢰즈-과타리와 역사」는 들뢰즈-과타리가, 자본주의를 형성시킨 ‘자본’과 ‘노동’의 마주침이 우발적이라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자본주의를 이루는 구성 요소들의 결합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음을 조명한다. 그럼으로써 들뢰즈-과타리의 ‘맑스주의’는 자본주의를 역사로 귀환시키고, 자본주의와는 다른 ‘결합-배치’ 역시 가능하다는 것을 가시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리와 명령 : 말의 의미를 쟁취하는 과정으로서 투쟁을 재구상해야 한다
두 번째 글 「공리와 명령 : 들뢰즈·과타리의 레닌」은 들뢰즈-과타리가 논한 자본의 ‘포획장치’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정리하면서 이 장치로부터 벗어날 길을 모색한다. 자본주의의 ‘포획장치’는 공리계를 통해 작동한다. 자본주의 공리계는 모든 사물을 비물체적 변형을 통해 상품화하여 포획하는 조작 장치다. 이 공리계에 대항하여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은 명령어다. 명령은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사건을 일으키고, 존재하는 것의 배치를 전환시킨다. 자본주의의 공리계로부터 탈출하고 새로운 배치를 이루어내는 명령이 종종 슬로건으로 표명되는 혁명적 언표행위다.
이 언표행위를 잘 보여준 이가 바로 레닌이다. 1917년 레닌이 표명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이 대표적이다. 마쓰모토는 레닌의 명령어에 대해 분석하면서 바디우의 집합론과 진리론을 소환한다. 이에 따르면 명령은 “기존의 ‘상황 언어’에 대치하는 ‘주체-언어’에 의해 상황을 내부에서 일그러뜨리는 대항적 실천”이다. 이에 마쓰모토는 “말의 의미를 쟁취하는 과정으로서 투쟁을 재구상할 필요”를 제기한다.
이슬람 국가 IS 설립을 계기로 살펴보는 들뢰즈-과타리의 국가론
1부 세 번째 글 「‘원국가’의 사정거리 : 이슬람 국가 이후에 묻는다」는 들뢰즈-과타리의 국가론(원국가)을 논하면서, 21세기 현재에 그 국가론의 의미를 사유하고 있다(이 사유는 ‘IS-이슬람 국가’의 설립에 촉발되어 이루어진다). 마쓰모토는 현실에 나타난 국가들은 잠재적인 ‘국가’의 ‘현동화’라고 말하면서, 그 잠재적인 <국가>가 바로 들뢰즈-과타리가 제시한 ‘원국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들뢰즈-과타리가 그 잠재적인 것(원국가)의 현동화로서의 국가론을 맑스의 ‘추상에서 구체로’라는 방법론으로부터 입론의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도 조명한다. 나아가 사회 시스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에 의해 규정되고 그 기능이 작동되는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특질에 대해서도 들뢰즈 과타리의 ‘원국가’론은 해명하고 있다면서, 사회주의 국가나 민주주의 국가나 모두 ‘원국가’의 변형임을 논한다.
모순은 효력을 잃었는가 : 헤겔의 ‘모순’ 개념을 둘러싼 철학 논쟁
1부 네 번째 글, 「모순은 효력을 잃었는가 : 들뢰즈, 바디우에 의한 헤겔 변주」에서는 ‘모순’ 개념, 특히 헤겔의 ‘모순’ 개념을 둘러싼 철학자들의 논쟁적인 사유가 깊이 있게 논의된다. 이 철학적 사유는 정치에 대한 사유로 연결된다. 이 글에서 호출되는 철학자들은 헤겔, 들뢰즈, 라이프니츠, 바디우다. 특히 이 글은 1970년대 마오주의자로서 열렬하게 활동한 바디우의 들뢰즈 비판이 철학적으로 어떤 입장에 서있었는지 소개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이 글은 우선 들뢰즈가 헤겔에 대해 논하고 있는 『차이와 반복』의 해당 부분을 조명하면서, 들뢰즈의 ‘반헤겔주의’가 지닌 함의를 드러낸다. 들뢰즈에 따르면 헤겔은 차이를 유일한 문제로 보았지만, 모순 개념을 통해 차이를 해소해버린다. 이에 반해 라이프니츠는 어떤 운동을 그 순간마다의 양태에 주목하여 포착하는 미분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면서, 들뢰즈는 이 차이 그 자체를 파악하려는 라이프니츠의 ‘무한소’를 헤겔의 ‘모순’에 대치시킨다. 헤겔은 차이를 하나의 전체로 귀착시키지만 라이프니츠에게 전체는 차이의 ‘다양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다양체의 철학에 대한 바디우의 비판이다. 그는 결국 들뢰즈의 <다>(多)는 <1>로 반전된다면서 ‘하나를 둘로 나눈다’는 ‘모순’(헤겔의 모순론을 뒤집은 것)을 내세운다. 1968년 이후 성립된 복수화된 세계에서 바디우의 이러한 비판은 의미 있다고 마쓰모토는 쓰고 있다. 하지만 이 비판이 성공했다고 그는 평가하지 않는다. 그는 바디우와 들뢰즈의 마주침을 통해 현대사상에서 정치의 존립을 모색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하면서 글을 마치고 있다.
2부 ‘도래할 민중’의 이야기
이야기와 주름 : 들뢰즈의 서술적 지성
2부의 첫 번째 글 「이야기와 주름 : 들뢰즈의 서술적 지성」은, 고아가 아버지를 찾는 이야기로 전개되는 모리스 르블랑의 『발타자르의 이상한 모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작된다. 마쓰모토는 르블랑의 소설이 공존 불가능한 이야기의 공존과 중첩을 펼쳐내고 있음을 분석하고는, 이야기 자체가 그러한 특성이 있음을 논한다. 이야기의 중첩적 성격은, 벤야민의 ‘이야기론’을 거쳐 들뢰즈의 라이프니츠에 대한 책인 『주름』에서의 핵심적인 존재론적 개념인 ‘주름’으로 연결된다. 마쓰모토는 이 ‘주름’이 들뢰즈 철학의 서술적 특성(모든 개체를 그 특이성으로 포착하여 전개시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고 바디우의 들뢰즈론을 끌어들여 주장한다. “변화를 촉발하고, 자신도 변화에 맞추어 의미를 변화시켜 가기 위해 개념을 창조하는 말의 사용법”이 들뢰즈 철학의 서술적 특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일(一)과 다(多)라는 “쌍 자체로부터 빠져나와, 개체의 수만큼 류(개념)의 존재를 사고하는” 지성이기도 하다.
분열과 종합 : 과타리, 벤야민, 라이프니츠
2부 두 번째 글인 「분열과 종합」은 ‘과타리, 벤야민, 라이프니츠’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과타리와 벤야민, 그리고 들뢰즈의 라이프니츠가 교차되면서 ‘주체화’에 대해 논의하는 장이다. 과타리는 발튀스의 회화작품 <거리>를 분석하면서 실존 감각의 변경 생산의 과정, 그리고 주체화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 새로운 실존의 생산은 벤야민의 유사성론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마쓰모토는 말한다. 나아가 마쓰모토는 벤야민이 「번역자의 과제」에서 제기한 ‘깨진 항아리’의 조각들이 그 항아리(이념)와 유사관계에 있다는 이론을 참조하며, 이어서 들뢰즈에 의해 해석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으로 논의를 전개시킨다.
그 논의의 요체는 이렇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적인 이념은 이질적인 제요소의 집합-총체성이며, 이 이념의 서술이란 하나의 세계의 탄생과 소멸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모나드는 분할 불가능하게 폐쇄된 개체가 아니라 다른 모나드를 ‘희미한 형상’으로 포함하고 있다. 모나드 세계는 분할하면 할수록 한층 더 종합되는 기이한 세계로, 이를 바로크적이라고 벤야민과 들뢰즈는 지칭했다. 그리고 이러한 바로크적인 모나드는 과타리가 말하는 새로운 실존의 산출이 가진 특성(“자기 제작적으로 자기를 창조해 가는 과정으로서의 집합적 주체화”)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맑스는 필연성으로 회수되지 않는 우연성의 재출현으로 역사의 반복을 파악했다
2부 세 번째 글인 「무한소의 정치 : 맑스의 ‘역사’ 개념 재고」는 칼 맑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분석하면서 맑스의 역사 개념을 ‘재고’하는 작업을 보여준다. 이 글은 역사가 무수한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의 이성적 자유의 완전한 발전을 통해 진전한다는 칸트의 역사 이론, 이성의 간지를 통해 개인을 희생하면서 역사는 이성의 자유를 실현해간다는 헤겔의 역사 이론을 거쳐 맑스의 역사 이론으로 나아간다. 특히, 역사는 반복을 통해 그 필연성이 관철된다는 헤겔의 사상을 비틀어 반복의 첫 번째는 비극이지만 두 번째는 희극으로 나타난다(『브뤼메르 18일』)는 맑스의 말에 이 글은 주목한다.
맑스의 이 말은, 그가 개인들이 어떻게 역사의 반복 안에 말려들어 농락당하는지 그 반복을 통해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맑스는 역사의 반복을 원하지 않았으며, 역사를 자유로운 이념 실현의 필연적 과정이라고 본 헤겔과는 달리 실패의 퇴적으로 생각했다는 것이 마쓰모토의 주장이다. 즉 맑스는 필연성으로 회수되지 않는 우연성의 재출현으로 역사의 반복을 파악했다는 것인데, 맑스의 역사 이론에 대한 참신하고 전복적인 과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맑스는 그 실패가 하나의 유산으로 남아 현재로부터 미래를 변혁할 힘으로 전환된다고 생각했다고 마쓰모토는 논의를 진전시킨다. 나아가 그는 이 글의 말미에서, 그러한 사고는 “현재를 기점으로 지금까지의 궤도와는 별개의 방향으로 선을 끌어당기는” ‘무한소의 정치’로 이끈다고 주장한다.
‘빈곤’에 대한 새로운 사고의 가능성 찾기
2부 네 번째 글 「‘절대빈곤’ 쪽으로」는, ‘빈곤’이라는 개념을 통해 21세기의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상을 제시하면서, 빈곤의 역능에 대해 사유하고 있는 글이다. 이 논의는 19세기에 제기된 맑스의 고전적 계급론으로는 현재의 복잡한 현실을 파악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한결같은 실체로서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존재할 수는 없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는 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마쓰모토는 이 세기에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라는 실천적 물음에 대한 답을 내기 위해서 ‘빈곤’이라는 개념을 재조명한다. 맑스의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을 비판한 랑시에르를 경유하면서 맑스의 사고에서 ‘빈곤’에 대한 새로운 사고의 가능성을 찾고 있는 마쓰모토는, ‘빈곤’ 개념을 네그리와 하트의 『공통체』에서 전개한 ‘빈곤론’을 조명하면서 다시 사고한다. 네그리와 하트에게 ‘빈곤’은 빈궁과 결여가 아니라 열린 정치체제를 가져올 수 있는 사회적 주체성의 생산, 폭넓은 다양성을 가진 집단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글은 베르그손의 철학을 이어받은 퀑텡 메이야수와 클로소프스키가 재해석한 니체의 철학을 통해 ‘빈곤’에 대한 철학적 개념화를 시도한다. 그들의 철학적 사유를 경유하면서 마쓰모토는 ‘절대빈곤’을 카오스에 말려들어가는 상태로 상정하고, 니체에게서 빈곤 개념의 가치 전환 가능성을 읽는다. 그것은 현재의 제도에 의해 망각되고 억압된 것을 0도(절대빈곤)에 이르기까지 추적한 후 그것을 다시 시대착오적으로 회귀시키고, 그럼으로써 현재의 제도 쪽을 비현재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며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 전환은 ‘절대 빈곤’ 개념을 제시한 맑스의 사고 자체의 가치 전환 역시 이루어낼 수 있다는 것이 마쓰모토의 생각이다.
3부 ‘노동’과 유토피아의 행방
오늘날 우리는 능력을 판매하기보다 ‘렌탈’한다
이 책의 마지막 3부는 ‘노동’을 화두로 현대 사회의 삶과 이 사회가 강제하는 삶과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글인 「렌탈 라이프 : 포스트포디즘 시대의 노동」은 ‘능력’을 판매하기보다 ‘렌탈’하는 우리 시대의 양상을 바탕으로 현대 자본주의의 특성을 고찰한다. 맑스가 살았던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의 노동은 시공간상의 제약의 한정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 사람들은 ‘노동자’의 범주를 넘어 부업 등을 통해 그의 생활시간을 자본가에게 양도하는 계약을 자본과 맺고 있다. 자본은 빌려주는 생산수단들을 모아 결합하고 이 계열 안에 능력 제공자를 활동케 하여 가치의 자기증식운동을 계속한다. 이때 자본은 일종의 지대를 취하는 토지소유자처럼 나타난다.
여기서 마쓰모토는 카를로 베르첼로네나 크리스티안 마라찌와 같은 ‘자율주의’ 이론가들의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들을 호출한다. 베르첼로네는 현대 자본주의는 지식이라는 공유재산을 마련하여 사적 소유화하고 이를 활용하는 사람들로부터 지대를 뽑아낸다고 주장한다.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노동하지 않을 때조차 자본의 가치 증식을 실행해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노동자들은 ‘보장사회소득’(기본소득)을 요구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자율주의자들의 논리다. 이 글은 이러한 논의들을 소개하면서 ‘노동’의 딜레마를 진작 발견했던 맑스의 현재성을 다시 확인하면서 끝을 맺는다.
클로소프스키가 탐색한 ‘살아 있는 화폐’로부터 자본주의의 임계를 찾아낸다
3부의 두 번째 글 「노동과는 별개의 방식으로 : 『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살아있는 화폐』로」는, 맑스가 자술리치에게 보내는 편지를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이 편지는 19세기 후반에 러시아에 잔존하고 있는 고대적 공동체가 ‘코뮤니즘적인 소유의 형태’로 발전할 수 있는 바탕이 되어줄 수 있는지 탐색하고 있다. 이에 마쓰모토는, 이 편지보다 ‘비-자본주의적 요소’에 대해 더 심도 깊은 사유를 보여주고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선행하는 형태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 수록)이라는 글을 탐구하는 데로 나아간다.
마쓰모토의 탐구의 요지는 이러하다. 「자본주의적 생산에 선행하는 형태들」에서 맑스는 자본주의적 생산 이전의 소유 형태와 자본주의에서의 소유 형태를 비교한다. 전자에서 소유는 공동체가 자신을 재생산하기 위한 조건들과 밀접하다면, 생산자와 생산수단이 분리되는 자본주의하에서의 소유는 개인의 공동체로부터의 이탈을 조장한다. 소유와 노동은 분리되고 이 분리는 자본가에게는 소유의 자립화로 나타난다. 그럼으로써 자본주의에서는 등가교환이라는 대칭성의 외관 아래 노동과 소유의 비대칭성의 정도가 심화된다.
이러한 맑스의 논의를 바탕으로, 마쓰모토는 자본주의적 소유형태를 경유한 이후에서 비-자본주의적인 소유형태를 다시 포착하고자 하는데, 이 포착을 클로소프스키의 『살아 있는 화폐』라는 책을 통해 시도한다. 이 책은 ‘도착’(인간 자신의 재생산으로부터의 시대착오적인 일탈을 가리킨다)에 대한 복잡한 논의를 전개하는데, 마쓰모토는 클로소프스키가 규명하고 있는 이 도착을 맑스가 말한 부, 즉 ‘모든 인간적 힘들 그 자체의 발전의 총체성’과, 그리고 가치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마이너스의 노동과 연결시킨다. 그리고 클로소프스키가 탐색한 ‘살아 있는 화폐’(도착자의 환상이 교류되는 가능성을 가진 신체)로부터 자본주의의 임계를 조심스럽게 찾아낸다. 오늘날 자본주의를 넘어 공동성의 신체에서의 연결을 육성할 길을 그 ‘살아있는 화폐’에서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쓰모토는 자본주의와는 ‘별개의 한 체제’를 구상하는 사고를 더듬거리면서라도 모색해 가야 한다면서 이 글을 맺고 있다. 흥미롭고 도발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는 글이다.
노동과 예술 : 벤야민과 클로소프스키
3부의 세 번째 글 「노동과 예술 : 벤야민과 클로소프스키」는 맑스가 「고타강령 비판」에서 행한, 노동을 가치의 원천으로 삼는 사고에 대한 비판과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행한 노동 개념 비판을 연결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노동은 새 시대의 구세주”라는 사상, 결국 자연을 유용성에 근거한 착취 대상으로 보는 디츠겐의 사상에 대해 자연이 창조성을 스스로 발현시킨다는 푸리에의 사상을 벤야민은 대치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푸리에의 사상에서 노동은 유용성으로부터 해방되어 창조 활동에 가까워진다.
마쓰모토에 따르면 벤야민에게서 자연은 자신을 전개하는 운동이며 다른 자연을 촉발하고 작동시킨다. 그리고 예술은 이러한 자연의 창조성을 미메시스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마쓰모토는,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클로소프스키가 이에 호응하듯 푸리에의 사회구상과 창조적 활동으로서의 노동에 대해 논하고 있음도 소개한다. 이어 그는 과타리가 논한 주체화 과정을 상기하면서 노동자로서의 생산 양태, 스스로를 생산하는 포이에시스를 작동시키는 새로운 삶의 발명에서 혁명의 회로를 도출할 수 있을지 모른다며 이 글을 맺고 있다.
기호와 현실이 뒤섞이면서 새로운 공동체를 구축해가는 삶정치
이 책의 마지막 글인 「가능세계의 들뢰즈 : 네그리가 말하는 『맑스의 위대함』」은 망명을 마치고 이탈리아로 돌아가 재수감되는 것을 선택한 네그리의 사상에 대해 논하는 장이다. 감옥으로 돌아가면서도 밝고 긍정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는 네그리의 글을 조명하면서, 마쓰모토는 네그리의 ‘다중’론에도 이러한 태도가 스며들어 있다고 논하고 있다.
그런데 마쓰모토는 네그리가, 들뢰즈가 썼다는 맑스에 대한 책을 읽은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논의를 전개한다(들뢰즈의 『맑스의 위대함』은 출간되지 않았다). 네그리는 들뢰즈의 그 맑스에 관한 책이 지닌 핵심을, 공통적으로 되어가는 다중에 의한, 그리고 공통의 이름(보통명사)의 생산과정에 의한 코뮤니즘의 구축에서 찾고 있으며, 더 나아가 네그리는 기호와 현실이 뒤섞이면서 새로운 공동체를 구축해가는 삶정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네그리의 밝고 긍정적인 태도를 마쓰모토는 완전히 수용하지도 않고 배척하지도 않는 애매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코뮤니즘의 우화가, 자본으로부터 벗어나 무수한 접속을 통해 조직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정념의 흐름을 변경하도록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전망을 내비치면서 글을 맺고 있다.
열두 편의 글로 구성된 『들뢰즈와 맑스』는 들뢰즈나 맑스의 사상을 간명하게 정리하거나 해설하는 책이 아니다. 저자의 깊은 고민과 사유가 단순화되지 않고 복잡하면 복잡한 그대로 전개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이야기와 주름」에서, 지난 수년 동안 ‘명쾌함’이나 ‘이해하기 쉬움’을 과잉되게 내세우는 일본 인문과학 담론의 조류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새로운 사유는 이해하기 쉬울 수 없는 일이다. 명쾌하고 간명하며 이해하기 쉬운 ‘정리’의 사유는 새로운 사유를 막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비판적 인문 사회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이 책에서 새롭고 흥미진진한 논의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와 맑스』는 희망이 사라지는 시대에서 저항의 길을 찾아내어 희망의 원리를 다시 확보하고자 하는 저자의 사상적 고투를 보여준다. 저자는 희망의 길을 더듬더듬 찾아 나선다. 저자는 그 길이 시원히 뚫려 있는 대로가 아니며 미로처럼 엉켜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어떤 명쾌한 결론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저자는 이 미로를 나갈 수 있는 길을 함께 찾아보자고 독자를 이 책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 안으로 들어온 독자는 저자와 함께 그 출구를 찾는 데서 오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공리에는 음모론적 세계관(나의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가 나에 대한 방해물이 되고 있다)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이 공리를 교묘하게 조종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계속 재생산하는 시스템이 자본주의입니다.
― 한국어판 지은이 서문
이렇게 노동력을 포함한 상품들의 생산-유통-소비-(재)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원환이 완결되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노동 각각을 그 자체에 의해 긍정적으로 파악하여 자본과 노동의 우발적인 마주침을 기점으로 이 원환을 기술하는 것, 그래서 자본과 노동의 마주침을 필연으로서가 아니라 무수하게 가능한 다른 마주침과 함께 기술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역사로 귀환시키는 것, 그것이 『자본주의와 분열증』의 목적이었다.
― 들뢰즈-과타리와 역사
개념의 창조만이 아니라 그것을 적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세계에서 실현 또는 정치화시키지 않는 한, 개념은 수탈된다. 이 수탈을 바디우는 파시즘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이러한 의미에서의 파시즘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모순은 효력을 잃었는가
작가 소개
지은이 : 마쓰모토 준이치로
도쿄 출생. 릿쿄(立教) 대학 대학원 문학 연구과 박사 후기 과정을 수료했다. 슈지츠(就実)대학 인문과학부 표현문화학과 교수. 프랑스 문학·사상·철학 전공. 저서로는 본서 『들뢰즈와 맑스』(2019 ; 2025), 공저로는 『ドゥルーズ 生成変化のサブマリン』(2005), 『ドゥルーズ/ガタリの現在』(2008), 『ドゥルーズ, 千の文学』(2011), 『政治経済学の政治哲学的復権—理論の理論的〈臨界‐外部〉にむけて』(2011), 『ドゥルーズ・知覚・イメージ—映像生態学の生成』(2015), 『現代思想と政治—資本主義・精神分析・哲学』(2016) 등이 있다.
목차
한국어판 지은이 서문 : 뫼비우스의 띠를 절단하기 위하여 6
1부 역사·철학·정치
들뢰즈·과타리와 역사 : 『자본주의와 분열증』 읽기 16
공리와 명령 : 들뢰즈·과타리의 레닌 67
‘원국가’의 사정거리 : 이슬람 국가 이후에 묻는다 91
모순은 효력을 잃었는가 : 들뢰즈, 바디우에 의한 헤겔 변주 113
2부 ‘도래할 민중’의 이야기
이야기와 주름 : 들뢰즈의 서술적 지성 162
분열과 종합 : 과타리, 벤야민, 라이프니츠 192
무한소의 정치 : 맑스의 ‘역사’ 개념 재고 218
‘절대빈곤’ 쪽으로 250
3부 ‘노동’과 유토피아의 행방
렌탈 라이프 : 포스트포디즘 시대의 노동 290
노동과는 별개의 방식으로 : 『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살아있는 화폐』로 318
노동과 예술 : 벤야민과 클로소프스키 353
가능세계의 들뢰즈 : 네그리가 말하는 『맑스의 위대함』 365
후기 386
옮긴이 후기 392
각 글의 출처 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