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2013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김주경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난각번호 1번』이 가히 시인선 013으로 출간되었다. 존재론을 말할 때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것처럼, 김주경의 시에 등장하는 꽃은 인간이 주인인 세계에서 그 인간과의 관계를 말하는 상대역으로 등장한다. 꽃에 접근하는 인간의 욕망을 소유욕이라는 개념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론이란 것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현존과 무관하지 않으며, 타 존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담아내게 된다. 김주경에게 꽃의 존재론은 인간의 소유와 무관하게 오직 꽃이 지닌 생명을 존중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김주경 시인이 그리는 세계에 접속한 우리의 감각은 상상력이 살아 있는 한 어떤 장애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이 시집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해설 엿보기]
김주경 시인의 시집 『난각번호 1번』은 현상에 그치지 않는 연상 작용으로 세계의 본질을 탐사한다. 모든 현상을 번역한다는 마음으로 시를 쓰면서 잘 번역된 세계를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다. 이때의 방법적 실행 중에서 탁월한 연상 작용이 단연 김주경 시인의 시를 남다른 반열에 올려놓게 한다. 형식에 구애받는 시조이면서도 내용의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 요인도 이처럼 활달한 연상 작용 덕분이다. 이 세계의 어떠함을 번역한 그의 언어가 현상에 그치지 않고 심미성을 확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주경 시인은 주로 생활인으로서의 감정과 감각을 바탕으로 시를 쓰면서도 세속사에 매이지 않는 시적 행보를 보인다.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그의 시를 읽을 수 있다. 하나는 시 쓰기 수행과 관련한 것, 다른 하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경우, 세 번째는 닭이라는 조류를 통하여 세계관을 표명하는 경우다. 그는 살아가는 일과 시 쓰는 일의 가치를 등가로 알고 있으며 이 점에 고무된 시인이다. 프란츠 카프카가 말했듯이, 문학은 순수한 사람에게가 아니라면 적어도 이것에 알맞은 사람에게 맡겨진다. 김주경의 시편 중 상당수에서 한 편의 시 텍스트를 제작하는 자의 자의식이 드러나는 건 그가 순수한 사람이거나 시 쓰기에 알맞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혈연 중심의 가족 이야기, 어린아이의 생명력과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 젊은 층의 일자리 문제, 소유욕 등 삶의 치열성을 녹여낸 작품이 주종을 이룬다.
시인은 자기 자신이 아닌 존재로 간주되기를 바라면서도 결국 자기 자신인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가 시를 읽을 때 마주하는 주체는 시인이면서 시인이 아니다. 시인은 언제나 자기 내면의 타자와 살면서 양자 간 거리 조정을 통하여 어떤 말을 한다. 이 시집에는 시 텍스트 생산자의 발화일 법한 표현들, 예컨대 자서전·이력서·일기장·첨삭 등의 기표가 자주 등장한다. 시인의 세계관과 연접하는 이 문제는 이후에도 문체·주석 등의 글쓰기 기호로 하나의 표상을 만들면서 한층 깊이를 더하고 있다.
별을 본다는 건 하늘을 본다는 것
하늘을 본다는 건 고개를 들었다는 것
잘했다
이렇게 쉬운 걸 왜,
바닥만 섬겼을까
직립을 배우지 못해 생은 자꾸 흔들리고
처세술도 모른 채 곧추세운 두 개의 뿔
맨발로 걸어온 문장만이
첨삭 없는
자서였다
― 「민달팽이」 전문
첨삭을 거치지 않은 시인의 첫말을 읽는 듯하다. 삶의 조건이 바닥인 자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늘 바라보기인 점을 시사한다. 여기에 더해 시적 주체가 처세술을 배우지 못했다는 점이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이것이 무학無學에 대한 회한만은 결코 아닌 듯하다. 그가 반드시 배워야 할 것으로는 알지 않았던 것이 처세술임을 고백하는 측면이 있다. 직립의 불가능성을 선천적인 것으로 돌리지 않고 그러한 자세를 배우지 못한 것으로 아는 주체는 필경 민달팽이 같은 자라 해야 한다. 3차원의 세계가 있었음에도 2차원의 세계에 엎드려 있었다는 말은, 3차원 세계로의 진입에 배움이 필연임에도 이것이 자신과 먼일이었음을 뜻한다. 그만큼 그는 민달팽이처럼 맨발로 걸어 지금에 이른 시인이다. 이 같은 ‘자서’ 쓰기에 배움도 첨삭도 없었다는 말이 진정성 있게 들리는 것은 그런 이유다.
― 김효숙(문학평론가)
바람이 바람을 밀며 산길을 올라간다
바람이 바람을 업고 산길을 내려온다
바람이 퍼질러 앉아 후후, 바람개비 돌린다
바람의 흔적을 채집해 온 사람과
바람의 흔적이 궁금한 사람들이
바람의 흔적에 들앉아 바람이 되어가는
여기는 바람왕국 누구나 바람백성
바람으로 머물거나 바람으로 스치거나
바람과 닿은 인연 모두
바람의 흔적이다
― 「바람흔적미술관」 전문
화엄을 꿈꾸던 나무의 일기장이다
비바람의 무용담과 웃음 헤픈 푸른 잎이
어둠을 캔버스 삼아 비다듬어 펼쳐놓은
겹겹의 눈부처로 일렁이는 문장은
읽을수록 깊어지는 심연 속 우두커니
떠돌던 몇몇 동사가
흰 날개를 접는다
오래 익혀 시울이 말랑해진 속말들
모서리 궁굴리며 나붓나붓 안겨들면
좀처럼 삭지 않던 망상도
스르르 결을 푼다
― 「불멍」 전문
가장 깊은 몸속에 심장을 묻었네
햇덩이를 삼켰다는 태몽의 기운으로
난생의 오래된 문장
발아를 시작하네
무골의 세상에다 잔뼈를 키우느라
옹골찬 꿈의 자리 수위가 높아지고
미생의 마지막 증언처럼
날이 서는 목울음
눈 뜨는 모든 순간 날개가 생긴다고
줄탁의 고행으로 나를 깨운 어머니
민숭한 젖은 어깨에 벌써
바람이 깃을 펴네
― 「난각번호 1번―부화」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주경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2013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서정과현실》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조집 『은밀한 수다』가 있다.
목차
제1부
바람흔적미술관13/공간14/민달팽이15/자작나무 숲에 들다16/우리 동네에는 커피공장이 있다17/불멍18/불멍19/매미, 무음無音에 들다20/수구레국밥21/피정에 들다22/커튼콜24/겨울 주남지25/어싱earthing26/아침이 핀다27/모르고 싶은 남자28
제2부
무화과31/마블링32/어싱earthing33/난각번호 1번34/난각번호 1번35/난각번호 1번36/ㅋ ㅋ ㅋ의 배후37/꽃의 연대기38/파破40/노을에 스미다41/우리의 아침은 달콤하다42/봄날의 에피소드43/도둑이 아니라는데44/잔도공45/오름길 고사목46
제3부
캐리어의 다른 이름49/독감50/그래서 가을52/장마53/기러기, 날개 접다54/카톡 프사55/사람이 꽃이다56/몽돌58/성찬59/흑심60/빗살무늬 붉은 밤61/패러독스62/씨감자63/천기누설64
제4부
포스트잇67/나비, 나비잠, 나비 다리68/가시 돋는 밤69/즐거운 파동70/거꾸리의 꿈71/여름 감기72/별자리를 읽다74/은밀하고 위대하게75/천사 & 전사76/1월77/다시, 분홍78/묵화에 기대어79/얼음새꽃80/황사81/무화과 282
제5부
임플란트85/매미86/호박문학교실87/이젠 버리자88/마음으로 읽는 맛89/물숨90/그게 뭐라고92/안개병원 605호93/낀거 아님94/커피와 가로수길95/연煙꽃이 핀다96/가고파 꼬부랑길벽화마을98/로드킬99/마스크100
해설 김효숙(문학평론가)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