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부마사태의 진실
민주국가에서는 집회 및 시위의 자유가 법률로 보장되고 있으나 그 정도가 지나치면 국가 사회 질서가 극도로 문란하게 되어 이에 대한 철저한 대책이 필요하다.
1979년 10월 부마사태 당시 나는 마산 창원 지역 시위 진압을 위한 임시 편성 기동대 중대장이었다. 서울 등 대도시에서부터 유신독재 타도를 외치는 야당이나 대학가의 시위가 격렬해지자 경남경찰국에서는 1979년 9월 8일 전투경찰 1개 중대 규모의 임시기동대, 가칭 ‘창원공단경비대’를 창설했다. (당시 경남경찰국에는 상설 기동대가 없었다.)
중대 3개 소대 중 1개 소대는 경비 수요가 많은 울산 지구에 파견하고 남은 2개 소대의 경력(기간요원 포함 80여 명)으로 마산 창원 지역 소요 사태를 대비케 했다.
마산시 구 마산방직공장의 폐창고 콘크리트 바닥에 가마니를 깔아 잠자리를 마련하고, 난장 부뚜막에 솥을 걸어 취사를 해결했다.
낭만의 풍찬노숙(風餐露宿)?도 오래지 않아 10월 16일 부산을 시작으로 10월 18일 드디어 마산 지역에 격렬한 소요 사태가 일어났다.
오전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경남대학, 마산대학 학생 등 1,000여 명이던 시위대는 어둠이 깔리며 일반시민과 일부 고교생들까지 합세하여 10,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시내 곳곳으로 몰려다니며 공화당사, 신문사, 경찰서, 파출소, 시청, 동사무소, 방송국, 세무서 등 공공기관과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 사저에도 돌과 각목 화염병을 던져 마산경찰서 산호파출소와 시내 몇몇 파출소와 진압 출동 경찰 차량을 불태우고 공공건물과 상가 유리창을 깨부수는 등 무자비한 폭력적 행위는 그 도를 넘고 있었다.
특히 과격한 일부 시위꾼들은 시내 중심가인 남성동 일대를 칠흑같이 어둡게 하고 불이 켜져 있는 점포나 가정집에는 무차별 돌팔매질을 했다. 옥상에 올라가 화분, 벽돌, 집기 등을 가리지 않고 내던졌고, 더 나아가 운행 중인 택시의 운전기사를 끌어내리고 시동을 켠 채 그 안에 장작불을 붙여 선봉에 선 진압부대 앞으로 돌진시켰다. 그때 우리는 생명의 위험까지 감수해야 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정부는 10월 18일 부산에 이어 10월 20일 정오를 기하여 마산 지구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령하고 주요 공공건물과 대학가에 군을 주둔시켰다. 그 엿새 후가 10월 26일이다.
이처럼 폭동을 방불케 한 1979년 10월의 마산 사태 만큼은 군 출동 이전에 오직 경찰력에 의하여 쌍방 큰 인명 피해 없이 진압되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싶다.
동시에 민주헌정질서를 파괴하는 이 같은 후진적인 집회 시위의 근절을 위하여 근본적인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법은 시류에 편향됨이 없이 만인에게 엄정하게 적용되어야 하고 역사는 어디까지나 진실에 근거한 기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겪어 온 4·19, 5·18, 광우병, 천안함, 세월호 사건 등의 역사적인 큰 사건들 외에도 수많은 집회와 시위로 인해 극심한 사회의 혼란을 가져왔다. 이 많은 시위 중 마산 사태 역시 나라를 뒤흔든 시위 사건이었다.
당시 마산 사태 진압 작전을 슬기롭게 수행한 특히 전투경찰대원들의 노고에 재삼 깊은 감사의 말씀과 그리움의 안부를 전하고 이미 작고하신 여러분의 명복을 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 울진 삼척지구 무장 공비 출몰 현장에서 -
1968년 초겨울 울진 삼척 지구 무장 공비 출몰 현장에서다.
당시 나는 ○○전투경찰대의 말단 지휘관으로 무장 공비들의 이동로를 뒤쫓아 최선봉대로 두타산, 태백산, 함백산 등지를 누비는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날도 태백산 어느 골짜기를 수색하면서 하산하던 길이었다.
여러 날 자지도 제대로 먹지도 못해 추한 몰골의 우리들을 본 마을 주민이 우리를 무장 공비로 오인해서 예비군 초소에 신고했다. 신고를 접한 예비군들은 때가 때인지라 미처 확인할 겨를도 없이 집중사격을 가해 왔다. 부대 맨 앞에서 지휘하던 나는 공비가 아니라 전투경찰이라고 목청껏 소리를 쳤지만, 산울림으로 되돌아올 뿐 사격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때 상황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몸을 낮추고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해 총탄을 피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냇가에 있는 돌 틈에 머리를 박으려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 버렸다.
계곡 위 언덕에는 벌써 정규군 1개 중대쯤 됨직한 병력이 기관총을 장전 발사를 서두르고 있지 아니한가. 이제 나는 꼼짝없이 죽는구나. 순간 살아온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맨 먼저 아내의 동그란 얼굴이 떠올랐다. ‘박복한 여인아, 나 같은 못난 사람을 만나 호강 한번 못 하고 청상과부가 되는구나.’
그리고 두 번째로 어머니와 두 아들이 동시에 떠올랐다. 우선 어머니께 먼저 가는 불효자식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두 살, 세 살 두 아들이 천애 고아가 되어 길거리를 헤매는 환상이 눈물이 마르도록 아프게 다가왔다.
다음으로 같이 가야 할 전우들 생각, 똑똑하지 못한 지휘자를 만나 개죽음을 당하는구나. 미안하다는 말밖에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저승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로 작별 인사를 했다.
여기에서 잠깐,
흔히 우리들은 이런 말을 주고받는다.
만약 어머니와 아내가 동시에 물에 빠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당신은 누구를 먼저 구하겠는가? 라고 물을 때, 많은 사람들은 “마누라는 다시 얻으면 되지만, 어머니는 이 세상에 오직 한 분으로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셨는데 어찌 뒤로 미룰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분명 아내가 먼저 떠올랐다. 내 생각이 잘못이라면 나는 불효자식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목숨은 하늘의 뜻인가.
이 상황을 예리하게 관측하던 군부대 선임소대장의 사격 중지 명령으로 우리는 방한모와 전투복에 약간의 탄흔을 남긴 채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벗어나 다음 작전지로 이동할 수 있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당시 선발대를 지휘하던 소대장은 월남전에 참전하여 혁혁한 무공을 세운 하사관 출신의 장교라고 한다. 그분께 눈물 어린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은데…….
일본의 작가가 쓴 책에 이런 말이 있다.
당신이 정확히 한 시간 뒤에 눈을 감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면, 누구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하겠는가? 그리고 그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물론 사람에 따라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이때도 아내를 먼저 선택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죽도록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죽음 직전에 떠올랐던 내 아내 모습이 잊히지 않듯이 진심이 담긴 사랑으로 떠나는 마지막까지 찾아 부를 수 있는 행운이 나에게 주어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제 팔십 대의 초중반, 벌써 돌아가신 분들도 많은 그때의 전우들, 강원도 ○○○전투경찰대원들의 안녕을 빈다.
서오릉 숲길을 걸으며
나는 매주 한 번쯤 집에서 멀지 않은 서오릉 숲길을 걷는다.
공기는 맑고 햇볕은 좋으나 들어서는 마음은 꽤나 무겁고 슬프다.
풍수지리상 우선 방향이 서쪽이다.
동쪽은 밝은 세상으로 희망을.
남쪽은 따뜻한 고향 마을을.
북쪽은 눈과 빙하의 나라 춥고 배고프지만, 굳세게 삶을 이어 온 정신만은 자랑할 만하다. 그러나 서쪽은 해가 지는 곳. 머나먼 인생길에 일모도원(日暮途遠)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이곳 다섯 왕릉과 하나의 묘를 뒤돌아보자.
궁녀에서 후궁으로 후궁에서 왕비로 왕비에서 폐비 되어 사약까지 받게 되는 대빈 묘와 추존왕 덕종의 경릉, 즉위 1년 만에 세상을 떠난 예종의 창릉, 장성왕후의 홍릉, 인현왕후의 익릉, 숙종의 명릉 등 하나같이 만인의 축복을 받으며 서거하신 왕이나 왕후가 없었음을 말하고 있잖은가.
우리는 이 같은 비운의 역사 서오릉 숲길을 걸으며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조선왕조의 사색당파? 그 무엇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한 길이었나를 생각하게 되면서 오늘의 이 나라의 어지러운 세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이 나라를 오래전에 다스리시던 제왕들이시여 후손들이 어쩌다가 보니 나라는 두 동강이 나서, 북쪽은 백성이 먹고살기가 어렵다고 세계가 다 알게 소문이 났고, 남쪽은 그래도 잘살게 되었다고는 하나 위정자들이 나날이 싸움질이니 하늘에서 보시기에 어떠하신지요? 하긴 왕들께서 다스리실 때도 당파싸움이 요란했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그놈의 권력 싸움은 여전하구나 하시겠지요.
간곡히 말씀 올립니다. 그 파벌 싸움 이젠 그치고 진정한 애국자가 되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하여 이 나라를 잘 이끌도록 빌어 주소서.”라고…….
작가 소개
지은이 : 양희봉
전남 강진 출생강원대학 법과 졸업 1994년 시 등단(문학공간)한국문인협회 회원(시분과) 해남경찰서장 도로교통안전공단 서울지부장 한국경찰문학회 회장 역임 은평문학 대상 수상21세기문학상 수상세계계관시인협회 평화상 등 수상 세종문학상 수상(시 부문)시문집: 『억새풀』 시집: 『나는 이렇게 보았다』 『레미제라블』 『회상의 나날들』 『내 마음 꽃으로 말합니다』 『편안한 나루터에 닻을 내리고 갈대숲의 노래를 듣고 싶다』수필집: 『내일은 또 어디서 무슨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