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2025년,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의 군사 충돌이 격화되어 세계는 다시 ‘문명 충돌’의 징후에 잠식되었다. 뉴스와 담론은 다시금 이슬람을 ‘외부자’, ‘위협’, ‘서구 문명과 대립하는 타자’로 호출한다. 그러나 이런 시선은 이슬람 문명이 유럽 역사에 함께 뿌리내리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된 사실을 가려버린다. 『기억의 장소 : 유럽 속 이슬람 문화』는 바로 이 낡은 프레임에 도전하는 책이다. 지워진 흔적을 복원하고, 공존의 지형을 다시 그리는 시도로서 이 저작에 참여한 21인의 연구자들은 유럽의 도시와 문화 속에 살아 숨 쉬는 ‘이슬람의 기억’을 면밀하게 추적한다.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 유럽 정체성과 문화 형성에 깊숙이 스며든 이슬람 유산의 자취를 되짚어본다. 특히 이 책은 문화적 경계의 역사, 유럽 문명의 ‘순수 신화’를 해체하는 공간 기록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파리 아랍 세계 연구소, 플라멩코의 뿌리, 독일어와 스페인어 속 아랍어 차용어, 아베로에스와 이븐루시드의 철학까지… 도시의 건축과 언어, 문화와 예술, 몸짓과 음식 속에 각인된 이슬람 유산의 흔적을 추적하며, ‘유럽’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다문화적 접촉의 결과였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지중해의 건너편에서 온 문명이 어떻게 유럽의 일부가 되었을까?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학술적, 문화정치적 탐색이자 이주와 혼종, 갈등과 공존의 서사를 담은 인문지리적 여정이다.
출판사 리뷰
“유럽은 단일 문명인가?” 불안정한 시대, 낡은 경계의 틀을 넘어서는 역사적 사유를 만나다
2025년,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의 군사 충돌이 격화되어 세계는 다시 ‘문명 충돌’의 징후에 잠식되었다. 뉴스와 담론은 다시금 이슬람을 ‘외부자’, ‘위협’, ‘서구 문명과 대립하는 타자’로 호출한다. 그러나 이런 시선은 이슬람 문명이 유럽 역사에 함께 뿌리내리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된 사실을 가려버린다. 『기억의 장소: 유럽 속 이슬람 문화』는 바로 이 낡은 프레임에 도전하는 책이다. 지워진 흔적을 복원하고, 공존의 지형을 다시 그리는 시도로서 이 저작에 참여한 21인의 연구자들은 유럽의 도시와 문화 속에 살아 숨 쉬는 ‘이슬람의 기억’을 면밀하게 추적한다.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 유럽 정체성과 문화 형성에 깊숙이 스며든 이슬람 유산의 자취를 되짚어본다. 특히 이 책은 문화적 경계의 역사, 유럽 문명의 ‘순수 신화’를 해체하는 공간 기록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파리 아랍 세계 연구소, 플라멩코의 뿌리, 독일어와 스페인어 속 아랍어 차용어, 아베로에스와 이븐루시드의 철학까지… 도시의 건축과 언어, 문화와 예술, 몸짓과 음식 속에 각인된 이슬람 유산의 흔적을 추적하며, ‘유럽’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다문화적 접촉의 결과였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지중해의 건너편에서 온 문명이 어떻게 유럽의 일부가 되었을까?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학술적, 문화정치적 탐색이자 이주와 혼종, 갈등과 공존의 서사를 담은 인문지리적 여정이다.
유럽 다시 그리기-이슬람과 공존의 지층을 따라서
현대 유럽은 다문화 사회를 표방하면서도 이슬람은 유독 배제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 공공장소의 히잡 착용 금지, 무슬림 이민자에 대한 감시와 격리 정책 등은 유럽 내 이슬람 공동체에 실질적인 제약을 가한다. 이 책은 묻는다. 과연 이슬람은 유럽의 ‘밖’에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 이슬람은 유럽 역사 안에, 다양하게 표출된 문화의 결 안에, 기억의 흔적 속에 늘 함께 존재해왔다. 따라서 이 책은 “누가 유럽의 내부이고, 누가 외부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유럽 중심의 민족-종교-문명의 신화를 걷어내고, 유럽을 복수의 기억이 공존하는 장소로 복원하려 한다. 21인의 국내외 연구자들이 참여한 『기억의 장소: 유럽 속 이슬람 문화』는 “파트1-종교의 기억”, “파트2-문화의 기억”, “파트3-사상·언어의 기억”, “파트4-일상의 기억”이라는 구조 아래, 구체적이고 입체적인 사례들을 펼쳐낸다. 예를 들어 ‘종교’ 장에서는 무슬림 공동체가 유럽 안에서 신앙의 공간을 어떻게 구성했는지를 살피고, ‘문화’ 장에서는 십자군 전쟁 이후에도 이슬람이 유럽 예술과 도시 구조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탐색한다. ‘사상/언어’ 장은 유럽 언어와 철학의 전통이 이슬람의 영향을 어떻게 흡수해왔는지를 조명하며, ‘일상’ 장은 지금도 유럽인의 삶에 녹아 살아 숨 쉬는 ‘이슬람적 생활문화’를 섬세하게 다룬다.
왜 지금, ‘유럽 속 이슬람’을 이야기하는가?
이슬람은 이제 유럽과 세계에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존재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에게 이슬람은 여전히 ‘유럽 밖의 이방 문명’, 혹은 ‘최근에 유입된 위협’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이 인식은 역사적으로 옳지 않다. 『기억의 장소: 유럽 속 이슬람 문화』는 이슬람이 단지 ‘이민자 문화’나 ‘경계 밖의 타자’가 아니라,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이라는 공간의 일부분이었고, 그 정체성을 함께 구성해온 존재였음을 입증한다. ‘왜 지금 이야기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구체적인 답을 제시한다.
첫째, 정치적 이유로 ‘유럽 가치’라는 이름 아래 이슬람을 배제하는 현실에 주목한다. 즉 유럽 각국에 이슬람 공동체를 공공영역에서 점점 밀어내는 정책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을 보여준다. 히잡 금지법, 무슬림 신자에 대한 감시 정책, 이슬람 학교 폐쇄 등은 명목상 ‘세속주의’ 혹은 ‘유럽적 가치 수호’를 내세운다. 하지만 이는 유럽이라는 공간에서 ‘누가 안에 있고, 누가 밖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편협한 상상력에 기초한 것이다. 이 책은 역사적으로 이슬람이 이미 유럽 안에 있었고, 구성원이었음을 보여주며 이러한 상상에 균열을 낸다.
둘째, 문화적 이유로 유럽의 ‘단일문명 신화’를 해체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기독교와 백인 중심 질서를 축으로 구성된 유럽의 정체성은 사실상 허구에 가깝다. 유럽 건축, 음악, 언어, 철학 등은 이슬람 문명과의 교류 속에서 형성된 복합적 산물이다. 아베로에스와 이븐루시드의 철학은 중세 유럽 사상사의 기초였고, 알안달루스의 학문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기반이 되었으며, 아라비아식 도시 설계는 유럽 남부 도시들의 물리적 구조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은 유럽의 자화상을 다시 그릴 때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잊힌 계보’를 복원한다.
셋째, 사회적 이유로 다문화 공존의 현실과 그 뿌리에 대한 이해를 요청한다. 유럽은 이미 다문화 사회이며, 무슬림 공동체는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등 거의 모든 국가에서 주요 시민집단이다. 그러나 이들과의 공존은 현실의 조건일 뿐만 아니라, 과거로부터 이어진 관계의 결과이기도 하다. ‘공존’은 단지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그 역사적 전제를 이해하고 재구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 책은 현재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논쟁을 ‘현재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즉 이 책은 단지 “이슬람도 유럽의 일부다”라는 선언에 그치지 않고, 왜 그런 역사적 인식이 필요한지, 그것이 오늘날의 유럽과 세계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절박한지를 구체적 사례와 논거를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독서 포인트 및 추천 독자층
이 책은 교양과 학술, 현실 감각과 역사적 깊이를 동시에 갖춘 텍스트다. “유럽 속 이슬람”이라는 국내 초유의 관점을 다룬 최초의 집단연구 성과물이며, 장소 중심, 사례 중심 서술로 시각성과 몰입감이 탁월하고, 난민과 이민, 탈식민, 다문화 공존 등 동시대의 문제를 역사적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전시 및 북토크, 지역연계(유럽 도시사), 독서모임 주제로 이 책의 쓰임새는 무한 확장이 가능하다. 따라서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종교, 정체성, 공존 문제를 고민하는 독자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특히 세계사, 문화사, 종교사에 관심 있는 독자는 유럽 중심주의의 허상을 넘어서는 확장된 관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건축·예술·음식·음악 등 문화예술 분야를 공부하거나 가르치는 이들에겐 매우 실용적인 텍스트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학생·교사·교육 활동가에겐 교양수업, 다문화교육, 세계시민교육을 위한 1차 자료로도 쓰일 수 있을 것이다.
필진 소개
김지영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부교수
김희원 영국 아스톤 대학교 정치학과 조교수
박 단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유로메나연구소 소장
염운옥 경희대학교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박현도 서강대학교 유로메나연구소 대우교수
민원정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객원 연구원
양정아 서강대학교 유로메나연구소 선임연구원
이수정 서강대학교 유로메나연구소 학술연구교수
남종국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윤덕희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조교수
임동현 전북대학교 역사교육과 조교수
김유정 경상국립대학교 사학과 강사
홍용진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부교수
최성철 홍익대학교 교양과 부교수
이진현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김형민 서강대학교 유럽문화학과 교수
이강국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통번역학과 교수
김재희 서강대학교 유로메나 연구소 책임연구원
최선아 동덕여자대학교 유라시아투르크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이하얀 한국외국어대학교 EU연구소 연구교수
윤용선 한성대학교 크리에이티브인문학부 교수
대표적 프랑스 빵으로 알려진 크루아상(croissant)은 프랑스어로 초승달을 뜻한다. 생긴 모양이 초승달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이 빵의 유래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오스만 튀르크군이 1683년 빈(Wien), 또는 1686년 부다페스트를 공격할 때 성으로 들어가고자 성벽 아래로 밤새 터널을 파고 있었다. 이를 성안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던 어느 제빵사가 발견하고 아군에 알려 튀르크 군을 물리쳤다. 그 제빵사는 결정적 제보를 한 공로로 무슬림의 상징인 초승달 모양의 빵을 만드는 독점 권리를 받음으로써 크루아상이 세상에 처음 선보였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이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가 732년 프랑크 왕국의 샤를 마르텔이 오늘날 프랑스 지역인 프와티에에서 무슬림 군을 무찌른 것을 기념해서 만들어 먹었다는 것이다. 1529년 오스만 튀르크의 제1차 빈 포위 때나, 1536년 프랑스와 1세(au Grand Nez)와 오스만 튀르크 술탄 술레이만 대제가 동맹을 맺은 것을 기념해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슬람의 상징인 초승달 모양으로 빵을 질겅질겅 씹어 먹으며 전투욕을 불태웠거나, 승리 후 기념으로 초승달 모양 빵을 먹었다는 이야기로, 진위는 모두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음식 역사가들은 오스트리아의 키페를(Kipferl)을 크루아상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초승달 모양의 이 빵은 175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1770년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결혼하여 베르사유로 이사한 마리 앙투아네트가 즐겨 먹었다고 한다. 고국의 음식을 그리워해 궁정 제빵사에게 만들어달라고 하여 크루아상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인하기는 어렵다.
확실한 것은 1853년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프랑스 문헌에 크루아상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1839년에 오스트리아 사람 창(August Zang)과 슈바르처(Ernest Schwarzer)가 파리에 제과점 ‘빈(Boulangerie viennoise)’을 열어 키페를 판매했는데 그것이 크루아상의 기원이 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크루아상의 제조법은 1906년에야 나온다. 즉, 1906년 이전에는 우리가 지금 먹는 크루아상이 없었다. 정말 무슬림 군대 무찌른 것과 크루아상이 관련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1906년 이전에는 우리가 지금 먹는 크루아상이 없었다는 것이 아닐까._<초승달과 별로 읽는 유로메나> 중에서
앞서 살펴보았듯이, 17세기와 18세기 리보르노를 방문한 여행자들은 공통적으로 동상의 상단, 즉 성 스테파노 기사단의 단장이자 작은 요새 도시를 지중해 최대 무역항으로 변모시킨 인물인 페르디난도 1세에게 주목했다. 그러나 1799년 리보르노를 점령한 나폴레옹의 군대의 시선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페르디난도 1세가 아닌, 하단에 조각된 무어인 노예들의 비참한 모습에 주목했다. 당시 리보르노 항구 한복판에서 이 동상을 목격한 프랑스군 지휘관 미올리스(Sextius Alexandre Francois Miollis, 1759~1828) 장군은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그의 눈에 페르디난도 1세는 자유를 건설한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억압하는 압제자로 비쳤다. 반면, 동상 하단의 네 명의 무어인 노예는 압제자에 맞서 저항하는 자유의 상징처럼 보였다. 아래는 당시 미올리스 장군이 리보르노 시의회에 보낸 서신의 내용이다.
리보르노에 존재하는 유일한 기념물은 인류를 모독하는 폭정의 상징입니다. 기단에 구속된 네 명의 불행한 자들은, 그들을 짓밟고 서 있는 페르디난도보다 백 배는 더 용감합니다. 지난 300년 동안, 누군가가 이 항구에 발을 딛는 그 순간부터 고통스러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이 조각을 마주하는 모든 이는 필연적으로 고통, 분노, 멸시, 증오를 느끼게 됩니다. 이제 인류에게 가해진 모욕을 되갚아줍시다. 시민 여러분, 이 괴물 같은 동상 대신 자유의 여신상을 세우라고 명하십시오. 한 손으로는 노예 네 명의 사슬을 끊고, 또 다른 손으로는 땅에 떨어진 페르디난도의 머리를 창으로 내리치는 모습으로.
당시 미올리스는 리보르노에서 본 페르디난도 1세의 동상을, 그보다 몇 년 앞서 제작된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기마상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파리 퐁네프에 세워진 이 기마상은 말을 탄 앙리 4세를 지탱하는 중앙 받침대와 그 아래에 사슬로 묶인 네 명의 노예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기념물은 프란체스코 1세의 딸이었던 마리 드 메디시스
(Marie de Medicis, 1575~1642)가 남편 앙리 4세를 위해 조각가 프랑수아-프레드리크 르모(Francois-Frederic Lemot, 1772~1827)에게 의뢰하여 17세기 초에 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1792년, 혁명으로 인해 분노한 군중은 말을 탄 앙리 4세의 상을 파괴했지만, 그 아래에 있던 노예상들은 남겨두었다. 앞서 인용한 서신의 내용은 예술사가 로젠(Mark
Rosen)이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미올리스가 1792년 “파리에서 벌어진 일을 리보르노에서 재현”하려 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네 명의 무어인 상>은 미올리스의 명령에 따라 한때 철거되었지만, 1799년 7월 오스트리아 군대가 프랑스군을 몰아내면서 다시 원래의 위치로 복원되었기 때문이다. 당대 사람들은 이 사건을 “무어인의 복수”라고 불렀다._<네 명의 무어인 상(像)_리보르노의 무슬림 노예들>중에서
유럽 지성사에서 이븐 할둔을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19세기 초 서구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역사서술의 학문화를 이미 14세기 중세 말에 제창했다는 점이다. 그는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연구하는 방법, 그리고 서술하는 방식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혁신적인 변화는, 역사를 단순한 ‘지
식’이나 ‘정보’로 여기는 시각을 넘어 ‘학문’, 그것도 ‘철학적이거나 사회과학적 학문’으로 확립할 필요성을 강조한 점이었다. […] 이븐 할둔은 기존 아랍 역사가들이 사건을 다루는 방식을 비판했다. 그는 단순한 문학적·수사학적 접근과 표현이나 피상적 서술에서 벗어나 역사 속 사건들의 이면과 본질을 탐구하고, 원리와 법칙을 발견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븐 할둔은 역사학이 독립적인 학문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을 최초로 인식한 인물이었다. 그가 쓴 책의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아랍어에서 ‘역사’는 보통 ‘아크바르(Akhbar)’와 ‘타리크(Tarikh)’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아크바르’는 ‘주목할 만한 사건들에 대한 정보’, 즉 ‘사건’ 자체를 의미하고, ‘타리크’는 기간 측정하기, 즉 ‘연대기’를 뜻한다. 하지만 이븐 할둔은 자신의 역사책 제목에 ‘이브라(Ibra)’의 복수형 ‘이바르(Ibar)’를 사용했다. ‘이브라’는 본래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나 ‘장애를 극복하는 것’을 뜻한다. 확장된 뜻으로는 ‘사건이나 행위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 나아가 그 속에서 ‘정신적 실체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키탑(Kitab)’이 더해져 『키탑 알-이바르Kitab al-ʻibar』라는 제목이 완성되었다. 이를 직역하면 ‘교훈의 책’이며, 넓은 의미로는 통찰, 성찰, 지혜와 인식, 이해와 충고, 조언 등을 담은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즉, 단순히 사건을 나열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인간의 사회와 문명, 한 민족의 정치와 경제 및 사회문화 제도, 왕조의 흥망성쇠와 그 작동 원리를 깊이 성찰하도록 촉구하는 책이다. 그 점에서 이븐 할둔이 집필한 역사서는 연대기가 아니라, 이미 투키디데스와 폴리비오스(Polybius)가 역사에 대해 정의했던 것처럼 ‘사례를 통한 철학서’라고 칭할 만하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하면, 이븐 할둔은 ‘서구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랑케의 진정한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랑케가 완성된 역사서술의 학문화 과정은 이미 이븐 할둔이 실천했거나 주장했던 것들이었다. 물론 19세기 서구 역사가들은 역사서술을 학문으로 정립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요소들을 추가했다. 첫째, ‘역사적-비판적 방법’을 정리하여 역사 연구의 객관성을 강화했다. 둘째, 역사연구와 역사서술을 분리하여 학문적 체계를 구축했고, 셋째 대학 내에 역사학을 분과학문으로 설치했다. 넷째, 대규모 사료를 수집하고 편찬하는 작업을 진행했으며, 마지막으로 역사연구를 체계적으로 활성화하여 학문적 기반을 확장했다는 점 등이다._<이븐 할둔_주목받아야 할 생소한 기억> 중에서
작가 소개
지은이 : 박단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0년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같은 학교에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사상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프랑스 파리1대학 ‘사회운동 및 생디칼리슴 역사연구소’에서 프랑스 노동운동사를 연구했으며, 1995년에 〈프랑스 노동총연맹(C. G. T.)의 통합활동(1929.10~1936.3)〉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귀국한 뒤에는 북아프리카 출신 이민자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이후 프랑스 내 무슬림 이민자들의 고향인 북아프리카, 중동 등에 관심을 가지면서 연구 방향이 자연스레 유럽과 메나 MENA(Middle East & North Africa) 연구로 옮겨갔다.현재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유로메나연구소 소장, 한국서양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이주사학회와 한국프랑스사학회, 통합유럽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저서로 《프랑스공화국과 이방인들》, 《이만큼 가까운 프랑스》, 《현대 서양사회와 이주민》(편), 《역사 속의 유로메나》(편) 등이 있다.
지은이 : 이수정
서강대학교 유로메나연구소 책임연구원.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에서 중동아프리카학 박사를 취득하고, 이슬람 세계의 문화 예술, 이주 무슬림을 주로 연구한다. 주요 저서로는 《타인을 기록하는 마음》이 있다.
목차
머리말 4
part 1 종교의 기억
김지영 | 헝가리의 이슬람 기억의 장소_페치(Pes)의 여코발리 허싼(Jakovai Hassza), 가지 카심(Gazi
Kasim) 모스크를 중심으로
김희원 | 영국의 샤 자한(Shah Jahan) 모스크_영국에 새겨진 이슬람 문화의 기억
박 단 | 파리 대모스크_무슬림 병사 ‘추모 공간’에서 프랑스 국민 모두의 ‘화합 공간’으로
염운옥 | 히잡_불편한 기억의 터
박현도 | 초승달과 별로 읽는 유로메나
part 2 문화의 기억
민원정 | 엘 시드의 노래_기독교와 이슬람의 조우 속 저항의 기억
양정아 | 로제루 2세의 대관복_9세기 이후 시칠리아에 남은 아랍-이슬람 문화
이수정 | 알람브라 궁전이 전하는 과거와 현재의 기억
남종국 |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 예술_이슬람 세계를 보여주는 거울
윤덕희 | 세이버(sabre), 악마의 무기에서 근대화의 상징까지_유럽에 남긴 오스만의 군사적 유산
임동현 | 〈네 명의 무어인 상(像)〉_리보르노의 무슬림 노예들
김유정 | 파리 아랍 세계 연구소_프랑스와 아랍 세계를 연결하는 ‘문화의‘문화의 집’
part 3 사상·언어의 기억
홍용진 | 아베로에스와 중세 서유럽의 지적 대변동
최성철 | 이븐 할둔_주목받아야 할 생소한 기억
이진현 | 코페르니쿠스의 『회전』에 나타난 이슬람 천문학의 흔적
김형민 | 독일어 속 아랍어 차용어_‘문화 간 협력’의 결과물
이강국 | 스페인어 속의 아랍어
part 4 일상의 기억
김재희 | 플라멩코_아랍 부모에게서 태어난 스페인 춤
최선아 | 홀바인 카펫_유럽인의 일상 공간에 색을 더하다
이하얀 | 포막족의 결혼식_불가리아 내 이슬람 문화의 증언
윤용선 | 되너 케밥_‘기억의 장소’에서 독일의 국민 거리 음식으로
주 / 그림일람 /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