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19세기 끝자락에 태어나, 전례 없는 폭력과 유토피아적 희망이 공존하던 시대를 통과하며 철학적 사유와 예술적 실험을 전개해나갔던 발터 벤야민(1892~1940)과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1898~1948). 두 사람의 사유와 창작을 대질시켜 읽는 『비교의 산파술』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에이젠슈테인과 벤야민은, 이미 잘 알려진 공통의 탐구 대상인 ‘영화’를 필두로 다수의 문제의식과 방법론을 공유했고, 연결고리가 될 만한 공통의 지인들도 존재했지만, 두 사람이 생전에 만난 적이 있다거나 서로의 작업을 참조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책은 두 사람을 사로잡았던 다양한 문제의식을 집약하는 세 가지 상징인 ‘유리 집’ ‘미키마우스(디즈니)’ ‘찰리 채플린’을 중심으로, 이들의 궤적이 흥미롭게 교차하고 갈라지는 양상을 파헤쳐나간다.이와 관련해 언급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벤야민과 에이젠슈테인이 매우 특징적인 사유 방식 하나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다보는 대신에 돌아보는 방식의 역사 구성,” 다시 말해 현재에 입각해 미래를 전망하는 대신에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지향이 그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관습적으로 기술된 역사 속에서 매몰되고 왜곡된 ‘태고’를 발굴함으로써 대항적 역사의 출현을 가능하게 만드는 일은 벤야민의 “변증법적 이미지”의 핵심을 이룬다. 그는 진짜 과제는 미래가 아닌 과거에 있다고, 이제 “미래를 등지고서 과거를 향하라”고 주문했다. 그런가 하면, 영화의 문제를 예술 창조의 근본 법칙이나 인간 사유의 본래적 구조(“원시적 정신”)로 확장시켜 탐구하려 했던 에이젠슈테인에게도 과거는 역사철학적 함의를 갖는 중대한 과제였다.
이 글에서 그는 놀랍게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의 경험 전체가 빈곤해진 동시대의 상황을 절망스런 비극의 사태가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긍정적 조건, 이를테면 “일종의 새로운 야만성”으로 규정한다. 바로 이런 ‘영점의 조건’ 하에서 전승되어온 기존의 “휴머니즘적 인간상”을 단호히 거부하며 철저한 새로움을 대의로 택한 사람들, 벤야민의 인상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인정사정 보지 않고 “일단 판을 엎어버리는 일부터 시작하는 건설자”들이 등장하는데, 셰어바르트도 그중 한 명이다. 벤야민의 설명에 따르면, 셰어바르트적 사람들은 “인간성을 없앤(entmenscht) 인간성,” 곧 비(非)인간의 대변자이다. “왜냐하면 인간과의 유사성, 이 휴머니즘적 원칙을 그 사람들은 거부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모르는 무모함, 저 파괴적 자유의 세계를 지탱하는 낙관주의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분명 그것을 파악하는 일은 「미키마우스에 대해」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핵심 구절을 이해하는 과제와 직결되어 있을 것이다. “이 영화들에서 인류는 문명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길을 준비한다.” 하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고찰하기에 앞서 먼저 살펴볼 것이 있다. 디즈니라는 꿈의 형식, 저 특별한 동화적 세계가 벤야민의 동시대인 에이젠슈테인에게서도 대단히 유사한 방식으로 개념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수환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문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혁명의 넝마주이』 『책에 따라 살기』 『사유하는 구조』 등이, 옮긴 책으로 『오프모던의 건축』 『<자본>에 대한 노트』(공역)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코뮤니스트 후기』 『영화와 의미의 탐구』(공역) 『문화와 폭발』 『기호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