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김순옥의 시들은 자아를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고, 다양한 타자성으로 분열되고 재배치되는 형상으로 제시한다. 해체된 자아는 새로운 장소, 타인의 시선, 꿈, 환상 속에서 끊임없이 전이되고 다시 구성된다. 시인은 이러한 전이의 장치로 몽환, 꿈, 유년의 기억, 영화적 상상력 등을 활용한다. 해체된 자아가 사회적 규범 밖에서 재구성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재구성된 자아는 사회적 성공이나 이상에 도달한 자아가 아니라, 몰락의 자리에 존재할 수 있는 능력, 즉 새로운 생존의 형태로서의 자아일 것이다.
김순옥의 시에는 ‘역할놀이’가 빈번히 등장하여 자아란 본래의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연기자에 가깝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러한 역할놀이는 시집 전체의 미학적 전략이기도 하다. 자아는 고정된 ‘나’가 아니라 늘 타자의 역할을 대행하고, 또 다른 존재의 감각을 스며드는 매개체라는 것이다.
출판사 리뷰
[해설 엿보기]
김순옥의 시집 『누가 나를 심었나』는 이렇게 타자의 욕망 속에서 해체되어 가는 자신에 대한 응시이다. 그의 시들은 자아의 경계가 해체되고 그 파편 속에서 낯선 정체성이 움트는 과정을 실험적인 언어와 감각적 이미지로 드러낸다. 이 시집의 시들은 전통적인 서정에서 벗어나, 파편화된 육체와 분열된 정체성, 타자화된 자아, 존재의 불안정성을 다루고 있다. 주체는 더 이상 고정된 주체로서의 ‘나’가 아니라 정체성이 지연되고 환유로만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존재 그래서 끝없이 다른 역할을 해야 하는 불안한 존재로 등장한다. 그리고 시인은 이 불안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새로운 가능태를 탐색한다. 김순옥 시인에게 자아의 해체는 곧 새로움의 가능성이다.
보시다시피
모래밭에 누워 있습니다
아니 유리창입니다
하늘을 보면 구름이 짖는 소리
깨진 물동이를 머리에 인
개구리들이 뛰쳐나와
짖지 말고 울어라
짖지 말고 울어라
개구리 다리를 잡아당기면 불쑥,
튀어나오는 여름
저음의 나와 고음의 너 사이로
후둑 후두둑, 쏟아지는 비
떠다니는 거리의 발뒤꿈치에서 터지는 소리
막 솟아오르는 호박잎을 타고
막대를 든 엄마가
내 몸을 빌려 푸른 복숭아를 베어 뭅니다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여름 한 무더기
일제히 깨어지고 순간 사라져 버린 후
바람에 끌려간 창문은 보시다시피
빗방울을 몇 개나 삼켰는지 몰라 창백합니다
― 「개구리는 물방울 몇 개 모자로 쓰고」 전문
이 시는 자아의 해체라는 주제를 매우 감각적인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자아란 더 이상 일관된 중심이 아니며, 감각, 기억, 타자와의 경계,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조각나고 흩어지는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보시다시피/모래밭에 누워 있습니다/아니 유리창입니다”라는 첫 연의 시행들부터 화자의 정체성은 불확실하다. “모래밭”에서 “유리창”으로 전이되는 이 변화는 육체적 정체성조차 고정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이는 자아가 더 이상 고정된 ‘나’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외부 환경이나 시선에 따라 변화하고 해체될 수 있는 상태임을 보여준다.
― 황정산(시인·문학평론가)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순옥
201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목차
1부
산수국·13
호우주의보·14
명랑의 세계·16
죽음의 체적·18
카스텔라·20
화양연화·22
정오·24
뼈를 더듬다·25
오늘은 낮달·26
수몽·28
여우창문·30
누가 화분에 나를 심었나·32
반지 분실·34
외박·36
오래된 관계·38
잠에 눈이 쌓였다·39
2부
덧칠·43
눈사람이 서 있다·44
사루비아·46
무료한 사람들·48
밤의 트라우마·50
질감·52
파도가 다는 아닌 가파도·54
일기예보·56
윤달·58
개구리는 물방울 몇 개 모자로 쓰고·60
어딘가를 조금 잘라냈습니다·62
아다지에토·64
꽃은 내 귓바퀴를 돌아와·66
여긴 정거장이 아닙니다·68
죽는 꿈을 꾸면 오래 산다 해서 좋았다·70
당신을 해치고 싶은 배역을 꿈꾸지·71
3부
죽음에선 흰꽃나도샤프란 향기가 난다·75
리어왕 증후군·76
환승한 버스에서 허브 냄새가 났다·78
탱고 한 곡 출까요?·80
긴 겨울밤의 화투점처럼·82
안녕, 마리아·84
길고양이 출몰 구역·87
어제가 있었다·88
꽃게·90
길은 어디로도 가고 아무 데도 못 간다·92
아무의 여름날·94
몸에 두 개의 달이 뜬다·96
내일도·98
역할 대행·100
콜드건·102
스콘을 굽다·104
다른 행방·105
해설 | 황정산(시인·문학평론가)
자아의 해체와 새로운 정체성의 탐색·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