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전숙 시집. 재난을 지식이 아닌 감각으로 듣는 법을 탐색한다. 바다의 울음, 반사하지 못한 빛, 말을 잃은 혀를 통해 응답 불능의 세계를 포착한다.
「바다가 우는 방식」 「독설과 하이드」 「산호의 푸른 변방」은 청각·언어·빛의 고장을 장면으로 기록한다. 애도는 선언이 아니라 호흡의 리듬이 되고, 듣기는 사실 확인이 아니라 생명의 신호를 복구하는 습관이 된다. 이어 「숨비소리」 「울음의 공터」 「바다의 혀」 「우아한 샥스핀」 「크릴새우 하느님」은 미각의 윤리로 확장한다. 식탁과 바다 사이에서 멈춤과 부름, 먹임의 규칙을 세우며 감각의 회복을 생활의 질서로 제시한다.
출판사 리뷰
▣ 작품론
플라스틱 이후, 듣기의 시학
- 전숙 시집 『바다가 우는 방식』 해설
강나루 (시인, 문학평론가)
1.
전숙 시인의 『바다가 우는 방식』은 재난을 지식으로 해석하는 대신 원초로 향하는 감각으로 형상화한다. 시인은 냄새와 빛, 소리의 경로가 어긋나는 순간을 붙잡는다. 그래서 바다는 말 대신 울음으로 진동하고, 빛은 닿아도 반사하지 못하며, 혀는 맛과 말을 함께 잃는다. 그 틈에서 시는 ‘무엇이 부서졌는가’가 아니라 ‘어디에서 감각이 멈추었는가’를 듣는다.
시인은 언어가 부재하고, 빛이 반사하지 못하고, 혀가 맛과 말을 상실하는 모든 상황은 세계가 더 이상 인간에게 응답하지 않겠다는 징후로 읽는다. 그래서 더 이상 세계를 향해 요구하거나 소리치는 대신, 감각을 붙잡고 더 잘 듣고자 시도한다. 한때 청결의 상징이던 물질이 독성을 내뱉고, 반짝이던 산호가 빛을 잃을 때, 시인은 어째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지 설명하는 대신 체험을 통해 몸의 언어로 적어나간다. 시간 또한 감각의 언어로 치환된다. 호흡의 끝에서 터져나오는 울음, 애도의 일상은 시간의 흐름을 통해 반복적 리듬으로 승화된다. 또,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먹고 말하는 것조차 윤리의 영역에서 바라보고 있다. 샥스핀이 올라간 식탁에서 미각은 자연을 향한 폭력으로 전환되어서, 혀가 일개 미각기관이 아니라 살아있는 감각이 된다. 살아있는 감각으로서의 혀는 눈물을 말리고, 상처를 핥고, 먹임으로써 세계에게 다시금 숨을 불어넣는다.
『바다가 우는 방식』은 감각을 되살리려는 시집이다. 숨을 고르고, 울음을 삼키고, 음식을 나누는 일은 삶의 기본이다. 그런 행위들이 제자리를 찾을 때 감각은 조금씩 회복된다. 플라스틱 이후의 세계에서 시인은 묻는다. 우리가 아직 들을 수 있다면, 어디에서부터 들어야 할까?
2.
전숙 시인은 몸과 감각의 고장으로 사태를 보여준다. 말하기와 듣기, 반응과 반사가 차례로 멈추는 장면이 이어진다. 독자는 비극을 정보로 알지 않고 감각의 붕괴로 확인하게 된다.
세수하다 거울을 보니 얼굴 자리에 엉덩이가 붙어있어요
엉덩이에서 하루치의 반성이 쏟아져요
몇 년 전부터 해결하지 못한 플라스틱 숙변도 섞여있어요
비명도 못 지르고 플라스틱에 질식한 바다
몸부림치던 비명이 엉덩이로 다시 태어났어요
얼굴이 뭉그러진 바다
머리를 산발하고 몸을 기울인 채 앓고 있어요
올 풀린 스웨터처럼 잔영만 남은 포말
한때 철썩이며 사랑하고 번성했던 저 육체는
이제 거꾸로 뒤집힌 반어법
바람이 일 없이 발길질을 해대도 비명도 못 지르는 검은 침묵
언로가 막힌 통증은 역주행을 택했어요
엉덩이로 비명을 지르기로 한 거죠
전속력으로 역주행하는 거울 속의 자화상이 보여요
음식이 독일 때도
먹는 일이 길의 방식일까요
신경세포를 따라서 방사성으로 깨어나는 통각
꽃이 지는 일도 이토록 아플까요
내장을 밑바닥까지 뒤집어서 독극물을 토해내는 일은 먼저 제 속이 썩어문드러지는 일이었어요. 속 시끄러운 날 식구들 내보내고 마음 바닥까지 눈물로 닦아내듯이 마른 수숫대처럼 가슴이 타들어가던 바다는 온몸이 배설구가 되어 플라스틱을 토해냈어요. 한순간도 울음을 멈추지 않는 꽃처럼 아름다웠던 바다. 얼굴과 엉덩이가 뒤바뀌어도 진통제도 처방받지 못한 바다는 앓는 소리도 내지 못해요. 통증이 목구멍까지 차올라요.
향유고래의 배설물이 폐가처럼 울어요
한 생의 악취를 바다는 빨고 또 빨았지요
반어법의 얼굴처럼 똥에서 향기가 났어요
사람들은 그것을 용연향이라 불렀다지요.
- 「바다가 우는 방식」 전문
화자는 먼저 듣기의 조건이 무너진 세계를 상상한다. “얼굴 자리에 엉덩이”가 붙어있고 “엉덩이로 비명을 지”른다는 설정은 소리의 출구가 봉쇄된 상태를 극단적으로 가시화할 뿐만 아니라, 이 파열을 타자의 비극이 아니라 자기의 증상으로 끌어들인다. 또한 거울 속 자화상은 바다를 먼 풍경으로 밀어내지 않고, 우리 몸의 내부 사건으로 변환한다. 이러한 감각 체계를 뒤집는 혼란스러운 상상력은 윤리적 질문으로 이어지며, “똥에서 향기가 났어요”와 “용연향”의 연결을 통해 악취와 향기의 구분을 무너뜨리는 미화의 언어에 의해 감각은 둔감해진다. 시인은 바로 그 지점에서 수치와 책임의 감각을 깨우려 한다. 독자는 혼란과 역겨움, 그리고 뒤늦게 찾아오는 부끄러움을 자기 몸으로 감지함으로써 타자가 제시한 정보를 자기 것인 양 성급하게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대신, 감각을 회복하는 일이 윤리의 출발임을 자각한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시인의 사고는 한 방향으로 수렴한다. 바다를 증언자로 세우고, 인간의 언어가 막힐 때 다른 기관들이 어떻게 말하기를 이어받는지 탐지한다. 듣기는 사실 확인의 기술이 아니라 생명의 신호를 복구하는 습관이 된다. 시인은 상상력을 통해 목격과 책임을 한 자리에 놓는다. 조사를 늘리지 않고 장면을 남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독자가 장면을 오래 듣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이런 의도와 상상력이 이 시집 전체의 제목과 연결된다. 바다가 우는 방식은 울음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막힌 통로를 통해서라도 끝내 전해지는 신호의 질로 정의된다.
「독설과 하이드」에서도 이러한 시작(詩作) 방식을 확인할 수 있는데, 시인은 통증을 듣는 경험을 말의 기관으로 확장함으로써 깨끗함과 향기를 약속하던 물질이 어떻게 독의 저장고가 되는지, 그리고 혀와 말이 어떤 순간에 침묵과 폭력의 통로로 변하는지를 묻는다.
그는 집요한 사냥꾼처럼 장전을 하고 한쪽 눈의 감각으로 목표를 뚫었다. 한때 향기의 집이었던 미세플라스틱은 향기의 빈자리에 독설을 쌓기 시작했다. 걸레로도 닦아낼 수 없고 진공청소기로도 흡입해낼 수 없는 하이드의 독설에 바다는 점점 미쳐갔다. 산호도 함초도 해당화 꽃잎도 독설에 무릎을 꿇고 기어이 바다가 덜컥 멈추었다.
바람에 휩쓸려 만장처럼 펄럭이는 억새
억새의 바다를 떠올리며 파도는 우우 울었다
멀리서 보면 꽃잎 같았다
벌처럼 플라스틱 섬 속으로 날아든 새치떼
배를 하얗게 뒤집고 둥둥 북소리처럼 떠 있다
이어도사나로 흔들리는 하얀 상여꽃 같았다
플라스틱은 지킬 속의 하이드였을까
빗장을 두르듯 울음길이 막힌 바다는 화장터 같은 어둠이었다. 정어리 떼가 말없음표처럼 수면에 떠 올랐다. 썩은 멸치 떼는 하수구의 슬러시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바다는 수몰현장 같았다. 눈을 지운 심해어처럼 길이 막히자 모두들 더듬거렸다. 단두대처럼 막무가내의 살생이 집행되고 있었다.
유배지에서 섬이 된 플라스틱
그것들의 종착지는 슬프게도 바다였다
바다는 모든 종들의 고향이었다
그렇게 고향은 플라스틱으로 대체되었다
모든 종들은 플라스틱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플라스틱 무덤에 묻혔다
출생이 곧 무덤인 영생의 삶이 반복되었다
지킬 박사는 떠나버린 미래였다
플라스틱으로 재구성된 혀는 침묵했다.
- 「독설과 하이드」 전문
화자는 미세플라스틱을 “한때 향기의 집”으로 부르고, 그 자리에 “독설”이 쌓인다고 말한다. 독설은 독한 말이면서 동시에 독이 스며든 말이다. 깨끗함과 향기를 약속하던 “플라스틱”이 독의 저장고로 변하고, 향의 자리에는 말의 잔여가 남는다. 냄새의 경계가 무너질 때 언어의 경계도 흐려진다. 깨끗함의 언어가 폭력의 흔적을 덮는 순간을 독자는 감각으로 느낀다. 향과 독의 반전을 통해, 미화의 언어와 소비의 언어가 현실의 상처를 가려 온 방식을 드러낸다.
바다는 장례의 무대가 되어서, 억새는 만장처럼 흔들리고, 뒤집힌 새치 떼는 상여꽃이 된다. 정어리와 멸치의 침묵은 “말없음표”로 고정되고, 생명의 장이던 바다는 화장터처럼 식어간다. 시인은 플라스틱을 유배지에서 섬으로 옮겨 놓으며, 파괴의 종착지를 풍경으로 만든다. “출생이 곧 무덤인 영생의 삶”은 영생이 영생이 아니라는 역설을 드러냄으로써 지킬은 사라지고, 하이드만이 남긴다. 이 세계에서 말은 더 이상 윤리의 도구가 아니다. “플라스틱으로 재구성된 혀는 침묵”함으로써 언어는 스스로의 통로를 잃는다. 시는 그 침묵의 감각을 듣는다.
그런가하면 「산호의 푸른 변방」에서 시인은 말과 혀의 오염을 지나 시선을 빛으로 옮긴다. 들어오는 빛이 왜 돌아오지 않는지, 반짝임의 실패가 공동의 삶에서 무엇을 무너뜨리는지 묻는다.
푸른 것들은 변방에서 출렁거렸다
중심을 떠나 변방에 도착하면 바람결에도 소금기가 서걱거렸다
짠물에 젖은 바다에도 봄은 왔다
오슬오슬 떨던 해류들이 물의 온도를 바꾸고
산호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산호의 알이 꽃잎처럼 하롱거렸다
산호 왕관을 쓴 바다
자세히 보니 코로나19에게 봄을 뺏긴 중심처럼
산호의 빛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푸른 변방이 아무리 출렁대도 어느 해안에도 빛이 도달하지 못했다
해가 입술을 문질러대도 산호는 반짝이지 않았다
바다는 봄의 빛깔을 잃었다
아무데서나 주검이 목도되었다
어떤 것들도 빛을 받아도 돌려주지 못했다
해의 살이 상처를 문지르다가 문드러졌다
햇살이 흔들어대도 윤슬은 한때 반짝였던 추억이었다
플라스틱이 산호를 감아 목을 죄고 있었다
학폭 같은 어둠이 주먹으로 해의 뼈를 박살내고
발길질로 빛을 짓뭉개고 있었다
푸른 바다는 푸른빛을 잃고 죽음이 일상이 되었다.
- 「산호의 푸른 변방」 전문
시인은 중심과 변방의 감각 지도를 다시 그린다. “푸른 것들은 변방에서 출렁거렸다”와 “푸른 변방이 아무리 출렁대도 어느 해안에도 빛이 도달하지 못했다”는 진술은 자연의 계절 변화가 더 이상 사회의 중심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봄은 오지만 제자리를 잃는다. 시인은 생태의 위기를 지식의 언어로 설명하지 않고, 응답의 실패로 체험하게 만든다. “해가 입술을 문질러대도 산호는 반짝이지 않”음으로써 빛을 주고받는 관계를 대화의 형태로 바꾼다. 해는 말을 걸지만 산호는 대답하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윤슬은 한때 반짝였던 추억”이라며 기능의 과거형을 현재의 무능과 나란히 놓음으로써 감각의 기억이 지금의 책임을 환기하도록 한다. 빛을 가로막는 힘은 질병이나 재난만이 아니다. “학폭 같은 어둠”은 생태적 폭력이 생활의 폭력과 닮아 있음을 드러낸다. “플라스틱이 산호를 감아 목을 죄고 있”다며 은유로 폭력의 원인을 흐리는 대신 적나라하고 구체적 행위로 고정한다. 전숙 시인은 반사하지 못하는 표면을 오래 바라보며, 응답하지 못하는 시간의 체류를 기록으로 남긴다. 그 기록은 빛을 더 밝히는 해법이 아니라, 반사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과제를 남긴다.
전숙 시인의 시는 감각의 고장으로 시작해, 언어의 부패를 통과하고, 빛의 응답 실패로까지 확장된다. 「바다가 우는 방식」에서 그는 몸의 통증을 통해 세계의 균열을 듣게 만들었고, 「독설과 하이드」에서는 말과 혀의 변질을 통해 언어가 스스로의 윤리를 잃는 순간을 포착했다. 「산호의 푸른 변방」에 이르러 시선은 빛으로 옮겨지며, 반사의 부재가 관계의 단절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세 장면은 각각 다른 기관을 매개로 하지만, 모두 ‘응답 불능의 세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한 줄로 이어진다. 몸은 울음을 내지 못하고, 말은 스스로를 오염시키며, 빛은 반사를 멈춘다. 시인은 이러한 차단의 순간들을 통해 감각의 복원을 모색한다. 그 복원은 치유나 회복의 언어가 아니라, 더 이상 응답하지 않는 세계에 끝까지 귀 기울이는 일이다. 따라서 이 시집에서 ‘듣기’는 소리를 인식하는 능력이 아니라, 끊어진 관계를 감각의 층위에서 다시 이어보려는 윤리적 행위로 읽힌다.
3.
앞서 다룬 시편들이 감각의 붕괴를 다양하게 드러냈다면, 무너진 감각에서 호흡과 돌봄의 동작으로의 전이를 살피는 시편 또한 다양하다. 바다와 어머니와 혀의 이미지를 연결해 돌봄의 규칙을 꺼내며, 책임의 언어를 장면 속에서 자라게 한다. 핵심은 회복을 선언하지 않는 태도다. 오래 숨을 고르고, 서로를 부르고, 필요할 때 멈추는 질서를 반복 훈련으로 만든다.
「숨비소리」에서 시인은 회복을 말로 선언하지 않는다. 그는 상실을 견디는 호흡의 규칙을 먼저 보여준다.
달빛이 여우 목도리 같았다
너븐숭이는 가슴이 빈 줄도 모르고 사라진 목숨들을 빈 가슴에 토닥였다. 어쩌자고 달은 벼랑 끝에 매달려 위태롭기만 한데 달빛이 너븐숭이의 주름진 등을 감쌌다. 주름 사이사이 고인 핏물을 달빛은 한사코 씻어내고 달빛에 씻긴 핏물은 옴팡밭으로 스며들었다. 사람사냥에서 살아남은 엄마는 둘째와 셋째를 너븐숭이에 묻었다. 핏덩이로 버려진 어린 울음들, 가슴에 파인 주름 틈새로 날개도 없이 떠도는데 엄마는 그날 이후 너븐숭이를 기억에서 지웠다.
잠녀가 된 엄마는 호흡의 바닥까지 바다를 떠나지 않았다
마침내 바다 밖으로 나온 엄마의 숨비소리는 강하고 멀었다
바람을 타고 이어도에 흘러갈 힘이 생길 때까지
엄마는 숨을 달빛처럼 휘감았다
가엾은 아가를 이어도로 떠나보낸 잠녀만의 능력이었다
이어도 파도처럼 천년은 내쉬어야 숨비소리는 끝이 날 것 같았다
쑥국쑥국 쑥국새 울음처럼 머리를 산발한 바다에 누워
산담도 없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엄마는
돌 서너 개 얹힌 애기 돌무덤에 함께 묻어달라고 했다
지워진 자식들의 환상통이 밤마다 피어났을까
엄마는 빈 가슴 토닥이듯이
죽음 같은 숨비소리를 한 생 동안 토해냈을 것이다
울음뿐인 새들이 엄마의 숨비소리를 물고 너븐숭이로 날아갔다.
- 「숨비소리-동백 열네 송이」 전문
시인은 애도를 사건이 아니라 호흡으로 다시 정의한다. “호흡의 바닥”까지 내려가 터져 나오는 숨비소리는 한 번의 울음이 아니라 지속의 리듬이다. “천년은 내쉬어야”라는 과장은 과잉 표현이 아니다. 상실이 소멸하지 않는 시간 규모를 독자에게 체감시키려는 의도이다. 달빛이 너븐숭이의 핏물을 씻어 옴팡밭으로 스며들게 하는 장면은 피를 폐기물로 처리하지 않는다. 피를 흙으로 돌려보내며 돌봄의 순환으로 편입한다. 시인은 사건명을 호출하지 않는다. 달빛과 흙과 바람과 물살이 애도의 리듬을 대신 말하도록 배치한다. 상상력의 초점은 표어가 아니라 생활의 동작에 있다. “잠녀가 된 엄마는” “바다를 떠나지 않”고 숨을 감아 이어도로 보낸다. 호흡이 사라진 생을 옮기는 일은 종교적 은총이 아니라 숙련의 노동이다.
시인은 공간의 지도를 새로 그린다. 너븐숭이는 단순한 매장지가 아니다. 기억을 지우고도 지워지지 않는 경계이며, 사적 상실이 공동의 호흡으로 변환되는 관문이다. “환상통”은 없는 것을 계속 느끼는 고통이다. 시인은 이 신경의 언어를 애도의 언어로 전환한다. 보이지 않는 통증을 들을 수 있게 만들기 위해 새와 바람을 불러온다. “울음뿐인 새들”이 숨비소리를 물고 날아가는 장면은 비유의 장식이 아니다. 울음이 장소를 바꾸어도 리듬을 잃지 않는다는 증언이다. 엄마가 “함께 묻어달라”고 청하는 대목은 상실의 분리와 결별을 거부하고 연대의 거처를 선택하는 선언이다.
다음의 「울음의 공터」에서 시인은 개인의 호흡을 공동의 애도로 확장한다. 화면 앞의 관객을 공터의 증인으로 돌려세우며 애도의 장소를 만든다.
맹골수도는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울음이 범람하고 있었다
금방 스친 울음을 떨쳐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 바다에서는 바람도 옷고름이 젖었다
춘향이와 몽룡의 도홧빛 볼우물까지 울음이 차올랐다
울음은 까치발을 들고 목을 빼고 마지막 호흡까지 숨을 들어올렸다
울음이 물속에 잠겼다. T.V 화면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얼마나 더 힘을 주어야 침몰하는 울음들을 들어 올릴 수 있는 걸까
철문을 깨부술 응원을 쇠망치처럼 쳐들고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망치는커녕 뱃전을 때리는 바람 한 점 일지 않았다. 속수무책의 바다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발버둥 치던 살구꽃, 복숭아꽃, 벚꽃이 꽃잎을 떨구었다. 눈물을 쏟은 만큼 내장을 비운 맹골수도는 스스로 떠올라 날개가 돋아나도록 속도를 올렸다.
바다안개는 눈물방울의 개수만큼 계단을 쌓았다
가라앉다가 솟구치다가 다시 가라앉는 꽃잎들
모두의 가슴에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부둥켜안고 허우적대는 절망들
칼날 같은 파도에 희망이 베어지기 시작했다
베인 상처마다 시퍼런 주름들이 생겨났다
꽃가지를 던지자 뱅글뱅글
떠올랐다가 잠겼다가 서로를 맴돌았다
눈물이 눈물을 삼키자
울먹이던 괭이갈매기 한 마리
울음의 공터를 물고 허공으로 사라졌다.
- 「울음의 공터」 전문
사건명은 비워 두고, 화면 앞의 관객을 공터의 증인으로 불러내는 것이 이 시의 첫 의도다. “울음이 물속에 잠겼다”는 말은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 무게와 점성을 상상하게 만든다. 들고 선 망치는 아무것도 깨뜨리지 못하고, 바닷물만 가슴으로 밀려온다. 연민의 언어로 무력감을 봉합하지 않기 위해 시인은 물의 운동으로 감정의 압력을 번역한다. “춘향이와 몽룡”이 스며드는 순간 애도는 한 사건의 경계를 벗어나 일상의 기억으로 번진다. 공터는 그래서 비어 있는 땅이 아니라, 각자의 호흡이 모여 리듬을 만드는 자리로 설정된다.
애도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관점이 끝까지 유지된다. “가라앉다가 솟구치다가 다시 가라앉는” 반복은 실패와 희망이 교대로 찾아오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훈련이고, “꽃가지를 던지자”는 행위는 상징의 과장이 아니라 책임의 시작이다. 떠오르고 잠기며 서로를 맴도는 꽃처럼, 감정은 전달되고 되돌아오며 순환을 만든다. “눈물이 눈물을 삼키자”는 문장은 과잉의 눈물이 아니라 서로의 눈물이 서로를 지탱하는 윤리의 회로를 말한다. 마지막에 괭이갈매기가 공터를 물고 사라질 때, 시는 끝을 약속하지 않는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애도의 지속만 남긴다. “내장을 비운 맹골수도”와 “시퍼런 주름” 같은 이미지들은 통증을 관념으로 밀어 올리지 않고 몸의 감각으로 남기며, 물결과 꽃가지와 새라는 최소한의 사물로 공동의 시간을 다시 세운다.
「울음의 공터」가 애도의 리듬이 공터에서 몸에 배었다면, 이제 그 리듬이 먹임과 부름의 언어로 옮아서 눈물과 상처, 배고픔을 같은 기관이 돌보는 자리를 보여준다.
신은 바다에게 어미라고 불리는 혀를 주었다
혀는 그 따뜻함으로 세상의 눈물을 말려줄 줄 알았다
그 끈기로 가출한 남편의 귀가도 기다릴 줄 알았다
그 부드러움을 동그랗게 말아 세상의 상처를 안아줄 줄 알았다
그 든든함으로 세상을 먹일 줄 알았다
그 탄력으로 세상을 소통시킬 줄 알았다
오류의 길에서는 마땅히 혀를 깨물어 길을 끊어낼 줄 알았다.
바다 어미는 뭉게구름 고봉밥을 차려두고 알래스카해류 골목에 대고 소리친다
“혹등고래야 밥 먹어라, 밥 식는다.”
혹등고래는 요즘 대세인 트로트를 흥얼거리며
뭉게뭉게 숟가락질인데
뭉게구름 밥풀 서너 알
혹처럼 턱에 매달려 있다
설거지를 끝낸 어미는 스스로 어두워져 떠날 때를 알았다
그렇게 혀는 어미가 되고 어미는 바다가 되었다.
- 「바다의 혀」 전문
혀는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관계의 대상이다. “눈물을 말리고”, “상처를 안아주고”, “세상을 먹일” 수 있다는 진술은 혀를 맛과 말의 경계를 넘어 돌봄의 회로로 확장한다. 혀는 판단을 설교하지 않고, 눈물의 수분을 덜어내고, 상처를 핥아 덮고, 배고픔을 채우면서 규칙을 몸에 새긴다. 그런가하면 “바다 어미”의 부름, “혹등고래야 밥 먹어라, 밥 식는다”는 호출은 통제의 명령이 아니라 응답을 바라는 호명이어서 먹임은 우위의 표식이 아니라 관계의 상징이다. 또, “밥풀 서너 알이 혹처럼 턱에 매달려 있다”는 첨언에서 남은 밥풀은 서투름의 흔적이 아니라 다음 응답을 예비하는 신호다. “설거지를 끝낸 어미”가 “스스로” “떠날 때를” 아는 것은 먹임에는 끝맺음이 있고, 물러남 또한 돌봄의 일부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혀는 어미가 되고 어미는 바다가 되”는 결말은 돌봄의 규모가 몸에서 집, 집에서 바다로 확장된다는 사고를 명료하게 그린다. 한 기관의 사용법을 바꾸면 한 공동체의 질서가 바뀐다는 믿음이 여기 있다. 시인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보다 언제 멈추고 어떻게 부를 것인가를 먼저 묻는다. 그 질문이 회복의 기술을 생활 속에서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
앞서 「숨비소리-동백 열네 송이」에서 상실은 사건이 아니라 호흡의 길이로 환원되고, 달빛·흙·바람 같은 생활의 이미지가 애도의 리듬을 조직한다. 잠녀의 숨은 잊힌 이름들을 이어도로 보내는 기술로 제시되며, 오래 내쉬는 반복이 기억의 고통을 견디는 규칙이 된다. 시인은 구호 대신 동작을 남기고, 듣기를 음향의 확인이 아니라 숨의 훈련으로 전환한다.
그 리듬이 공동의 자리로 확장되면 「울음의 공터」가 된다. 화면 앞의 관객은 공터의 증인이 되고, 감정은 물의 운동으로 번역된다. 꽃가지를 던지는 행위는 상징의 과장이 아니라 책임의 시작이며, 떠올랐다 잠기는 꽃처럼 애도는 전달과 귀환의 순환으로 지속된다. 여기서 소리·말·빛의 회로가 끊겼다는 사실은 해법의 어휘로 바뀐다. 회복은 선언이 아니라 습관이고, 듣기는 막힘과 무응답을 감지하며 호흡과 반복으로 공동의 시간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4.
전숙 시인은 이제 감각의 중심을 귀에서 혀로 옮긴다. 앞선 장들이 들리지 않음과 멈춤의 장면을 통해 감각의 붕괴를 살폈다면, 이 장은 먹는 행위에서 윤리의 회로가 어떻게 무너지고 다시 이어지는지를 다룬다. 분석의 초점은 설명이나 설교가 아니라 장면에 있다. 식탁과 바다, 접시와 입 사이를 오가며 맛이 폭력의 기억을 어떻게 숨기거나 드러내는지 추적한다. 작은 존재가 큰 질서를 지탱하는 방식, 멈춤의 규칙, 부름이 관계를 여는 호명이라는 관점을 한자리에 놓는다.
다음의 「우아한 샥스핀」에서 시인은 시선을 식탁으로 옮긴다. 우아함의 말이 어떻게 폭력을 가리고, 맛이 어떻게 책임을 마비시키는지 묻는다.
어부는 상어의 지느러미만 잘라내고
죽이기도 귀찮아서 선심 쓰듯 놓아주었다
팔 다리가 잘린 상어는 몸통으로 물결을 달래보지만 50층에서 낙하하는 노숙자처럼 날개가 없다.
비명 소리…
바닥에 부딪히는 절망이 주마등처럼 한 생의 필름을 거꾸로 돌린다. 마녀사냥, 노예상인, 일본, 독재, 고문 기계. 반복 생산된 비애로 3류 극장 동시상영처럼 눈물비가 오는 필름은 시간고문으로 고단한 숨결을 내려놓는다. 해저에는 고층아파트에서 유성처럼 쏟아져 내린 별의 무덤이 있다.
고급식당 아름다운 본차이나 접시
샥스핀이 아름답게 성장한 채 우아하게 앉아있다
자살골처럼 저를 죽인,
잘라내고 싶은 식감으로 미식가의 혓바닥을 공격한다
꿈틀대는 식욕이 끊임없이 돋아나는 욕망의 밤
한때 훈장으로 남기고 싶었던 날카로운 위용
종횡무진 물살을 가르던 족적이
푸른 물결의 기억으로 조신하게 앉아
사르르 빠져드는 미각의 깊이에
복수의 칼날을 찔러 넣는다
목구멍 속으로 번지는 살육의 비린내
아가미를 빠져나간 바다가 창자를 휘젓고
내장 돌기마다 보이지 않는 바늘이 꽂혀
고통이 서서히 퍼진다
샥스핀이 송골매의 눈으로 쏘아보고 있다.
-「우아한 샥스핀」 전문
바다에서 잘린 샥스핀과 접시 위에 놓인 식감은 같은 장면의 두 단면이다. “선심 쓰듯 놓아주었다”는 말은 잔혹을 호의로 감추는 심리를 드러낸다. 이어지는 “50층에서 낙하하는 노숙자”, “마녀사냥, 노예상인, 일본, 독재, 고문 기계”의 연쇄는 식탁이 역사적 폭력의 계보와 분리될 수 없음을 환기한다. 시인은 미식의 언어를 개인의 취향으로 격리하지 않고, 우아함이 품격이 아니라 마취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초점은 곧 입안으로 이동한다. “자살골처럼 저를 죽인”이라는 역설은 식욕의 자기 파괴성을 드러내고, “아가미를 빠져나간 바다가 창자를 휘젓고”는 바다를 풍경이 아니라 내장으로 바꾼다. 먹은 것은 사라지지 않고 “내장 돌기마다 보이지 않는 바늘”처럼 남아 통증으로 기억된다. 마지막의 “샥스핀이 송골매의 눈으로 쏘아보고 있다”는 시선을 뒤집는다. 접시를 내려다보던 주체가 응시당하는 객체가 되고, 책임은 식탁의 밖이 아니라 혀의 한복판으로 옮겨진다.
시인은 도덕을 해설하지 않는다. 이미지와 어휘만으로 독자가 판단의 자리에 서도록 만든다. 남는 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질문이다. 혀를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 그리고 언제 멈출 것인가. 그 질문이 다음 시에서 이어질 섬김의 질서를 예비한다.
다음의 「크릴새우 하느님」에서 시인은 지배의 상상력을 버리고 섬김의 상상력으로 이동한다. 힘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권한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를 떠받치는 공급으로 다시 정의한다.
그는 바다 같아서
아니 바다여서
세상의 뱃구레를 복종시킨다
세상의 먹이가 되어 세상을 먹여 살린다
자존을 일으키는 등뼈는 타인의 자존을 위해 부드러운 살이 되었다
군림은 독재자의 무기이므로
섬김을 필생의 방패로 삼은 작은 신은
허기진 뱃구레들의 눈물을 닦아준다
기도하지 않아도 스스로 응답이 된다
비폭력이어서 가장 강력한 종교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서 가장 무서운 하느님이다
스스로 순교자가 되어 세상을 용서하는 예수님이다
붉은 바다에는 크릴새우 하느님이 산다.
- 「크릴새우 하느님」 전문
화자는 크릴새우를 “세상의 먹이가 되어 세상을 먹여 살”리는 존재로 인식한다. 크릴새우는 먹히는 존재가 됨으로써 공동의 생을 유지하는 핵심이자 돌봄의 주체가 된다. 그래서 “자존을 일으키는 등뼈는 타인의 자존을 위해 부드러운 살이 되었다”는 말은 힘의 사용법을 바꾼다는 선언이다. 화자는 거대한 신을 불러 현실을 정당화하지 않고, 가장 작은 먹이를 “하느님”으로 불러 위계를 뒤집는다. “섬김을 필생의 방패로 삼은 작은 신”은 공격이 아니라 보호를 미덕으로 삼고, “스스로 순교자가 되어 세상을 용서하는 예수님”은 대가를 먼저 지불하는 책임의 형식을 보여준다. 이 상상력은 미식의 우아함으로 폭력을 은폐하던 이전 작품과 정확히 대조를 이룬다. 혀는 지배의 도구가 아니라 관계를 여는 기관이 되고, 먹는 일은 생태적 회계가 아니라 응답의 습관이 된다. 시가 남기는 질문은 실천으로 이어진다. 무엇을 더 많이 소유할 것인가가 아니라, 누구를 어떻게 먹여 살릴 것인가. 멈춰야 할 때 멈추고, 불러야 할 때 부르는 규칙이 여기서 완성된다.
전숙 시인의 시는 듣기에서 먹기로, 청각의 윤리에서 미각의 윤리로 확장된다. 「우아한 샥스핀」에서 그는 미식의 언어를 통해 욕망과 폭력의 회로를 드러내고, 「크릴새우 하느님」에서는 먹히는 존재를 중심에 세워 지배의 상상력을 섬김의 상상력으로 바꾼다. 이 두 시편은 식탁과 바다, 혀와 입이라는 일상적 기관을 통해 윤리의 방향을 하강이 아니라 상승으로 전환한다. 먹는 일은 더 이상 소유의 행위가 아니라 응답의 행위이며, 말과 달리 맛은 숨길 수 없는 감각으로 타자의 고통을 남긴다. 시인은 이러한 미각의 윤리를 통해 관계의 복원을 감각의 층위에서 다시 실험한다. 따라서 이 시집에서 ‘먹기’는 생존의 기술이 아니라 타자를 먹여 살리는 훈련이자, 섬김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는 또 하나의 듣기로 읽힌다.
5.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전숙의 시는 플라스틱 이후의 세계를 감각의 변화로 보여준다. 이번 시집은 진단에서 훈련을 거쳐 실천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사유를 완성한다. 시인은 감각을 회복의 수단이 아니라 관계의 언어로 바꾸려 한다. 귀는 타인의 고통을 듣기 위한 기관이었고, 혀는 그 고통을 나누기 위한 기관이 되었다. 소리와 빛, 냄새와 맛을 따라 이동하는 감각의 서사는 몸이 세계와 맺는 방식을 다시 배우는 과정이다. 그는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며, 가르치지 않고 부른다. 상처를 말로 봉합하는 대신, 울음과 숨, 맛과 냄새를 통해 감각이 멈춘 자리에서 관계가 다시 작동하도록 만든다. 이때 회복은 기적이 아니라 습관이며, 윤리는 제도나 신념이 아니라 생활의 리듬이다. 결국 전숙의 시는 세계를 재건하는 거창한 예언이 아니라 생활을 정비하는 세밀한 기술로 읽힌다. 듣기·호흡·부름·먹기의 반복을 통해 시인은 감각의 윤리를 일상의 질서로 되돌린다. ‘바다가 우는 방식’은 그래서 인간이 다시 감각을 배우는 방식이다.
바다가 우는 방식
세수하다 거울을 보니 얼굴 자리에 엉덩이가 붙어있어요
엉덩이에서 하루치의 반성이 쏟아져요
몇 년 전부터 해결하지 못한 플라스틱 숙변도 섞여있어요
비명도 못 지르고 플라스틱에 질식한 바다
몸부림치던 비명이 엉덩이로 다시 태어났어요
얼굴이 뭉그러진 바다
머리를 산발하고 몸을 기울인 채 앓고 있어요
올 풀린 스웨터처럼 잔영만 남은 포말
한때 철썩이며 사랑하고 번성했던 저 육체는
이제 거꾸로 뒤집힌 반어법
바람이 일 없이 발길질을 해대도 비명도 못 지르는 검은 침묵
언로가 막힌 통증은 역주행을 택했어요
엉덩이로 비명을 지르기로 한 거죠
전속력으로 역주행하는 거울 속의 자화상이 보여요
음식이 독일 때도
먹는 일이 길의 방식일까요
신경세포를 따라서 방사성으로 깨어나는 통각
꽃이 지는 일도 이토록 아플까요
내장을 밑바닥까지 뒤집어서 독극물을 토해내는 일은 먼저 제 속이 썩어문드러지는 일이었어요. 속 시끄러운 날 식구들 내보내고 마음 바닥까지 눈물로 닦아내듯이 마른 수숫대처럼 가슴이 타들어가던 바다는 온몸이 배설구가 되어 플라스틱을 토해냈어요. 한순간도 울음을 멈추지 않는 꽃처럼 아름다웠던 바다. 얼굴과 엉덩이가 뒤바뀌어도 진통제도 처방받지 못한 바다는 앓는 소리도 내지 못해요. 통증이 목구멍까지 차올라요.
향유고래의 배설물이 폐가처럼 울어요
한 생의 악취를 바다는 빨고 또 빨았지요
반어법의 얼굴처럼 똥에서 향기가 났어요
사람들은 그것을 용연향이라 불렀다지요.
말랑말랑한 바다
말랑말랑하다는 것은 각이 없다는 것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일은 일생에 단 한 번도 없으리라는 것
세상의 모든 상처를 부드럽게 쓸어줄 준비가 되었다는 것
말랑말랑한 품새를 가진 그는 말랑거리는 촉수로 상처에게 다가간다
따뜻하고 뭉클한 성격은 상처를 토닥토닥 어르는 속성이 있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파도문장 골목에는
어린 문장기호들이 엄마 따라 나들이 중이다
푸른 잎맥처럼 분화된 혀들이 아픈 살들을 쓸어주고 있다
작은 상처까지 일일이 핥아주는 물컹하고 단단한 근육
상처의 비명을 찾아내는 고막 지느러미가 달려있다
뻐꾸기가 울어 예는 밤이면 꽃은 대문을 닫아걸지만
바다는 24시간 대기 중인 외상전문응급센터이다
달빛 안테나로 상처를 타전하는 꼬리지느러미
바다는 말랑거리는 혀를 길게 늘여서
플라스틱 바이러스에 밤새도록 앓고 있는
어라연처럼 굽이굽이 에돌아간 갯바위 샛골목
따개비 오두막까지 왕진을 간다.
혀의 순례
바다는 얼마나 오래 얼마나 아픈 살로 몸부림쳤던 것일까? 태평양 어디쯤, 뾰족뾰족한 이를 드러낸 사나운 플라스틱에 물린 상처가 있다고 했다. 생살을 파먹는 플라스틱은 거머리의 후예. 무엇에든 달라붙는 흡판과 무엇이든 빨아먹는 빨판이 생존방식이다. 바다는 플라스틱에 짓무른 상처의 울부짖음에 숱한 밤을 서성였을 것이다. 가슴이 타들어가던 바다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았다. 신경세포와 수많은 관절과 미세혈관과 림프관과 인대가 연합해 근육의 총체인 혀가 되었다. 혀가 된 바다는 상처 밖으로 플라스틱 고름을 몰아내고 거대한 흉터로 아물기까지 말랑말랑한 감성으로 폭군 같은 플라스틱을 혼쭐냈을 것이다. 핏줄이 터지고 관절이 박살 나도 오체투지로 혀의 순례길을 걸었을 것이다.
지금도 눕지도 앉지도 못하고
쏴아쏴아… 쏴아쏴아…
쏴아쏴아… 쏴아쏴아…
쏴아쏴아… 쏴아쏴아…
상처가 상처를 달래는 밤
바다는 아픈 혀로 상처를 핥고 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전숙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전남여중·고와 전남대학교 간호학과, 동신대학교 한국어교원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7년 계간 《시와사람》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고운 최치원문학상, 펜문학상, 전국계간문예지작품상, 백호임제문학상, 광주문학상, 시와사람 시학상을 수상했다. 시집 『나이든 호미』, 『눈물에게』, 『아버지의 손』, 『꽃잎의 흉터』, 『저녁, 그 따뜻한 혀』, 『바다가 우는 방식』이 있다.
목차
□이 시집을 어떻게 독서할까? / 김종
□해양생태시집을 내며
□시인의 말
제1부 바다가 우는 방식
바다가 우는 방식
말랑말랑한 바다
혀의 순례
슬픈 지도
바다의 귀 -홍어에게
바다의 시한폭탄
독설과 하이드
출항하는 고래
플라스틱 극락
플라스틱 아기
울음의 공터 - 세월호의 눈동자
숨비소리 - 4·3동백 열한 송이
바위의 눈물
장미와 고래
민어의 끈
목선 한 척
제2부 바다의 혀
울음의 속도 - 절판도니 바다, 순신
해수관음의 길
십자가는 검다
북극의 흰 살
보트피플
아직 닿지 못한 네가 아름답다
땅채송화 치마폭이 펄럭였다 - 등대에게
한때 반구대암각화였던 나는
거제도에서는 걸음마다 별이 뜬다
작두와 다랑어
고래들의 수다
어머니의 상처
사막과 바다
우아한 샥스핀
식물 제국
백합을 캐다
꽃지에 가면
바다와 비
바다의 혀
제3부 바다 경전
둥근 어머니
눈물 몇 마리
독도라는 풀꽃
귀향의 오답
딥블루·1
딥블루·2
바다 경전
집어등의 크레센도
공(무)도해가
사라진 경보
어미라는 신
속도전의 반어법으로
섬으로 가는 여정
산호의 푸른 변방
크릴새우 하느님
작품론
플라스틱 이후, 듣기의 시학 / 강나루